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처방전>18회 위암편

겸목
2023-02-03 20:50
536

 

무사(無事), 누군가의 분투의 대가

-위암에 황정은의 에세이집『일기』를 처방합니다

 

 

황정은을 좋아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무사(無事)는 누군가의 분투를 대가로 치르고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숨 막히는 ‘말’들이 있다는 걸 아니까, 이 고요의 성질에 질식이라는 성분이 있다는 걸 아니까, 어디로도 가지 않고 이렇게 유지하는 고요가 그래도, 그래서, 나는 좀 징그럽습니다. (황정은, 『일기』, 창비, 2022년, 41쪽)

 

황정은의 에세이집 『일기』는 작고 예쁘다. 친구에게도 가벼운 마음으로 선물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니 친구도 좋아할 거라는 생각으로 택배를 보냈다. 그런데 읽다보니 좋은 선물이었는지 불안해진다. 나에게는 불편하게 읽히는 책을 친구는 어떻게 읽고 있을지 궁금하다. 나에게는 질책으로 다가오는 황정은의 말들을 친구는 어떻게 독해하고 있을지 걱정스럽다. 이런 걱정으로 나는 황정은의 『일기』를 여러 번 읽었다. 여러 번 읽으며 든 생각은, 내가 힘들게 읽은 만큼 황정은 또한 힘들게 썼겠구나 하는, 이상한 동질감이다. 독자가 작가를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나도 힘들게 읽고 그도 힘들게 썼으니 피장파장이라는 느낌이다.

 

무엇이 읽기에 힘들었을까? ‘징그럽다’는 그의 생생한 감정이다. 나의 무사(無事)함이 누군가의 분투의 대가라는 것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무한 경쟁과 탐욕의 시대, 무사하고 무탈함을 바라는 것은 욕망의 기본값이 아닐까? 그런데 오늘날은 ‘보통’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결코 보통의 대가로 이루어지지 않는 시대다. 무사한 보통의 삶은 많은 비용을 치룰 수 있어야 가능하고, 무사하지 못한 사람들의 부당함을 모르는 척 해야 유지되는 ‘고요’이다. 이런 자책감을 불편함 정도가 아니라 ‘징그럽다’는 강렬함으로 표현하는 작가의 말투가 내게는 따갑게 느껴진다.

 

『일기』에서 황정은 내내 자신의 까칠함을 드러낸다. 전자책을 ‘견딜 수 없다’고 말하고서는 곧 전자책도 누군가의 노동으로 만들어내는 결과물일 텐데 그 노동의 과정을 잘 모르면서 ‘견딜 수 없다’고 말해도 될까, 망설인다. 이웃들의 공터에 대한 관심을 ‘안다’고 쓰려 했다가, “안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내가 그걸 모른다는 것을 안다. 알아버린 것을 모르는 척, 안다고 말해야 할 때 나는 순진한 척을 하며 무언가를 단념하고 있고 그래서 안다고 말하는 것이 내게는 늘 얼마간 책임을 지는 일로 느껴진다”( 『일기』, 29쪽)고 숨김없이 실토하고 있다.

 

난감한 상황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어’ 라는 비겁한 변명에 대해 황정은은 무지는 ‘게으름’이라고 ‘덮어쓰기’ 한다. 차별받았다는 생각으로 분노할 줄은 알지만 차별한다는 자각은 없는 삶에 대해서는 ‘무능력’이라고 단호히 말하고, 그런 자신의 태도에 대해 ‘정치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반박을 멈추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너무 정치적이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런데 나는 누가 어떤 이야기를 굳이 ‘너무 정치적’이라고 말하면 그저 그 일에 관심을 두지 않겠다는 말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그건 너무 정치적, 이라고 말할 때 나는 그 말을 대개 이런 고백으로 듣는다.

나는 그 일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 『일기』, 133~134쪽)

 

 

황정은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쉽게 말할 수 없는 곤란함이 있다. 그의 윤리적 감수성은 베일 듯 날카롭고, 그 날카로움에 내가 피투성이가 안 될 자신이 없다. 알려고 하지 않는, 알지 않으려 의지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에 대해 ‘상투적인 어른’이라 질책하는 황정은의 문장은 내게 매섭다. 황정은의 작품을 좋아하기 위해 나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까?

 

 

룸메이트, 내 인생의 피해자 1

선형은 대학시절 나의 룸메이트였다. 2학년 때부터 첫 직장에 다니던 때까지 5년을 같이 살았다. 그 사이 내가 1년 휴학을 해서, 선형과 나의 졸업년도가 다르다. 휴학생과 학생, 3학년과 4학년, 4학년과 직장인으로,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행동반경은 달라졌지만, 방 하나를 같이 쓰는 사이로서 흉허물이 없었다. 결혼을 결정하고 나서, 엄마에게 말하기보다 선형에게 말하는 것이 더 미안했다. 웃기지만, 친구를 혼자 두고 떠난다는 생각이 죄책감처럼 달라붙었다. 물론 선형은 내 결혼소식에 크게 서운해 하지 않았다. 어쩌면 속 시원해 했는지도 모르겠다. 선형과 사는 5년 동안 내가 방청소를 한 날은 손에 꼽을 정도다. MT를 가서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해장국을 끓어놓는 내공에서 알 수 있듯이, 선형은 룸메이트를 없는 셈치고 혼자 잘 치우고 살았다.

