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회>이 여름의 끝, 걷기의 단상들

기린
2023-09-07 01:23
410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1. 한 여름 걷기의 맛

 

  8월 내내 둘레길을 걸을 엄두가 안 나는 무더위가 계속 되었다. 근데 올해 여름이 제일 시원할 수도 있다니 걱정이다. 그래도 누가 같이 걷자고 하면 마음이 달라졌다. 그래서 경기옛길 영남길 4코스도 걸었고, 서울 둘레길 1코스도 걸을 수 있었다.  이 코스들은 모두 산을 오르내리며 걷는 코스였다. 영남길 4코스는 용인 동백 호수 공원에서 석성산 정상을 통과하는 길이고, 서울 둘레길은 수락산 둘레를 걸었다. 그래서 한 여름이라도 숲 속을 통과하는 길이라 정수리로 내리꽂는 땡볕은 피할 수 있었다.

 

 석성산 코스는 정임합목 하우스와 함께 걸었다. 471 미터 고지정도 되지만 동백동쪽 등산로는 산세가 가파르고 거대한 경사면의 암벽 길까지 타고 올라야 하는 코스였다. 매일 새벽 아파트 뒤로 난 석성산 산책로를 걷는다는 두 사람은 출발부터 발걸음이 가벼웠다. 하지만 나는 초입부터 숨이 가팠다. 헉헉대며 올라가자니 온 몸으로 땀이 차올랐다. 뒤처지는 나를 기다려 가다 쉬고를 반복하며 정상에 올라서니 윗도리가 땀으로 흥건했다. 정상에 얼음이 동동 뜨는 막걸리를 파는 미니 주점이 있었다. 반색하는 나를 보고 무사님이 한 잔 사주었다. 얼음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 뒷덜미가 시원해졌다. 한 여름에만 느낄 수 있는 낙차의 온도였다.

 

 서울 둘레길 1코스는 친 자매인 새봄과 시소와 걸었다. 도봉산역에서 시작해 수락산자락을 둘러 걷는 총 18.6키로 코스였다. 일요일에 하는 세미나를 하고 있는 두 사람이 한 주 쉬는 방학이니 같이 걷자고 연락이 와서 반가웠다. 역 앞에서 만났을 때 가랑비가 흩뿌려서 어쩌나 했는데 점점 개였다. 그래도 습도는 높아서 걷기 시작할 때부터 후덥지근했다. 이 길은 잘 정비되어 있긴 했는데 계단이 너무 많았다. 산길을 조금 걷는가 하면 오르는 계단이더니 내려가는가 싶으면 또 계단이 나왔다. 길을 걷는다기보다 계단을 계속 오르내리는 느낌이었다. 산길에 떨어진 도토리들을 보니 아무리 더워도 계절은 가을로 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10키로쯤 걸었을 즈음 당고개역으로 빠지는 이정표가 보였을 때, 시소님이 이 길은 계단이 너무 많다며 역으로 빠지면 어떠냐고 물었다. 지친다 싶었던 터라 단번에 그러자고 했다.

 

 한 여름의 숲에서 윗도리가 흠뻑 젖도록 땀을 흘리며 걷고 내려오면 온 몸이 수분을 원한다는 걸 느낀다. 혼자서 걸을 때는 물 몇 모금 축이며 집에나 와서야 그 갈증을 풀 수 있었다. 이번에는 일행이 있어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일단 자리를 잡고 음식을 주문하면서 맥주부터 달라고 부탁했다. 차가운 맥주 한 모금이 넘어가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다. 온 몸의 세포가 갈증을 푸는 느낌이랄까. 술을 즐기지 않는 이 친구들도 너무 맛있다고 한 마디씩들 했다. 한 여름을 통과하면서 놓칠 수 없는 맛이다. 함께 즐기니 더 좋았다.

