자연선택에는 진화가 없다

두루미
2024-05-05 05:11
93

자연선택에는 진화가 없다. 

 

오늘 <종의 기원> 마지막 장을 넘겼다. 10년 전 읽었을 때보다 더 잘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좀 배짱이 생긴 거 같다. 가령 오늘의 주제처럼 말이다. 내가 처음 읽었을 때는 당연하게 받아들였을 테지만, 지금은 진화라는 말에도 의문이 생긴다.  

 

진화는 영어로 evolution이다. 이 말은 revolution이라는 말과 비슷한데, revolution은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아니라 지구가 돈다는 것을 발견하고 회전하다의 의미로 사용한 데서 시작된 말이라고 한다. 그의 발견이 너무나 놀라워서 급기야 우리가 아는 바로 그 단어, 혁명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 때문인지 오늘날 evolution 이라는 말을 들으면 develop/advance 같은 진보적인 의미를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다윈은 이 표현을 정말 고심 끝에 스펜서의 충고를 받아들여 6판부터 사용한다.(적자생존은 5판부터) 그러니까 <종의 기원> 5판까지는 자신의 자연선택설을 진화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우리가 읽은 것은 초판 번역이기 때문에 진화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딱 한 번 나온다.. 다른 이유로) 오늘날 "다윈의 진화론"은 누구나 아는 말이고 당연하게 사용되지만, 정작 본인은 그 표현을 쓰는데 주저했다니...  왜 그랬을까? 영영사전을 찾아봤더니 네이버 영영사전에 이렇게 깔끔하게 도표가 나온다. 사전적 의미로 보자면 다윈의 진화론에는 진보의 개념이 없다. 아래 표는 evolution이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보여준다. 첫 번째는 진보/발전을 뜻하고, 다른 하나는 다윈주의와 자연선택설을 의미한다. 이 둘은 영영사전에서처럼 엄밀한 의미에서 다르다. 

 

다윈은 5판본까지는 진화라는 말 대신, 변화를 동반한 계승(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는 표현을 쓴다. 여기서 변화는 변이들, 다양성을 의미한다. 계승이란 우리 책 표현으로 대물림이지만 오늘날 표현으로 보자면 유전이 맞겠다. 다시 말해서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진화란 유전을 통해서 다양해지는 것을 의미한다(변이가 유전돼서 우리는 모두 다르다). 내 자식은 왜 나와 다를까? 엄마와 아빠의 유전자를 만나서 엄마도 아니고 아빠도 아닌 이상한 년놈이 나오는 것이 진화란 것이다. 그렇기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나와 너가 다르고 이렇게 세상이 다양한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분투했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원리는 자연선택이다.  

 

 

나는 생체 조직이 고등해진다거나 하등해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명확하게 정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말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나비가 애벌레보다 고등하다는 말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590p)

 

낮은 단계에 위치하는 유기체들이 더 고등한 형태들보다 일반적으로 더 느린 속도로 변화한다고 믿을 만한 몇 가지 근거가 있다. 따라서 더 하등한 형태들은 더 넓은 분포 영역을 가지면서도 동일한 형질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546p)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윈은 동식물을 하등과 고등으로 나눠 설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고, 이들이 각기 다른 변화의 속도를 가지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조차도 고등과 하등이라는 표현을 명확히 정의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가령 어미와 그 자식을 고등과 하등으로 달리 부르기도 하고, 혹은 강과 호수에 사는 담수 생물은 더 느리게 변화한다고 할 때 이들은 낮은 단계의 유기체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무엇이 고등이냐 하등이냐를 나누는 데 있지 않다.

 

 

내가 처음으로 브라질의 담수에서 채집 활동을 했을 때, 담수 곤충과 패류 등이 영국의 것들과 비슷한 데 비해 그 부근의 육서 생물들을 그렇지 않다는 데 무척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519p)

 

 

