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이예술
  기온이 아닌 기운으로 바라보는 세상     동은     1. 날씨라는 변수   나는 비오는 날이 싫다. 건강상의 이유가 있지만 비오는 날 뿐만 아니라 흐린 날에도 하루종일 컨디션이 저조하다. 반대로 날이 좋을 땐 무엇을 하든 의욕이 넘친다. 하루의 시작 자체가 다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날씨에 따라 컨디션에 영향을 많이 받다 보니 최근 기후위기로 시작된 변덕스런 기후가 난감하다. 특히 지난 여름 날씨는 굉장했다. 분명 해가 내리쬐었는데 고개만 돌리면 갑자기 하늘이 까매지고 땅을 뚫어버릴 기세로 비가 쏟아진다. 그럴 때면 하루가 다 어그러져버린 것만 같다. 그렇게 멍하니 내리는 비를 보고 있다보면 그러지 말라는 듯 갑자기 다시 햇볕이 쏟아진다. 덕분에 나도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혼란스럽다.     변덕스러운 날씨는 나에게 곧 ‘일상의 변수’를 의미한다. 일상이라는건 어느정도 엇비슷한 리듬을 유지해야 하는데 요즘 날씨에 그런 리듬이란 없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규칙적이다. 매일 해야 하는 일이 있고, 자거나 일어나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변덕스런 날씨에 나를 맞추려 하면, 일상을 지킬 수 없어진다. 그래서인지 일을 할 때는 바깥을 보지 않으려 애쓰게 된다. 창 없는 사무실에서 시곗바늘에 의지해 일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끝난다. 일을 무사히 끝내고, 날씨에 휘둘리지도 않았지만 이런 날에는 어딘가 단절된 듯한 허전함이 남는다. 왜 허전한 걸까? 처음에는 일하기 싫어서라고 생각했다. 어느 나라에서는 덥거나 추우면 일을 쉬기도 한다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으니까. ‘핑계가 거창하기도...
  기온이 아닌 기운으로 바라보는 세상     동은     1. 날씨라는 변수   나는 비오는 날이 싫다. 건강상의 이유가 있지만 비오는 날 뿐만 아니라 흐린 날에도 하루종일 컨디션이 저조하다. 반대로 날이 좋을 땐 무엇을 하든 의욕이 넘친다. 하루의 시작 자체가 다른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날씨에 따라 컨디션에 영향을 많이 받다 보니 최근 기후위기로 시작된 변덕스런 기후가 난감하다. 특히 지난 여름 날씨는 굉장했다. 분명 해가 내리쬐었는데 고개만 돌리면 갑자기 하늘이 까매지고 땅을 뚫어버릴 기세로 비가 쏟아진다. 그럴 때면 하루가 다 어그러져버린 것만 같다. 그렇게 멍하니 내리는 비를 보고 있다보면 그러지 말라는 듯 갑자기 다시 햇볕이 쏟아진다. 덕분에 나도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혼란스럽다.     변덕스러운 날씨는 나에게 곧 ‘일상의 변수’를 의미한다. 일상이라는건 어느정도 엇비슷한 리듬을 유지해야 하는데 요즘 날씨에 그런 리듬이란 없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규칙적이다. 매일 해야 하는 일이 있고, 자거나 일어나는 시간이 정해져 있다. 변덕스런 날씨에 나를 맞추려 하면, 일상을 지킬 수 없어진다. 그래서인지 일을 할 때는 바깥을 보지 않으려 애쓰게 된다. 창 없는 사무실에서 시곗바늘에 의지해 일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끝난다. 일을 무사히 끝내고, 날씨에 휘둘리지도 않았지만 이런 날에는 어딘가 단절된 듯한 허전함이 남는다. 왜 허전한 걸까? 처음에는 일하기 싫어서라고 생각했다. 어느 나라에서는 덥거나 추우면 일을 쉬기도 한다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으니까. ‘핑계가 거창하기도...
