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 블루스> (6회) - 고생은 나의 운명 : 간병과 사주팔자

문탁
2020-10-10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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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이고, 내 팔자야....

 

동영상은 효과가 컸다. 섬망으로 인한 어머니의 욕과 매를 마치 액받이 무녀처럼 고스란히 받아 내고 있는 나의 모습을 영상으로 확인한 후, 동생 한 명은 밤새 울었다고 했고 다른 한 명은 새벽까지 손발을 덜덜 떨었다고 했다. 근처에 사는 남동생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밤늦게까지 스탠바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하룻밤이 지나자 모든 상황은 급변했다. 어머니는 전날 밤 일을, 사건 전후의 맥락은 상실한 채 어떤 장면들만 스냅사진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자 어제 밤의 “아비 잡아먹은 년”은 오늘 아침엔 “세상에 불쌍한 년”이 되어 버렸다. 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미안하다”며 울었고, 집에 오는 사람 모두에게 “내가 000를 때렸는데 말이야..”는 말부터 먼저 했고, 아무나 붙들고 나에게 밥을 차려주라고 채근을 해댔다. 얼마나 나를 챙기는지 이번에 나는 어머니에게 공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고착된 감정을 재생산시키지 않기 위해서 어머니를 슬슬 피해 다녀야 했다.

 

어쨌든 그 일을 계기로 간병이 무엇까지를 감당해야 하는 것인지를 실감한 동생들은 비로소 ‘말’이 아니라 ‘액션’을 취하기 시작했다. 남동생은 호캉스라도 다녀오라며 당장이라도 호텔방을 끊어줄 기세였고 여동생들은 나의 휴가에 대비해 자신들이 담당할 간병 스케줄을 짜기 시작했다. 등 떠미는 동생들 덕분에 나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휴가를 떠날 수 있었다. 운 나쁘게도 딱 그 타임에 ‘하이난’이 상륙한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집과 엄마를 잠시라도 떠날 수만 있다면 태풍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강원도 바다가 보이는 숙소에서 3박4일 처박혀 세상과 연을 끊고 먹고 자고 할 거야. 아무하고도 아무 말도 안 할거야. 가져가는 소설책 5권만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읽다가 올 거야. 동생들아, 3박4일 엄마를 부탁해!!

 

그런데 안심은 12시간을 넘지 못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카톡 방해금지 시간대를 24시간 하루종일로 맞춰놓고 실컷 자다가 일어난 저녁 8시쯤, 잠시 핸폰을 보니 카톡 126개가 와 있었고 부재중 전화도 열통이나 걸려와 있었다.

 

"언니 전화 좀 받아. 엄마가 언니 찾느라 난리도 아냐."

"오빠, 빨리 엄마한테 좀 가봐"

"아, 작전을 잘못 짰나봐"

"엄마가 간병인한테 고래고래 소리 질러, 아줌마 당장 그만 둘 것 같아.“

 

깊은 빡침!! 어떻게 24시간이 아니라 12시간도 못 버티고 나에게 톡을 보낼까? 모질게 답을 했다. ”너네가 알아서 해. 어떻게 3박4일도 커버 못하니? 너네 모두 엄마한테 가서 3박4일 숙식하면 되잖아?....” 하지만 마음은 울렁울렁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결국 엄마한테 전화해서 엄마의 흥분을 일단 가라앉히고 그 다음 날부터 하루에 세 번씩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나 죽은 다음에 오라”는 애먼 말을 들으면서 휴가를 보냈다.

 

“간병이란 몸은 떨어져 있어도 ... 일할 때도 쉴 때도 잠시도 내려놓을 수 없는 무거운 짐 같은 것” (우에노 치즈코, 『누구나 혼자인 시대의 죽음 : 홀로 죽어도 외롭지 않다』)이라더니, 휴가기간 내내 나는 그 짐을 진 채 바다를 쳐다보았고, 그 짐을 진 채 소설책을 읽었고, 그 짐을 진 채 혼자 자다가 돌아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 집으로 돌아와 겪어내야 할, 불을 보듯 뻔한 일을 떠올리며 깊은 한숨과 함께 저절로 이런 소리가 나왔다. “아이고, 내 팔자야~~”

 

 

 

 

 

 

 

2. 팔자공부가 필요해

 

“살과 뼈를 갈아 넣어도 결코 완결되지 않는 돌보는 일의 고통”(『세벽 세 시의 몸들에게』, 봄날의 책, p16)을 감당하고 있는 나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는 어떻게 어머니를 돌보면서 동시에 나를 돌볼 수 있을까?

 

자기연민? 최근 들어 내가 나를 좀 많이 애틋해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쪽은 전혀 내 취향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회적 인정? 돌봄노동이 하찮게(사적으로 혹은 성차별적으로) 취급되는 것도 사실이고 마땅히 더 많은 사회적 관심을 받아야 하는 것도 맞는 이야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봄의 사회적 배치를 바꾸는 것이 현재 나의 과제는 아니다. 나는, 아직까지는 ‘돌봄노동자 운동’을 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실제 내 친구나 친지들 모두는 나의 돌봄 생활에 대해 “얼마나 힘드니?”- “하지만 대단하다!”로 요약되는 위로와 칭송을 보낸다. 그러나 ‘동천동 효녀’라거나 ‘엄마의 믿음직한 큰 딸’ 같은 호명들은 발화하는 사람의 진심과는 다르게 공허하거나 심지어는 반동적일 수 있다. 새로운 언어의 길을 봉쇄하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나한테 필요한 것은 자기연민이나 사회적 인정이 아니라 이 시간들이 왜 나에게 도래했는지, 이 시간들을 어떻게 견뎌내야 하는지 등에 대해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 그리고 엄마를 돌보는 만큼 나를 돌볼 수 있는 실제적 기술이다. 하여 궁시렁궁시렁 주절주절 이런 간병블루스도 쓰고 있고 매일 매일 무릎을 혹사시키면서 걷기도 한다. 그러던 중 양생프로젝트에서 다시 공부하게 된 사주명리학이 최근의 간병지옥을 통과하고 있는 나에게 새로운 통찰을 제공했다.