 

그래서 우리 사이가 안 좋았을까? 그랬다면 5년을 같이 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같은 동아리였기 때문에, 우리 방은 늘 동아리 선후배들로 북적였다. 우리가 없어도 방에는 한두 명의 친구들이 어슬렁거렸고, 사생활이 없었다. 학년이 다르고, 수업을 듣는 과목도 달랐지만, 함께 해야 하는 동아리 일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운명공동체였다. 신입생 환영회, MT, 작품집 발간 같은 어지간한 일들은 둘이 후다닥 해치웠다. 성향과 기질이 달랐지만, 크고 작은 톱니바퀴들이 맞붙어 잘 굴러가는 것처럼, 우리는 티격태격하면서도 붙어 다녔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건 선형이의 배려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처럼 N분의 1의 법칙이 칼같이 적용됐다면, 우리의 동거는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집안일이라고는 할 줄도 모르고, 할 생각이 없는 나를 ‘태생적으로 이기적’이라 어쩔 수 없다고 단념한 선형이의 ‘K-장녀’다운 아량과 배포 덕분에 나는 간신히 얹혀살 수 있었다(선형이는 남동생이 둘씩이나 있는, 명실상부한 K-장녀다). 선형이는 ‘내 인생의 피해자 1호’인지도. 나의 대학생활은 룸메이트 덕분에 내 마음대로, ‘나 잘났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 수 있었다. 집을 나왔으니 간섭하는 부모도 없었고, 같은 집에 사는 룸메이트와 신경전을 벌일 일도 없었다. 그러니까 내 자존감의 원천은 부모의 무관심과 룸메이트의 인내심 덕분이다.

 

나같이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룸메이트도 거뜬히 감수하며 살아간 공덕으로 선형의 삶은 무탈하게 흘러갔다. 경상도 여자답게 말은 ‘뚝뚝’하게 했지만, 누구에게도 ‘모난’ 소리 하지 않는 친절한 사람이란 걸 숨길 수 없었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나만 해도 나 좋을 땐 나 몰라라 지내다가도, 어려운 일이 닥치면 선형을 찾았다. 선형은 입으로는 싫은 소리를 해도, 산타클로스처럼 작은 선물들을 잊지 않았다. 립스틱, 원두커피, 와인, 수제비누 같은 걸 꼭 가지고 왔다. 이런 선물은 받을 때는 모르지만, 헤어지고 혼자 지하철을 타고 돌아갈 때쯤 꺼내보면 부적처럼 의지가 되고 위로가 됐다. 선형과 만나고 있으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기고만장하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안심이 됐다. 언제 찾아가도 밥 한 끼 사줄 사람이 있다는 든든함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후줄근해진 마음을 조금은 부풀어 오르게 한다.

 

 

 

 

 

 

다른 사람이 애써 만들어낸 것으로 내 삶을 구한다

선형은 작년에 위암수술을 받았다. 1기에 발견되어 다행이라고 하지만, 종양의 위치가 나빠, 위를 반 이상 절개했다. 늘 ‘받기만’ 하던 내가 드디어 무언가를 주어야 할 순간이 왔다. 나는 무엇을 주어야 할까? 따뜻한 말 한 마디, 정성들인 밑반찬, 알짜배기 의학정보…… 뭐든 들고 달려가려는 내게 선형은 말했다. “나중에 보자. 지금은 앉아 있기도 힘들고” 그 말투가 평소의 무뚝뚝함을 넘어서는 서늘함이라 나는 이내 수긍하고 말았다.

 

선형의 삶이 무탈하다고 했지만, 위암 수술 이후 생각해보니 전혀 무탈하지 않았다. 선형의 부모님은 20년 전쯤 한 해 걸러 모두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죽음은 식도암 말기 판정을 받은 이후 치러져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했지만, 그 다음해 심장마비로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모두 충격을 받았다. 그해 선형의 어머니는 막 정년퇴직을 한 직후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 모두 어느 정도 가족력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일찍 부모를 잃은 선형 남매는 알게 모르게 건강관리에 신경을 쓰며 살아왔다. 그렇게 신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위암 진단과 수술을 마치고 나니 선형은 조금 억울했다고 한다. 모두들 일찍 발견해서 다행이라고 하는 말도 듣기 싫고, 조심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건 맥이 빠지는 일이기도 했다. 수술 후, 선형은 평소와 달리 하루 다섯 끼를 조금씩 나누어 먹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짜증나는 일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건 언제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이었다고 했다.

 

“부모의 이른 죽음을 보고, 죽음이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 죽음을 생각하며 사는 건 나쁘지 않아. 그런데 돌이켜 보면 일찍 세상을 떠난 엄마의 인생이 너무 짧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안 좋아. 자식이 결혼해서 자식과 똑 닮은 손자를 낳았는데, 그 얼굴을 봤으면 엄마가 얼마나 좋아했을까 싶고, 그걸 못 보고 돌아가신 게 아쉽지.”