동은
2025.04.04 | 조회 541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문탁네트워크  '공성의 지혜'를 주제로 올해 불교학교에서 공부하는 요요, 인디언, 두루미가 릴레이로 글을 올리는 코너입니다. <금강경>과 <반야심경> 등의 경전을 읽는 불교학교의 공부와 연재 글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보살이 사는 세상 『금강경』으로 배우는 보살의 존재론   세상이 불타고 있다   지난 열흘 산불 소식에 발을 동동 굴렀다. 매일 문탁에서 같이 밥을 먹는 기린의 어머니가 계신 바닷가 후포집 앞에까지 그을음이 날아왔다. 청송의 장소익 선생님도 전태일 연극단의 배우들을 데리고 잠시 청송나무닭 연구소를 떠났다고 했다. 불타는 곳이 어디 영덕, 청송, 안동, 산청 뿐이었겠는가? 사람들과 산에 사는 동식물들이 겪을 고통에 대한 불안과 걱정으로 우리 가슴에도 불이 활활 타올랐다. tv화면으로 시뻘겋게 산하대지를 태우는 산불을 보며 ‘일체가 불타고 있다’고 설한 「불타오름경」이 떠올랐다.   비구들이여, 일체는 불타오르고 있다. 어떤 일체가 불타오르고 있는가? 눈은 불타오르고 있다. 형색은 불타오르고 있다. 눈의 알음알아는 불타오르고 있다. 눈의 감각접촉은 불타오르고 있다.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불타오르고 있다. 그러면 무엇에 의해 불타오르고 있는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태어남과 늙음, 죽음과 근심, 탄식, 경제걱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으로 불타오르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쌍윳따니까야』 「불타오름경」)   대승경전인 『법화경』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불타오르는 집으로 비유하는 화택(火宅)의 비유도 나온다. 불타는 집 안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놀이의 재미에 빠져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구하는 이야기다. 화택의 비유가 더...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문탁네트워크  '공성의 지혜'를 주제로 올해 불교학교에서 공부하는 요요, 인디언, 두루미가 릴레이로 글을 올리는 코너입니다. <금강경>과 <반야심경> 등의 경전을 읽는 불교학교의 공부와 연재 글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보살이 사는 세상 『금강경』으로 배우는 보살의 존재론   세상이 불타고 있다   지난 열흘 산불 소식에 발을 동동 굴렀다. 매일 문탁에서 같이 밥을 먹는 기린의 어머니가 계신 바닷가 후포집 앞에까지 그을음이 날아왔다. 청송의 장소익 선생님도 전태일 연극단의 배우들을 데리고 잠시 청송나무닭 연구소를 떠났다고 했다. 불타는 곳이 어디 영덕, 청송, 안동, 산청 뿐이었겠는가? 사람들과 산에 사는 동식물들이 겪을 고통에 대한 불안과 걱정으로 우리 가슴에도 불이 활활 타올랐다. tv화면으로 시뻘겋게 산하대지를 태우는 산불을 보며 ‘일체가 불타고 있다’고 설한 「불타오름경」이 떠올랐다.   비구들이여, 일체는 불타오르고 있다. 어떤 일체가 불타오르고 있는가? 눈은 불타오르고 있다. 형색은 불타오르고 있다. 눈의 알음알아는 불타오르고 있다. 눈의 감각접촉은 불타오르고 있다. 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는 즐겁거나 괴롭거나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느낌은 불타오르고 있다. 그러면 무엇에 의해 불타오르고 있는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불타오르고 있다. 태어남과 늙음, 죽음과 근심, 탄식, 경제걱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으로 불타오르고 있다고 나는 말한다.(『쌍윳따니까야』 「불타오름경」)   대승경전인 『법화경』에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불타오르는 집으로 비유하는 화택(火宅)의 비유도 나온다. 불타는 집 안에서 아이들이 놀고 있다. 놀이의 재미에 빠져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구하는 이야기다. 화택의 비유가 더...
