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회> 오래 함께 일할 수 있을까

문탁
2023-10-10 11:12
339

 

 

 

 

 

남어진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노동자가 아닌 사장이 되다

나에게는 함께 일하는 좋은 동료 직원이 있다. 직원은 작년 봄, 목수 일을 배우고 싶다며 대구에서 밀양까지 나를 찾아왔다. 첫 만남 후에 그는 일이 있으면 불러 달라는 연락을 종종 하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생각보다 돈이 안 된다”, “보기처럼 멋있지 않고, 위험하고 힘든 일이다”, “서울에 한 달 다녀와야 할 일이 있다” 등의 핑계를 대며 함께 일하기를 피했다. 일의 규모는 점점 커지고, 맡은 일들도 많아지는 상황이었지만 누군가를 고용하여 안정적인 고용을 책임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친동생이나, 동생의 친구들을 잠깐씩 알바로 쓰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그를 불렀다. 전시용 가벽을 만드는 작업이 있었는데, ‘그렇게 해 보고 싶다니 하루 같이 해 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여태껏 같이 일해 본 초보자들 중에 가장 이해도 빠르고, 손재주도 좋았다.

나는 책임감 있게 일을 잘 해내는 것이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일 중독자인 나에게 ‘좋은 동료’의 기준은 열심히 하는 것보다 ‘일을 잘 하는 것’이다. 나를 쏙 빼닮은 사람이 나타났다. 눈치가 빠르고, 성실하고, 끈기도 있고, 악도 있고, 게다가 손재주도 좋은 사람이다.

어느덧 그와 함께 일한 지 1년이 되었다. 둘이 아니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해 왔다. 직원이 생긴 뒤 공간 전체를 채우는 가구 작업도 처음 해 보았다. 이런 주문이 들어와도, 이전에는 여력이 부족해 못 할 일이었다.

일이 즐거운 것도 괴로운 것도 나의 책임인 사람이 생겼다. 우리가 조금 더 즐거운 노동을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나는 목공소를 차리기로 결심했다. 동료 직원 덕에 목공소 사장이 되었다.

▲ 50평 목공소에 가득 찬 가구들

혼자서는 옮길 수도 없는 큰 가구들이다.

 

 

사장이 되고 나니 할 일이 많다. 해 본 적이 없는 종류의 일들이라 더욱 헤매는 중이다. 하루 종일 만들기만 할 때는 미처 몰랐는데, 종일 만들기만 하는 것도 즐거운 노동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일용직 일을 주로 했던 지난 몇 년 간의 고단한 하루가 그립기까지 하다. 5시면 퇴근해서 술을 먹거나, 씻고 누워서 졸릴 때까지 핸드폰이나 보며 뒹굴거리던 날이 가끔 그립다.

겨우 2명이 일하는 작은 사업장일 뿐인데도 할 일이 넘쳐난다. 기계를 돌리며 시끄럽게 일하는 중에도 전화 벨이 쉴 새 없이 울린다. 가구를 주문하는 전화, 영수증 출력을 요청하는 전화, 견적서를 요청하는 전화, 발주 넣은 부속품의 제작 치수를 확인하는 전화……. 견적을 내기 위해서 줄자 하나 들고 종일 돌아다니기도 하고, 필요한 자재도 매일 저녁 정리해 주문해야 한다.

이정도야 목수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일을 하면 할수록 늘어나는 돈과 관련된 스트레스는 자려고 눈을 감아도 계속 나를 괴롭힌다. 매월 1일에는 사업용 신용 카드의 카드값이 나간다. 2일에는 월세, 월급, 대출 이자 및 원금이 나간다. 또 12일에는 4대 보험료가 나간다.

 

2명 규모의 아주 영세한 사업장인데도 12일 동안 나가는 돈이 1,000만 원이 훌쩍 넘는다. 분명히 어제 통장에 1,300만 원이 있었는데 이것저것 해결하고 나니 돈이 모자라 여기저기 또 손을 벌린다. 이미 납품한 가구의 수금이 제때 되지 않거나, 견적보다 훨씬 더 비용이 많이 들어가서 내 돈을 써 가며 일을 하게 될 때에는 정말 미칠 지경이다.

