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철학학교 1] 5주차 후기: 쪼그라든 상상력, 불어난 통각

세븐
2024-03-15 17:00
234

 

올해 철학학교에서 칸트의 3비판서를 읽게 될 예정인데, 1학기도 벌써 반환점을 돌았네요.
전체 8주에 걸쳐 <순수이성비판 1권>을 읽는 중이고, 5주차에선 칸트철학의 '심장부'라는 연역 부분을 2주 연속 훑어봤습니다.
지난주에는 초판(A판)을 다뤘고, 이번 주에는 재판(B판)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3년 만에 재개된 오프라인 세미나는 본격 토론에 앞서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로 훈훈하게 시작합니다.
'자전거 마니아'인 정군샘은 고가의 사이클과 갖춰야 할 장비들에 대한 호기심을 한 톤 높은 목소리와 행복한 표정으로 해소해줍니다.
아렘샘이 세미나에 오기 전 만났던 여울아(두루미)샘의 근황과 간식에 대한 이야기도 곁들여졌습니다.
정군샘이 다른 세미나에선 튜터가 에세이를 쓰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는 사연이 세미나 전 방담의 하이라이트였습니다.
저도 세미나에 합류했을 때 튜터가 에세이 발표하는 걸 보고 신기하게 생각했는데, 정군샘의 설명으로는 반장이었던 요요샘이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
정군샘이 귀여운 항의에 요요샘은 "쓰면 좋지 뭐!". 요요샘의 담담한 반응이 더 걸작이었습니다.
1학기 8주 여정에는 에세이 발표가 없는데, <순수이성비판 2권>을 마친 후 정군샘이 에세이를 어떻게 할지 궁금합니다. 그래도 저는 '정군샘이 에세이를 쓴다'에 한 표를 던집니다. ㅎㅎ

아쉽게도 이날 세미나에는 철학학교에 나란히 합류해 활력소 역할을 톡톡히 해왔던 덕영샘과 휴먼샘이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몸살이 난 덕영샘의 빠른 회복을 빕니다.

 

세미나에서는 초판-재판의 차이점과 상상력, 직관, 통각이 주로 다뤄졌습니다.
재판(B판)에서 받은 인상은 대체로 초판보다 수월하게 읽힌다는 것.
그게 초판(A판)을 먼저 읽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칸트 선생님이 6년여에 걸쳐 고민하며 가다듬었기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정군샘은 "<순수이성비판> (연역 부분을) 해설할 때 A판만 하고 B판을 생략하는 경우도 많은데, 전체적으로 B판이 잘 읽힌다. 논리적 전개가 더 깔끔해진 느낌"이라며 '칸트 덕분'이라는 쪽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초판과 재판은 전체적인 내용에선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몇 곳을 손보는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쓴 느낌을 줍니다.
칸트가 얼마나 꼼꼼하면서도 '집요(철저)한' 철학자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깊이 파고들어 가면 미세하게 달라진 부분이 적지 않습니다.
우선 재판에서는 상상력의 비중이 약화했다는 것.
초판에서 인식과 관련한 '세 겹의 종합'에서 상상에서의 재생이 포착(직관), 인지(개념)와 함께 한 축을 이뤘고, 상상력은 감관, 통각과 함께 인식의 세 가지 원천으로 분류됐습니다. 상상력이 감성, 지성의 매개자로서 독립적 영역을 구축한 것처럼 보일 정도입니다.
이와 달리 재판에서는 상상력의 초월적 종합에서 '생산적 상상력, '재생적 상상력' 등이 언급되긴 하지만 전체 분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축소되고 그만큼 위상도 떨어진 느낌입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재판에서) 상상력의 위치는 두드러지게 낮아지고 있으며, 거의 말살되다시피 하고 있다"고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학자(미키 기요시)도 있습니다.
상상력이 감성과 지성을 자발적으로 매개하는 근본능력이 아니라 지성의 통제를 받는 형태로 쪼그라들었어도 역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호수샘의 의견이었고, '매개자' 또는 '접착제'로서의 상상력의 역할론에 대해선 공감했습니다.