 

확실히 공부에도 시절인연이 있다. 20대 때는 사회과학(만)이 공부라고 생각했었다. 앗, 역사학도 중요했다. (이미 여기저기서 이야기한 바 있었지만) ‘나 때’의 대학생이라 함은 이영희샘의 『전환시대의 논리』와 강만길샘의 『분단시대의 역사인식』을 읽으면서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한국근대사의 질곡에 대해 눈을 뜬 사람을 일컬었다. 여기에 반드시 추가되어야 할 것이 며칠 전 돌아가신 이이효재 선생님의 『여성해방의 이론과 실제』 이다. 역사와 사회, 그리고 젠더. 이 세 가지 키워드가 20대 공부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그 때 나는 혁명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90년대에 들어서 여러 가지 국내외 정세도 달라지고 지식인사회의 문제의식도 달라지고 결혼과 출산 등으로 내 상황도 달라졌을 때, 내가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은 프랑스 철학이었고 나를 다시 구원해준 공부도 들뢰즈나 푸코 같은 소위 ‘포스트’ 담론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공부가 너무나 재미가 있어 지식인으로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었다.

 

그러다가 지식인 공동체 안에서조차 앎과 삶이 일치하기가 정말 어렵구나, 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면서 우연히 동양고전을 만나서 또 그 세계에서 한동안 노닐었다. 나는 다시 전향했고 군자가 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이런저런 공부를 했다면 이제쯤 혁명가+지식인+군자의 혁혁한 인물이 되어 있어야 할텐데 꼬라지가 그게 뭐냐고 나를 너무 나무라지는 말길 바란다. 돌이켜보니 공부는 늘 방편이라 우연처럼 마주친 어떤 공부가 어떤 한 시기를 살아 내게 하고, 또 다시 벼락처럼 꽂힌 다른 공부가 생의 어떤 문턱을 넘어가게 할 뿐인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10년 만에 다시 만난 사주명리를 통해 10년 전과 다른 감응을 받고 있을 뿐이다. “아이고 내 팔자야...”라는 정념을 “오호, 이게 내 팔자구나”라는 해석으로 바꿀 수 있는!

 

 

 

3. 정화(丁火), 예의와 배려의 아이콘!!

 

팔자(八字)는 사주팔자(四柱八字)의 줄인 말이다. 사주팔자란 한 인간의 존재적 특이성을 음양 오행이라는 앎의 체계 속에서 포착하여 그 사람이 출생한 연월일시(年月日時)의 간지(干支) 여덟 글자로 변환시킨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사주팔자란 사주(四柱), 즉 네 개의 기둥(연월일시)에 천간(天干) 네 칸, 지지(地支) 네 칸, 이렇게 여덟 칸 안에 팔자(八字)를 적어 넣은 존재의 매트릭스이다. 그리고 이런 사주팔자를 탐구하는 학문을 명리학(命理學)이라고 한다. 서양에서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같은 비극 서사를 통해 운명을 탐구했다면 동양에서는 주역이나 명리학 같은 담론을 통해 우주의 이치나 인간의 운명을 탐색해왔던 것이다.

 

어쨌든 나의 운명탐구를 위해 사주팔자 여덟글자의 배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요즘엔 각종 무료 만세력 앱이 보급되어 있어 적당한 곳을 찾아 자신의 생년월일과 태어난 곳을 입력하면 아예 이렇게 오행의 색깔까지 구별하여 여덟 글자가 짠하고 나타난다.)

 

 

 

 

 

 

자, 여기서 첫 번째 찾아야 할 것은 존재의 축, ‘본캐’다. 사주팔자 여덟 글자 중에서도 어떤 사람의 ‘본캐’를 결정하는 것은 태어난 날(日)의 하늘의 기운(天干)을 나타내는 일간(日干)의 자리이다. 나는 그 일간이 정(丁)이고 정(丁)은 병(丙)과 더불어 오행 중 화(火)에 배속된다. 하여 나는 목,화,토,금,수 오행 중 불의 인간, 되시겠다. 물론 불도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양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태양 혹은 횃불같이 이글거리는 불도 있고 음의 기운을 머금은 달 혹은 촛불처럼 살랑거리는 불도 있다. 나의 일간인 정화(丁火)는 이 중 횃불이 아니라 촛불에 해당하는 불이고 이 불의 기호는 “예와 배려의 아이콘”(안도균, 『운명의 해석, 사주명리』, 북드라망, p154)이다.

 

 

     “‘병정’(丙丁)은 화(火)다. 역시 병이 양이고, 정이 음이다. 병화는 태양의 이글거림을, 정화는 촛불의 그윽함을 떠올리면 된다. 자신을 태워 주변을 밝혀주니까 예의와 배려의 기술이 뛰어나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형식과 외부(폼)을 밝히다 정작 자기 내부는 탁해질 수도 있다. 병화는 엄청 센 불이라 열정이 지나쳐 못 말리는 수준이 되기 십상이다...그에 비하면 정화는 아주 착하다. 조용히 타오르면서 꼭 필요한 열기와 빛을 전파하는 불이기 때문이다. 열 개의 기운 가운데 정화가 가장 타인에 대한 봉사와 배려의 기술이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그래서인가. 우리 연구실에는 정화들이 많다. 감이당의 주술사 장금이가 그렇고, ‘문탁네트워크’를 이끌고 있는 문탁여사가 그런 경우이다.”(고미숙,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북드라망, p76)

 

 

그 다음 봐야 할 것이 여덟 개의 글자의 오행적 특징이다. 목,화 같은 시작/발산하는 기운이 강한가? 수,금 같은 갈무리/수렴하는 기운이 강한가? 고로 양의 기운이 강한가? 음의 기운이 강한가를 따져봐야 한다. 이것은 단순하게는 오행의 개수로 따질 수도 있지만 각각이 놓여있는 자리의 가중치 값이 있어서 점수로 표현되기도 한다. 나는 오행 중 목(木)이 2개, 화(火)가 1개, 토(土)가 2개, 금(金)이 3개이고 수(水)는 없다. 기계적으로 보면 목, 화 합쳐서 3개, 수, 금 합쳐서 3개이기 때문에 시작하는 기운과 마무리 하는 기운이 비교적 균형 있기 분포되어 있는 편이다. (가중치까지 고려해서 점수로 환산해도 비슷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여덟 글자는 간지(干支)자체의 음양구분에 따르면(주1 참고) 모두 양이 아니라 음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정화가 음화인 것처럼, 내가 가지고 있는 묘목도 신금도 축토도 모두 음목, 음금, 음토이다. 한마디로 보기 드문 음팔사주(陰八四柱)이다! 그래서 사실 나의 본캐는 ‘쎈언니’와는 전혀 거리가 먼, “아주 착하”고 누군가를 배려하고 포용하고 돌봐주는 게 더 어울리는, 한마디로 본투비 무수리이다.