 

회사의 꼴이라고는 전혀 갖추지 못한 작은 작업장의 사장 주제에 엄살이 심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혼자 일할 때보다 몸도 마음도 훨씬 더 부침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생에 다시 찾기 힘들 것 같은 손발이 잘 맞는 동료가 있는데도 말이다.

 

다치는 것이 비용으로 생각되기 시작하다

 

나는 오랜 시간동안 사장들을 욕하며 살았다. 재벌이건, 영세 자영업자건 하나같이 노동자를 저임금으로 착취하거나, 위험한 노동으로 내몰거나, 한순간에 해고해 버리더랬다. 어떤 친구는 11개월 하고도 20일 넘게 일하던 일터에서 말 한마디로 잘렸다. 근로 계약서·4대 보험·휴게 공간과 같은,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들은 돈이 더 든다는 이유로 삭제되기 십상이다.

실은 많은 이들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수많은 노동이 (쓰레기 처리, 하수 처리, 배달, 건설 등 위험하고 더러운일들..) 세상을 지탱하는 소중한 근간임에도, 사장들은 보상의 크기로 노동의 가치를 평가하게 만든다. 나는 그리하여 높은 연봉을 받는 이들이 더 중요한 일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들이 너무 싫었다. 노동자의 삶이 뿌리째 흔들리더라도 돈이 된다면 어떤 나쁜 짓이라도 하는 인간들이 사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목공소를 차리자마자 모두들 나를 사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격려와 경고가 함께 담겨 있는 호칭 같았다. 실은 사장이 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나와 동료 직원에게 보다 더 안전한 노동의 조건을 갖추고 싶었다. 위험 요소를 통제하고, 사고를 예방하고, 일용직에게는 꿈과 같은 4대 보험을 마련해 주고 싶었다. 혼자 일하러 다닐 때는 나 자신만 책임지면 되지만, 일을 배우고 싶다고 찾아온 그에게 ‘이건 각자 책임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 때문에 괴로울 때마다 그런 조건들을 버리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난다. 노동자에서 사장이 되는 게 한순간인 세상이다. 그리고 누구나 한순간에 나쁜 사장이 된다. 나도 그렇게 될까 봐 무섭다.

 

 

▲ 우리가 만든 가구

가구의 균형이 잘 맞다고 해서 그 가구를 만드는 제작자의 삶의 균형이 잡힌 것은 아니다.

 

 

목공소에서는 가구를 만들 때 장갑을 착용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지긋지긋할 정도로 장갑 착용과 안전 제일을 강조한다. 그럴 때마다 웃으며 “네~ 잘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지만, 공장에는 사실 한 번만 쓰고 벗어 둔 장갑이 수십 켤레가 뒹굴고 있다.

잠깐 자기변호를 해 보겠다. 거친 통나무에서 말끔한 가구가 되기까지는 마름질, 재단, 조립, 샌딩, 마감 순으로 공정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대부분의 목공 공정에는 감촉이나 결을 손끝으로 느껴야만 하는 섬세함이 필요하기 때문에 장갑을 쓰기란 생각보다 어렵다.

이밖에도 이유가 또 있다. 전기로 돌아가는 톱이나 대패 같은 목공 기계들은 모터 회전을 이용해 엄청난 힘으로 목재를 깎거나 잘라 낸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기계를 처음 본 사람들은 기계의 날물1이 돌아가는 소리만 들어도 위축될 정도이다.

 

장갑을 쓰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이 기계의 회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분당 5,000번이 넘게 돌아가는 톱날에 실밥이 하나라도 말려 들어가는 순간 끔찍한 사고가 일어난다. 자전거 체인에 옷이 말려드는 것과 비슷한 원리이다. 그래서 아무리 바쁘더라도, 전기로 작동하는 기계 사용은 천천히, 정확하게, 장갑 없이 하는 편이다. 매번 기계 앞에 서면 바지춤에 튀어나온 끈을 정리하고, 소매를 제대로 걷고 나서 작동 버튼을 누른다. 다치지 않고 그렇게 일하는 것이 훨씬 빠르기도 하다.

