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끝의 약국 / 로이

로이
2024-01-13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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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서

 

  세상에 하나뿐인 약국. 동네 사랑방 같은 약국. 마을 건강 플랫폼. 호모큐라스들의 네트워크. 이런 캐치프레이즈들을 내걸고 친구들과 함께 공동체 안에 약국을 열었다. 내 삶의 계획 안에는 없었지만 약국을 기꺼이 오픈하게 된 이유는 친구들과 삶을 함께 도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저 캐치프레이즈들이 말하듯 내 업에서도 새로움을 모색하고 싶었다. 약 3년 동안 적자와 흑자를 오가는 매출 곡선에 일희일비하면서도 우리는 먹고살 수 있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공동체 친구들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약국이 공유지로서 작동했기 때문이다. 처방전을 받지 않고도, 한 사람과 2시간이 넘게 상담하고도, 저렴하게 약을 지으면서도 아직 망하지 않았다. 또 우리가 지은 약(주로 쌍화탕)은 다른 인문학 네트워크로, 연대의 현장으로 선물이 되어 흘렀다.

 

 

  하지만 내 머리와 마음은 분리가 일어나기 일쑤였다. 약국 알바로 살 때가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돈 벌 때는 상품 경제를, 공동체에서 활동할 때는 선물 경제만 생각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약국을 운영하면서 적자일 때 매출을 올릴 방안을 고민해야 했고, 상품을 더 많이 팔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먹고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고민과 노력이 선물 경제로 작동되는 공유지에서는 불편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또 친구들과의 대화가 주로 매출에 대한 이야기로 흐를 때 동학이 아닌 직장 동료 같아서 가끔 헛헛하다. 공부할 시간도 줄었다. 약국 알바 때 보다 수입이 줄어 내 삶이 더 불안정해졌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애나 칭의 『세계 끝의 버섯』을 읽으면서 나의 분열된 마음을 정리해 보고 싶어졌다. 사실 문탁네트워크에 접속한 이유 중 하나는 “돈돈” 하는 세상이 싫었기 때문이다. 돈에 초연해지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돈에 관한 공부를 하고 거의 십 년 동안 풀타임 일을 하지 않았었다. 덕분에 통장은 ‘텅장’이 되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면서 자본주의 안에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애나 칭의 이 질문은 비자본과 자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내 질문이기도 하다. 애나 칭은 자본주의를 초월하자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자본주의가 비자본주의적 요소에 의존하고 있는 지점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호기심과 상상력을 동원할 것을 요청한다. 그곳에 우리가 알아차릴 것이 있다.

 

 

  애나 칭의 자본주의 분석

 

 

  애나 칭은 송이버섯의 전 세계적 상품사슬을 추적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해 색다른 분석을 한다. 지금의 글로벌 경제를 잉태한 20세기 후반의 역사를 송이버섯의 공급사슬이 고스란히 보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초 세계대전의 여파로 일본의 경제는 호황을 누렸고, 금융자본을 등에 업은 무역회사들은 용이하게 글로벌 공급사슬을 형성했다(1). 20세기 후반 일본 자본의 성공에 긴장한 미국은 일본의 방식을 따랐다. 투자자들의 주요 전략은 ‘기업 인수 합병’으로, 가장 이윤이 남는 분야만 남기고 나머지 사업은 멀리 떨어진 공급자들과 계약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러한 비즈니스 전략은 진화 과정을 거쳐 도달한 첨단기술인 걸로 미화되었고 공급사슬 자본주의는 세계 곳곳에 존재하게 되었다(2). 

 

  글로벌 공급사슬이 형성되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기업은 더 이상 노동표준화를 위해 일자리, 교육, 복리를 보장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공급사슬을 통해 이윤 창출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 모두의 삶이 훨씬 불안정해졌고 불확실해졌다. 즉 진보가 성장을 이끌고 안정성과 풍요를 가져올 거라는 기대가 종말을 맞게 된 것이다. 게다가 기업은 공급자들에게 상품을 더 싸게 생산하도록 강요함으로써 야만적인 노동 착취와 환경파괴가 일어나게 하였다.