 

이런 나의 '본캐'를 가장 잘 간파하고 있는 사람은 고미숙샘이다. 그녀는 종종 나에게 “제발, 그 마더 테레사 같이 좀 굴지 마”라고 구박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내 주변의 대부분은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심지어 비웃는다.^^ 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쎈언니’에 가깝지 ‘츤데레’에 가까운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그것은 나의 ‘부캐’가 신금(辛金)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팔자 중 가장 많은 게(8개 중 3개) 신금인데, 그것은 십간(十干) 중에서 가장 음기가 강한 기운으로 날카로운 칼에 해당한다. 단번에 무엇이든 자를 수 있는 칼, 단칼! 내가 일을 할 때 디테일에서나 갈무리에서나 매번 휘두르는 매서운 칼, 단칼!! 바로 나의 ‘부캐’인 것이다.

 

                                                                  

                                                                                    나의 본캐 마더테리사                                                    나의 부캐 쎈언니

 

 

 

4. 고생은 내 운명!!

 

내가 매우 신약(身弱)한 사주라는 것은 십년 전 사주명리를 처음 공부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신약(身弱)함이 싫지 않았다. 자의식이 필수적으로 요청되고 (너 자신을 찾아!) 욕망이 무한 긍정되는 세상(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에서 자의식도 별로 없고 욕망도 거의 없는 팔자로 태어났다는 게 오히려 엄청난 행운처럼 느껴졌다. ‘의필고아(意必固我)’(의도, 기필함, 고집, 아집)를 끊는 것은 공자 정도의 성인이나 할 수 있는 것이어서(주2 참고) 남들은 평생 죽을 힘을 다해 공부해야 겨우 도달할까 말까 하는 경지인데 나는 타고나길 그게(의필고아) 별로 없다니 이 정도면 전생에 엄청난 공덕을 쌓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보니 그 신약함이 나에게 꼭 길(吉)한 것만은 아니라는 ‘삘’이 확~~ 왔다. 내가 처해있는 상황이 달라졌고 내 운명에 대한 질문도 달라졌기 때문일텐데, 지금 나에게 새롭게 보이는 것은 신약한 사주를 더 신약하게 만드는 운명의 ‘변수’, 즉 합충(合沖)이다.

 

아시다시피 동양의 음양오행론은 관계론이기 때문에 (음과 양은 이분법적인 관계가 아니라 대대적(對待的)인 관계이다) 사주에서도 오행의 개수가 아니라 일간의 오행을 중심으로 이웃 자리의 오행들과 맺는 관계의 성질을 잘 따져봐야 한다. 다시 말해 오행의 상생, 상극 관계를 봐야 하고 합충의 관계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 우선, 상생, 상극의 흐름을 보자.(주3 참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내 팔자에는 신약한 촛불인 나를 극하는=억누르는 자리(水)가 비어있다. 전문용어로 무관사주(無官四柱)! 오히려 나는 내가 극해야=다스려야 하는 성질인 금들이 우글우글하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상극관계에 역전이 일어나 (이걸 중급사주명리 전문용어로 역극이라고 한다. ㅋㅋ) 내가 그것들을 다스리는 게 아니라 그것들이 나를 들쑤신다. 한마디로 불이 쇠를 녹이는 게 아니라 칼들이 촛불을 끄는 형국이랄까.

 

 

 

 

게다가 합충(合沖)을 따져보니 나의 천간에서는 그나마 외로이 버티고 있는 일간인 정화가 바로 옆의 신금을 만나 충(沖)을 일으킨다(丁辛沖). 그리고 연주의 천간과 월주의 천간에 나란히 놓여있는 두 개의 신금이 쉴틈도 없이 서로 쨍, 쨍 부딪히면서 충돌한다. 그러니까 나는 천간의 배치로만 보면 모든 것이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즉 타고나길 삶의 변수가 많은, 크고 작은 사건/사고를 만나고 그만큼 감정의 소용돌이를 많이 겪게 되는 팔자가 바로 내 팔자이다.

 

 

 

이 그림은 함께 사주명리를 공부한 초희가 그려준 것이다.

 

 

 

 

 

그런데 지지의 배치도 만만치 않다. 토끼(卯木) 두 마리, 소(丑土) 두 마리가 떡 하니 버티고 있다. 토끼(卯木)의 기호는 분주함, 탈중심, 유연함 등이다. 하지만 움직임에 비해 “생각보다 실속이 크지 않은 편”(안도균, p216)이다. 소(丑土)는 아시다시피 노동의 아이콘이다. 성실함과 우직함. 대의명분. 그게 축토의 성질이다.

 

   “토끼도 쥐처럼 번식력이 왕성하다..묘목은..창조적인 생각을 일에 반영하며, 그 재능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거기에다..인정이 많고 온순해서 사회적으로 더 활발하다...묘목은 모든 일을 분주하게 시작하고 풍성하게 여는데, 그것을 혼자하기보다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한다.” (안도균, p216)

 

   “소는 우직하고 성실하다...오죽하면 소띠(연지의 축토)들은 평생 일복이 넘쳐서 고생한다는 말이 있을까. 그야말로 소는 노동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축토에게는 대의명분이 중요하다. 물론 그것은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겪고 스스로 인정한 명분이다...공공의 이익과 평등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생각한다. 축토는 이 가치가 삶의 영역 안에서 실현되기를 바라며 실제로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크고 작은 활동들을 하는 경우다 많다.” (안도균, p208)

 

 