요요
2025.03.31 | 조회 560
방과 후 고전 중
  [동은의 음양탐구 ⓵] 태극도가 전하는 음양의 원리     동은 동양고전은 세계의 경이와 아득함을 담고 있는 지혜다. 음양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세계를 이해했는지 정리해보고 싶다.     주렴계가 <태극도설>을 쓴 이유      음陰과 양陽은 고전을 읽다보면 꼭 한 번쯤 마주치게 되는 단어다. 응달을 의미하는 음과 볕을 의미하는 양은 흔히 태양과 달로 표상되지만, 꼭 태양과 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나 남자라고 하기도 하고, 아래와 위 같이 어떤 개념이나 위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것을 보면 음양은 사물과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인 것 같다. 나의 경우엔 ‘음양’하면 음과 양이 무엇인지보다 우리나라 태극기가 떠오른다. 태극기의 가운데 있는 ‘태극’은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만물이 음양의 조화로 인해 생명을 얻는다는 자연의 진리가 담겨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태극을 이루고 있는 음양은 자연의 진리에 따라 움직이는 ‘무언가’로 보인다. 중국의 여러 학자들도 태극이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논했다. 그 중에 송宋대 철학자 주렴계(1017-1073)는 <태극도설太極圖說>을 통해서 이 ‘태극’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주렴계는 <태극도설>에서 음과 양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주렴계의 <태극도설>은 기본적으로 <태극도>라는 그림을 해설하는 글이다. <태극도>는 송나라 초기에 어느 신선이 돌벽에 새긴 그림이라고 전해지는데, 원래는 <무극도>라는 그림이었다고 한다. 주렴계는 이 그림을 새롭게 <태극도>라고 이름을 붙이고 이를 설명하는 <태극도설>을 썼다. <태극도>와 <무극도>는 결국 이름만 다른 그림이다. 두 그림 사이에 다른 점은 보는 순서에 있다. 본래 <무극도>는 아래에서 위를...
  [동은의 음양탐구 ⓵] 태극도가 전하는 음양의 원리     동은 동양고전은 세계의 경이와 아득함을 담고 있는 지혜다. 음양을 통해 그들이 어떻게 세계를 이해했는지 정리해보고 싶다.     주렴계가 <태극도설>을 쓴 이유      음陰과 양陽은 고전을 읽다보면 꼭 한 번쯤 마주치게 되는 단어다. 응달을 의미하는 음과 볕을 의미하는 양은 흔히 태양과 달로 표상되지만, 꼭 태양과 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나 남자라고 하기도 하고, 아래와 위 같이 어떤 개념이나 위치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것을 보면 음양은 사물과 개념을 모두 포괄하는 개념인 것 같다. 나의 경우엔 ‘음양’하면 음과 양이 무엇인지보다 우리나라 태극기가 떠오른다. 태극기의 가운데 있는 ‘태극’은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만물이 음양의 조화로 인해 생명을 얻는다는 자연의 진리가 담겨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태극을 이루고 있는 음양은 자연의 진리에 따라 움직이는 ‘무언가’로 보인다. 중국의 여러 학자들도 태극이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논했다. 그 중에 송宋대 철학자 주렴계(1017-1073)는 <태극도설太極圖說>을 통해서 이 ‘태극’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주렴계는 <태극도설>에서 음과 양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주렴계의 <태극도설>은 기본적으로 <태극도>라는 그림을 해설하는 글이다. <태극도>는 송나라 초기에 어느 신선이 돌벽에 새긴 그림이라고 전해지는데, 원래는 <무극도>라는 그림이었다고 한다. 주렴계는 이 그림을 새롭게 <태극도>라고 이름을 붙이고 이를 설명하는 <태극도설>을 썼다. <태극도>와 <무극도>는 결국 이름만 다른 그림이다. 두 그림 사이에 다른 점은 보는 순서에 있다. 본래 <무극도>는 아래에서 위를...
