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재 읽기
해완이의 쿠바통신
김해완 청소년 때 인문학 지식공동체인 남산강학원에 눌러앉아서 오 년간 읽는 법, 쓰는 법, 질문하는 법을 배웠다. 그 후로 쭉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2014년에는 남산강학원과 인문의역학 연구소 감이당이 함께 하는 MVQ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뉴욕에 가서 살짝이나마 세계를 엿보았다. 2017년에는 공부와 실험을 계속하기 위해 쿠바로 넘어갔다가, 공부의 방향을 의학으로 틀게 되었다. 앞으로 신체와 생활이 결합되는 글쓰기를 해보고 싶다. 저서로는 『다른 십대의 탄생』(2011),『리좀 나의 삶 나의 글』(2013),『돈키호테, 책을 모험하는 책』(2015), 『뉴욕과 지성』(2018)이 있다. 파스텔색의 청년 P-14. C가 새벽마다 타는 마을버스다. 이제 막 기점에서 출발한 버스는 텅 비어있다. 대학교에 가려면 그가 사는 아바나 끝자락에서 버스로 두 시간은 달려야 한다. 왕복 네 시간 거리를 사 년째 통학하고 있다. 그간 C는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쪽잠을 자는 법을 익혔다. 곧 버스는 형형색색의 사람들로 가득 찬다. 당장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허름한 버스 풍경과 대조를 이룬다. 카리브해 쿠바는 원색의 땅이다. 물, 자동차, 건물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행색도 번쩍번쩍하다. 호피무늬 레깅스를 입은 할머니, 머리띠부터 드레스까지 핑크색으로 통일하고 아침 강의를 나가는 교수, 금빛 목걸이와 귀걸이를 뽐내며 일터로 가는 청년. 맨살을 훤히 드러내는 것은 이 뜨거운 나라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그 속에서 C는 홀로 파스텔색인 것처럼 옅게 존재한다. 청바지, 단정한 티셔츠, 검은 운동화에 검은 책가방이 그의 복장이다. 한여름 더위에 나시를 꺼내...
김해완 청소년 때 인문학 지식공동체인 남산강학원에 눌러앉아서 오 년간 읽는 법, 쓰는 법, 질문하는 법을 배웠다. 그 후로 쭉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2014년에는 남산강학원과 인문의역학 연구소 감이당이 함께 하는 MVQ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뉴욕에 가서 살짝이나마 세계를 엿보았다. 2017년에는 공부와 실험을 계속하기 위해 쿠바로 넘어갔다가, 공부의 방향을 의학으로 틀게 되었다. 앞으로 신체와 생활이 결합되는 글쓰기를 해보고 싶다. 저서로는 『다른 십대의 탄생』(2011),『리좀 나의 삶 나의 글』(2013),『돈키호테, 책을 모험하는 책』(2015), 『뉴욕과 지성』(2018)이 있다. 파스텔색의 청년 P-14. C가 새벽마다 타는 마을버스다. 이제 막 기점에서 출발한 버스는 텅 비어있다. 대학교에 가려면 그가 사는 아바나 끝자락에서 버스로 두 시간은 달려야 한다. 왕복 네 시간 거리를 사 년째 통학하고 있다. 그간 C는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쪽잠을 자는 법을 익혔다. 곧 버스는 형형색색의 사람들로 가득 찬다. 당장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허름한 버스 풍경과 대조를 이룬다. 카리브해 쿠바는 원색의 땅이다. 물, 자동차, 건물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행색도 번쩍번쩍하다. 호피무늬 레깅스를 입은 할머니, 머리띠부터 드레스까지 핑크색으로 통일하고 아침 강의를 나가는 교수, 금빛 목걸이와 귀걸이를 뽐내며 일터로 가는 청년. 맨살을 훤히 드러내는 것은 이 뜨거운 나라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그 속에서 C는 홀로 파스텔색인 것처럼 옅게 존재한다. 청바지, 단정한 티셔츠, 검은 운동화에 검은 책가방이 그의 복장이다. 한여름 더위에 나시를 꺼내...