난 최근 지인들에게 “이제야, 난 나의 정체성을 파악한 것 같아”라는 소리를 자주 하곤 했다. 그러면서 “나의 정체성은 노동자(勞動者)야!!, 노동해방의 그 노동자,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담지하는 그 노동자 말고 진짜 죽도록 일만 하는 노동자, 그 노동자가 나인 것 같아”라고 말을 건넸다. 듣는 사람들은 농담 반 진담 반 치부했지만 나의 속내는 진심이었다. 어떤 몸부림을 쳐봐도 공동체에서 해야 할 일이 줄지 않고 거기에 “이러다간 앞치마와 한 몸이 될지도 몰라”라고 느낄 정도로 가사노동이 날로 증가하고 간병과 관련된 관리노동(간병인 관리, 병원 스케줄 조절, 각종 간병용품 주문, 형제들간의 소통)도 늘어나기만 하는데 어떻게 내가 나를 노동자라는 키워드 말고 다른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번에 사주명리를 공부하면서 그것의 우주적 근거^^를 알게 되었다. 나는 원래 신약한 작은 촛불인데 날카로운 칼들로 둘러싸여 그 살바람으로 늘 꺼질 듯 말 듯 하는 위태위태한 상황에 놓인다. 그렇게 천간에는 자기 한 몸 돌보기도 힘들어 (지지를) 주관할 역량이 없는데도 지지(현장)에서는 끊임없이 해야 할 일이 생기니 이거야말로 ‘쌩고생’의 사주 아닌가? 육친(이것도 전문용어인데 몰라도 상관없다)으로 보더라도 식상(食傷)의 축토와 재성(財星)의 신금은 너무나 죽이 맞는 관계여서 밀어주고 끌어주고 아주 일복이 우글거리고 있다.

 

그래 맞다, 내 운명은 쌩고생이고, 쌩고생은 나의 운명이다!!

 

 

5. 새로운 시절인연이 온다

 

그래서일까? 겪어야 할 모든 것은 겪을 수밖에 없다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그 모든 것을 두 배로 겪어낸 것 같다. 비명횡사한 아버지의 죽음도 그랬고, 징역도 곱징역을 살았고, 육아도 곱육아 (큰 아이가 많이 아팠다)를 해내야했고, 남편과의 인연도 결국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 나는 묘유충(卯酉沖)의 시절을 통과하고 있는 중인지라 더 고달파졌다. 어머니와 함께 살게 된 것도 쉽지 않은 간병생활을 이어가게 된 것도 이 시절인연 듯하다. 다행히 나의 본캐와 같은 정화(丁火) 한 개가 유금(酉金)과 함께 시절인연으로 들어와있어 그나마 몸이 크게 상하지 않고 버텨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행히 내년에는 대운이 바뀐다. 나를 도와주는 목 기운을 흔들었던 유금(酉金)이 사라진다. 그렇게되면 목들이 나를 온전히 도와주면서, 다가오는 것들을 피할 수는 없더라도 더 잘 감당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다시 말해 인성(印星)의 힘을 제대로 쓰면서 상생의 순환을 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인성이란 “나를 낳는 기운으로 존재의 근원이자 에너지의 원천이다” 그러니 생물학적으로는 어머니가 인성이다. 하지만 오행의 상생적인 흐름으로 말하자면 “인성은 계속해서 새로운 존재를 낳는 모태의 자리”이지만 “어머니는 더 이상 나를 낳을 수 없으니, 이제 다른 무엇인가가 나를 재탄생시켜야 한다. 그 모태가 인식론적 전환이고, 방법론은 공부가 된다. 그래서 인성은 공부의 자리이기도 하다” (안도균, p308)

 

그렇다면 어머니이기도 하고 공부이기도 하는 인성의 에너지를 쓴다는 것은 나에게 어머니를 공부로 삼게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것은 『세벽 세 시의 몸들에게』의 저자들 말대로 “‘아프고 늙고 의존하는 몸으로 사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의미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경험을 모으고, 그 경험을 지식으로 만들어 유통시키고, 상상력도 최대한 펼쳐야” 하는 일(p24), 즉 늙음과 죽음에 대한 담론생산을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럴듯한 담론생산을 하지 못해도 나에게 어머니=공부는 삶과 죽음에 대한 통절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일 수도 있다. 기꺼이 그렇게 되길 바란다.

 

더구나 나는 몇 년 전부터 <길드다>나 <인문약방>에 사장으로 셀프 취임하여 나에게 부족한 관성(官星)을 보충하고 있는 중이다. 다시 말해 조직에 책임을 떠넘기고 직원들에게 일을 시키면서 나의 일복을 분배하고 있다. 전문용어로 용신(用神)(주4 참고)을 쓰고 있는 중이랄까^^ 게다가 내년부터 시작되는 무술(戊戌)대운으로 나는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된다. 앞으로 10년간 황무지 같은 대지가 펼쳐지는데 황무지라고 함은 아직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니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기다린다는 뜻이고 씨 뿌리는 심정으로 아주 작은 뭔가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 문탁네트워크의 상황을 보면 (우리는 아주 새로운 문탁을 준비 중이다) 그런 일들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 모든 것은 변한다. 이번에 다시 공부하게 된 사주명리는 나에게 나의 운명 중 그동안 보지 못했던/않았던 것에 주목하게 만들었고 나의 삶을 다시 해석하도록 했다. 아마 10년 후에 사주명리학을 다시 공부하면 그 때는 전혀 다르게 내 삶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사주명리는 단순히 결과론적인 담론도 아니고 (사주명리를 깔대기로 만들면 안된다.) 게으른 자의 손 쉬운 대응책도 아니다. (수가 부족하면 검은 색 옷을 입는다, 따위가 아니다) 사주명리는 다른 공부가 그러하듯 자기 삶을 돌보는 유용한 기술 중 하나이다. 나는 이번에 그 기술을 써봤고 효과는 좋은 편이었다. 다른 분들도 이 기술 한번 써보시길! 