동은
2025.03.24 | 조회 521
토용의 서경리뷰
  문왕을 찾아라   유가 경전을 읽다보면 ‘요순우탕문무주공’을 자주 보게 된다. 처음에는 ‘태정태세문단세’도 아니고 “이건 또 뭐지?” 싶었다. 이것은 주자가 만들어놓은 도의 전승 계보이다. 그리고 『서경』의 주인공들이며, 주공을 제외하고 고대 성왕이라 칭송받는 사람들이다. ‘서경리뷰’는 요순시대를 거쳐 하나라와 상나라를 지나 이제 주나라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상나라를 정벌한 왕은 무왕이다. 그러나 그 전에 무왕의 길을 닦아 놓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무왕의 아버지 문왕이다. 주나라 건국에 문왕을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다. 문왕에 관한 언급은 유가 관련 책이라면 빠지지 않고 나온다. 더구나 『서경』은 요순과 하상주 삼대의 기록물이기 때문에 당연히 문왕에 대한 이야기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주나라 기록인 「주서」의 시작은 무왕부터이다. 무왕이 실제로 상나라를 정벌하고 주나라를 건국한 왕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왕에 대한 기록은 「상서」 뒷부분에 있는 <서백감려西伯戡黎> 딱 한 편에 보인다. 그마저도 문왕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서백감려>는 ‘서백이 려를 쳐서 이겼다’는 뜻이다. 여기서 서백은 문왕을 지칭한다. 상나라 때는 문왕을 서백이라 불렀고, 문왕은 후에 추존된 명칭이다. 편명을 보면 문왕이 려를 정벌하게 된 전후사정의 기록과 함께 문왕의 훈계 내용도 들어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내용은 전혀 없다. 우선 서백이라는 칭호를 보자. 상나라는 자신의 중심통치 지역을 벗어난 외곽의 다른 종족들과 관계를 맺고 교류를 했다. 이 정치체들을 방方이라 하고 그 지도자를 방백方伯이라고 불렀다. 주나라도 상나라 정벌 이전에는 주방으로서 서쪽에 있던 여러 방들 중 하나였다. 세력이 점차 커지자 문왕은 상나라로부터...
  문왕을 찾아라   유가 경전을 읽다보면 ‘요순우탕문무주공’을 자주 보게 된다. 처음에는 ‘태정태세문단세’도 아니고 “이건 또 뭐지?” 싶었다. 이것은 주자가 만들어놓은 도의 전승 계보이다. 그리고 『서경』의 주인공들이며, 주공을 제외하고 고대 성왕이라 칭송받는 사람들이다. ‘서경리뷰’는 요순시대를 거쳐 하나라와 상나라를 지나 이제 주나라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상나라를 정벌한 왕은 무왕이다. 그러나 그 전에 무왕의 길을 닦아 놓은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무왕의 아버지 문왕이다. 주나라 건국에 문왕을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다. 문왕에 관한 언급은 유가 관련 책이라면 빠지지 않고 나온다. 더구나 『서경』은 요순과 하상주 삼대의 기록물이기 때문에 당연히 문왕에 대한 이야기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주나라 기록인 「주서」의 시작은 무왕부터이다. 무왕이 실제로 상나라를 정벌하고 주나라를 건국한 왕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왕에 대한 기록은 「상서」 뒷부분에 있는 <서백감려西伯戡黎> 딱 한 편에 보인다. 그마저도 문왕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서백감려>는 ‘서백이 려를 쳐서 이겼다’는 뜻이다. 여기서 서백은 문왕을 지칭한다. 상나라 때는 문왕을 서백이라 불렀고, 문왕은 후에 추존된 명칭이다. 편명을 보면 문왕이 려를 정벌하게 된 전후사정의 기록과 함께 문왕의 훈계 내용도 들어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내용은 전혀 없다. 우선 서백이라는 칭호를 보자. 상나라는 자신의 중심통치 지역을 벗어난 외곽의 다른 종족들과 관계를 맺고 교류를 했다. 이 정치체들을 방方이라 하고 그 지도자를 방백方伯이라고 불렀다. 주나라도 상나라 정벌 이전에는 주방으로서 서쪽에 있던 여러 방들 중 하나였다. 세력이 점차 커지자 문왕은 상나라로부터...