 

선형이 앉아 있을 체력이 생겼을 때쯤 우리는 만나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위암 수술을 마친 친구를 위로하고자 만났지만, 그 자리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나눈 얘기는 부모님의 죽음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건강관리를 해도 유전자의 힘은 강하고, 그걸 거스를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 냉소적이 되기 쉬운데, 그보다 선형은 부모의 이른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그때 자신도 경황이 없어 동생들을 살피지 못해 트라우마와 건강염려증을 갖게 된 것 같다고 아쉬워해 했다.

 

선형은 수술 후 6개월 정도 지난 후 다시 일에 복귀했고, 식습관 조절에도 어느 정도 적응했다. 아직 여행일정을 잡는 게 조심스럽다고 하지만, 그 밖의 일상생활에서 속도가 느려진 것 말고는 달라진 점이 거의 없다. 언제나 안달복달하지 않고 그러려니 살아가는 선형의 모습이 의아했는데, 이번에도 선형은 호들갑 떨지 않고 이 고비를 넘길 것이다.

 

문제는 나다. 선형이가 서른의 초입에서 때 이른 부모의 초상을 치를 때 나는 문상객으로 조문을 다녀왔을 뿐이다. 막 아이들이 태어나 정신없을 때라고 하지만, 그애의 인생에서 ‘충격적’인 사건일 수도 있었는데, 그때 나는 그 옆에 있어주지 못했다. 그 당시 막냇동생은 아직 대학생이었다. 졸지에 부모를 잃은 남매가 어떻게 생활을 꾸리고,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결혼준비를 하였는지 나는 세세히 알지 못한다. 처리해야 할 번거로운 일들에 나는 일손을 보태지 못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다. 수술 후 오지 말라는 친구에게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위로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요즘은 거의 매일 일기를 쓰고 있다. 일기를 쓰면서, 문장을 쓰는 동안 쌓인 스트레스를 푼다. 소설 문장을 쓰느라고 긴장한 뇌를 이리저리 풀어준다는 느낌으로, 아무렇게나 쓴다. 하지만 어느 날엔 문득 용기가 사라지고 그런 날엔 소설도 일기도 쓸 수 없다. 그럴 땐 음악의 도움을 받는다. 다른 사람이 애써 만들어낸 것으로 내 삶을 구한다. 음악 한곡을 여덟 번 열 번 반복해 듣는 것이 어떻게 삶을 구할 수 있기까지 하느냐고 누군가는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일이 일어난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넷플릭스 오리지널2019)의 두 형사, 그레이스와 캐런은 한번도 만나지 못한 마리의 삶을 본인들의 일로 돕는다. 누군가의 애쓰는 삶이 멀리 떨어진 누군가를 구한다.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나며, 픽션 드라마에서나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일기』, 20쪽)

 

선형이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 애써 만들어낸 것이 다른 사람의 삶을 구한다. 나는 황정은이 애써 쓴 문장을 빌려 친구에게 그 시절의 무사함에 대해 ‘고마웠다’는 인사를 뒤늦게 해본다. 내가 위로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은 감사였다.

 

 

날카로운 윤리의식과 날렵한 상상력

황정은의 소설을 좋아한다. 황정은의 소설은 대개 비슷하다. ‘다크’하다. 그가 그려내는 빈곤의 모습은 평면적이지 않다. 빈곤을 다루되 예의를 갖추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무심한 듯 다정하고 단정한 그의 문장을 읽고 있으면,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 그의 수고가 떠오른다. 황정은은 상투적이고 진부하게 들릴 수 있는 말들을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기꺼이 알고자 하고, 제대로 인식하고, 정직하게 책임을 지고 발언을 하려는 그의 태도는 존경스럽다. 그러나 가끔 그의 문장들은 내게 매서운 질책의 말들로 다가오기도 한다. 나는 그만큼 정직하지 못하고, 무책임하기 때문이다. 황정은의 책을 읽을 때 따라오는 부작용 가운데 하나가 이런 후회와 자책감이다.

 

『일기』를 읽으며 황정은도 나처럼 후회하고 자책하며 글을 계속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황정은의 책을 좋아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아마도 그의 문장들에 찔려 피를 흘리면서도 부끄러워하며 계속 읽어나가는 일일 것이다. 불편한 독서는 무뎌지려는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일기』의 뒷부분에 실린 「흔」이 만들어낸 파문은 오래도록 마음에서 요동쳤다. 자신의 상처를 탐문하는 과정을 거쳐, 자신과 같은 상처로 괴로워하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황정은은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수치심은 당신의 몫이 아니라고,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아니라고.”(184쪽) 황정은은 자신을 옭아매는 것들에 함몰되지 말고 자신의 존엄함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상상의 힘을 잊지 말라고 거듭 당부한다.

