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 2절, 3절 후기

봄날
2022-11-22 17:17
454

<차이와 반복>본문을 다 읽고 결론을 읽고 있는 지금에도 여전히 새로 읽는 책 같다.(이래서 차이와 반복인지...) 그런데 서론을 잠깐 읽어봤는데 뭔가 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직 나의 언어로 옮겨지지는 않지만 아무튼 들뢰즈가 거듭해서 말하는 개념들이 조금은 익숙해진 느낌...

 

2절 이유로서의 근거: 근거의 세가지 의미

근거짓는다는 것은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규정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세가지로 설명하겠다는 거다. 이 세가지는 이데아같이 본질에 해당하는 것, 지망자나 지망에 해당하는 것(이미지), 그리고 경쟁적 지망이 향하고 있는 것(자질)이다. 이데아가 재현의 세계를 창시하거나 근거짓는 것은 기껏해야 모상이다. 반면 반항적이고 유사성 없는 이미지들은 거짓 지망자라는 이유로 거부된다.  일단 재현의 세계가 열리면 충족이유는 동일성이 아니라 재현의 모든 유한한 관점들을 수렴시킨다.  그런데 세번째 의미에서 이 두가지 의미는 다시 하나가 된다. 근거짓는 것은 언제나 어떤 시간의 질서를 조직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질, 차이는 원환속에 놓이게 되고 경쟁하는 지망자들은 움직이는 원환의 주위에서 배분되고, 하나의 삶은 언제나 현재를 재현한다. 현재는 재현 안에서 도래하고 지나간다. 이때 근거는 아득한 태고의 기억이나 순수과거로 나타난다. "이런 과거는 결코 현재였던 적이 없는 과거, 따라서 현재를 지나가게 하는 과거이고, 모든 현재들은 이런 과거에 대한 관계안에서 원환을 이루는 가운데 공존한다."

 

여기서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이 재현을 통해 단순하고 분배되는 이 원환이 해체되지 않냐고 묻는다. 탈성화된 죽음본능과 본질적으로 기억상실성에 빠져 있는 나르키소스적 자아가 '시간의 텅빈형식'을 통해 현전하지 않냐고.  근거는 자신이 근거짓는 것을 향해, 재현의 형식들을 향해 기울어져 있지만, 반면에 모든 형식들에 저항하고, 재현들되지 않는 어떤 무-바탕으로 미끄러진다. 근거는 근거짓는 원리에서 근거와해로 이행한다. '순수한 규정, 추상적인 선으로서의 사유가 (친해보이는)미규정자인 무-바탕과 대결해야 하는'이유는 바로 사유이기 때문이다. 무-바탕이 사유에만 고유한 동물성, 사유의 생식성이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어리석음' '멍청함'으로밖에 사유(?)할 수 없다는 뜻일 것이다.

 

3절 허상들

많은 질문들은 '타인'으로 집중됐다. 타인은 어떤 구조, 지각세계 전체의 작동방식을 보장하는 구조이므로, 그 어떤 누가 아니고, 당신도 나도 아니다. 지각적 세계의 개체화(개인화)를 보장하는 것이 이 타인-구조이다.  새삼스럽게 "서로 다른 자각의 세계들 안의 어떤 가변항들-가령 당신의 지각의 세계 안에서 당신에 대한 나, 나의 지각의 세계 안에서 나에 대한 당신-에 의해서만 효력을 미치는 구조"라는 들뢰즈의 말이 꽂힌다. 이것은 결코 일반의 특수한 구조나 종별화된 구조가 아니다. 우리는 타인이 있지 않고서는 세계를 기술할 수 조차 없다.  타인-구조만이 강도적 계열안에 있는 그대로의 개체화요인을 발견하고 이념안에 있는 그대로의 전-개체적 독특성들을 재발견할 수 있다. 

 

이때의 이념들은 신적인 놀이와 같다. 인간적인 놀이는 선재하는 정언적 규칙들을 가정하고 이 규칙들은 실행된 가설에 따라 배당된다. 이것은 거짓된 놀이방식이다. 어떤 도덕적 전제들, 선악에 관련된 놀이, 도덕성의 학습이다.  반면 신적인 놀이는 재현의 세계에서는 다루기 불가능하다. 여기에는 선재하는 규칙이 없고 놀이의 대상은 자신의 고유한 규칙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우연은 매번 그대로 나타난다(매번 긍정된다). 주사위 던지기는 가설들의 분배에 따라 할당되는 것이 아니라 유일하고 배당되지 않은 던지기의 열린 공간 안에서 그 자체로 배당된다. 이념들의 모든 실증성이 개봉되는 이 세계는 텅 빈 시간의 형식 속에서 균열된 나밖에 아무 것도 없다. 분열된 자아밖에 없는 이 세계는 그래서 필연적으로 고독하다고 하는 것 아닐까?