이렇게 조심히 일하지만, 목공소에 피가 안 흐르는 날은 거의 없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외마디 비명이 들린다. 나와 직원은 서로의 욕지거리가 들릴 때마다 작업을 중단하고 고개를 돌려 사고의 경중을 확인한다. 주로 가시에 찔리거나, 수공구에 베이거나, 물건을 들고 걷다가 기계 모서리에 부딪히는 작은 사고들이다.

 

이 중에서도 가시가 박힐 때는 주로 목재의 엇결에 손이 지나갈 때이다. 가시는 바로 뽑지 않으면 더 깊게 들어가 버리기도 하고, 날물에 가볍게 베이는 것보다도 훨씬 우리하게2 아파서 바로 뽑는다. 바늘을 들고 내 손을 후벼 파다가 도저히 가시가 나오지 않을 때는 동료 직원과 함꼐 손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깊게 박히지 않아서 있는 줄도 몰랐던 가시들은 아직도 손 여기저기에 남아 있다.

최근에는 야근 중에 직원이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짜맞춤3 구조의 의자를 만들기 위해 끌질을 하다가 자기 손을 찔렀다. 피가 뚝뚝 흘렀다. 상황을 들어 보니 힘이 들어간 끌질이었을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상처 부위를 볼 새도 없이 바로 병원으로 출발했다.

찍힌 부분을 휴지로 대충 싸매고 있는 그를 태우고 응급실로 향하는데, 찰나에 ‘와 이번에 안 그래도 마감 바쁜데, 완전 조졌네.’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응급실 앞에서 그를 기다리며 담배를 몇 대 피웠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다행히도 인대나 신경은 건드리지 않았지만 5바늘을 꿰맸다.

 

그는 내가 속으로만 했던 그 생각을 느낀 것 같다. 말은 “다치면 쉬어야지. 조심해서 일하자. 아프면 마감을 미루자.”라고 했지만 내 표정과 뉘앙스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눈치 빠른 그도 그런 나를 금세 파악했기 때문에, 다음 날 ‘오른손은 괜찮다’며 평소처럼 일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욕하고 싫어하는 ‘사장 짓’을 나도 똑같이 해 버렸다. 다치는 것을 비용으로 생각하는 나를 보며, 한없이 혐오감을 느꼈다.

내가 누군가의 일용직 노동자로서 고용되어 일하면서 겪었던 수많은 사고와 부상들. 그 순간 어떤 사장도 일을 멈추지 않았던 기억들. 그 날 벌었던 일당을 모조리 응급실에 가져다 주는 서러움. 생긴 지 수 년이 지났는데도 여기 저기 남아 있는 상처들이 결국에는 너도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 나 같은 사장을 만나서, 다친 다음 날에도 일하는 우리 직원

 

1날물(-物): 목공 현장에서 쓰이는 말로, 얇고 날카로운 ‘날’이 있는 여러 가지 절삭 도구를 뜻한다.

2우리하다: 대구 및 일부 경북 지역의 사투리로, '지끈지끈하고 욱신욱신 거리며 찌르듯이 아프다'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3짜맞춤: 철물 피스(나사못)나 목심(나무 못)이 아닌, 목재를 자르고 파내는 형식으로 가공하여 서로 맞물리도록 한 가구.