 

  애나 칭의 분석은 더 나아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의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한다. 그것이 바로 ‘구제salvage(3)’이다. 구제는 자본주의적 통제 없이, 비자본주의적으로 생산된 가치를 자본주의적으로 써먹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자본가는 피복공장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의 바느질 능력을 이용하지만, 그가 그 바느질 능력을 생산한 것은 아니다. 공장에서 이러한 능력들이 구제된다. 그리고 자본가는 구제를 통해서 부를 축적한다. 이른바 ‘구제 축적’이다. 구제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자본주의 내부(상품 경제)인 동시에 외부(선물 경제)이다. 애나 칭은 이러한 장소들을 ‘주변자본주의적pericaptitalist’이라고 칭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늘, 항상 비자본주의에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구제가 글로벌 공급사슬을 통해 이뤄질 때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번역’(4)이다. 국제적인 거래에서는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공간을 가로질러서 번역하는 작업이 필수이다. 따라서 차이가 존재하는 장소를 교차하며 행해지는 번역이 바로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곧 자본주의는 번역기계이다. 글로벌 경제에서는 ‘구제’와 ‘번역’을 통해야 부를 축적할 수 있다.

 

 

  송이버섯의 공급사슬로부터

 

  미국 오리건주로부터 시작하여 일본으로 이어지는 송이버섯의 공급사슬을 들여다보자. 오리건주의 캐스케이드 산맥의 숲속에서는 다양한 배경을 가진 채집인들(5)이 송이버섯을 채취한다. 그들은 그날그날 채집한 송이버섯을 구매인과 흥정한다. 대규모 구매업자의 현장 중개인은 버섯을 구매인에게 산다. 버섯은 대규모 구매업자를 통해 수출업자에게 팔린다. 일본의 수입업자로부터 도매업자에게 간 송이버섯은 중간 도매업자를 거쳐서 최종 구매인(소비자)에게 전달된다. 이 기다란 공급 사슬의 배열 속에서 두 번의 번역이 이루어진다. 대규모 구매업자와 수출업자 사이에서, 그리고 일본의 수입업자와 도매업자 사이에서 이뤄진다. 첫 번째는 송이버섯이 공항 주기장駐機場에서 다시 분류되면서 자본주의의 재고품(상품)으로 번역되고, 두 번째는 재고품이었던 송이버섯이 일본 도매업자에 의해 선물로 번역된다. 따라서 송이버섯이 재고품으로 존재한 것은 단지 몇 시간 뿐이다. 

 

 

  채집되고 흥정되는 시간에는 송이버섯이 자본주의 상품이 아니었다면 무엇이었을까? 애나 칭은 이렇게 말한다. 채집인, 구매인, 현장 중개인들의 생산 여건이 ‘자유’의 문화적 실천에 오염되어 있기에 자본주의적일 수 없다고. 어떤 자유일까? 이 ‘자유’의 의미는 각자에게 다르다. 예컨대 캄보디아 내전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캄보디아 난민에게 자유는 반공反共이고 반전反戰이다. 몽인과 미엔인은 답답한 도시 아파트를 벗어나 숲의 풍경에서 동남아시아를 떠올리면서 자유를 찾는다. 백인 베트남전쟁 참전용사는 공황 발작을 야기하는 군중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숲에 산다. ‘오리건주의 오픈티켓’(6)에서도 자유가 수행된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자유로운 구매 경쟁에서 노골적으로 추구되는 목표는 가격을 높이는 것이다.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게다가 많은 돈이 오가지만 그 돈은 사라지고 절대로 투자되지 않는다. 즉 자본이 형성되지 않는다. 또 채집인들은 자신의 채집 행위를 노동으로 말하지 않는다. 재산을 ‘찾는 행위’라고 한다. 채집인과 송이버섯 사이에는 소외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렇게 ‘자유’는 동일하지 않고 불규칙적이며 합리화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상품 경제와는 다른 경제를 이루게 한다. 이들이 겪은 각각의 역사적 흐름(7)은 자유의 실천으로서 버섯 채집이라는 실천을 동원했다. 그들을 ‘버섯 열병’에 들끓게 했다. 