 

가혹한 현실에 시달려 손상된 사람이라기보다는 상상에 상상을 거듭하며 현실 너머로 건너가는 사람이었다. 그의 상상이 현실을 밀어내며 엉뚱하게 팽창하는 순간을 나는 좋아했고, 그가 어른들 앞에서 비교적 의젓하고 무력하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이 그 상상력에 있다고 생각했다. 앤이 하는 것처럼 앤처럼, 나에게도 상상력이 있다고 믿으며 상상으로 빠져든 시간이 내게도 있었고 그 상상들 중에 무언가는 내게 도움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부럽기도 했다. (『일기』, 47쪽)

 

내게 황정은의 날카로운 윤리적 감수성이 부담스럽다면, 그의 상상력에는 조금 가볍게 편승하고 싶은 마음이다. 난관에 부딪쳐 옴짝달싹 할 수 없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이고, 용기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상상의 힘에서 나온다. 황정은이 사랑하는 빨간 머리 앤처럼 말이다. 지금 용기가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앤의 날렵한 상상력을 ‘공유’한다. 그러고 보니 오래도록 상상력을 발동시키지 않고 살아왔다. 녹슨 상상력에 시동을 걸어본다.

 

 

댓글 17
  • 2023-02-03 20:59

    18회로 <문학처방전>을 마칩니다. 그러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오래된 친구에 대한 글로 마무리를 하게 되어 훈훈합니다. <문학처방전>을 읽고 '재미있다' 말해주시는 분들 덕분에 3년 동안 게으르게나마 계속 쓸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행복한 글쓰기' 경험해봤습니다. 고맙습니다. 황정은의 문장으로 인사드립니다. "건강하시기를. (....) 우리가 각자 건강해서, 또 봅시다. 언제고 어디에서든 다시."

  • 2023-02-04 07:54

    그간...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문학처방전 읽는 동안 즐거웠어요^^

  • 2023-02-04 08:36

    생각이 납니다. 빨강머리 앤과 말괄량이 삐삐에게서 받은 힘이 있었죠. ^^

    문학처방전 팬으로서 아쉬움은 남지만 그래도 마무리를 하게 된 걸 축하하고 싶네요. 겸목이 다른 글로 나아가게 될 거니까요. ^0^

  • 2023-02-04 08:42

    ㅋ 위로보다 감사를 먼저 했어야 한다는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겸목도 마이~~~~ 성장했을 것이네요^^ 애쓰셨습니다~~ 문학처방전을 쓰겠다는 발심의 순간에 함께 했던 저로서는 이렇게 마침표를 찍는 겸목의 순간에 또 함께 해서 좋습니다~~~~ 겸목의 글로 또 봅시다~~ 언제고 어디에서든 다시.

  • 2023-02-04 09:07

    문학 처방전 너무 잘 읽고 있었어요!
    마지막이라니 아쉽네요ㅠ
    또 좋은 글 보여주세요~^^

  • 2023-02-04 09:28

    그간 문학처방전 덕분에 의미있게 책선물도 할수 있었지요~~
    친구분 덕분에 어린겸목샘의 이야기도 들을수 있었네요~^^
    감사해요~좋은글을 읽게 해주셔서^^

  • 2023-02-04 12:07

    겸목님의 친구 선형님을 응원하고 싶어집니다.
    선형님이 공을 들인 덕분에 지금 우리가 애정하는 겸목이 될 수 있었구나, 고맙기도 하고요. 하하하
    겸목의 문학 처방전을 읽는 즐거움이 이 글로 끝이라니 아쉽지만, 또 다른 글로 돌아 올 겸목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2023-02-04 20:34

    그러게요.. 연재마감에 매우 섭섭한 또 하나의 일인입니다.'날카로운 윤리의식과 날렵한 상상력'은 '문학처방전'의 미덕이기도 했죠.

    마침 제게도 친구가 준 황정은의 '일기'가 있어요.
    문학처방전 덕분에 다시 한번 촘촘히 읽어봐야겠어요.겸목샘~~그간 많이 애쓰셨어요!^^

  • 2023-02-04 22:47

    문학처방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황정은의 <일기> 문장을 다시 대하니 저는 너무 평평하게 읽어 버렸던게 아닌가 싶네요...
    겸목샘도 건강하시기를...그래서 또 뵈요~

  • 2023-02-05 06:32

    황정은 작가는 십년 전 ‘라디오 책다방’ 이라는 팟캐스트를 통해 알게 되었는데요. 왜인지 그의 작품은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겸목샘의 이번 문학처방전을 통해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아요.

    유독 소설 읽기를 힘들어하는 편인 저에게, 겸목샘의 문학처방전은 마치 다 깎아놓은 과일을 먹기만 하면 되는 기쁨을 주었더랬습니다. 그 과일을 깎기까지의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언제가 글쓰기 수업에서 지도받고 함께 공부하고 싶습니다^^

    오늘의 무사함에 빚지고 있는 모두(모든 것)에 감사하며…

  • 2023-02-05 06:52

    그 동안 겸목의 처방전 리스트에
    언급되었던 친구들이, 한켠 부럽기도 했다.
    그들이 겸목에게 특별한 편지를 받는 구나, 싶었다.
    그러면서 겸목이 참 글을 잘 쓰는구나, 싶었다.
    그게 또 부럽기도 했다.
    무사한 일상이 누군가의 수고로움으로 꾸려진다면
    쉽게 읽히는 글에는 글쓴이의 고민과 애씀이
    더욱 녹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겸목의 글이 그러했다.
    그런 글들은 참 고맙다.
    아, 생각해보니 쉽게 잘 읽히는 좋은 글을 좋아한다는 것
    그 역시 이기적인 욕심이라는 생각도 든다.
    난 편하게 읽을께, 고민은 당신들이 해주라.