오래 함께 일할 수 있을까

 

어느날 점심 시간에 식당 TV에서 주 69시간 이야기가 한창일 때, 동료 직원은 나에게 물었다. ‘몇 시간이든 자기가 일하고 싶은 만큼 일하면 되는 거지, 왜 정부가 노동 시간을 제한하는 것이냐’고 말이다. 나는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공장, 야간 노동 같은 예시를 들며 노동 시간이 줄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지만 실은 엄청 찔렸다. 이미 우리가 그만큼, 때로는 그보다 더 일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질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동료 직원은 그러고선 자신의 고민을 털어놨다. 목공소가 힘겨울 때 본인은 이를 함께 감수할 수 있는 식구가 되고 싶은데, 내가 자꾸 그 상황을 회피하거나 거부하고 ‘사장-직원’의 관계로만 정립하려고 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나는 함께 일을 하고 밥을 먹는 식구이기 때문에 어떤 원칙들에 있어선 더더욱 타협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도하지 않은 노동 시간과 적절한 임금, 엄격한 안전 관리 등이다. 그런데 동료 직원은 달랐을 법도 하다. 아주 당연하지만 쉽게 무시되는 원칙들을 지켜 내려 하면서 힘들어하는 나의 모습이, 동료 입장에서는 불편할 수 있다.

그 모습이 우리의 즐거운 노동을 방해한다면, 이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동료 직원과 함께 오래 일하고 싶다. 겨우 2인 규모의 목공소 사장의 입장에서 ‘좋은 노동’이란 무엇일까 고민을 해 본다. 작게 일하고 많이 벌 방법은 없나. 사람은 왜 일할까. 확연한 위계 관계와 일하면서 생기는 스트레스가 동료 직원에게 바로 영향이 가는 상황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 직원와 나의 생계가 흔들리지 않으려면 도대체 얼만큼 일해야 하는가.

 

장사가 잘 되면 해결될지, 넉넉한 재정 상황이 되면 넉넉한 마음을 가지는게 가능할지 잘 모르겠다. 돈과 악착같이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돈이랑은 전혀 상관이 없기도 한 애매모호한 ‘사장-직원’ 또는 ‘동료-동료’, ‘함께 삶을 사는 식구’ 같은 관계들. 하루하루 원칙과 신뢰를 잘 지키며 살아가고 싶다.

가구를 만들면서 만듦새가 좋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매우 뿌듯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신경 써서 만들었을 때만 들을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구 밸런스를 잘 맞추려다가 내 워라밸이 박살나 버리기도 한다. 동료 직원과의 관계도 그런 파국을 맞고 싶지는 않다.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나와 그는 이번 주말에도 더위와 싸우며 먼지를 종일 마신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지난 세월동안 목수일을 하면서 부끄럽지 않은 점이 있다면, ‘돈’보다는 일을 맡긴 이와의 ‘약속’이 내 마음 속에서 항상 더 중요했다는 점이다. 동료 직원과도 그런 약속을 함께 만들고 지켜 내고 싶다. 그러다보면 나의 삶에 균형을 찾는 약속들도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댓글 4
  • 2023-10-10 19:48

    목공소 사장의 존재론! 무겁네요.

  • 2023-10-10 21:30

    와.... 어진씨, 멋집니다~ 일하면서 자신의 일에 치열하게 질문하는 삶, 진짜 멋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 2023-10-14 13:09