 

반면 아렘샘이 "이번주 범위 가장 중요한 키워드를 고르라면 '통각짱'"이라고 공언했을 만큼 통각의 존재감은 높아졌습니다. 초판과 재판을 가르는 핵심적 변화입니다.
초판에서 다소 미진했던 "통각의 종합적 통일의 원칙은 지성 사용의 최상의 원리"(B 136)로 떠오릅니다.
통각( Apperzeption.영어 apperception)은 작년 세미나에서 공부했던 라이프니츠가 사실상 처음 사용한 개념이라고 합니다.
후기를 쓰면서 작년 텍스트였던 <형이상학논고>(아카넷)를 들춰보니 '모나드론'과 '자연과 은총의 원리'에서 통각을 '지각에 대한 반성적 인식'(위의 책 232쪽, 257쪽)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칸트는 통각을 차용해 자기 개념화했고, 이는 주어진 표상과 잡다에게 범주들의 '통일성'을 부여한다는 의미에서 통각(統覺)으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진달래샘이 '자기의식'으로서 통각의 개념에 대해 물었는데, 통각은 단지 지성 차원에 머무르기보다 '감성-지성-이성을 가능하게 하는 것' 즉, 모든 인식을 지탱해주는 '뿌리'에 해당하는 구조라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정군샘은 통각을 핵심 키워드로 사용한 재판(B판)의 차별성을 언급하면서 "통각이 철학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것은 주체와 연관돼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칸트가 현상되지 않은 부분의 균열, 즉 내가 아닌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 덮었다"며 칸트의 한계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을 곁들였습니다.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부분)
하지만 불교의 무아(無我)와 연결 지점과 관련해선 "무아는 사고하는 주체가 없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답변이 나왔습니다.

 

가마솥샘은 '나는 사고한다'는 통각을 통해서도 우리가 물자체를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존재하는 바 그대로의 나에 대해선 아무런 인식을 하지 못하고, 내가 나에게 현상하는 대로의 나에 대한 인식만 가질 뿐"(365p)이라는 구절을 가지고 왔습니다.
지성에 대해서도 호수 샘과 저, 그리고 아렘샘이 질문과 의견을 냈습니다.
호수샘은 상상력의 종합인 '형상적 종합'과 대비되는 '순전한 지성적 종합'이 신(神)적 지성의 종합이 아니냐는 의문을 품었는데, 모든 상상력이 배제된 지성의 종합으로 순수수학적 종합이 예시로 제시됐습니다.
신적 지성인 '지성적 직관'에 상응하는 '비감성적 직관'이 논의거리가 되지 않기 때문에 '비경험적 직관'으로 고쳐 읽어야 한다는 번역자(백종현)의 주석에 대해선 그대로 읽어도, 고쳐 읽어도 맥락상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아렘샘은 세미나 초반부터 질문이 제기됐던 '종합은 누가 하느냐'와 관련해 "이번 주 범위 중에선 '지성이 한다'라고 밝히고는 있습니다만...:이라면서 통각에 대해 "지성이 만들어낸 지성 개념은 아니고 이성이 만들어낸 이념이 아닐까"라며 범위 밖의 예습 질문을 던졌습니다.
봄날샘은 자기의식의 초월적 통일과 선험적 인식의 동일성 여부, 세션샘은 통각의 종합적 통일에서 '행위'의 통일과 동시성에 관해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카울 바흐의 '통각은 활동'이라는 해석을 곁들여 의식의 활동성과 칸트의 행위의 의미를 다르게 봐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됐습니다.

 

맥락이나 요점 없이 정리하다 보니 후기가 장황해졌네요.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곳이 많다 보니 본의 아니게 길어진 것 같습니다. ㅠㅠ
이날 세미나는 아렘샘의 에세이 초안에 가까운 마지막 발언을 끝으로 9시30분 이전에 끝났습니다.
철학학교 개교 이래 가장 빠른 시간에 종료된 비현실적 상황에 정군샘은 벽시계를 인증샷으로 남겼습니다.
막힘없이 세미나가 진행된 측면이 있고, 덕영샘과 휴먼샘의 결석으로 질문 수가 줄어든 것도 이유일 것입니다.
호수샘은 다음번에는 더 많은 질문, 더 길고 논쟁적인 질문을 예고했습니다.

