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세미나] 『모방의 법칙』 3회차 후기

우현
2024-01-16 22:54
148

 어느덧 3장입니다. 이번주는 유독 내용이 많은 느낌이었는데요, 사회라는 것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있는 파트여서 그런 것 같아요. 사회에 대한 예시를 많이 제시하고 있기도 하지만, “사회는 ‘모방’이며, 모방은 일종의 ‘몽유 상태’다.” 라는 정의를 풀어내기 위해 심리학의 영역까지 끌어오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정군샘은 3장의 내용을 타르드의 논지 중 가장 도전적이고, 그만큼 현대적이며 중요한 지점이라고 강조하셨는데요. 뭐.. 저는 툭툭 걸리는 지점들이 있어 읽기 어려웠지만, 확실히 중요해보이는 것 같습니다. 우선 말부터 도발적이잖아요. 사회는 꿈에 불과 하다니.

 

 우선 사회를 정의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특정 관습을 모방하는 데에 있어서 경제적 유용성이나 법적 효용성만 작용하는 게 아니라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오히려 정신적인 유대를 형성할 수 있는 특정한 의례나 규범, 즉 종교나 정치적인 부분이 더 ‘사회적’이라고 말하죠. 이런 정신적인 유대를 만들어내는 기초에는 모방이 있습니다. 그럼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다른 이를 모방하게 되는 걸까요?

 

 이에 대해 타르드는 권위를 가진 사람들을 모방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모든 사회의 시작이 강압적이고 도전적인 누군가가 권위를 가지게 되면서부터라고 하죠. 그들이 공포라는 감정을 이용해 대중들을 억압하며 ‘권력’을 가지게 된다는 게 일반적인 설명이지만, 타르드는 권력이 아닌 ‘위세’를 이야기하며 위세는 정반대로 작동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요컨데 지배자들이 위세를 가지고 특정 행위를 하는 게 아니라, 피지배자들이 최면에 걸려 지배자들의 행위를 능동적을 해석하고 모방해나간다는 것이죠. 보통 지배자(위세를 가진 사람)는 기존 관습에 저항하거나 대안을 만들어낸 창의적 인물입니다. 그들의 사상이나 행위는 일종의 최면술이 되고, 그들은 최면술사라고 할수도 있겠지요. 그 대안-유행-에 매료된 대중들은, 일종의 몽유-최면-상태에 빠지게 되고, 지배자에게 존경과 위세를 부여합니다. 따라서 사회는 모방이고, 모방은 일종의 몽유 상태에 불과한 것이죠.

 

 이는 기존의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합니다. 이를테면 ‘당시 독일 사람들은 왜 그렇게 나치에 동조했는가?’ 같은 질문에 다른 해석을 줄 수 있다는 것이죠. 기존 해석에 따르면 나치정권의 공포를 이용한 통치와 억압이라고 밖에 볼 수 없지만, 실제로 당시의 독일인들은 상당수가 나치에 동조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에 대해 타르드는 애초에 사회가 몽유상태에 불과하고, 최면에 걸린 대중들이 정권과 히틀러에게 ‘위세’를 부여했다는 식으로 볼 수 있으니까요. 자신들을 억압하는 사회를 대중들이 유지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그럴듯하고 대안적인 관점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저는 뭔가 찜찜함을 지울수가 없었습니다. 타르드의 논지를 밀고 나가면 “억압이 부정적이라는 것도 하나의 최면상태가 아닌가?” 더 나아가 “자신의 행위가 최면상태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나?” 같은 질문에 도달하기 때문이에요. 결국 사회가 모방이라는 것도, 모방이 일종의 몽유 상태라는 것도, 명확히 논증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한 것이죠. 이는 타르드의 라이벌(?)이었던 뒤르켐의 반박이기도 합니다. 타르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심리학자인 이폴리트 텐을 인용하기도 합니다. 인간이라는 생물의 뇌 자체가 일종의 반복기관이며, 기억이나 습관까지도 특정 세포와 기관의 모방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인간 자체부터 그런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니까, 뭔가 답답한, 사회의 ‘외부’가 없다는 느낌이 듭니다. 정말 과학이라기 보다는 형이상학에 가까운 것 같아요.

 

 그럼에도 굉장히 시대를 앞서갔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습니다. 잘은 모르지만, 들뢰즈가 영감을 참 많이 받았겠다는 생각도 들고, 계속되는 모방과 새로운 최면 상태를 반복하는 게 사회이고, 그 속에서의 차이와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다면, 정말 인식 자체가 바뀌는 듯한 느낌도 들지요. (그 느낌을 더 강하게 받으려면 공부가 더 필요할 듯 합니다.)

 

ㅎㅎ.. 여러분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문탁의 성향상 많은 사람들이 타르드를 재밌어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구요.

댓글 3
  • 2024-01-19 00:34

    『모방의 법칙』3장은 그야말로 대담함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를테면 1-2장에 걸쳐 타르드는,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반복으로서 모방' 개념을 정립합니다. 3장에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사회는 모방이며 모방은 일종의 몽유 상태다'라고 합니다. 왜 '몽유 상태'인지는 우현의 후기 세 번째 단락에서 잘 설명되고 있고요. 그러니까 '사회'가 구성되고 그것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모방이 작동하기 위한 토대가 필요합니다. 그 토대는 통치의 측면에서 볼 때는 '위세(prestige)'이고 피통치의 측면에서 볼 때는 '최면'입니다. 인용문을 한 번 볼까요.