 

  일본 내에서도 송이버섯은 거의 항상 선물을 위해 거래된다. 중간 도매업자는 자신들이 하는 일을 최고의 구매인과 송이버섯을 맺어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중매를 통해 그들은 송이버섯을 상품에서 선물로 번역한다. 선물은 이렇게 상품 사슬에서 구제된다. 선물이 된 송이버섯은 더 이상 소외된 사물이 아니다. 이렇게 자본주의는 선물 경제와 상품 경제가 얽혀서 구성된다. 비자본주의적 패치patch(8)와 자본주의적 패치는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자본주의는 하나의 큰 체계가 아니다. 이 패치들 사이를 번역하며 오가는 ‘패치 자본주의’라고 해야 한다.

 

 

  세계 끝의 약국에서 상상하기

  오리건주 오픈티켓에 모인 사람들이 열중한 ‘자유’는 비자본주의적 경제를 이루고 있는 핵심이다. ‘자유’라는 가치가 송이버섯과 함께 번역되었던 것이다. 우리 약국에서는 어떤 가치가 번역되고 있는 걸까? 생각해 보면 그들처럼 나 또한 어떤 ‘자유’를 수행하고 있었다. 자본주의로부터의, 임노동으로부터의, 이전의 삶으로부터의 ‘자유’. 일리치 약국을 열면서는 의료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리고 건강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실천을 수행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약국이라는 가게 형태와 양립하기 껄끄럽다는 마음에 자꾸 걸려 넘어졌다.

 

  “삶과 상품은 구제 축적되면서 비자본주의적 형식과 자본주의적 형식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 그 형식들은 서로의 모양을 빚어주고 서로에게 침투한다. ‘주변자본주의적’이라는 용어에는 이러한 번역에 사로잡힌 우리가 자본주의로부터 결코 완전하게 보호될 수 없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주변자본주의적 공간을 안전한 방어와 회복을 위한 플랫폼으로 보긴 어렵다.”(126)

 

  애나 칭의 분석에 따르면 일리치약국은 상품경제와 선물경제가 오가는 자본주의의 가장자리, 주변자본주의적 장소, 곧 세계 끝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선물 경제가 상품 경제와 연결된 채로 지금의 삶을 잘 살아내고 싶다. 물론 세계 끝의 약국이라고 해서 불안정성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적 통치를 이용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는 현장에서 불안정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오리건주의 오픈티켓에 모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다. 내 안의 갈등은 어쩌면 당연하였다. 그들은 불안정하기에 서로 마주칠 수 있었고 오염(9)될 수 있었다. 불안정성은 타자들에게 취약한 상태를 말한다. 불안정하지 않다면, 오염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협력하지 않는다면 생존할 수 없다. 또 불안정하기에 변화할 수 있고, 다른 가능성들을 상상할 수 있다. 우리도 불안정했기에 이곳에 모였고 서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약국을 열 수 있었다. 부분들의 합보다 더 큰 사건이 될 수 있었다. 안정과 풍요라는 진보가 던진 공수표는 이제 필요 없다. 

 

  애나 칭은 서문에서 “제3의 자연은 곧 자본주의 속에서도 삶을 살아내는 것을 뜻한다”(10)고 했다. 어떻게? 결국 그녀는 우리에게 다양한 종들과 얽혀서 살아가라고 그러기 위해 마주치고 오염되고 협력하라고 얘기한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살고 있음을 알아차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다양한 삶들의 가치를 알아차려야 한다. 그 삶들이 생산하는 잠재되어 있는 공유지를 알아차려야 한다. 내가 더 알아차려야 할 것들이 여전히 있다. 아직 알아차리지 못한 잠재적 공유지와 잠재적 협력자들이 더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이전과 다른 호기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상상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배치assemblage(11)를 바꿔야 할 수도 있고 새로운 배치를 만들 수도 있다. 우린 앞으로 어떤 호기심으로 무엇을 상상하며 어떻게 배치를 새롭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포자 되기

