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철학학교 1] 2주차 후기: 칸트가 말합니다, 선험적 종합 명제는 이렇게 가능하지

호수
2024-02-25 18:06
356

이거 어쩌면... 철학학교 세미나가 한 주의 힐링 타임이 될 수 있겠다는 이상한 예감이 드는데... 이건 아무래도, 타는 듯이 붉은 점퍼를 입으신 휴먼샘 옆에 앉았던 저의 착각이 맞겠지요? 그런 걸까요, 휴먼...샘? 아무튼 세븐샘이 봉투에 가득가득 담아오신 버터향 고소한 소금빵은 너무 맛났고요, 갑자기 나타나시어 무심하지만 다정한 수다로 분위기를 데워주는 세션샘이 반가웠습니다. 휴머니즘 가득한 사유로 두 주 연속 지각하신 전교 1등 가마솥샘이 뿜어내시는 든든한 기운, 그리고 질문 있습니다! 이 다음 후기는 제가 쓰겠습니다! 라며 손을 번쩍번쩍 드시는 덕영샘의 경쾌한 기운, 지난 시간과 이번 시간 꼭 짚어야 할 개념들을 챙겨주시는 진달래샘의 진득함.... 작년에 철학학교 세미나를 ‘행복 세미나’로 만들자는 정군샘의 말을 블랙 유머로 간주했던 저인데 아무래도 진짜 그렇게 될까요?

 

지난 시간에 아렘샘은 그래서 칸트가 보기에 형이상학이 가능하다는 것입니까, 불가능하다는 것입니까 라는 어마어마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봄날샘으로부터 독특한 철학 세계를 지난 분이라는 평을 들었습니다. 그 질문을 다루려면 일단 ‘선험적 종합 판단은 어떻게 가능한가’가 해결되어야 하는데요, 칸트는 일단 순수 수학과 순수 자연과학이 이미 그 존재 자체로서 선험적 종합 명제의 가능성을 입증하고 있다고 선언했어요. 그리고 이번에 우리가 읽은 ‘초월적 요소론’의 첫 파트 ‘초월적 감성론’에서 선험적 종합을 가능하게 하는 문제의 X, 그러니까 선험적 종합에서 개념들에 덧붙여지는 어떤 것을 ‘공간과 시간이라는 선험적인 순수 직관’(272)에서 발견할 수 있음을 소상히 밝힙니다.

 

일단 칸트는 시간과 공간은 경험적 개념이 아니라 선험적 표상이고, 순수한 직관이라 주장합니다. 경험적 종합 명제가 아닌 선험적 종합 명제를 가능하게 어떤 것 X는 결코 경험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건 칸트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일 듯합니다. 그런데 직관은 선험과 후험에서의 위치가 참 오묘합니다. 시간과 공간이 경험적 개념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들은 경험을 통해 얻는 개념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은 선험적 표상이고 순수한 직관이되 ‘경험적’ 실재성을 갖습니다. 시간과 공간은 우리에게 경험적 대상을 표상해주는 형식이고, 우리의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은 이 역할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칸트는 말합니다.

 

만일 경험을 떠나, 즉 ‘우리 감성의 성질을 고려함이 없이’(249) 우리가 사고하는—세미나 시간에 사용한 표현을 쓰자면 “우리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사물이 있다면 이 경우 공간은 ‘초월적 관념성’을 띱니다. 이 실재성/관념성의 짝이 저는 무척이나 헷갈리고 어려웠습니다. 특히 ‘이성이 감성을 고려하지 않고 사념하는 사물’이 우리에게 공간의 관념성을 가르쳐준다고 말할 때 그 예가 유령이나 유니콘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관념성은 경험이 결여되어 공허한 가상 같은 느낌을 주는데요, ‘관념성’이 그러한 뉘앙스로만 쓰이는 것 같지 않아서요. 세미나에서는 일단 긍정적/부정적이라는 가치판단은 배제하고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어떤 것 정도로 정리하고 가자고 이야기된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저는 마찬가지로 ‘실재성’도 일단 가치판단을 미뤄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칸트가 말하는 실재성은 즉 플라톤의 이데아를 말할 때의 실재성과는 다른 것, 즉 현실 경험과 결부되어 있는 것에 국한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덧붙여 들뢰즈가 잠재적인 것이 실재적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러한 차원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렇게 직관을 경험 이전과 이후에 놓인 관문으로 설정하는 것은 많은 함의를 갖습니다. 예를 들어 잡다가 시간과 공간 표상에 현상한 상태를 하나의 절단면으로 놓는다면 이 상태는 인식과 경험이 일어난 상태이냐 아니냐를 놓고 편이 갈립니다. 라이프니츠에게는 이것 역시 이미 인식과 경험이 일어난 상태이되 다만 혼미한 인식을 얻은 상태였지만, 칸트에게 이것은 지성의 활동이 일어나기 전이므로 아예 인식하지 못한 것이고, 그저 인식의 원천에 지나지 않습니다. 라이프니츠가 파도의 예를 들어 미세 지각을 말할 때 너무나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는데 그것은 그때까지 칸트식의 설명에 익숙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주지하듯이 지성의 자발적인 활동만을 인식 활동으로 여기는 것은 이후 많은 비판을 받지요.