 

 

 

2. 혼자 걷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다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둘레길을 찾아다니며 걸었다. 아주 가끔 친구들과 함께 걸었고 대부분 혼자 걸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등산로와 달리 둘레길은 한적한 편이었다. 그래도 무섭다거나 하는 생각 없이 잘 걸어 다녔다. 8월 중순 신림동 관악산 둘레길에서 한 여성이 성폭행을 당하고 목숨을 잃은 사건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그동안 거리낌 없이 외진 길을 혼자 다녔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21년 여름 김대건길을 걸었다. 용인에 있는 은이성지에서 출발해 안성 미리내 성지까지 걷는 순례길이다. 은이성지를 지나 은이계곡으로 들어서면 울창한 숲길이 시작되고 걷는 내내 점점 숲이 깊어지는 길이었다. 출발할 때부터 지나가는 사람을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10키로가 넘는 우거진 숲 속의 길을 혼자서 내내 걷자니 차츰차츰 등골이 서늘해지는 거였다. 그러다 문득 그 무렵 용인 처인구 곰농장에서 곰이 탈출했다던 기사를 본 게 떠올랐다. 그러자마자 흠칫 몸이 굳는가 싶었는데 발걸음이 빨라지더니 내처 달리기 시작했다. 마침 고개를 내려가는 길이기도 해서 걸음아 나 살려라는 심정으로 내달렸다.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달려서 쉼터가 있는데 와서 멈추었다. 여전히 아무도 없었지만 숨을 가누다보니 마음이 진정되었다.

 

  점점 마음이 가라앉자 혼자서 뭔 난리 부루스냐며 픽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머릿속에 곰이 떠오른 순간은 정말 심장이 쫄깃해졌다. 이번 사건을 듣는데 그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망상이었음에도 몸이 그 순간의 두려움을 기억해냈던 거다. 짐승보다 사람이 더 무서운 거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다른 친구들과도 그 사건 이야기를 하면서 이제는 혼자서 둘레길 걸을 엄두가 안 난다고 투덜거렸다. 친구들은 시간이 지나면 잊힐 거라고 했다. 그렇게 될까. 어쨌든 지금은 불안이 가시지 않는다.

 

 

 

3. 마음을 걷게 하기

 

 레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최대한 빠른 속도가 대세가 된 현대인의 삶에서 자신 또한 어떻게 가느냐보다 도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게 될까 두렵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자신이 걷기를 좋아하는 것은 느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기술력으로 점점 빠르게 통과하는 대신 두 발의 움직임을 따라 “보면서 동시에 본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고, 새로운 것을 이미 알 고 있는 것 속으로 흡수할 수 있는” 정도의 속도 말이다. 그렇다면 걷기는 몸의 움직임과 눈의 볼거리를 통해 마음에서도 새로운 풍경이 펼쳐질 수 있는 기회이다. 빠름에 매몰된 마음의 속도를 늦추어 두 발로 걷는 속도에 맞추는 일, 마음을 걷게 해야 할 일이다.

 

 그동안 나는 운동 삼아 걷기도 하고, 오일 내내 공간 안팎을 맴도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동하기도 했다. 드문드문 친구들과 함께 걸으며 사는 얘기를 나누는 즐거움도 있었다. 한 편으로 매주 새로운 둘레길에서 낯선 길을 헤매다보면, 머리가 텅 비고 온 몸이 나른하게 피로해지는데 이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몸을 놀려서 끊이지 않는 망상에서 빠져나오는 그 순간을 기다리게 되기도 했다. 레베카 솔닛의 문장을 따라 그동안 나의 걷기를 되돌아보니 나 역시 마음이 내달리는 속도에 지쳤다가 내내 걸으며 그 속도를 늦추곤 했던 것이다. 일상으로 돌아오면 다시 내달리고 마는 반복이었다. 그러면 다시 걷기였다.

 

 이렇게 여름이 가는 사이 8월의 사건이 회자되는 와중에도 친구들과 함께 걸을 수 있는 시간이 있어 좋았다. 친구들의 마음의 속도에도 귀 기울이는 시간이기도 했다. 한편으로 한동안은 두려울 것 같은 마음에 같이 걸을 친구들을 물색 중이다. 두 발로 걷는 속도에 맞춰 마음을 걷게 하고 싶은 분, 저한테 연락 주세요^^ 코스는 제가 물색해 보겠습니다.