 

다음 주에는 373쪽부터 3절 직전인 393쪽까지 읽을 예정입니다.

댓글 7
  • 2024-03-15 17:34

    엇 호수샘은 다음번에는 더 많은 질문, 더 길고 논쟁적인 질문을 (아마도 계속하여 자제할 것임을) 예고합니다…

    언제나처럼 현장감 넘치는 문장으로 세미나 내용을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매번 꼭 필요한 질문들을 정성껏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맛난 간식도 감사합니다. 담주에는 제가 간식을 가져갈 것을 예고합니다. 뒷정리까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븐샘께 감사한 것이 넘 많네요.

  • 2024-03-15 20:21

    Off Line세미나로 변경하면서 녹화영상이 없어서 결석하신 휴먼님이나 덕영님 걱정을 했는데...
    세미나 풍경과 내용을 이렇게 생생하게 전달해주셔서 후기만 잘 읽어도 세미나한 것이나 다를 바 없을 듯 합니다.

    질문에, 간식에, 후기에
    아! 세미나 끝나고 청소기까지 돌리시고 가시니....
    세븐님은 철학학교 통각 이십니다! ㅎㅎㅎ

  • 2024-03-17 09:36

    자전거는 질주보다 자전거 종류가 더 관심이 가고, 스포츠 장비들이 워낙 재밌다보니 말이죠. 세븐샘은 너무 수고하시는 것 같다고 호수샘과도 이야기했죠. 어찌나 부지런하시고 여러모로 마음 써주시는지 그저 감탄. 셈나는 뉴페이스 두분이 못오셔서 섭섭했고 담주는 꼭 오시길. 토론은 톡쏘는 맛이 좀 줄어들었고 시간은 지난 시즌의 거의 3분의 2로 줄어든 듯. 그래도 칸트는 너무나 천재적이고 철학학교는 여전함. 끝^^

  • 2024-03-18 14:30

    "내가 존재하는 바 그대로의 나에 대해선 아무런 인식을 하지 못하고, 내가 나에게 현상하는 대로의 나에 대한 인식만 가질 뿐"이라는 구절은 여러가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구절입니다. 그런 근본적 무지無知가 항상 어떤 가능성(잠재성)을 전제합니다. 이를 겨울방학 중에 공부한 '신유물론과 비스듬하게 연결해서 보면, 우리 각자가 물질이라는 점에서 개체들은 우주적 운동의 일부이고 그 말은 우리 자신의 의식적으로 가늠하는 변동 가능성보다 더 큰 변동 가능성이 개체 안에 내재해 있다는 말이 됩니다. 들뢰즈가 그렇게나 칸트를 열심히 읽은 이유, 그가 잠재/현행의 존재를 전개할 수 있었던 근거 등을 알 수 있었던 세미나였습니다 ㅎㅎㅎ.
    아 그리고, 철학학교도 무려 9시20분에 끝날 수 있습니다!

    IMG_6786.JPG

  • 2024-03-19 13:06

    세븐샘 생생한 후기 덕에 참여하지 못했음에도 세미나의 분위기가 그려집니다 감사합니다^^!!

  • 2024-03-19 20:55

    세미나 후에 통각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게 되었지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조금씩 적응하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받으며 매주 설명해주시는 샘들께 감사드립니다~

  • 2024-03-20 12:27

    그럴리가 없겠지만, 30여쪽 범위가 세미나에 최적의 범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차곡차곡 칸트가 쌓고 있는 걸 어느 때보다 잘 따라가고 있다는 착각마저 들게하니 말입니다. ㅎ 다음 시간은 세미나 이래 가장 짧은 범위....20여쪽입니다. 열심히 밟아서 다음 시간에는 조금 더 일찍...

    참 세븐샘이 지고 다니시는 가방속 물건들도 멋집니다. 남의 가방속이 항상 궁금한 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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