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습록> 62조목: 비추는 공부와 닦는 공부에 대하여

요요
2024-02-16 16:19
116

<전습록> 59조목에서 70조목까지 읽었습니다.

 

61조목의 율려와 관련된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동지에 일양(一陽)이 시작되는 정확한 시각을 아는 법에 대한 것이었는데요. <율려신서>는 주희의 제자인 채원정이 지은 책인데, 이 책에는 바로 일양이 시작되는 시각을 파악하는 방법이 나와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양명선생은 그 방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황종율관에 대나무 속껍질을 태운 재를 넣어두면 어느 시각에 그 재가 날아오른다고 합니다. 그 때가 동지의 바로 그 시각이라는 거죠.(와~ 근데 그런 건 또 어떻게 알고 행했을까요? 참으로 신통방통합니다.) 근데 우리의 양명선생은 재가 날아오를 때도 재들 사이의 선후의 차이가 있는데 대체 어느 시각이 바로 그 시각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라고 묻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시각을 알까요? 양명선생의 답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동지의 시각을 알아야한다는 것입니다. 헉! 일양이 시작되는 시간을 마음이 안다는 것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마음과 자연을 둘로 분리해서 보는 사람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안다면, 마음이 그 시각을 알 수 있다는 것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마음에 리가 있다는 말, 심즉리가 일양의 시각을 아는데까지 미친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된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는 근대적 인간으로서는 참 어려운 말입니다만, 몸과 마음이 하나이고, 마음과 자연이 하나라는 것을 체득한 이들에게는 마땅한 말씀이겠지요? 예약의 세세한 내용이 아니라 예악의 근본인 마음을 아는 것이 공부의 핵심이라는 말씀!!

 

주희의 공부방법에 대한 양명의 비판은 그 다음 62조목에서는 더욱 더 날카롭게 전개됩니다. 62조목은 양명선생의 말씀이 아니라 서애의 말입니다. <전습록>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양명선생 본인이 아닌 제자의 말이 인용된 조목이라고 하는군요. 그만큼 서애가 양명의 정수를 받았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서애는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은 거울과 같다. 성인의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고, 보통 사람의 마음은 어두운 거울과 같다. 격물에 대한 주자의 학설은 마치 거울로 사물을 비추는 것과 같다. (거울이 사물을) 비추는 공부(照上用功)를 하지만, 거울이 어두운 것을 알지 못하니, 어찌 능히 비출 수 있겠는가? 양명선생의 격물은 거울을 갈아 그것을 밝게 하는 것과 같다. (거울을) 닦는 공부(磨上用功)를 하니, 거울이 밝아진 후에도 또한 (거울에 사물이) 비추는 것을 폐한 적이 없다."

 

주희의 격물 공부는 비추는 공부이고, 양명의 격물 공부는 닦는 공부라는 것으로 둘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양명이 격물공부를 하기 위해 대나무 앞에서 며칠을 앉아 있다가 쓰러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후 양명은 격물은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구나, 대상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나무를 보고 있을 때 그 대나무는 내 마음에 비친 대나무입니다. 바로 표상으로서의 대나무인 것이지요. 비추는 공부는 재현적 방식의 공부를 말하는 것이라고 하면 과한 해석이 되려나요? 

 

그런데 최근 문탁에서 <신유물론> 강의를 듣던 중에 프루스트와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재현적인 것을 통해 비재현적인 것에 접근하는 방법인 감응에 대한 이야기였는데요. 들뢰즈의 프루스트에 대한 책에 나오는 이야기 아닌가 싶은데요. 프루스트가 계속 꽃을 들여다 보고 있었는데 누가 뭐하냐고 하자 꽃이 어떤 사유를 촉발시킬지 보고 있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62조목을 읽으면서 프루스트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이런 건 또 뭘까? 양명이 대나무 앞에서 삼일밤낮을 침식을 잊고 대나무를 바라본 공부와 프루스트의 꽃과의 감응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아무튼 62조목을 통해 격물공부에 대한 양명학이 제시하는 두가지 방법론, 비추는 공부와 닦는 공부, 두 가지가 있는데, 프루스트가 한 것은 뭘까요? 내 눈앞의 것을 단지 인식대상으로만 보고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다고 보는 전통적 인식론이나 진리관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는 프루스트와 양명이 같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불교에서도 남송대에 묵조선이라는 것이 유행했는데요. 묵묵히 비추는 공부라고 할 수 있지요. 이에 대해 대혜종고는 간화선만이 올바른 공부방법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비추는 것이 아니라 화두를 들고 마음을 의심으로 가득 채워서 단번에 뚫어내는 공부입니다. 공부방법에 대한 대론이 활발했던 시기의 이야기라고 이해해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댓글 1
  • 2024-02-18 12:28

    전 주희의 격물이 재현적인 것을 통해 비재현적인 것을 아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양명전기를 읽다보니까 대나무 연구 실패로 양명이 얻은 것은 내면을 먼저 공부해야겠다는 것이 아니라 '좌절'이었다고 해요.
    주희의 격물을 이해하지 못해 성인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좌절이요. 그것도 두 번씩이나요.
    20대의 양명은 주희의 가르침으로 내적인 자기 실현을 이루고자 했지만 그 길을 찾지 못해 괴로워했다는....
    그리고 照上用功과 磨上用功은 같이 해야하지 않을까요? 도문학과 존덕성은 같이 가는거지 존덕성을 먼저 내세울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고보니 주희는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오히려 서애가 나누어보는 것 같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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