다윈은 만약 우리가 각기 다른 장소에서 독립적으로 창조되었다면 이와 같은 동식물의 지리적 분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느냐고 질문한다. 브라질의 담수 생물은 영국에서도 비슷하게 발견되지만, 왜 브라질의 육서 생물은 영국에서 발견되지 않는가? 그는 담수 생물이 바닷물 같은 짠물에도 얼마나 오래 살아남는지를 관찰하기도 한다. 또한 이들이 어떤 우연적인 운송수단에 의해, 가령 오리의 발바닥? 에 붙어서 씨앗으로 이주하는 경우 등 이들이 가지각색의 방식으로 넓게 확산되었다고 소개한다. 한 마디로 육서 생물보다 담수 생물이 더 잘 이주해서 정착하는 것이다. 담수 생물이 브라질과 영국에서 각각 창조된 것이 아니라 이들은 어느 한 조상으로부터 각기 다른 지역으로 넓게 분포하게 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때 담수 생물의 경우는 하등 유기체(단순한 생체조직)로서 느리게 변화하기 때문에 이들이 멀고 넓게 확산되는 분포보다 더 느리게 변화한다는 것을 다윈은 발견한다. 이 때문에 브라질에서 영국의 담수 생물과 유사한 것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이다. 브라질의 담수 생물과 영국의 담수 생물이 유사한 것, 이것이 자연선택이다. 비글호에서의 놀라운 발견을 자기 스스로 20년만에 재해석해낸 것이다!

 

다윈의 자연선택에는 (사회학적인)진보의 의미가 없다. 고등과 하등을 나눌 때조차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이들의 변화를 구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들의 변화에는 고정된 우열이 없다는 것이다. 담수 생물은 생체 조직이 하등하기 때문에 어디든 흘러가고 묻어가서 가장 넓은 지역에 분포한다. 다시 말해서 하등생물이 생존투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자연선택은 물리적인 조건이 아니라 이들 상호관계의 결과이다. 이번에 <종의 기원>을 읽으면서,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진화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댓글 10
  • 2024-05-05 09:49

    두루미, 곰곰, 효주샘, 종의기원 완독을 축하드립니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써왔고, 익숙했던 다윈 진화론의 '진화' 가 우리가 생각했던 그 의미가 아니었다는 두루미샘의 후기를 보고, 평상시 사용하는 용어와 개념들을 항상 뒤집어 생각해 보는 습관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세미나 참석하지 않은 사람도 이해가 쏙쏙되는 두루미샘의 후기는 '후기 작성의 교본' 같습니다. 후기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언젠가 과학 세미나 멤버가 될 경호 다녀 갑니다...^^

    • 2024-05-06 07:55

      반가운 댓글이네요^^
      경호샘도 3년 후엔 꼭!!

      • 2024-05-06 11:03

        헉 3년!!

        • 2024-05-06 14:13

          저만의 회사 은퇴 목표 시점인 55세 기준, 3년 9개월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매주 금요일 연차휴가를 내고 세미나를 올 수는 없으니깐요...^^

  • 2024-05-06 07:58

    후기 감사합니다. 하등과 고등에 관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이미지 때문에 염려되었는지 하등과 고등으로 나누긴 하지만 하등이 고등보다 열등하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꼭찝어 얘기했던 다윈의 세심한 말이 떠오르네요^^

  • 2024-05-06 09:34

    다윈의 차별없는 관점은 참 훈훈하고 아름다워요. evolution = natural selection 이라고 영영사전에라도 표기되어 있다니 다행이네요. 그야말로 혁명적인 사상을 좁은 시선으로 축소해 써먹은 후손들로인해 안타깝게 흘러가버렸네요...후기 잘 읽었습니다.

    • 2024-05-06 11:03

      잎사귀님 과학세미나 함께 해요~~ 다음 시즌은 <이기적 유전자>와 그 반론을 읽습니다!!

      • 2024-05-07 17:54

        마음은 굴뚝인데 몸은 귀차니즘이 여전히 번성중이라서요 ㅎㅎ

  • 2024-05-06 11:01

    에세이를 없다 시리즈로 갈까봐요. 자연선택에는 진화가 없다, 자연이 없다, 공리가 없다! ㅎㅎ

    다음 주는 최재천 교수의 <다윈 지능>을 10장까지 읽습니다.

  • 2024-05-08 16:24

    아니, 이렇게 인기많은 후기라니요!
    부럽다요 두루미샘 ㅋㅋ

    다윈 그리고 진화론에 대한 오해들을 하나씩 풀어가는 시간이 흥미롭습니다. 그렇게 경전 같은 벽돌책 하나가 끝났네요 ㅎ 다음 책도 기대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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