 

 

댓글 6
  • 2023-09-07 09:02

    저랑도 걸어요. 죽전에서 오시다가 불곡산에서 만날까요?
    전 걷기보다는 숲이 좋아서요. 나무가 많은 곳으로 걸으면 좋겠어요.^^

    • 2023-09-07 09:38

      저도 숲길 같이 걸어요~ 저도 숲길파!

  • 2023-09-07 13:23

    평일 오후 광교산도 한 번 같이 가요~~!

  • 2023-09-07 14:58

    아~~ 그날 석성산 막걸리 장난아니였죠?ㅎㅎ
    더운날에만 느낄수 있는 즐거움이었습니다~
    내년에도?ㅎ

  • 2023-09-07 19:20

    너무 더웠고, 지금까지도 더운데.. 그래도 걷는다!
    또 걷자고 꼬신다. 포레스트 기린 만세!!ㅎㅎㅎ

  • 2023-09-09 11:14

    저야 말로 걸어야하는데......

기린의 걷다보면
30대 중반을 통과하던 무렵이었다. 신문에서 일본 시코쿠섬에 위치한 88개의 절을 순례하는 도보 여행가의 여행기를 보게 되었다. 1번 절에서 출발해서 88번까지 이르는 완주 과정 자체가 내게는 경이롭게 다가왔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방을 빼고 적금을 깨 여행을 떠났다는 이력도 그랬고, 여자 혼자서 그 길을 완주하는 실행력도 멋있어 보였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도 좋았고, 오랜 걷기로 발가락에 생긴 물집 터뜨리기에 점점 능숙해지는 변화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홀가분하게 떠난 그의 도전이 부러웠다. 언젠가는 나도 한 번 해 봐야지 다짐했다.     그렇지만 나는 하던 일을 때려치울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다짐은 서서히 잊혔다. 시간이 지나 인문학공부를 하게 되면서 다른 일상으로 접어들었고, 타고 다녔던 승용차를 처분했다. 집을 나서서 걷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그사이 걷기가 점점 더 많은 이들의 관심 영역으로 떠올랐다. 제주도 올레길이나 산티아고 순례길 등을 걷는 이야기들이 더 자주 들려왔다. 시코쿠 순례길을 알게 되었을 때처럼 끌리지는 않았다. 그러다 고향집을 통과하는 해파랑길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긴 트레일 코스로 50개 코스로 이루어진 750km의 길이었다. 고향집 주변 코스부터 몇 코스를 걷기 시작하면서 다시 예전의 그 다짐이 떠올랐다. 나도 한번 해 봐야지.       해파랑길을 검색하다보니 완주한 사람들의 사연도 올라왔다. 명예퇴직을 한 후 이 길을 완주하면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는 50대 중년의 이야기도 있었고, 전국의 길을 다 걷겠다는 의지를 실천하는 걷기의 달인도 있었다. 언젠가가...
30대 중반을 통과하던 무렵이었다. 신문에서 일본 시코쿠섬에 위치한 88개의 절을 순례하는 도보 여행가의 여행기를 보게 되었다. 1번 절에서 출발해서 88번까지 이르는 완주 과정 자체가 내게는 경이롭게 다가왔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방을 빼고 적금을 깨 여행을 떠났다는 이력도 그랬고, 여자 혼자서 그 길을 완주하는 실행력도 멋있어 보였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도 좋았고, 오랜 걷기로 발가락에 생긴 물집 터뜨리기에 점점 능숙해지는 변화도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홀가분하게 떠난 그의 도전이 부러웠다. 언젠가는 나도 한 번 해 봐야지 다짐했다.     그렇지만 나는 하던 일을 때려치울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다짐은 서서히 잊혔다. 시간이 지나 인문학공부를 하게 되면서 다른 일상으로 접어들었고, 타고 다녔던 승용차를 처분했다. 집을 나서서 걷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그사이 걷기가 점점 더 많은 이들의 관심 영역으로 떠올랐다. 제주도 올레길이나 산티아고 순례길 등을 걷는 이야기들이 더 자주 들려왔다. 시코쿠 순례길을 알게 되었을 때처럼 끌리지는 않았다. 그러다 고향집을 통과하는 해파랑길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긴 트레일 코스로 50개 코스로 이루어진 750km의 길이었다. 고향집 주변 코스부터 몇 코스를 걷기 시작하면서 다시 예전의 그 다짐이 떠올랐다. 나도 한번 해 봐야지.       해파랑길을 검색하다보니 완주한 사람들의 사연도 올라왔다. 명예퇴직을 한 후 이 길을 완주하면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는 50대 중년의 이야기도 있었고, 전국의 길을 다 걷겠다는 의지를 실천하는 걷기의 달인도 있었다. 언젠가가...