 

이날 나온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았지만,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제가 ‘사상(事象)’이 사물과 다른 것이냐고 질문했는데요, 궁금해서 원어를 찾아보니 Sache를 옮긴 것이네요. ‘사물’의 원어는 Ding입니다. ‘사물 그 자체’도 ‘Ding an sich’이고요. 둘 다 영어로 thing으로 무난히 옮길 수 있는 말이어서 백종현 선생님이 고민을 하시다 둘을 구분하기 위해 사상을 쓰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여러 샘들 말씀처럼 일역본을 참고하셨겠고요. 도서출판 b의 칸트 사전은 Sache를 ‘물건’으로 옮겼네요.

 

아, 그리고 사고하는 다른 존재자(248), 다른 어떤 존재자(257), 모든 유한한 생각하는 존재자(271)를 보고 아, 어쩌면 칸트가 비인간 존재자들의 인식 방식에도 편견 없고 겸허한 열린 태도를 갖고 있었는지 몰라, 라고 생각했던 저의 순진함을 ‘흥, 칸트의 휴머니즘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군’이라는 코웃음 대신 너의 ‘회절적 독해’가 대견하구나, 라는 말씀으로 대신해주신 세미나 샘들... (하지만 나는 정군샘의 콧구멍이 벌렁거리는 것을 본 것만 같아요..) 칸트가 말하는 그들은 아마도 ‘감성의 조건 그러니까 시간 표상 없이 나를 직관하는’ 어떤 존재자들, 말하자면 천사나 신과 같은 존재자들이었으리라는 해석에 수긍했습니다.

 

음.. 공간에 대한 뉴턴과의 입장 차이(뉴턴의 물리학을 아인슈타인이 특수 이론으로 만들었듯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이후 특수 이론으로서의 타당성을 갖게 되었다는 정군샘의 해석 인상적이었습니다)나 통각 얘기도 해야 할 듯하지만.. 통각은 특히 나중에 다시 자세히 나오니까 건너고 ㅎ 이 정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아무튼 칸트 읽기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재미있습니다. 첫 번째 시간에 이어 두 번째 시간에도 새 멤버(구 멤버지만 새 멤버 ㅋ 귀찮아도 꼭 오기요 세모샘)가 합류하셨으니 세 번째 시간에도 새로운 분이 합류하시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ㅋ

 

 

댓글 10
  • 2024-02-26 09:37

    실재성과 관념성에 관한 칸트의 설명이 많이 어려웠는데, 이렇게 산뜻하게 설명해주니....
    감사합니다.

  • 2024-02-26 11:31

    호수샘의 후기를 읽고 복습을 하게 되네요. 좋은 후기 감사합니다. ^ ^
    3주차 세미나에서 하게 될 '초월적 논리학'을 읽다가 '초월적 감성학'으로 다시 돌아가 음미하게 됩니다.
    저도'경험적 실재성'과 '초월적 관념성'이라는 '켤레' 개념이 어려웠는데 호수샘의 후기가 이해에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제가 읽던 참고 자료 중에 경험적 실재성과 초월적 관념성에 대한 설명이 있어 첨부합니다.

    "칸트는 자신의 철학을 '초월적 관념론'이자 '경험적 실재론'이라 칭했다. 인식 형식과 구조는 객체로부터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초월적으로
    대상(객체)에 부여하는 것이기에 '초월적 관념론'이라고 부른 것이다. 다른 한편 인식의 재료는 모두 물자체(대상)가 경험적으로 제공하는 것이기에
    '경험적 실재론'이라 불릴 수 있다."

  • 2024-02-26 14:22

    오! 섬세한 호수샘 후기에서 현장감이 느껴집니다.

    • 2024-02-26 16:05

      고인물 취급을 받던 철학학교에 새 바람이 부는 건 손을 번쩍 들며 '제가 다음주 후기를 쓰겠습니다'하신 덕영샘 덕분입니다. 몇 년 하면서 그런 모습은 처음 목격했습니다. 신기했습니다.