    사장님의 고충이 우리하게 전해지네요^^

  • 2023-10-15 23:02

    스스로 끊임없이 현재를 들여다보는 수고로움..
    그 과정이 삶을 짊어지는 근육을 키우는 것 같아요.
    응원하며 박수를 보냅니다.. 잘 읽었습니다~^^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심장병은 응급실 1순위 ​ 두해 전 즈음, 2020년 12월 초 겨울이었다. 11월부터 바깥에서 데크를 만드는 작업을 했다. 손도 얼고 드릴도 어는 추위가 찾아왔지만 마감 날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 날도 종일 열심히 일했다. 겨울에 종일 바깥에서 일하다가 집으로 들어오면 몸이 녹진녹진해지면서 모든 의욕이 다 사라진다.   겨울에 바깥에 오래 나가 있으면 몸이 퉁퉁 붓는데, 부었던 몸이 녹을 때까지, 씻지도 않고 방바닥에 들러붙어 있다가 자기 직전에 어쩔 수 없이 씻었다. 씻고 나오는데 식은땀이 나면서 어질어질하길래 ‘어 몸이 이상하네?’라고 생각하며 물을 마셨다. 물을 마시던 중에 쓰러졌다. 일어나 보니 2ℓ짜리 생수가 거실 바닥에 다 쏟아져 있었다. 내가 정신을 잃었던 것인지, 잤던 것인지 모르겠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빨래 바구니에 들어있는 수건을 가져와 방바닥을 닦고 나니, 그제서야 무서웠다.   “아…… 나 죽을 뻔했네?”   나는 보통 심각하다고 판단되는 외상이 없으면 병원은 쳐다보지도 않고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날은 느낀 적 없던 공포가 찾아왔다. ‘혼자 사는 내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쓰러지다가 재수없게 머리를 박았거나 심장이 멈췄더라면 죽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다음날 동네 병원에 가서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부정맥이 의심된다며 대학 병원에 가보라는 의뢰서를 받았다. 뭘 대학 병원까지 가냐, 하는 생각에 집으로 갔다. 그런데 다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완전 쫄아 버린 나는 결국 응급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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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11.13 | 조회 282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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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탁
2023.10.10 | 조회 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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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9.11 | 조회 355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글쓴이 남어진​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1. 밀양에 작은 목공소를 차렸다.   지난 5년 간은 창고 하나 없이 여기저기 얹혀 살며 가구도 만들고 집도 지었다. 연장은 뿔뿔히 흩어져 매일 늦은 밤마다 다음 날 쓸 연장을 챙기러 돌아다녀야 했고, 사용 가능한 자재가 남았을 때에도 챙겨 둘 수 없었다. 현장에 짐을 둔다는 대가로 이런저런 눈탱이를 맞는 일도 잦았다. 임금을 떼이거나, 아주 잡스러운 심부름을 시켜도 마스크 속에서만 보이는 욕을 하며 버텨야만 했다. 쫒겨나면 갈 곳이 없으니까. 눈에도 사람의 감정이 드러난다지만, 몇 년간은 마스크가 참 고마웠다.   돈을 버는 건지 스트레스를 버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던 어느 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허름한 창고를 얻었다. 드디어 나에게도 해방이 온다고 생각했다. ​ 작은 창고는 싱크 공장을 하던 곳이었다. 비록 비 오는 날에는 풍향에 따라서 바닥으로 물이 제법 스며들었고, 몇 명의 세입자가 뚫었을지 모르는 벽 곳곳의 연통 구멍 안으로는 냉기가 빨려 들어오는 곳이었지만, 이를 제외하면 그럭저럭 쓸 만한 공간이다. 목수 일로 먹고사는데 이 정도 문제가 별일인가 싶었다.   이렇게 지난 세월 끊임없이 머리 속으로 상상하고 또 상상했던 일이 시작되었다. 내 몸에 가장 알맞게 구성된 공간,...