    그러나 나 역시 겸목의 글을 부러워하기 전에
    먼저 감사의 인사를 건내고 싶다.

    잘 읽었어요. 고마워요.

  • 2023-02-05 07:22

    샘 저도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계속 읽겠습니다

  • 2023-02-05 19:52

    그간 수고 많았어요.
    다른 글로 또 보겠죠?

  • 2023-02-05 20:15

    잘 읽었습니다. 황정은 작가의 <일기>가 무척 읽고 싶어지네요. 산다는 것은 준엄한 일이고 살아남는 것 또한 그런 일이겠지요. 좋은 친구를 두신 것 같아서 부럽습니다.

  • 2023-02-06 06:18

    다른 분들의 처방을. 통한 제 마음의 치료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응원합니다, 겸목샘!!

  • 2023-02-06 10:11

    양생과 글쓰기에 글을 올리면서 처음 겸목의 연재글을 보고
    한 편씩 찾아서 아껴가며 매일 매일 읽기 시작했는데, 마감한다고요?
    이거슨 반칙입니다!
    하지만 고생했습니다. 수고로움에 감사합니다

  • 2023-02-06 17:09

    얼굴은 본 적 없지만, 선형님에게 애틋한 마음이 생겨요. 그리로 겸목의 뒤늦은 감사의 인사에 울컥합니다. ^^:

    '나의 무사(無事)함이 누군가의 분투의 대가라는 것'을 당분간 곱씹게 될 것 같아요. 최근 들어서 누군가의 분투를 자주 발견하게 되는 것 같거든요.

    겸목의 처방전을 선물로 받고, 처방전대로 실천도 해보고 종종 아껴 보게 됩니다. 겸목의 분투로 저의 무사함을 지켜갈 수 있어서 고마워요.