 

  버섯의 포자는 유성 생식도 무성 생식도 이종 교배도 가능하다. 심지어 포자가 버섯갓 안쪽 주름에서도 발아할 수 있다. 애나 칭은 이처럼 포자가 체세포와 결합하는 것이 마치 자기 팔과 짝짓기를 하는 것처럼 ‘퀴어’하다고 말한다. 다양한 생식 형태를 통해 송이버섯은 다른 게놈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어떤 게놈을 버릴 수 있다. 하나의 몸체에서 진화를 일으켜 이질성을 발생하는 것이다. 포자는 새로운 유전적 물질을 더하면서 송이버섯 개체군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는다. 새로 시작하는 약차 사업이 새로운 게놈을 추가하는 포자로서 또는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으로서 우리를 이질성으로 안내하길 바란다. 그리하여 새로운 활기가 생긴다면 좋겠다.

 

  포자는 공기를 따라, 사물이나 생물에 묻어서 장거리 여행을 한다. 우리의 자유, 실천, 가치가 포자가 되어 멀리멀리 여행하는 상상을 해본다. 쌍화탕에 묻어, 우리가 쓴 책 속에 잠복해서, 약국의 SNS 타고서 말이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착한 그곳에서 다행히 발아하기를! 이왕이면 퀴어하게! 그리고 더 많은 약국이 송이버섯처럼 세계 끝에서 생기기를 희망한다!

 

  포자는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고, 유형을 교차해 교배하며, 최소한 가끔씩 새로운 유기체를 낳는다. 새로운 종류의 시작이다. 포자는 분명하게 정의하기 힘들다. 그것이 포자의 품격이다. (404)

 

 

 

주석

 (1) 해외 공급사슬 파트너에게 대출, 장비, 기술적 조언을 하는 방식으로 공급사슬 하청을 했던 것이다. 대표적 하청국이 한국이다. 

 (2) 나이키는 공급사슬 자본주의의 상징이다. 생산은 하지 않고 21세기 초 900개가 넘는 공장과 계약을 맺었다. 나이키 부사장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제조에 대해 하나도 모릅니다. 우리는 마케팅 전문가이고 디자이너입니다”.

(3) salvage의 사전적 의미는 “가치있거나 중요한 것을 구하다, 지키다, 저축하다”이다.

(4) 번역은 부분적인 조율이 일어나는 다양한 형식으로, 다양한 경제를 이으면서 공급사슬의 중심에 있다.

(5) 아시아계 난민인 미엔인, 몽인, 크메르인, 참인 그리고 라오인, 백인 참전용사, 아메리카 원주민, 미등록 라틴아메리카인 등이다.

(6) 애나 칭이 송이버섯 상거래 장소를 지칭하기 위해 만든 합성어다. ‘오픈티켓’이란 채집인이 원래 지불받는 가격보다 같은 날 밤에 거래된 최고 가격이 더 높을 경우, 그 차액을 나중에 구매인에게서 보상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7) 미국 참전 용사와 아시아계 난민은 베트남 전쟁과 그 후 뒤따른 내전을 겪으며 전쟁이라는 공통의 역사를 가진다. 하지만 민족마다 각자 다른 경험을 했다. 

(8) 애나 칭은 다종의 생물들의 얽힘의 관계망을 말하는 생태적 용어를 가져와 자본주의를 자본주의적 패치와 비자본주의적 패치가 글로벌 경제로 연결되면서 작동하는 체계로 봤다.

(9) 마주침을 통한 변형으로서 오염은 다양성을 만든다.

(10) 제1의 자연은 인간을 포함한 생태적 관계를 의미하고, 제2의 자연은 자본주의적으로 변형된 환경을 뜻한다. 이러한 전제로 애나 칭이 생각한 제3의 자연을 말함. 