 

 

 

 

피에쑤 : 최근 둥글레가 나에게 부족한 오행인 화, 목을 보충하라고 요것을 선물했다. 아주 맘에 든다. 둥글레 땡큐^^

 

 

 

 

 


주석

1)간지를 음양으로 구분하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간지 자체를 음양으로 구분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양목이 있으면 음목이 있다. 양목은 갑(甲)과 인(寅)이고, 음목은 을(乙)과 묘(卯)이다. 이런 식으로 음양을 구분했을 때, 양의 천간은 갑(甲),병(丙),무(戊),경(庚),임(壬)이고, 인(寅),진(辰),사(巳),신(申),술(戌),해(亥)는 양의 지지이다. 을(乙),정(丁),기(己),신(辛),계(癸)는 음의 천간, 자(子),축(丑),묘(卯),오(午),미(未),유(酉)는 음의 지지다” 그리고 간지를 음양으로 구분하는 두 번재 방법은 간지를 오행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목,화는 양으로, 금,수는 음으로 치게 된다. (안도균, 『운명의 해석, 사주명리』, p92)

2)“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 (“공자께서는 네 가지, 즉 의도, 기필함, 고집, 아집이 없으셨다” /논어, 자한 7편)

3)오행의 상생 관계는 물(水)이 나무(木)를 살리고, 나무(木)가 불(火)을 살리고, 불(火)이 흙(土)을 살리고, 흙(土)은 쇠(金)를 살리고, 쇠(金)는 물(水)을 살리는, 그런 관계를 말한다. 반대로 오행의 상극관계란 물(水)은 불(火)를 극하고 (물이 불을 끈다고 생각하면 훨씬 이해하기 쉽다), 불(火)은 쇠(金)을 극하고 (금속은 불 속에서 녹지 않는가), 쇠(金)는 나무(木)를 극하고, 나무(木)는 흙(土)을 극하고, 흙(土)은 물(水)을 극하는 관계를 말한다.

 

4)“용신은 사주명리학의 하이라이트다. 용신이란 내 사주의 태과불급을 순환시킬 수 있는 방편을 말한다. ”(고미숙, p121)

 

댓글 13
  • 2020-10-10 16:27

    묘술합화로 화가 생기네요!
    새롭게 벌인 일이 공부와 만나 자신을 잘 세우게 될 것 같기도... ^^

  • 2020-10-10 19:10

    신약을 저렇게 해석할수도 있군요!
    신약파들에게 한줄기 빛이 되는 신박한 해석!~~~^^

    • 2020-10-11 10:54

      그러게요 신약함이 자의식 없음과 연결될 수 있다니..ㅋㅋ
      이제부터 "나 많이 신약해서 내가 별로 없어..ㅠ"하고 말하지 말고
      "내 기운이 거의 없어서 자의식 쎄지 않아^^"라고 말해야겠네요!

  • 2020-10-10 20:05

    아직 오행을 익히는 데다 육친은 여전히 어려운 저로서는 충과 합까지.. 갈길이 머네요^^
    저의 여덟개의 키워드를 다시 펼쳐봐야겠군요^^
    샘의 대운이 어떤 시절 인연을 만들지 궁금궁금^^

  • 2020-10-10 22:39

    여기 촛불 하나 더 있습니다~ 언제든 필요하시면ㅎㅎ
    레드, 블루 기억하겠습니다.^^

  • 2020-10-11 11:54

    저도 레드와 블루 가운데 고민해볼게요^^
    절대 쎈 언니 아닌 문탁샘!!

  • 2020-10-11 12:53

    본캐와 부캐를 넘나드는 문탁샘~
    새로운 시절인연에는 어떤 캐릭터를 만들어내실지 기대해봅니다~~

  • 2020-10-12 10:54

    재밌게 읽었어요! 사주 명리로 본캐와 부캐를 설명해보이시다니, 신박한대요. 트렌디하고요! ㅎㅎㅎㅎ

  • 2020-10-12 13:27

    초반에 샘 글을 보고... 심장이 철렁했어요.
    간병 블루스가 아니라 간병 스릴러 같아서.... ^^

    끝이 보이지 않는 간병, 돌봄의 시간 속에서 다시 뭔가를 찾아 건져내시는군요.
    내년에 바뀌는 대운이 선생님을 새로운 공부의 장으로, 그래서 스스로를 살피고 생할 수 있는 기운 속으로 안내하기를 바래요. 진심으로.
    경험을 널리 알려주셔서. 땡큐~ !

  • 2020-10-14 13:47

    “아이고 내 팔자야...”라는 정념을 “오호, 이게 내 팔자구나”
    발화하는 사람의 진심과는 다르게 공허하거나 심지어는 반동적일 수 있다. 새로운 언어의 길을 봉쇄하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ㅎㅎ저도 예전에 시어머니를 모실 때 누가 제게 와서 "복 받을겨~" 하면 " 그 복 니가 받고 니가 할래?"
    이 말이 목구멍 까지 올라 왔었죠. 그리곤 침묵으로 맞서기도 하고ㅡ.
    그러다 어떤공부를 하다보니 " 네 감사합니다~"를 하게 되었어요.^^

  • 2020-10-16 11:18

    정묘일주 공통
    묘묘병존 월일지 공통
    달랑 일간 정화 하나 신약 공통
    버뜨
    문탁샘 트리플 신금으로 재다
    저는 경금 달랑 1개가 고립인데
    관성 수가 3개인데다 통근

    재다신약 문탁샘
    관다신약 저

    죄송합니다^^
    문탁샘 누드글쓰기가 넘 재밌어서 댓글 단다는게
    사주만 깠네요^^

    아, 타인의 누드글쓰기의 욕망을 불러오는
    넘 재밌는 글였습니다~~~

    *비밀메모가 필터링되었습니다

  • 2020-10-24 19:39

    글 잘봤습니다~ 힘내세요!