    고생 많으셨어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

겸목의 문학처방전
  무사(無事), 누군가의 분투의 대가 -위암에 황정은의 에세이집『일기』를 처방합니다     황정은을 좋아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무사(無事)는 누군가의 분투를 대가로 치르고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숨 막히는 ‘말’들이 있다는 걸 아니까, 이 고요의 성질에 질식이라는 성분이 있다는 걸 아니까, 어디로도 가지 않고 이렇게 유지하는 고요가 그래도, 그래서, 나는 좀 징그럽습니다. (황정은, 『일기』, 창비, 2022년, 41쪽)   황정은의 에세이집 『일기』는 작고 예쁘다. 친구에게도 가벼운 마음으로 선물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니 친구도 좋아할 거라는 생각으로 택배를 보냈다. 그런데 읽다보니 좋은 선물이었는지 불안해진다. 나에게는 불편하게 읽히는 책을 친구는 어떻게 읽고 있을지 궁금하다. 나에게는 질책으로 다가오는 황정은의 말들을 친구는 어떻게 독해하고 있을지 걱정스럽다. 이런 걱정으로 나는 황정은의 『일기』를 여러 번 읽었다. 여러 번 읽으며 든 생각은, 내가 힘들게 읽은 만큼 황정은 또한 힘들게 썼겠구나 하는, 이상한 동질감이다. 독자가 작가를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나도 힘들게 읽고 그도 힘들게 썼으니 피장파장이라는 느낌이다.   무엇이 읽기에 힘들었을까? ‘징그럽다’는 그의 생생한 감정이다. 나의 무사(無事)함이 누군가의 분투의 대가라는 것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무한 경쟁과 탐욕의 시대, 무사하고 무탈함을 바라는 것은 욕망의 기본값이 아닐까? 그런데 오늘날은 ‘보통’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결코 보통의 대가로 이루어지지 않는 시대다. 무사한 보통의 삶은 많은 비용을 치룰 수 있어야 가능하고, 무사하지...
  무사(無事), 누군가의 분투의 대가 -위암에 황정은의 에세이집『일기』를 처방합니다     황정은을 좋아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 무사(無事)는 누군가의 분투를 대가로 치르고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숨 막히는 ‘말’들이 있다는 걸 아니까, 이 고요의 성질에 질식이라는 성분이 있다는 걸 아니까, 어디로도 가지 않고 이렇게 유지하는 고요가 그래도, 그래서, 나는 좀 징그럽습니다. (황정은, 『일기』, 창비, 2022년, 41쪽)   황정은의 에세이집 『일기』는 작고 예쁘다. 친구에게도 가벼운 마음으로 선물을 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니 친구도 좋아할 거라는 생각으로 택배를 보냈다. 그런데 읽다보니 좋은 선물이었는지 불안해진다. 나에게는 불편하게 읽히는 책을 친구는 어떻게 읽고 있을지 궁금하다. 나에게는 질책으로 다가오는 황정은의 말들을 친구는 어떻게 독해하고 있을지 걱정스럽다. 이런 걱정으로 나는 황정은의 『일기』를 여러 번 읽었다. 여러 번 읽으며 든 생각은, 내가 힘들게 읽은 만큼 황정은 또한 힘들게 썼겠구나 하는, 이상한 동질감이다. 독자가 작가를 걱정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나도 힘들게 읽고 그도 힘들게 썼으니 피장파장이라는 느낌이다.   무엇이 읽기에 힘들었을까? ‘징그럽다’는 그의 생생한 감정이다. 나의 무사(無事)함이 누군가의 분투의 대가라는 것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무한 경쟁과 탐욕의 시대, 무사하고 무탈함을 바라는 것은 욕망의 기본값이 아닐까? 그런데 오늘날은 ‘보통’이라고 말하는 것들이 결코 보통의 대가로 이루어지지 않는 시대다. 무사한 보통의 삶은 많은 비용을 치룰 수 있어야 가능하고, 무사하지...
겸목
2023.02.03 | 조회 536
겸목의 문학처방전
‘월간 부끄러움’ -이석증에 이주란의 단편소설 「넌 쉽게 말했지만」(『한 사람을 위한 마음』, 문학동네, 2019년)을 처방합니다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다   나는 단지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고, 그러나 그후의 삶이 두려워 자주 울었다. 그런 나의 매일에 대한 말들은 할 수 없다기보다는 하면 안 되는 것에 가까웠다. 언젠가 결국엔 ‘그만하라’는 말을 들을 것 같아서였다. 그즈음엔 내가 몇 년 전, 오래 알고 지낸 후배에게 들은 “누나, 그렇게 살지 마세요”라는 말을 자주 복기했다. 쉽게 뱉은 말이었을까, 어렵게 꺼낸 말이었을까, 비아냥댄 걸까, 내게 상처를 받았던 걸까. 그러니까 나는 무엇인가? 나는 내가 거의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다거나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 말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얼마 전 그 후배를 한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주란, 「넌 쉽게 말했지만」, 59쪽)   H가 직장을 그만둘 때의 심정은 이주란의 단편소설 「넌 쉽게 말했지만」의 주인공과 똑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퇴사에는 공통된 감정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소설 속 주인공은 “다 싫다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고, “두세 달만 쉬고 싶었는데 아예 그만두지 않는 한, 두세 달을 쉴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 외곽에 있는 엄마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누나, 그렇게 살지 마세요”라고 했던 후배의 말을 곱씹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미안해, 시간이 없어”라는 말을 입에...
‘월간 부끄러움’ -이석증에 이주란의 단편소설 「넌 쉽게 말했지만」(『한 사람을 위한 마음』, 문학동네, 2019년)을 처방합니다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다   나는 단지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고, 그러나 그후의 삶이 두려워 자주 울었다. 그런 나의 매일에 대한 말들은 할 수 없다기보다는 하면 안 되는 것에 가까웠다. 언젠가 결국엔 ‘그만하라’는 말을 들을 것 같아서였다. 그즈음엔 내가 몇 년 전, 오래 알고 지낸 후배에게 들은 “누나, 그렇게 살지 마세요”라는 말을 자주 복기했다. 쉽게 뱉은 말이었을까, 어렵게 꺼낸 말이었을까, 비아냥댄 걸까, 내게 상처를 받았던 걸까. 그러니까 나는 무엇인가? 나는 내가 거의 모든 것을 멈추고 싶었다거나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 말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얼마 전 그 후배를 한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이주란, 「넌 쉽게 말했지만」, 59쪽)   H가 직장을 그만둘 때의 심정은 이주란의 단편소설 「넌 쉽게 말했지만」의 주인공과 똑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퇴사에는 공통된 감정도 포함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소설 속 주인공은 “다 싫다는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고, “두세 달만 쉬고 싶었는데 아예 그만두지 않는 한, 두세 달을 쉴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 외곽에 있는 엄마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누나, 그렇게 살지 마세요”라고 했던 후배의 말을 곱씹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미안해, 시간이 없어”라는 말을 입에...