      글쓴이 남어진​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1. 밀양에 작은 목공소를 차렸다.   지난 5년 간은 창고 하나 없이 여기저기 얹혀 살며 가구도 만들고 집도 지었다. 연장은 뿔뿔히 흩어져 매일 늦은 밤마다 다음 날 쓸 연장을 챙기러 돌아다녀야 했고, 사용 가능한 자재가 남았을 때에도 챙겨 둘 수 없었다. 현장에 짐을 둔다는 대가로 이런저런 눈탱이를 맞는 일도 잦았다. 임금을 떼이거나, 아주 잡스러운 심부름을 시켜도 마스크 속에서만 보이는 욕을 하며 버텨야만 했다. 쫒겨나면 갈 곳이 없으니까. 눈에도 사람의 감정이 드러난다지만, 몇 년간은 마스크가 참 고마웠다.   돈을 버는 건지 스트레스를 버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아주 강하게 들었던 어느 날,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허름한 창고를 얻었다. 드디어 나에게도 해방이 온다고 생각했다. ​ 작은 창고는 싱크 공장을 하던 곳이었다. 비록 비 오는 날에는 풍향에 따라서 바닥으로 물이 제법 스며들었고, 몇 명의 세입자가 뚫었을지 모르는 벽 곳곳의 연통 구멍 안으로는 냉기가 빨려 들어오는 곳이었지만, 이를 제외하면 그럭저럭 쓸 만한 공간이다. 목수 일로 먹고사는데 이 정도 문제가 별일인가 싶었다.   이렇게 지난 세월 끊임없이 머리 속으로 상상하고 또 상상했던 일이 시작되었다. 내 몸에 가장 알맞게 구성된 공간,...
문탁
2023.08.10 | 조회 302
남어진의 현장분투기
          글쓴이 남어진​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1.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대학 가는 수업에 흥미를 잃은 상태로 지냈다. 어느 날 뉴스에서 할머니들이 포크레인 바가지 안에 들어가서 쇠사슬을 목에 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약간의 궁금증과 더불어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저 사람들은 왜 저러고 있을까. 그러던 중 하루 종일 밀양과 송전탑이 뉴스에 나오길래 한번은 가 봐야겠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가을이 한창이던 10월 첫 날, 해가 지기 두어 시간 전 밀양역에 도착했다. 누군가 ‘저 차에 타면 된다’고 해서 난생 처음 보는 조끼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차를 타고 골짜기로 들어갔다. 조끼를 입은 사람들은 인권 침해 감시단으로 활동하는 인권 활동가들이었다.   ​ ▲ 논 한가운데 솟은 송전탑 아래에 있는 사람이 점처럼 보인다. ​ ​ 2 ​ 그렇게 아주 경사가 가파른 산길에 도착하면서 지난한 ‘밀양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후회는 거의 없다. 하지만 가끔은 ‘아 밀양은 참 마음 아픈 곳이구나. 그러니까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바꿔야겠다.’라고 생각했으면 지금보다는 아주 조금은 몸과 마음이 편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조금은 한다. ​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가 제일 고통스러운 곳인 줄 알았는데, 근사한 명분이 생겨 학교를 자퇴를 하고 나서야 여기나...
          글쓴이 남어진​ 밀양에서 작은 목공소를 합니다. 밀양에서 765kV 초고압 송전탑 반대 운동도 하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도, 마음이 사는 일도 어렵고 괴롭다는 생각을 자주 하며 지냅니다.     1.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녔지만 대학 가는 수업에 흥미를 잃은 상태로 지냈다. 어느 날 뉴스에서 할머니들이 포크레인 바가지 안에 들어가서 쇠사슬을 목에 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약간의 궁금증과 더불어 미안한 마음이 생겼다. 저 사람들은 왜 저러고 있을까. 그러던 중 하루 종일 밀양과 송전탑이 뉴스에 나오길래 한번은 가 봐야겠다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가을이 한창이던 10월 첫 날, 해가 지기 두어 시간 전 밀양역에 도착했다. 누군가 ‘저 차에 타면 된다’고 해서 난생 처음 보는 조끼를 입은 사람들과 함께 차를 타고 골짜기로 들어갔다. 조끼를 입은 사람들은 인권 침해 감시단으로 활동하는 인권 활동가들이었다.   ​ ▲ 논 한가운데 솟은 송전탑 아래에 있는 사람이 점처럼 보인다. ​ ​ 2 ​ 그렇게 아주 경사가 가파른 산길에 도착하면서 지난한 ‘밀양 라이프’가 시작되었다. 후회는 거의 없다. 하지만 가끔은 ‘아 밀양은 참 마음 아픈 곳이구나. 그러니까 더욱 열심히 공부해서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을 바꿔야겠다.’라고 생각했으면 지금보다는 아주 조금은 몸과 마음이 편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조금은 한다. ​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가 제일 고통스러운 곳인 줄 알았는데, 근사한 명분이 생겨 학교를 자퇴를 하고 나서야 여기나...
남어진
2023.07.10 | 조회 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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