  • 2020-10-26 01:51

    사주 명리가 뭔지 잘 모르는데 재미있게 글이 읽혀요~ 역쉬~! ㅎㅎㅎㅎㅎㅎ
    사주 명리를 공부하며 나의 육아 돌봄에도 뭔가 숨통이 트였으면 좋겠다.. 하는 작은 바램을 가져봅니다... (너무 정신없는 하루들의 연속ㅜ)

문탁의 간병블루스
프롤로그   아침에 눈을 떴는데 집안이 고요했다. 아주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커피를 내렸고 사과를 깎았다. 엄마가 없다. 엄마가 없으니 조용하다. 엄마가 없어서 평화가 왔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훌쩍거렸고 사과를 우물거리면서 울었다. 결국 그렇게 병원으로 쫓겨 간 엄마가 불쌍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텅 빈 집에서 평화를 느끼는 내 맘이 너무 징그러워서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주방 바닥에 주저앉아 삼십 분간 대성통곡을 했다.   그랬다. 엄마의 션트 수술 후 지금까지 약 3개월간은 내가 엄마랑 같이 산 지난 6년 중 특히 힘든 시간이었고, 최근 몇 주는 그 3개월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수술 이후 생긴 섬망이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지기는커녕 빈도나 정도 면에서 점점 심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동생들에게 계속 SOS를 쳤고, 급기야 얼마 전 이러다가 내가 죽을 것 같으니 누구든 엄마를 모셔 가라고 카톡을 날렸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동생들은 긴급회동을 했고 각자 일주일에 두 번씩, 엄마가 혼미해지는 오후 4시부터 저녁 8시까지 하루에 4시간 정도 엄마를 돌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최근 한 달 가량 우리 사남매는 간병 총동원 체제를 구축해서 엄마를 함께 돌봤다. 그런데도 사태가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며칠 전,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욕을 해대고, 차려놓은 밥상을 바닥에 패대기를 치는 엄마를 도저히 어찌 달랠 도리가 없게 되자 난 오후 2시쯤 119 구급차를 불렀다.      ...
프롤로그   아침에 눈을 떴는데 집안이 고요했다. 아주 오랜만에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커피를 내렸고 사과를 깎았다. 엄마가 없다. 엄마가 없으니 조용하다. 엄마가 없어서 평화가 왔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훌쩍거렸고 사과를 우물거리면서 울었다. 결국 그렇게 병원으로 쫓겨 간 엄마가 불쌍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텅 빈 집에서 평화를 느끼는 내 맘이 너무 징그러워서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주방 바닥에 주저앉아 삼십 분간 대성통곡을 했다.   그랬다. 엄마의 션트 수술 후 지금까지 약 3개월간은 내가 엄마랑 같이 산 지난 6년 중 특히 힘든 시간이었고, 최근 몇 주는 그 3개월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수술 이후 생긴 섬망이 시간이 지나면서 나아지기는커녕 빈도나 정도 면에서 점점 심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동생들에게 계속 SOS를 쳤고, 급기야 얼마 전 이러다가 내가 죽을 것 같으니 누구든 엄마를 모셔 가라고 카톡을 날렸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동생들은 긴급회동을 했고 각자 일주일에 두 번씩, 엄마가 혼미해지는 오후 4시부터 저녁 8시까지 하루에 4시간 정도 엄마를 돌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최근 한 달 가량 우리 사남매는 간병 총동원 체제를 구축해서 엄마를 함께 돌봤다. 그런데도 사태가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며칠 전,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욕을 해대고, 차려놓은 밥상을 바닥에 패대기를 치는 엄마를 도저히 어찌 달랠 도리가 없게 되자 난 오후 2시쯤 119 구급차를 불렀다.      ...
문탁
2020.12.13 | 조회 2135
문탁의 간병블루스
1. 아이고, 내 팔자야....   동영상은 효과가 컸다. 섬망으로 인한 어머니의 욕과 매를 마치 액받이 무녀처럼 고스란히 받아 내고 있는 나의 모습을 영상으로 확인한 후, 동생 한 명은 밤새 울었다고 했고 다른 한 명은 새벽까지 손발을 덜덜 떨었다고 했다. 근처에 사는 남동생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밤늦게까지 스탠바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하룻밤이 지나자 모든 상황은 급변했다. 어머니는 전날 밤 일을, 사건 전후의 맥락은 상실한 채 어떤 장면들만 스냅사진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자 어제 밤의 “아비 잡아먹은 년”은 오늘 아침엔 “세상에 불쌍한 년”이 되어 버렸다. 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미안하다”며 울었고, 집에 오는 사람 모두에게 “내가 000를 때렸는데 말이야..”는 말부터 먼저 했고, 아무나 붙들고 나에게 밥을 차려주라고 채근을 해댔다. 얼마나 나를 챙기는지 이번에 나는 어머니에게 공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고착된 감정을 재생산시키지 않기 위해서 어머니를 슬슬 피해 다녀야 했다.   어쨌든 그 일을 계기로 간병이 무엇까지를 감당해야 하는 것인지를 실감한 동생들은 비로소 ‘말’이 아니라 ‘액션’을 취하기 시작했다. 남동생은 호캉스라도 다녀오라며 당장이라도 호텔방을 끊어줄 기세였고 여동생들은 나의 휴가에 대비해 자신들이 담당할 간병 스케줄을 짜기 시작했다. 등 떠미는 동생들 덕분에 나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휴가를 떠날 수 있었다. 운 나쁘게도 딱 그 타임에 ‘하이난’이 상륙한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집과 엄마를 잠시라도 떠날 수만 있다면 태풍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강원도 바다가 보이는...