겸목
2022.10.24 | 조회 549
겸목의 문학처방전
우리는 ‘다정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김금희의 소설집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마음산책, 2018년)을 처방합니다     화병, 답답하고 섭섭하고 화가 난다 우리 아파트 종이 배출일이 화요일임을 기억하는 일, 가족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외식 갈 맛집 리스트를 뒤져보는 일, 코로나에 걸린 친구에게 기프티콘을 보내는 일, 카페에서 장시간 있으려면 콘센트가 있는 자리를 골라잡는 일, 식당 키오스크 앞에서 순두부와 비빔밥 사이에서 갈등하는 일 등 인생은 시시콜콜한 작은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잘 쌓아올린 나무토막들 가운데 한두 개쯤 빼버려도 굳건하게 버티는 젠가게임처럼. 그러나 한두 개쯤 빼버려도 그만인 나무토막들이 수북해질 때 젠가는 균형을 잃고 쓰러진다. 그러니까 티끌같이 작은 일들을 얕잡아봐서는 안 된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에는 티도 안 나는, 눈치도 못 채는 작은 틈과 균열이 있다. 그렇다고 강박증에 걸릴 필요는 없다. 약간의 주의력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S와 세 번 만나는 동안 흔히 ‘사소한 일상’이라고 말하는 ‘사소함’을 오래 생각했다.   S는 ‘화병’으로 문학처방전을 의뢰했다. 화병은 일이 잘 안 풀릴 때 가슴이 답답해지고 화가 치밀어 심장에 열이 오르고 온몸이 뜨거워지는 증상을 이른다. S에게는 어떤 답답한 일이 있는지 이야기를 나눠봤다. S의 남편 회사는 몇 년 전에 지방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본사로 옮겨갔지만, S의 남편은 서울에 남았다. 이 결정이 그의 직장생활에 하나의 이정표가 되리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외부의 시선에 그는 승진이나 일의 성취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정한’ 사람이 되기로 했다 -김금희의 소설집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마음산책, 2018년)을 처방합니다     화병, 답답하고 섭섭하고 화가 난다 우리 아파트 종이 배출일이 화요일임을 기억하는 일, 가족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외식 갈 맛집 리스트를 뒤져보는 일, 코로나에 걸린 친구에게 기프티콘을 보내는 일, 카페에서 장시간 있으려면 콘센트가 있는 자리를 골라잡는 일, 식당 키오스크 앞에서 순두부와 비빔밥 사이에서 갈등하는 일 등 인생은 시시콜콜한 작은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잘 쌓아올린 나무토막들 가운데 한두 개쯤 빼버려도 굳건하게 버티는 젠가게임처럼. 그러나 한두 개쯤 빼버려도 그만인 나무토막들이 수북해질 때 젠가는 균형을 잃고 쓰러진다. 그러니까 티끌같이 작은 일들을 얕잡아봐서는 안 된다. 모든 일의 시작과 끝에는 티도 안 나는, 눈치도 못 채는 작은 틈과 균열이 있다. 그렇다고 강박증에 걸릴 필요는 없다. 약간의 주의력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S와 세 번 만나는 동안 흔히 ‘사소한 일상’이라고 말하는 ‘사소함’을 오래 생각했다.   S는 ‘화병’으로 문학처방전을 의뢰했다. 화병은 일이 잘 안 풀릴 때 가슴이 답답해지고 화가 치밀어 심장에 열이 오르고 온몸이 뜨거워지는 증상을 이른다. S에게는 어떤 답답한 일이 있는지 이야기를 나눠봤다. S의 남편 회사는 몇 년 전에 지방으로 본사를 이전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본사로 옮겨갔지만, S의 남편은 서울에 남았다. 이 결정이 그의 직장생활에 하나의 이정표가 되리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 외부의 시선에 그는 승진이나 일의 성취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겸목
2022.08.18 | 조회 493
겸목의 문학처방전
  복잡한 마음, 복잡한 진실 -최정화의 단편소설 「잘못 찾아오다」(문학동네, 2018년)을 처방합니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B와는 가끔 SNS로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다. 그 가끔은 1년이기도 하고 6개월이기도 하다. 나와 B는 5~6년 전에 예술워크숍의 담당자와 참가자로 알게 되었다. 대학 졸업을 앞둔 시기에 연기로 진로를 결정한 B는 가끔 연극 공연을 올리거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고 가끔 취업상태이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는 B의 20대는 늘 뭔가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매우 열정적이면서도 매우 냉소적인 인상을 주었다. 안 될 거야, 라든가 별 거 없다, 라는 식으로 쿨한 제스처를 보였지만, 그 내면에는 전전긍긍하는 마음이나 간절함이 있어 보였다. 누군들 안 그럴까? 예술지망생이라는 오래된 직업은 열등감과 우월감이 제멋대로 사람을 휘저어 놓는 직업적 특징을 갖고 있지 않던가? 그런 보편적인 모습과 달리 B만의 특징이라고 하면 매우 예의 바르면서도 매우 막무가내의 상태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만취상태에서도 내가 ‘선생’이라고 무례하게 대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하면서도 한순간에 막말을 날려버리는 후련함이 있었다. 많은 청년들에게서 제멋대로이고 잘난 척하거나 불행한 척하며 폭주하는 건 익히 봐왔지만, 단정하고 예의바른 모습을 유지하려 하다 허물어지는 모습은 좀 새로웠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B는 단정하고 예의바르며 막무가내였다. 내가 기억하는 B의 불일치는 이런 모습이다.   최근 2~3년 동안 B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일과 연기를 병행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여 연기에 집중하려 했는데 하필 코로나가 터져 일이 꼬여버렸다. 주식투자에 중독적으로 빠지기도 했고, 20대를 같이 보낸 남친과도 결별했다....