지난 연재 읽기
해완이의 쿠바통신
김해완 청소년 때 인문학 지식공동체인 남산강학원에 눌러앉아서 오 년간 읽는 법, 쓰는 법, 질문하는 법을 배웠다. 그 후로 쭉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2014년에는 남산강학원과 인문의역학 연구소 감이당이 함께 하는 MVQ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뉴욕에 가서 살짝이나마 세계를 엿보았다. 2017년에는 공부와 실험을 계속하기 위해 쿠바로 넘어갔다가, 공부의 방향을 의학으로 틀게 되었다. 앞으로 신체와 생활이 결합되는 글쓰기를 해보고 싶다. 저서로는 『다른 십대의 탄생』(2011),『리좀 나의 삶 나의 글』(2013),『돈키호테, 책을 모험하는 책』(2015), 『뉴욕과 지성』(2018)이 있다. 아바나의 흔한 대학생 K가 집을 나선다. 이른 아침 옅게 흩어지는 쿠바의 햇볕은 견딜 만하지만, 아직 잠이 선한 그의 얼굴은 뚱한 표정을 하고 있다. 이웃들은 옷차림만 봐도 그가 어디 가는지 안다. 뻣뻣한 남색 치마, 땀이 잘 안 빠지는 재질의 하얀 반팔 셔츠. 의대생의 교복이다. K는 지금 동네 진료소에 가는 중이다. 어젯밤 K의 할머니는 교복을 세탁하고 노련한 다림질 솜씨로 셔츠 칼라의 각을 반듯하게 세웠다. 이 ‘각 세우기’는 쿠바에서 특별히 중요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집이라도 다리미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게 쿠바 주부들의 지론이다. 제복의 상징인 경찰과 군인은 물론이요, 교복을 입는 초중고 학생과 의대생도 모두들 셔츠 칼라를 빳빳하게 세우고 다닌다. 이것은 살림이 아무리 궁핍하더라도 공적인 자리에서 옷차림을 제대로 갖추는 교양까지 잃지는 않았다는 쿠바인들의 긍지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똑바른 각은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소중히 여겨주는 가족들의 지지다....
김해완 청소년 때 인문학 지식공동체인 남산강학원에 눌러앉아서 오 년간 읽는 법, 쓰는 법, 질문하는 법을 배웠다. 그 후로 쭉 글쓰기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2014년에는 남산강학원과 인문의역학 연구소 감이당이 함께 하는 MVQ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뉴욕에 가서 살짝이나마 세계를 엿보았다. 2017년에는 공부와 실험을 계속하기 위해 쿠바로 넘어갔다가, 공부의 방향을 의학으로 틀게 되었다. 앞으로 신체와 생활이 결합되는 글쓰기를 해보고 싶다. 저서로는 『다른 십대의 탄생』(2011),『리좀 나의 삶 나의 글』(2013),『돈키호테, 책을 모험하는 책』(2015), 『뉴욕과 지성』(2018)이 있다. 아바나의 흔한 대학생 K가 집을 나선다. 이른 아침 옅게 흩어지는 쿠바의 햇볕은 견딜 만하지만, 아직 잠이 선한 그의 얼굴은 뚱한 표정을 하고 있다. 이웃들은 옷차림만 봐도 그가 어디 가는지 안다. 뻣뻣한 남색 치마, 땀이 잘 안 빠지는 재질의 하얀 반팔 셔츠. 의대생의 교복이다. K는 지금 동네 진료소에 가는 중이다. 어젯밤 K의 할머니는 교복을 세탁하고 노련한 다림질 솜씨로 셔츠 칼라의 각을 반듯하게 세웠다. 이 ‘각 세우기’는 쿠바에서 특별히 중요하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집이라도 다리미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게 쿠바 주부들의 지론이다. 제복의 상징인 경찰과 군인은 물론이요, 교복을 입는 초중고 학생과 의대생도 모두들 셔츠 칼라를 빳빳하게 세우고 다닌다. 이것은 살림이 아무리 궁핍하더라도 공적인 자리에서 옷차림을 제대로 갖추는 교양까지 잃지는 않았다는 쿠바인들의 긍지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똑바른 각은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소중히 여겨주는 가족들의 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