(11) 애나 칭에게 배치는 질 들뢰즈의 아장스망의 의미를 사용한 것으로, 어떤 규모에서도 하나의 장소에 모이게 하는 것, 상호작용을 하는 구조를 가정하지 않고 존재하는 방식이 모인 것을 뜻한다. 그것은 열린 모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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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약방 에세이
          비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서     세상에 하나뿐인 약국. 동네 사랑방 같은 약국. 마을 건강 플랫폼. 호모큐라스들의 네트워크. 이런 캐치프레이즈들을 내걸고 친구들과 함께 공동체 안에 약국을 열었다. 내 삶의 계획 안에는 없었지만 약국을 기꺼이 오픈하게 된 이유는 친구들과 삶을 함께 도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저 캐치프레이즈들이 말하듯 내 업에서도 새로움을 모색하고 싶었다. 약 3년 동안 적자와 흑자를 오가는 매출 곡선에 일희일비하면서도 우리는 먹고살 수 있었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공동체 친구들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약국이 공유지로서 작동했기 때문이다. 처방전을 받지 않고도, 한 사람과 2시간이 넘게 상담하고도, 저렴하게 약을 지으면서도 아직 망하지 않았다. 또 우리가 지은 약(주로 쌍화탕)은 다른 인문학 네트워크로, 연대의 현장으로 선물이 되어 흘렀다.       하지만 내 머리와 마음은 분리가 일어나기 일쑤였다. 약국 알바로 살 때가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돈 벌 때는 상품 경제를, 공동체에서 활동할 때는 선물 경제만 생각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약국을 운영하면서 적자일 때 매출을 올릴 방안을 고민해야 했고, 상품을 더 많이 팔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먹고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고민과 노력이 선물 경제로 작동되는 공유지에서는 불편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또 친구들과의 대화가 주로 매출에 대한 이야기로 흐를 때 동학이 아닌 직장 동료 같아서 가끔 헛헛하다. 공부할 시간도 줄었다. 약국 알바 때 보다 수입이 줄어 내 삶이 더 불안정해졌다는 점도 무시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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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2024.01.13 | 조회 174
인문약방 에세이
애나 칭의 『세계 끝의 버섯』은 자본주의를 연구한 책이다. 나에게 자본주의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마르크스이다. 그는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여 잉여가치를 축적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가속화되고 결국은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킨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세계는 자본주의 체제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이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애나 칭은 자본가나 노동자가 아니라 폐허가 된 숲과 그곳에서 자라는 송이버섯을 통해 자본주의 세계를 연구했다. 이 세계에는 성장을 위한 경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협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 비인간을 너머 얽혀있는 다종의 생명체들이 움직이는 방식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우선은 애나 칭을 따라 폐허가 된 숲으로 들어가 보자.     1.오염에서 창발로   20세기 초 오리건 주의 데슈츠강을 따라 철도가 건설되었다. 숲에서 벌목된 폰데로사 소나무는 철도에 실려 먼 곳까지 팔려나갔다. 1930년대에 이르렀을 때 오리건 주는 미국에서 목재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지역이 되었다. 하지만 1989년 무렵에는 대부분의 제재소가 문을 닫았고 벌목된 숲은 폐허가 되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1854년 일본은 미국과 조약을 맺고 항구를 개방하며 무역을 시작했다. 이들은 서구의 근대화 과정을 좇아 국제무역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세계경제가 호황을 맞았을 때, 일본 경제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때 일본의 기업들은 생산이 아니라 금융자본에 의해 성장했다. 일본의 무역회사는 “해외 공급사슬 파트너에게 대출이나 장비, 기술적...