 

범주들에 대한 요요샘의 질문에 크게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었다. 우리는 많은 기초개념들을 일종의 '범주'로 이해하지 않았나? 재현의 범주들과 구분되는 이유를 들뢰즈는 이렇게 말한다. 우선 기초개념들은 실재적 경험의 조건이지, 가능한 경험의 조건이 아니다. 아렘샘이 질문한 '이 개념들이 조건화되는 사태보다 더 크지 않는다'는 의미는 바로 모든 가능한 경험의 조건보다 크지 않을 거라는 말인 듯 하다.  또 기초개념들은 각각의 유형들의 분배가 전적으로 구별되고 환원불가능하다. 즉 기초개념들은 마주치는 순간 펼쳐지는 것이지 어떤 재인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을 들뢰즈는 버틀러가 주장한 '에레혼들'과 같다고 말한다.

댓글 7
  • 2022-11-23 11:15

    "우선 기 기초개념들은 실재적 경험의 조건이지, 결코 가능한 경험의 조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 개념들은 조건화되는 사태보다 더 크지 않다" 저는 아직도 이 문장이 좀 어렵습니다. 앞 문장의 단정과 뒷문장의 단정이 "바로 이런 의미에서"로 이어지는 게 자연스러울 수 있는 맥락을 찾아보려는 데 아직까지는 실패입니다. 강독 시간에도 혹시 휴식 시간이 있다면 비공식적으로다가 좀 샘들께 여쭤봐야지 하고 있습니다. (까먹고 있다가 봄날샘이 다시 생각나게 해주셨습니다. ) ㅎ

    • 2022-11-24 12:40

      저는 이해하기 편하게 '실재적 경험의 조건'은 잠재성이고 '가능한 경험의 조건'은 가능성으로 읽었어요. 그러니까 잠재성은 매번 새롭게 생성되는 거이니까 범주화할 수 없는 것이고요. 가능성은 이미 어떤 범주안의 '경우의 수'같은 것으로....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렇다면 둘을 대조한다는 것 자체가 애매한 일이기는 하네요...

    • 2022-11-25 09:46

      제 생각에는.. 가능한 경험의 조건과 실재적 경험의 조건의 대비 속에서 '이런 의미에서'를 이해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가능한 경험의 조건은 칸트의 범주인데, 범주는 실재보다 더 큽니다. 가령 인과성이라는 범주는 ~하면 ~한다고 말할 수 있는 모든 인과를 다 포함하려 하니까요. 이와 달리 실재적 경험의 조건은 내생적 발생의 조건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미분화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범주가 성긴 그물이라면 미분화는 촘촘한 그물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군요.(이건 들뢰즈 흉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가능한 경험의 조건은 조건화 되는 사태보다 크다. 실재적 경험의 조건은 조건화 되는 사태보다 크지 않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큼과 작음으로 이 둘을 비교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자가당착일 수도 있고(아렘샘 따라하기^^) 다른 한편으로는 재치 혹은 익살일 수도(정군샘 따라하기) 있습니다.^^

  • 2022-11-23 23:39

    다 읽어가는 데도 여전히 낯설고 그런 와중에도 다시 읽어보면 뭔가 알 것 같은 그런 책들을 '고전'이라고 부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ㅎㅎ 그런 점에서 들뢰즈 자신이 '깊이'를 만들어 낸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고 범주와 기초개념은 어쩌면 심각한 것이라기보다(실제로 그렇기는 하지만) 들뢰즈의 재치가 빛나는 구분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 2022-11-24 07:54

    결론을 읽는 동안 복습의 효과가 있어서 좋네요. 책을 읽기는 읽었는데 뭘 모르는지 더 잘 알게 되는 뼈 때리는 효과 말이에요. 그래서 멘붕이 오기도 하지만 그것도 나름 괜찮습니다.^^ㅎㅎㅎ

  • 2022-11-24 12:10

    저는 지난 시간에 토용샘이 질문하셨던 "개념 바깥에서"의 "개념 없는 차이"에 대해 더 생각해보았어요. 마침 4절에서도 계속 나와서요. 요요샘께서 오른손장갑과 왼손장갑으로 잘 설명해주셨는데, 그게 '장갑'이란 게 무엇인지 개념을 '봉쇄'하는 사태에서 일어나는 반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제가 오른쪽/왼쪽으로 구분이 되지 않느냐고 반문했는데 그렇게 오른손 장갑이라고 외연을 좁힌다고 해도 그 안에 다 포섭되지 않는 속성들이 있게 되기는 마찬가지여서(얼마나 닮았는지, 올이 좀 풀리지는 않았는지....) 역시나 서로 다른 장갑을 같은 것으로 보는 '개념 없는 차이로 재현되는 반복'이 일어난다고 봐야 할 것 같아요. 이 생각을 하니 '재현'이 지금의 현실을 드러내는 표면적 양상인 동시에 초월론적인 실재적 역량이 드러나는 '하나의' 양상이기도 하다고.. 그렇게 조금 더 정리가 되었습니다.

    • 2022-11-25 09:10

      세미나에서 샘이 오른쪽 왼쪽도 개념 아니냐고 했을 때 잠시 멈칫했는데요.ㅎㅎ 지금 생각해보니 오른쪽 왼쪽은 사실 공간이 도입될 때 가능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도입되어야 반복이 가능하듯이 공간이 도입되어야 반복이 가능해진다는 그런 이야기?^^ 칸트를 빌어 말한다면 시공간은 직관의 형식이지 개념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오른쪽 왼쪽 장갑은 반복이고 개념없는 차이가 되는 것 아닐까라고 생각해봅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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