    "모든 고대사회의 시작에는 더구나 최고로 강압적이며 단호한 몇몇 사람들이 행하는 권위의 커다란 과시가 필요했다. 사람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그들은 특히 공포와 사기를 통해서 지배했는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설명으로는 분명히 불충분하다. 그들은 위세prestige로 지배했다. 최면술사라는 예만이 우리에게 이 말의 깊은 뜻을 이해하게 해 준다. 최면술사는 최면에 걸린 사람에게서 맹목적인 믿음과 욕망의 일정한 잠재력이 있는데 이 잠재력은 갖가지 종류의 기억 속에 비활성화되어 있다는 것, 즉 잠들어 있을 뿐 죽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그 힘은 연못의 물이 흐르기를 갈망하는 것처럼 현실화되기를 갈망하는데, 최면술사만이 일련의 특이한 상황을 통해 그 힘에 필요한 출구를 열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122쪽)

    저는 사실 이 부분을 읽을 때, (조금? 진짜? 많이?) 깜짝 놀랐습니다. 이를테면 과거에 '공산주의는 종교나 다름없다' 같은 말로 맑시즘을 비난할 때, 부당한 비난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종교 같은 면이 없지는 않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럴만한 요소들이 실제로 많기도 했고요. 그런데 동시에 그것은 사회-역사에 대한 '과학적 이론'의 외양을 띄고 있기도 합니다. 정치와 종교와 과학이라는 삼극이 도대체 어떻게 하나 안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인지 그 때는 뭐라 설명하기 어려워서 덮어두었는데요, 타르드의 위와 같은 분석에 따르면 그것은 '기억 속의 비활성화'된 어떤 욕망의 출구를 열어주는 '최면'이었던 셈입니다. 이건 다만 맑스주의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닐 겁니다. 이번 주 신유물론 세미나에서 배운 라투르의 '팩티쉬(factish)' 개념과도 연관지어서 생각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실의 실험실에서 그들의 제조에 덧붙이고, 물신에 그들의 제작자에 의한 명시적이고 성찰적인 제조를 덧붙인다면, 비판의 두가지 주요 자원은 사라질 것이다. 모루 뿐 아니라 망치마저도 말이다. 그들 대신에 나타나는 것은, 우상파괴주의에 의해 파괴되어온 것이자, 항상 거기 있어온 것이다. 즉 그것은 항상 다시 새롭게 새겨져야만 하는 것이자, 행위하기와 주장하기에 필요한 것이다." - 라투르,『판도라의 희망』, 433쪽

    타르드와 라투르를 비스듬히 이어보면, 요컨대 어딘가에 잠든 '사실'을 그저 '발견'하기만 하면 되는 '과학'이 아니라, '번역' 함으로써 '주장'을 구성해야만 성립하는 '과학' 역시 사회적-담론적 수준에서는 '최면'일 수밖에 없다, 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지점에서 fact와 fetish는 하나, factish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타르드가 '모방'의 원천으로 이야기하는 특이적 '발명' 같은 개념까지 생각해 본다면 라투르-타르드 사이에 그을 수 있는 연결선을 좀 더 진한 실선으로 그을 수 있습니다.

    '위세(prestige)'의 의미 중에 '매혹'이 있다는 점도 재미있습니다. 만약 사회가 '몽유-최면 상태'라고 한다면, 한 사회의 개별 구성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다들 무언가에 매혹되어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자본주의라면 화폐와 그것의 증식 매커니즘에 매혹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테고요. 사회와 역사를 보편적 '법칙'의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고 이와 같은 '매혹'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어떨까요? 당연하게도 다른 '매혹'에 따라 사회는 얼마든지 가변적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요컨대 사회의 현재와 같은 상태를 상대화 할 수 있게 됩니다. 랏자라또 같은 현대 정치철학자들이 타르드에 주목하는 이유도 알 것 같고요.

    여하간 두꺼운 책 두 권을 한꺼번에 읽느라 방학이 사라져버리기는 했습니다만, 읽을수록 새로 만들어지는 교집합(라투르-타르드, 타르드-가타리, 타르드-라이히, 타르드-스피노자)들이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언제가 좀 더 규모가 큰 세미나에서 함께 읽으면 좋겠네요. ^^

    • 2024-01-19 08:57

      김홍중 교수의 라투르소개 동영상을 보았는데요. 라투르가 고교시절에는 니체를 탐독했고, 20대에는 데리다를 가장 많이 읽었대요. 그리고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과 <앙띠오이디푸스>를 경유해서 타르드를 읽었다고 하더라고요. 미셀셰르와는 아주 깊은 관계였고요. 사회학에서는 뒤르껨-부르디외와는 전혀 다른 계열로 뒤르껨의 사회적 '사실'에 대해 비판적이었던게죠. 이른바 사회적 '사실'에 대한 급진적 비판으로 팩티쉬를 놓아보면 더 잘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 2024-01-20 17:50

    전부터 우현샘과 정군샘의 후기를 따라 읽다 어제는 지하철로 장시간 이동하며 요요샘 말씀하신 김홍중 교수 동영상을 봤어요. 새로운 '지식 패치'가 눈에 들어오는 듯 묘한 기분을 느낍니다. ㅎ 어쩌면 우현샘의 질문과도 연결이 될 듯한데 동영상에서 질문자들이 제기한 정치적임의 의미, 머뭇거리는 답변과 곤혹스러운 표정들도 기억에 남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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