1. 아이고, 내 팔자야....   동영상은 효과가 컸다. 섬망으로 인한 어머니의 욕과 매를 마치 액받이 무녀처럼 고스란히 받아 내고 있는 나의 모습을 영상으로 확인한 후, 동생 한 명은 밤새 울었다고 했고 다른 한 명은 새벽까지 손발을 덜덜 떨었다고 했다. 근처에 사는 남동생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밤늦게까지 스탠바이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하룻밤이 지나자 모든 상황은 급변했다. 어머니는 전날 밤 일을, 사건 전후의 맥락은 상실한 채 어떤 장면들만 스냅사진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자 어제 밤의 “아비 잡아먹은 년”은 오늘 아침엔 “세상에 불쌍한 년”이 되어 버렸다. 어머니는 나를 볼 때마다 “미안하다”며 울었고, 집에 오는 사람 모두에게 “내가 000를 때렸는데 말이야..”는 말부터 먼저 했고, 아무나 붙들고 나에게 밥을 차려주라고 채근을 해댔다. 얼마나 나를 챙기는지 이번에 나는 어머니에게 공격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고착된 감정을 재생산시키지 않기 위해서 어머니를 슬슬 피해 다녀야 했다.   어쨌든 그 일을 계기로 간병이 무엇까지를 감당해야 하는 것인지를 실감한 동생들은 비로소 ‘말’이 아니라 ‘액션’을 취하기 시작했다. 남동생은 호캉스라도 다녀오라며 당장이라도 호텔방을 끊어줄 기세였고 여동생들은 나의 휴가에 대비해 자신들이 담당할 간병 스케줄을 짜기 시작했다. 등 떠미는 동생들 덕분에 나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휴가를 떠날 수 있었다. 운 나쁘게도 딱 그 타임에 ‘하이난’이 상륙한다는 예보가 있었지만 집과 엄마를 잠시라도 떠날 수만 있다면 태풍 따위는 문제도 되지 않았다. 강원도 바다가 보이는...
문탁
2020.10.10 | 조회 1638
문탁의 간병블루스
“그것이 생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니체, 「구제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엄마가 이..상..해   4월 13일 : 벌써 1년이 되었구나   1년 전 오늘, 엄마가 아파트 안에서 쓰러졌다. 지난한 '간병블루스'가 시작되었다.   4월 15일 : 왜 이를 갈지?    간만에 형제 단톡방에 엄마 소식을 전했다.    하나. 엄마가 몇 주 전부터 이를 조금씩 가셨는데 점점 심하게 가셔. 나의 치과주치의와 의논을 해봤는데 정확히는 모르겠다고 하네. 치매를 의심하는 듯. ㅠ    둘. 지난 번에 허리 통증 주사를 맞았는데도 여전히 아프신가봐.. 점점 더 “힘들다, 힘들다” 소리가 늘어나네...    셋. 소화를 잘 못 시키심. 아무래도 운동량은 없는 상태에서 약은 계속 드시니까... 일단 일체의 간식을 중단. 그랬더니 변비가...ㅠㅠ    넷. 그동안은 기저귀사용이 좀 줄었는데 요 며칠 기저귀 사용이 다시 늘고 있어. 다시 말해 변기에 앉기 전에 이미 대소변을 보신다는 거지. 왜 그럴까? 인지문제일까? 기능문제일까?   4월 23일 : “이 가는 건 치의학적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 문제입니다”    <00치과> 원장과 전화 상담을 했다. 의사에 따르면 이를 가는 것은 치의학적 원인이 아니라 심리적 문제라는 게 최근의 연구 결과란다. 치과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를 갈지 않도록 어떤 장치를 끼우는 것인데, 그것은 원인을 제거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익숙해지면 장치를 낀 상태에서도 이를 간다고 한다. 어머니가 정신의학과 치료를 받는다고 하니 그렇다면 그쪽에서 상담을...
“그것이 생이었던가? 좋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니체, 「구제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 엄마가 이..상..해   4월 13일 : 벌써 1년이 되었구나   1년 전 오늘, 엄마가 아파트 안에서 쓰러졌다. 지난한 '간병블루스'가 시작되었다.   4월 15일 : 왜 이를 갈지?    간만에 형제 단톡방에 엄마 소식을 전했다.    하나. 엄마가 몇 주 전부터 이를 조금씩 가셨는데 점점 심하게 가셔. 나의 치과주치의와 의논을 해봤는데 정확히는 모르겠다고 하네. 치매를 의심하는 듯. ㅠ    둘. 지난 번에 허리 통증 주사를 맞았는데도 여전히 아프신가봐.. 점점 더 “힘들다, 힘들다” 소리가 늘어나네...    셋. 소화를 잘 못 시키심. 아무래도 운동량은 없는 상태에서 약은 계속 드시니까... 일단 일체의 간식을 중단. 그랬더니 변비가...ㅠㅠ    넷. 그동안은 기저귀사용이 좀 줄었는데 요 며칠 기저귀 사용이 다시 늘고 있어. 다시 말해 변기에 앉기 전에 이미 대소변을 보신다는 거지. 왜 그럴까? 인지문제일까? 기능문제일까?   4월 23일 : “이 가는 건 치의학적 문제가 아니라 심리적 문제입니다”    <00치과> 원장과 전화 상담을 했다. 의사에 따르면 이를 가는 것은 치의학적 원인이 아니라 심리적 문제라는 게 최근의 연구 결과란다. 치과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이를 갈지 않도록 어떤 장치를 끼우는 것인데, 그것은 원인을 제거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익숙해지면 장치를 낀 상태에서도 이를 간다고 한다. 어머니가 정신의학과 치료를 받는다고 하니 그렇다면 그쪽에서 상담을...
문탁
2020.08.31 | 조회 1215
문탁의 간병블루스
                     문탁       1. 4월엔 주꾸미   “君子務本 本立道生 孝悌也者 其爲仁之本與” (『논어』, 학이) 군자는 근본에 힘을 쓰니, 근본이 서면 도가 생긴다. 효도와 우애는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다. (김수경, 나은영, 이수민 풀어엮음, 『낭송 논어』, 북드라망, 35쪽)     나는 그다지 많이 먹지도 않고 맛있는 걸 즐겨 찾는 편도 아니다. 수련의 결과냐 하면 전혀 그런 건 아니고 사주상 식상(食傷)에 해당하는 토(土)가 고립이기 때문이다. 전문용어로 ‘식상고립’! 쉽게 말해 타고나길 비위가 약하다는 뜻이다. 당연히 편식도 심해, 순대도 안 먹고 족발도 안 먹고 민물생선도 안 먹고 오리고기도 안 먹는다. 외국 나가서도 현지 음식을 거의 못 먹는다. 몇 년 전 친구들과 인도여행을 할 때는 매 끼니 굶다시피 했고, 작년 이탈리아 여행에서는 가져간 포트에 누룽지를 끓여서 연명했다.   뿐만 아니라 서울 중구 을지로에서 태어나서 중학교 때까지 중구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나는 아스팔트 키드답게 “조수초목지명(鳥獸草木之名)”(『논어』, 양화)에 아주 무지하다. 적산가옥이었던 어릴 때 우리 집은 마당도 화단도 꽃도 나무도 없었기 때문에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가장 가까운 학교 화단에 가서 봉숭아와 채송화의 실물을 보여주면서 자연 선행학습을 시킬 정도였다. 과일이든 야채든 그것이 상품이 되어 시장에 나오기 전엔 그것들의 생로병사를 잘 모른다. 어떤 모습으로 싹을 틔우고 어떻게 자라서 언제 수확을 하게 되는지 모른다는 뜻이다. 언젠가 친구들과 강화도의 모 공동체를...