애나 칭의 『세계 끝의 버섯』은 자본주의를 연구한 책이다. 나에게 자본주의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마르크스이다. 그는 생산수단을 가진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여 잉여가치를 축적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가속화되고 결국은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킨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고, 세계는 자본주의 체제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 이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애나 칭은 자본가나 노동자가 아니라 폐허가 된 숲과 그곳에서 자라는 송이버섯을 통해 자본주의 세계를 연구했다. 이 세계에는 성장을 위한 경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협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 비인간을 너머 얽혀있는 다종의 생명체들이 움직이는 방식을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우선은 애나 칭을 따라 폐허가 된 숲으로 들어가 보자.     1.오염에서 창발로   20세기 초 오리건 주의 데슈츠강을 따라 철도가 건설되었다. 숲에서 벌목된 폰데로사 소나무는 철도에 실려 먼 곳까지 팔려나갔다. 1930년대에 이르렀을 때 오리건 주는 미국에서 목재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지역이 되었다. 하지만 1989년 무렵에는 대부분의 제재소가 문을 닫았고 벌목된 숲은 폐허가 되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1854년 일본은 미국과 조약을 맺고 항구를 개방하며 무역을 시작했다. 이들은 서구의 근대화 과정을 좇아 국제무역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했다.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세계경제가 호황을 맞았을 때, 일본 경제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때 일본의 기업들은 생산이 아니라 금융자본에 의해 성장했다. 일본의 무역회사는 “해외 공급사슬 파트너에게 대출이나 장비, 기술적...
기린
2024.01.13 | 조회 158
인문약방 에세이
      2학기 공부는 유독 일상과 교차되었다. 길을 걷다 장애를 가진 동물과 마주친다든가 갑자기 호떡이 먹고 싶어져 농인인 상인과 소통을 해야하는 일 등으로 말이다. 직업군인으로 근무했던 수십 년 동안 내 주변에 장애인이 ‘없었다’는 것과 장애를 나와 관련된 이슈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장애인 차별이 비장애중심주의ableism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공부하고 나서야 비로소 관련없어 보였던 군대와 장애를 연결시킬 수 있었다.        군에서는 운동신경이 없어서 혹은 경험이 많지 않아 헛발질을 일삼고 잘 하지 못하는 이들의 스포츠 경기를 일컫어 ‘장애인 00’이라고 불렀다. 병영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장병들은 “장애인이냐? 고문관이냐?”는 폭언을 일상적으로 들었다. 군대야말로 인간 사회를 적자생존이라는 진화론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우생학 정책’의 생생한 현장으로 보였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과 한국의 징병제도는 ‘정상 신체를 가진 대한민국 남성’만을 전쟁에 필요한 자원으로 호명해왔다. 군에서 장애인은 철저하게 비가시화되어 있었지만, 비하할 만한 상황이나 대상이 필요하면 여지없이 소환되었다. ‘군인되기에 적합한 신체'라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애쓰며 그 누구도 장애인되기를 원하지 않(을 줄 알)았다.     에이블리즘의 원형, 군대    군에는 장애인이 ‘없다’. ‘신체의 정상성’으로 대표되는 조직인 군은 입영단계에서 법령(국방부령 병역판정신체검사등검사규칙)에 근거하여 ‘그냥 인간’을 ‘등급내 인간’과 ‘등급외 인간’으로 분류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장애인의 군내 진입은 ‘원천’ 차단된다. 장애인이 없으니 장애인 편의시설도 필요없다. 장애인 화장실은 고사하고 휠체어 픽토그램조차 보지 못했다. 군 복무 중 장애가 생기는 경우는 어떨까? 장애의 원인이...