기린
2024.04.06 | 조회 222
기린의 걷다보면
경강선을 타고 여주역에 도착하니 11시가 넘었다. 세 번 째로 여강길을 걷게 되었는데, 제일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여강은 여주지역에서 부르는 남한강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남한강이 흐르는 길을 따라 여주 지역을 이은 여강길은 현재 총 11개의 코스가 있다. 1코스인 옛나루터길은 물길을 따라가며 옛 나루터를 통과하는 18키로 정도 되는 길이다.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때는 혼자 걸었는데, 이번에는 친구와 함께 걷게 되었다. 긴 코스이기도 하지만 외진 곳도 있어서 같이 걸을 친구가 있어서 든든했다. 여주 터미널까지 걸어와서 점심을 해결하고 영월루로 향해서 길을 나섰다.     영월루에 올라서 보면 아래로 남한강과 여주 일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강 건너 편으로 천년고찰 신륵사도 보였다. 여강길 4코스를 걸을 때는 신륵사에서 출발했다. 대부분의 사찰이 깊은 산속에 위치해 있는데, 신륵사는 강줄기와 너른 모랫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절 이름의 유래로 고려시대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진다니 천년이 넘은 시간의 두께가 느껴졌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의 수피에 푸른 이끼가 뒤덮여 있었다. 평일(월요일) 오후 한가롭게 경내를 거니는 사람들이 멀리서도 보였다. 친구가 그걸 보다가 뭔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운전해서 오면 먼 거리도 아니었는데, 신륵사까지 말이야. 근데 고작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 대놓고 시간을 보냈다니까.   자식 셋을 연이어 키워내느라 고단하던 어느 날의 순간, 집을 벗어나 바람 쐬러 나올 여유도 없었던 시절이었단다. 아름다운 풍광에 깃든 여유가 좁은 차안에서 시간을 때워야 했던 옹색한 순간을 환기시켰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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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3.05 | 조회 317
기린의 걷다보면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생업의 기회를 잡아 3년간 일리치약국 정규직으로 지냈다. 2024년 나이듦연구소로 적을 옮겨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를 꿈꾼다.   1.  쓰레기산이 숲으로?   나의 검색 알고리즘에 매번 뜨는 소식은 걷기에 관련한 정보다. 둘레길 걷기를 하면서 걷기 좋은 길을 자주 검색했기 때문이다. 작년 가을쯤 서울에서 걷기 좋은 길로 ‘마포난지생명길 1코스’를 추천하는 기사가 떴다. 6호선 월드컵경기장역에서 시작하는 길로, 예전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을 공원으로 바뀐 후 그 공원들을 둘러보는 코스였다. 더 추워지기 전에 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후 차일피일 미루며 언젠가는 걸어야지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녹색평론 2023년 겨울호에서 『씨앗부터 키워서 천이숲 만들기』 라는 책의 서평에서 ‘노을공원시민모임’이라는 시민단체를 알게 되었다.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을 다섯 곳의 공원으로 만들었는데, 그 중에 노을공원에서 나무를 씨앗부터 길러 옮겨 심는 활동을 한다고 했다. 걷기 좋은 길이라고 했는데, 쓰레기더미 위에 숲을 만들었다고? 호기심이 급상승했다.     1월 셋째 주 일요일 하늘은 흐렸고 비 예보도 잡혀 있었다. 마음먹은 참에 더 이상 미루지 말자고 집을 나섰다. 지하철을 타고 월드컵경기장역에 내리니 가늘게 보슬비가 흩날렸다. 한겨울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역 옆으로 걸어가다 안내하는 표지판을 만났다. 난(蘭)초와 지(芝)초가 무성하게 자라서 난지도였던 한강 둔치의 섬이 15년 동안 쓰레기 매립장이 되었다가, 1996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지금의 공원으로 바뀌었다는 설명이었다. 월드컵을 열었던 경기장에 옆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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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2.05 | 조회 289