                     문탁       1. 4월엔 주꾸미   “君子務本 本立道生 孝悌也者 其爲仁之本與” (『논어』, 학이) 군자는 근본에 힘을 쓰니, 근본이 서면 도가 생긴다. 효도와 우애는 인을 실천하는 근본이다. (김수경, 나은영, 이수민 풀어엮음, 『낭송 논어』, 북드라망, 35쪽)     나는 그다지 많이 먹지도 않고 맛있는 걸 즐겨 찾는 편도 아니다. 수련의 결과냐 하면 전혀 그런 건 아니고 사주상 식상(食傷)에 해당하는 토(土)가 고립이기 때문이다. 전문용어로 ‘식상고립’! 쉽게 말해 타고나길 비위가 약하다는 뜻이다. 당연히 편식도 심해, 순대도 안 먹고 족발도 안 먹고 민물생선도 안 먹고 오리고기도 안 먹는다. 외국 나가서도 현지 음식을 거의 못 먹는다. 몇 년 전 친구들과 인도여행을 할 때는 매 끼니 굶다시피 했고, 작년 이탈리아 여행에서는 가져간 포트에 누룽지를 끓여서 연명했다.   뿐만 아니라 서울 중구 을지로에서 태어나서 중학교 때까지 중구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나는 아스팔트 키드답게 “조수초목지명(鳥獸草木之名)”(『논어』, 양화)에 아주 무지하다. 적산가옥이었던 어릴 때 우리 집은 마당도 화단도 꽃도 나무도 없었기 때문에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가장 가까운 학교 화단에 가서 봉숭아와 채송화의 실물을 보여주면서 자연 선행학습을 시킬 정도였다. 과일이든 야채든 그것이 상품이 되어 시장에 나오기 전엔 그것들의 생로병사를 잘 모른다. 어떤 모습으로 싹을 틔우고 어떻게 자라서 언제 수확을 하게 되는지 모른다는 뜻이다. 언젠가 친구들과 강화도의 모 공동체를...
관리자
2020.06.09 | 조회 855
문탁의 간병블루스
문탁   1.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   얼마 전이었다. 날이 완연히 따뜻해지자 <인문약방> 등산동아리 친구들의 등산점퍼가 가벼워지고 컬러풀해졌다. 나만 여전히 검정색 겨울패딩 차림. 어, 나도 어딘가 적당한 등산점퍼가 있지 않을까? 옷장을 뒤졌는데 마땅한 것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카디건이거나 야상점퍼를 입고 산행을 하긴 좀 부담스럽다. 어떻게 해야 하지? 등산 몇 번을 위해서 옷을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다 갑자기 어머니 봄 점퍼에 생각이 미쳤고 득달같이 어머니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마침 색깔도 두께도 스타일도 등산용으로 딱 맞춤한 옷을 찾아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찐’분홍 점퍼로 몇 년 전 눈썰미 좋은 며느리가 사다드린 옷이다.   내친김에 나는 어머니 옷들 중에 내가 입을 수 있는 쓸 만한 게 더 있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옷장 안은 수십년 된 빈티지의상들로 가득했다. 소매 끝이 나달나달해졌지만 유난히 아끼시던 붉은 색 체크무늬 겨울 모직 반코트, 여름철 한, 두 번 밖에 입지 않지만 그걸 위해 정성 드려 풀을 먹여 손질해놓던 모시 스리피스, 입으실 때마다 똥배를 한탄하며 다이어트를 다짐하곤 하시던 패션 바지들...지금 당장 그래니 룩으로 재활용해도 손색이 없어 보이는 것들이었다.   물론 신상들도 제법 있었는데 어머니와 함께 사는 나는 그것들의 사연을 대체로 알고 있다. 저 여름 원피스는 막내딸이 사가지고 왔는데 자꾸 나를 주겠다고 하셨던 것이고 (한 마디로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 저 회색 벙거지 모자는 손주 녀석이 할머니 생신선물로 드린 건데 엄청 맘에...
문탁   1. 더이상 어머니는 없다   얼마 전이었다. 날이 완연히 따뜻해지자 <인문약방> 등산동아리 친구들의 등산점퍼가 가벼워지고 컬러풀해졌다. 나만 여전히 검정색 겨울패딩 차림. 어, 나도 어딘가 적당한 등산점퍼가 있지 않을까? 옷장을 뒤졌는데 마땅한 것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카디건이거나 야상점퍼를 입고 산행을 하긴 좀 부담스럽다. 어떻게 해야 하지? 등산 몇 번을 위해서 옷을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다 갑자기 어머니 봄 점퍼에 생각이 미쳤고 득달같이 어머니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마침 색깔도 두께도 스타일도 등산용으로 딱 맞춤한 옷을 찾아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찐’분홍 점퍼로 몇 년 전 눈썰미 좋은 며느리가 사다드린 옷이다.   내친김에 나는 어머니 옷들 중에 내가 입을 수 있는 쓸 만한 게 더 있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옷장 안은 수십년 된 빈티지의상들로 가득했다. 소매 끝이 나달나달해졌지만 유난히 아끼시던 붉은 색 체크무늬 겨울 모직 반코트, 여름철 한, 두 번 밖에 입지 않지만 그걸 위해 정성 드려 풀을 먹여 손질해놓던 모시 스리피스, 입으실 때마다 똥배를 한탄하며 다이어트를 다짐하곤 하시던 패션 바지들...지금 당장 그래니 룩으로 재활용해도 손색이 없어 보이는 것들이었다.   물론 신상들도 제법 있었는데 어머니와 함께 사는 나는 그것들의 사연을 대체로 알고 있다. 저 여름 원피스는 막내딸이 사가지고 왔는데 자꾸 나를 주겠다고 하셨던 것이고 (한 마디로 별로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 저 회색 벙거지 모자는 손주 녀석이 할머니 생신선물로 드린 건데 엄청 맘에...
관리자
2020.04.24 | 조회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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