토용
2025.03.19 | 조회 498
Socio-sociolgy
Socio-Sociology는 문탁네트워크 사회학 세미나팀의 연재코너입니다. 2023년부터 진행 중인 ‘사회학 고전 읽기’ 세미나에서 읽어온 주요한 사회학 고전들과 더불어 함께 읽을 만한 텍스트들, 주제들을 중심으로 회원들이 고민한 글들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자본주의 도시의 헤테로토피아 - 앙리 르페브르의 『도시에 대한 권리』, 『도시 혁명』   “대도시는 바로 가장 많은 (그리고 대부분의) 소비자들의 거주지이기 때문에 그처럼 커진 것이다. 따라서 도시의 확대는 본질적으로는 나라의 중심이 되는 도시에 소비가 집중되는 것에 기인한다.” ― 베르너 좀바르트, 이상률 옮김, 『사치와 자본주의』, 문예출판사, 51쪽.   좀바르트의 저러한 말처럼, 현대 소비주의 문제의 양상을 살피는 데 있어서 ‘도시’는 핵심적인 키워드이다. 현대의 대도시와 과거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던 도시들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을까? 여러 고려점들이 있을 수 있지만, 자본주의 체제 이전과 이후의 ‘도시’는 동일 맥락 아래에서 비교할 수 없을 듯 하다. 현대 도시는 무엇보다 산업, 행정, 소비의 중심지이면서 국가의 영토 전체를 위계화하는 꼭짓점이다. 그렇게 도시와 非도시는 분할되고 종속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분할은 비단 도시와 시골 사이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도시 내부에서도 중심과 외곽의 위계가, 중심 안에서도 향유계층과 봉사계층의 위계가 있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 시스템 내부의 공간 분할과 작동방식을 살펴보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작동 방식에 대한 탐구가 될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2025 사회학 세미나 : 현대 소비주의 탐구’의 보조 과제로 ‘자본주의와 공간’을 주제로 공부를 해보려고 한다. 물론 이 공부는 실재하는...
Socio-Sociology는 문탁네트워크 사회학 세미나팀의 연재코너입니다. 2023년부터 진행 중인 ‘사회학 고전 읽기’ 세미나에서 읽어온 주요한 사회학 고전들과 더불어 함께 읽을 만한 텍스트들, 주제들을 중심으로 회원들이 고민한 글들을 연재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자본주의 도시의 헤테로토피아 - 앙리 르페브르의 『도시에 대한 권리』, 『도시 혁명』   “대도시는 바로 가장 많은 (그리고 대부분의) 소비자들의 거주지이기 때문에 그처럼 커진 것이다. 따라서 도시의 확대는 본질적으로는 나라의 중심이 되는 도시에 소비가 집중되는 것에 기인한다.” ― 베르너 좀바르트, 이상률 옮김, 『사치와 자본주의』, 문예출판사, 51쪽.   좀바르트의 저러한 말처럼, 현대 소비주의 문제의 양상을 살피는 데 있어서 ‘도시’는 핵심적인 키워드이다. 현대의 대도시와 과거에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던 도시들을 동일 선상에서 비교할 수 있을까? 여러 고려점들이 있을 수 있지만, 자본주의 체제 이전과 이후의 ‘도시’는 동일 맥락 아래에서 비교할 수 없을 듯 하다. 현대 도시는 무엇보다 산업, 행정, 소비의 중심지이면서 국가의 영토 전체를 위계화하는 꼭짓점이다. 그렇게 도시와 非도시는 분할되고 종속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분할은 비단 도시와 시골 사이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도시 내부에서도 중심과 외곽의 위계가, 중심 안에서도 향유계층과 봉사계층의 위계가 있다.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 시스템 내부의 공간 분할과 작동방식을 살펴보는 것은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의 작동 방식에 대한 탐구가 될 수 있다.     그런 이유에서 나는 ‘2025 사회학 세미나 : 현대 소비주의 탐구’의 보조 과제로 ‘자본주의와 공간’을 주제로 공부를 해보려고 한다. 물론 이 공부는 실재하는...
정군
2025.03.16 | 조회 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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