      2학기 공부는 유독 일상과 교차되었다. 길을 걷다 장애를 가진 동물과 마주친다든가 갑자기 호떡이 먹고 싶어져 농인인 상인과 소통을 해야하는 일 등으로 말이다. 직업군인으로 근무했던 수십 년 동안 내 주변에 장애인이 ‘없었다’는 것과 장애를 나와 관련된 이슈라고 생각해 본 적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장애인 차별이 비장애중심주의ableism와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공부하고 나서야 비로소 관련없어 보였던 군대와 장애를 연결시킬 수 있었다.        군에서는 운동신경이 없어서 혹은 경험이 많지 않아 헛발질을 일삼고 잘 하지 못하는 이들의 스포츠 경기를 일컫어 ‘장애인 00’이라고 불렀다. 병영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장병들은 “장애인이냐? 고문관이냐?”는 폭언을 일상적으로 들었다. 군대야말로 인간 사회를 적자생존이라는 진화론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사회적 다윈주의와 우생학 정책’의 생생한 현장으로 보였다. 한반도의 분단 상황과 한국의 징병제도는 ‘정상 신체를 가진 대한민국 남성’만을 전쟁에 필요한 자원으로 호명해왔다. 군에서 장애인은 철저하게 비가시화되어 있었지만, 비하할 만한 상황이나 대상이 필요하면 여지없이 소환되었다. ‘군인되기에 적합한 신체'라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애쓰며 그 누구도 장애인되기를 원하지 않(을 줄 알)았다.     에이블리즘의 원형, 군대    군에는 장애인이 ‘없다’. ‘신체의 정상성’으로 대표되는 조직인 군은 입영단계에서 법령(국방부령 병역판정신체검사등검사규칙)에 근거하여 ‘그냥 인간’을 ‘등급내 인간’과 ‘등급외 인간’으로 분류한다. 이 과정을 통해 장애인의 군내 진입은 ‘원천’ 차단된다. 장애인이 없으니 장애인 편의시설도 필요없다. 장애인 화장실은 고사하고 휠체어 픽토그램조차 보지 못했다. 군 복무 중 장애가 생기는 경우는 어떨까? 장애의 원인이...
문탁
2023.12.31 | 조회 226
인문약방 에세이
    장애인활동지원사를 아시나요   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그 사람의 목소리와 표정, 일상적인 습관, 스타일 같은 것에 민감한 편이다. 무의식적으로 주변사람들을 관찰하는 습성은 주로 내가 속한 모임에서 불편해 보이는 사람을 빨리 발견하는데서 자각되곤 한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를 고민했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끙끙거렸다. 특히 나와 일면식이 없더라도 주변에 바로 식별이 가능한 지체장애인이 나타나면 오지라퍼적인 감각이 더 살아나 온통 신경이 그쪽으로 집중되고 긴장이 되곤 한다. 그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거나 접촉할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했다. 물론 그것은 실행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성향 때문이었을까. 나는 회사를 그만두면 돌봄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올해 여름 재취업한 회사를 그만두면서 기회가 왔다. 장애인활동지원사 교육을 신청했고 5일간의 교육을 통해 그 현장의 소리를 들으며 장애, 돌봄, 비장애중심주의, 상호의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지정된 교육 기관에서 5일간 8시간씩 40시간의 교육을 받으면 실습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현장 실습 10시간까지 완료하면 정식 장애인활동지원사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인정되는 장애의 유형은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를 합쳐 15가지이고 신체장애와 관련된 보조기기만 해도 수백 가지인데 50시간의 교육만으로 실무에 투입된다는 게 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나에겐 이론 교육을 받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장애인활동지원사의 역할은 신변처리, 가사지원, 이동지원, 커뮤니케이션 보조 등 네 가지이고 구체적으로는 장애에 대한 이해, 장애인의 인권, 활동지원사의...
    장애인활동지원사를 아시나요   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그 사람의 목소리와 표정, 일상적인 습관, 스타일 같은 것에 민감한 편이다. 무의식적으로 주변사람들을 관찰하는 습성은 주로 내가 속한 모임에서 불편해 보이는 사람을 빨리 발견하는데서 자각되곤 한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를 고민했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끙끙거렸다. 특히 나와 일면식이 없더라도 주변에 바로 식별이 가능한 지체장애인이 나타나면 오지라퍼적인 감각이 더 살아나 온통 신경이 그쪽으로 집중되고 긴장이 되곤 한다. 그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인지,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거나 접촉할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했다. 물론 그것은 실행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성향 때문이었을까. 나는 회사를 그만두면 돌봄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올해 여름 재취업한 회사를 그만두면서 기회가 왔다. 