  복잡한 마음, 복잡한 진실 -최정화의 단편소설 「잘못 찾아오다」(문학동네, 2018년)을 처방합니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B와는 가끔 SNS로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다. 그 가끔은 1년이기도 하고 6개월이기도 하다. 나와 B는 5~6년 전에 예술워크숍의 담당자와 참가자로 알게 되었다. 대학 졸업을 앞둔 시기에 연기로 진로를 결정한 B는 가끔 연극 공연을 올리거나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고 가끔 취업상태이기도 했다. 내가 기억하는 B의 20대는 늘 뭔가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는데 매우 열정적이면서도 매우 냉소적인 인상을 주었다. 안 될 거야, 라든가 별 거 없다, 라는 식으로 쿨한 제스처를 보였지만, 그 내면에는 전전긍긍하는 마음이나 간절함이 있어 보였다. 누군들 안 그럴까? 예술지망생이라는 오래된 직업은 열등감과 우월감이 제멋대로 사람을 휘저어 놓는 직업적 특징을 갖고 있지 않던가? 그런 보편적인 모습과 달리 B만의 특징이라고 하면 매우 예의 바르면서도 매우 막무가내의 상태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만취상태에서도 내가 ‘선생’이라고 무례하게 대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하면서도 한순간에 막말을 날려버리는 후련함이 있었다. 많은 청년들에게서 제멋대로이고 잘난 척하거나 불행한 척하며 폭주하는 건 익히 봐왔지만, 단정하고 예의바른 모습을 유지하려 하다 허물어지는 모습은 좀 새로웠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B는 단정하고 예의바르며 막무가내였다. 내가 기억하는 B의 불일치는 이런 모습이다.   최근 2~3년 동안 B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일과 연기를 병행한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여 연기에 집중하려 했는데 하필 코로나가 터져 일이 꼬여버렸다. 주식투자에 중독적으로 빠지기도 했고, 20대를 같이 보낸 남친과도 결별했다....
겸목
2022.07.10 | 조회 438
겸목의 문학처방전
  침착하고, 꼼꼼하고, 영리하게 ―우울증에 백수린의 단편소설 「폭설」을 처방합니다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   대학교수인 남편과 세 아이, 한적한 교외의 주택, 그의 조건을 떠올릴 때, Y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제 막 40대에 접어든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운이 좋은 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들 부부는 또래들보다 일찍 생활의 기반을 잡았고, 남편의 직업도 안정적이다. 그들 부부에게 위기라고 부를 만한 심각한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정말 그럴까? Y의 남편은 지방대학 교수라 주중에는 학교가 있는 지역에서 지내고 주말에 집에 온다. 아이들은 네 살, 여덟 살, 열 살, 아직은 부모의 손이 많이 가는 때이다. 그의 남편은 아내에게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만, 남편 없이 세 아이를 돌보야 하는 Y의 육아스트레스를 그대로 체감하지는 못한다. 아마도 막연히 아내가 힘들겠구나 짐작하는 정도. 그러나 짐작과 실제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못 견딜 만큼 힘들지는 않아요. 그런데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제가 혼자 아이들을 돌봐야한다는 일에 긴장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 긴장이 하루하루 쌓이다, 남편이 올 때쯤 되면 참을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아요. 남편은 남편대로 학교와 집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 같고, 우리는 우리대로 남편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 같고. 이런 가족형태가 괜찮은지도 모르겠어요.”     부부는 일본 유학시절에 만나 남편은 박사학위를 따고 Y가 석사학위를 마쳤을 때 결혼을 했다. Y의 전공은 ‘환경경영’이다. 대학부터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Y는...
  침착하고, 꼼꼼하고, 영리하게 ―우울증에 백수린의 단편소설 「폭설」을 처방합니다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   대학교수인 남편과 세 아이, 한적한 교외의 주택, 그의 조건을 떠올릴 때, Y는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이제 막 40대에 접어든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운이 좋은 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들 부부는 또래들보다 일찍 생활의 기반을 잡았고, 남편의 직업도 안정적이다. 그들 부부에게 위기라고 부를 만한 심각한 문제는 없을 것 같다. 정말 그럴까? Y의 남편은 지방대학 교수라 주중에는 학교가 있는 지역에서 지내고 주말에 집에 온다. 아이들은 네 살, 여덟 살, 열 살, 아직은 부모의 손이 많이 가는 때이다. 그의 남편은 아내에게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지만, 남편 없이 세 아이를 돌보야 하는 Y의 육아스트레스를 그대로 체감하지는 못한다. 아마도 막연히 아내가 힘들겠구나 짐작하는 정도. 그러나 짐작과 실제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못 견딜 만큼 힘들지는 않아요. 그런데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제가 혼자 아이들을 돌봐야한다는 일에 긴장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그 긴장이 하루하루 쌓이다, 남편이 올 때쯤 되면 참을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아요. 남편은 남편대로 학교와 집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 같고, 우리는 우리대로 남편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 같고. 이런 가족형태가 괜찮은지도 모르겠어요.”     부부는 일본 유학시절에 만나 남편은 박사학위를 따고 Y가 석사학위를 마쳤을 때 결혼을 했다. Y의 전공은 ‘환경경영’이다. 대학부터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Y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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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2 | 조회 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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