기린의 걷다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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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
2024.01.06 | 조회 299
기린의 걷다보면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12월 4일 아침 6시,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사방이 컴컴할 때 집을 나섰다. 혜화역에서 열리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기자회견에 지지 방문을 가는 길이었다. 올해 다섯 번째 방문이다. 전장연에서는 2021년 12월 3일부터 출근길 지하철 행동을 시작했다.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권리와 관련 예산을 제대로 책정하라고 요구하는 행동이었다. 2월에는 경복궁역에서 치러진 삭발식에 참석했었다. 역 승강장안 출근인파가 뒤섞이는 현장에서 삭발하는 장애인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착잡했다.    내가 둘레길을 걷기 위해 준비하는 첫 단계는 이동할 수 있는 대중교통 검색이다.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은 둘레길의 입구까지 지하철과 마을버스 등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이 과정은 공기처럼 당연해서 특별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들은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할 이동권을 투쟁해서야 겨우 얻을 수 있는데다, 그마저도 예산을 제대로 책정하지 않아 권리가 축소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듣고 있자니 내가 누리고 있는 당연함이 특권으로 느껴졌다.           이번 기자회견은 교통약자의 이동 편의를 위한 특별교통수단 예산과 관련 국토교통위원회가 증액한 금액(271억원)을 포함해서 내년 예산안에 반영해달라고 촉구하기 위해 열렸다. 아침 8시 혜화역 5-3번 승강장...
          기린 고전 분야에서 덕업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차, 양생을 위한 담론을 생산하고 생업도 마련하는 기회를 잡아 소속을 인문약방 팀으로 옮겨 일리치 약국 정규직이 되었다.  양생과 관련한 공부에 박차를 가하며 또 한 번의 덕업일치에 도전중이다.       12월 4일 아침 6시, 아직 해가 뜨지 않아서 사방이 컴컴할 때 집을 나섰다. 혜화역에서 열리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기자회견에 지지 방문을 가는 길이었다. 올해 다섯 번째 방문이다. 전장연에서는 2021년 12월 3일부터 출근길 지하철 행동을 시작했다.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권리와 관련 예산을 제대로 책정하라고 요구하는 행동이었다. 2월에는 경복궁역에서 치러진 삭발식에 참석했었다. 역 승강장안 출근인파가 뒤섞이는 현장에서 삭발하는 장애인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착잡했다.    내가 둘레길을 걷기 위해 준비하는 첫 단계는 이동할 수 있는 대중교통 검색이다. 당일로 다녀올 수 있는 곳은 둘레길의 입구까지 지하철과 마을버스 등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이 과정은 공기처럼 당연해서 특별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들은 누구나 당연히 누려야 할 이동권을 투쟁해서야 겨우 얻을 수 있는데다, 그마저도 예산을 제대로 책정하지 않아 권리가 축소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들을 듣고 있자니 내가 누리고 있는 당연함이 특권으로 느껴졌다.           이번 기자회견은 교통약자의 이동 편의를 위한 특별교통수단 예산과 관련 국토교통위원회가 증액한 금액(271억원)을 포함해서 내년 예산안에 반영해달라고 촉구하기 위해 열렸다. 아침 8시 혜화역 5-3번 승강장...
기린
2023.12.05 | 조회 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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