장애인활동지원사 교육을 신청했고 5일간의 교육을 통해 그 현장의 소리를 들으며 장애, 돌봄, 비장애중심주의, 상호의존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지정된 교육 기관에서 5일간 8시간씩 40시간의 교육을 받으면 실습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현장 실습 10시간까지 완료하면 정식 장애인활동지원사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인정되는 장애의 유형은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장애를 합쳐 15가지이고 신체장애와 관련된 보조기기만 해도 수백 가지인데 50시간의 교육만으로 실무에 투입된다는 게 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나에겐 이론 교육을 받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웠다.   장애인활동지원사의 역할은 신변처리, 가사지원, 이동지원, 커뮤니케이션 보조 등 네 가지이고 구체적으로는 장애에 대한 이해, 장애인의 인권, 활동지원사의...
문탁
2023.12.31 | 조회 147
인문약방 에세이
    그는 지금껏 내가 만난 가장 낯선 작가였다.   책을 읽기 전, 단톡방에 올라온 저자 일라이 클레어의 사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여자라고 들었는데, 두 귀가 다 드러난 반삭에 가까운 짧은 머리, 두툼한 안경을 낀 얼굴에 넓은 어깨, 지퍼 달린 낡은 녹색 점퍼... ‘남자같은 여자’ 내가 갖고 있는 단어의 수준에서 나는 이렇게밖에 정의내릴 수 없었다. 그런데,             글을 보니, 그는 ‘젠더 퀴어’란다. 무슨 뜻이지? 동성애자인가? 소수자 용어에 낯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퀴어는 동성애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퀴어란, 태어날 때 사회(의사)가 지정해준 생물학적 성과 자기 정체성으로서의 성이 일치하지 않은 사람을 통칭한다. 거기에는 여자지만 남자보다 여성에게 성적으로 더 끌리는 사람, 남녀 모두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는 사람, 사회에서 훈육되는 여성성에 부합하지 않는 여자, 자신을 굳이 남녀이분법에 놓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 … 그러다 보니 나도 퀴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미디어와 문학의 일방적인 이성애적 세례가 없었다면, 혹은 대학 시절 다이크 공동체를 만났다면, 나도 지금과는 다른 젠더가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에 대한 소개를 좀 더 해보자. 그는 1963년생, 미국 오리건주 시골 벌목 노동자 마을에서 백인 중산층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지정성별로는 여성이지만 자신이 소녀라는 걸 확신할 수 없는 젠더 퀴어였고, 선천적 뇌병변 장애인으로 어려서부터 지진아, 불구, 원숭이 같은 조롱과 비난을 들으며 자랐다. 그는 아주...
    그는 지금껏 내가 만난 가장 낯선 작가였다.   책을 읽기 전, 단톡방에 올라온 저자 일라이 클레어의 사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여자라고 들었는데, 두 귀가 다 드러난 반삭에 가까운 짧은 머리, 두툼한 안경을 낀 얼굴에 넓은 어깨, 지퍼 달린 낡은 녹색 점퍼... ‘남자같은 여자’ 내가 갖고 있는 단어의 수준에서 나는 이렇게밖에 정의내릴 수 없었다. 그런데,             글을 보니, 그는 ‘젠더 퀴어’란다. 무슨 뜻이지? 동성애자인가? 소수자 용어에 낯선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퀴어는 동성애자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퀴어란, 태어날 때 사회(의사)가 지정해준 생물학적 성과 자기 정체성으로서의 성이 일치하지 않은 사람을 통칭한다. 거기에는 여자지만 남자보다 여성에게 성적으로 더 끌리는 사람, 남녀 모두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는 사람, 사회에서 훈육되는 여성성에 부합하지 않는 여자, 자신을 굳이 남녀이분법에 놓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 … 그러다 보니 나도 퀴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미디어와 문학의 일방적인 이성애적 세례가 없었다면, 혹은 대학 시절 다이크 공동체를 만났다면, 나도 지금과는 다른 젠더가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에 대한 소개를 좀 더 해보자. 그는 1963년생, 미국 오리건주 시골 벌목 노동자 마을에서 백인 중산층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지정성별로는 여성이지만 자신이 소녀라는 걸 확신할 수 없는 젠더 퀴어였고, 선천적 뇌병변 장애인으로 어려서부터 지진아, 불구, 원숭이 같은 조롱과 비난을 들으며 자랐다. 그는 아주...
문탁
2023.12.31 | 조회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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