  • 2024-02-26 17:18

    어떤 책에 대해서든 찬찬하고 진중한 호수샘 글을 읽고 있으면 늘 '아, 나도 책 좀 차분하게 잘 읽어가야지. 진정 이렇게 읽고싶다' 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문제는 그때 뿐, 셈나 할 때 다 돼서 대충대충 휘리릭 아무렇게나 읽고 기억도 안나는 상태로 가는 버릇은 평~생 고쳐지지가 않네요 젠장ㅋ. 어쨌든 호수샘 후기를 읽고 있으니 감성학을 다시 읽는 기분이에요. 복습이라곤 생전 단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새삼스레 할 수도 없고...고마우신 쌤 후기 몇번 더 읽겠습니다^^

  • 2024-02-26 18:45

    호수샘 기억의 첫 자리에 영광스레 자리하는 걸 보면, 제 붉은 점퍼가 꽤나 강렬한가 봅니다. 혹여라도 여러분들의 집중력을 저해하는 역할이 아니고, 철학적 열정에 불을 더 지피는 역할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앞으로 '정말 흔치 않게도' 철학을 통해 모두가 힐링하는 '철학 힐링 타임'이 펼쳐지기를 기대해봅니다.

    전반적 정리 감사드립니다. 큰 도움 받았습니다.

  • 2024-02-26 21:23

    ㅎㅎㅎㅎ 콧구멍 벌름거리는 걸 보셨다니... 예리하십니다. ㅋㅋㅋ 사실 칸트는 역사상 가장 많은 회절적 독해를 당한 철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리고 이번에 읽으면서, 호수샘의 지적을 들으면서 여전히 칸트에게 재독해의 여지가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였고요 ㅎㅎㅎ. 아마 한 주 한 주 차곡차곡 나가다보면 또 어떤 독특한 칸트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지 모를 일입니다. 제가 크게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오프라인 세미나에서 세-모 샘을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넘나 감격적이었고요. 저 위에 아렘샘도 대댓글로 써두셨지만, 덕영샘이 '다음주는 제가 쓰겠'다고 한 것도 기분 좋은 점이었습니다(처음은 아녀요. '다음주 후기'를 약속한 사례는 그래도 꽤 많았습니다. 늘 '이번주 후기'가 문제지요 ㅎㅎㅎ)

  • 2024-02-27 09:24

    ‘사상(事象.Sache)’은 호수샘이 처음에 질문했던 것처럼 단순한 사물(Ding)보다 넓은 범위의 '사물+현상'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b칸트사전에서는 '물건', 최재희샘의 <순수이성비판>(박영사)에선 '사물'로 번역되고 있지만요.
    <순수이성비판> 2권 내용을 보면 사상의 의미를 더 정확하게 유추해볼 수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사상(事象)이 단지 그것이 표상 안에서 실존할 수 있다는 명제는 물론 이상하게 들릴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삼고 있는 사상들은 '사물들 자체가 아니라 현상들, 다시 말해 표상들이므로, 그 기이한 느낌은 사라질 것이다."(585쪽). 여기에선 사물보다는 표상 또는 현상에 더 무게를 싣는 듯해요.

    그리고 후설과 하이데거의 현상학에 이르러서는 'Sache'의 존재감이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존재와 시간> 등에서는 이 단어가 '사태(事態)'로 번역되고 있네요.

    "현상학은 근대의 실존주의에 반대해 엄밀하게 '사태 자체(Sache selbst)'를 기술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하이데거에게 '사태(Sache)' 곧 현상은 현사실적 삶 자체였다."
    "결국 현상학의 준칙 '사태 자체로 돌아가라!(Zurück zu den Sachen selbst!)'를 표현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현상학이란 '사태 자체로 나아가 사태 자체가 스스로 드러나는 그대로 드러냄'인 것이다."

    어쨌든 여러 정황을 볼 때 사상(事象)이 단순한 사물의 의미를 넘어서는, 더 큰 뜻을 품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백종현샘이 굳이 사물과 구분해 사상으로 번역한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해요.

    • 2024-02-27 10:24

      오, 옮겨주신 2권의 문장을 보니 확실히 칸트가 특별히 주의해서 Sache와 Ding을 구분했단 걸 알 수 있네요. 그런데 참 알쏭달쏭한 개념이네요. 후설과 하이데거 인용문에서도 현상에 더 가까운 의미로 보여요. 여기서는 아예 물 자체와 현상을 구분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느낌도 들고.... 앞으로 더 주목해서 보게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세븐샘!

  • 2024-02-27 16:58

    저는 계속 여러 단어들이 돌고 돌고 있습니다.~
    샘들의 후기와 댓글로 열심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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