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 후 고전 중
왕필, 의리역의 세계를 열다     천재는 요절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40이 넘어서면서 가끔 우스개 소리로 “이제 천재 되기는 틀렸다”는 말을 했었다.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자질을 가지길 원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거기에 젊은 나이에 반짝이는 재능을 보이고 사라진 이에 대한 아쉬움일까? 나에겐 아마도 요절한 천재에 대한 묘한 동경과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주역철학사』를 공부하면서 그 천재 이미지에 꼭 맞는 인물을 만났다. 바로 왕필이다. 왕필은 위진남북조 시대 사람으로 『삼국지』에 등장하는 그 조조의 위(魏)나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 저명한 현학 이론가로 이름을 날렸다. 지금도 왕필하면 『노자(老子)』와 『주역(周易)』의 탁월한 주석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후대에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가 죽은 나이가 고작 24살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노자』와 『주역』을 주석했다는 것인데……. 고전공부를 하면서 나에게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텍스트가 노자와 주역인데, 이를 고작 20살 전후의 나이에 주석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그가 풀이한 노자와 주역의 해석은 이후에 교과서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 송대 주역 해설의 체계는 왕필의 『주역주』를 통해 확정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천재, 왕필 왕필(王弼/226~249)의 자는 보사(輔嗣)이고 삼국 시대 위(魏)나라 학자이다. 왕필의 집안은 한나라 시기에 명문 호족으로 역학(易學)으로 이름이 났었다. 왕필의 조부 왕개는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왕찬(王粲)과 친형제였다. 하소의 「왕필전」에 따르면 왕필은 어려서부터 뛰어났으며 노씨(老氏)를 좋아하고 언변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또 특출난 천재인데 본바탕은 온화하고...
왕필, 의리역의 세계를 열다     천재는 요절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40이 넘어서면서 가끔 우스개 소리로 “이제 천재 되기는 틀렸다”는 말을 했었다.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자질을 가지길 원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거기에 젊은 나이에 반짝이는 재능을 보이고 사라진 이에 대한 아쉬움일까? 나에겐 아마도 요절한 천재에 대한 묘한 동경과 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주역철학사』를 공부하면서 그 천재 이미지에 꼭 맞는 인물을 만났다. 바로 왕필이다. 왕필은 위진남북조 시대 사람으로 『삼국지』에 등장하는 그 조조의 위(魏)나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 저명한 현학 이론가로 이름을 날렸다. 지금도 왕필하면 『노자(老子)』와 『주역(周易)』의 탁월한 주석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후대에 그를 더 유명하게 만든 것은 그가 죽은 나이가 고작 24살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노자』와 『주역』을 주석했다는 것인데……. 고전공부를 하면서 나에게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텍스트가 노자와 주역인데, 이를 고작 20살 전후의 나이에 주석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그가 풀이한 노자와 주역의 해석은 이후에 교과서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 송대 주역 해설의 체계는 왕필의 『주역주』를 통해 확정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천재, 왕필 왕필(王弼/226~249)의 자는 보사(輔嗣)이고 삼국 시대 위(魏)나라 학자이다. 왕필의 집안은 한나라 시기에 명문 호족으로 역학(易學)으로 이름이 났었다. 왕필의 조부 왕개는 건안칠자(建安七子)*의 한 사람인 왕찬(王粲)과 친형제였다. 하소의 「왕필전」에 따르면 왕필은 어려서부터 뛰어났으며 노씨(老氏)를 좋아하고 언변에 능통하였다고 한다. 또 특출난 천재인데 본바탕은 온화하고...
진달래
2025.08.26 | 조회 422
Socio-sociolgy
    부채와 자본주의 데이비드 그레이버 – 『부채, 그 첫 5000년』          지난 글에서 나는 비트코인의 기원과 작동 원리, 그리고 그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짚었다. 비트코인의 창시자로 알려진 나카모토 사토시는 현대 화폐가 실물가치가 없는 신용화폐이고, 화폐가치를 지탱하는 ‘신용’을 오직 중앙정부만이 보증하기 때문에, 정부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한 약탈적 통화정책이 가능하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2008년의 금융위기는 그와 같은 약탈적 정책이 불러일으킨 결과다. 그 배경에는 미국 정부의 저금리 정책으로 무분별하게 늘어난 대출 상품이 있었다. 금리가 낮아지자 서민들은 대출을 통해 집을 구매했고, 그에 따라 집값이 폭등하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집값이 오름에도 금리가 낮았기 때문에 은행들은 더 많은 서민들에게 대출을 권장했고, 신용불량자에 가까운, 그러니까 돈을 다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주택을 담보한 대출 상품을 팔았다. 그렇게 버블은 커져만 갔고, 2008년에 그 버블은 터져버렸다. 집을 구매할 사람이 적어지자 집값은 폭락했고, 많은 사람들이 담보로 잡힌 주택을 포기함에 따라 은행들이 줄줄이 파산해 버린 것이다. 파생상품 투자 및 판매로 투자 은행 중 상위권을 다투던 ‘리먼 브라더스 은행’도 이때 파산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잃어 길거리에 내몰렸다. 그런 배경 속에서 사토시가 제시한 해법은 탈중앙화되고 강력하게 암호화된 화폐를 만들어 그에 대한 신용을 이용자 전체가 보증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비트코인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러나 비트코인이 성공했다고 보긴 힘들다. 사토시의 의도와는 별개로, 지금의 비트코인은 대안화폐로서 기능한다기보다는 일종의 투기 상품에...
    부채와 자본주의 데이비드 그레이버 – 『부채, 그 첫 5000년』          지난 글에서 나는 비트코인의 기원과 작동 원리, 그리고 그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짚었다. 비트코인의 창시자로 알려진 나카모토 사토시는 현대 화폐가 실물가치가 없는 신용화폐이고, 화폐가치를 지탱하는 ‘신용’을 오직 중앙정부만이 보증하기 때문에, 정부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한 약탈적 통화정책이 가능하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2008년의 금융위기는 그와 같은 약탈적 정책이 불러일으킨 결과다. 그 배경에는 미국 정부의 저금리 정책으로 무분별하게 늘어난 대출 상품이 있었다. 금리가 낮아지자 서민들은 대출을 통해 집을 구매했고, 그에 따라 집값이 폭등하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집값이 오름에도 금리가 낮았기 때문에 은행들은 더 많은 서민들에게 대출을 권장했고, 신용불량자에 가까운, 그러니까 돈을 다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주택을 담보한 대출 상품을 팔았다. 그렇게 버블은 커져만 갔고, 2008년에 그 버블은 터져버렸다. 집을 구매할 사람이 적어지자 집값은 폭락했고, 많은 사람들이 담보로 잡힌 주택을 포기함에 따라 은행들이 줄줄이 파산해 버린 것이다. 파생상품 투자 및 판매로 투자 은행 중 상위권을 다투던 ‘리먼 브라더스 은행’도 이때 파산했고,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잃어 길거리에 내몰렸다. 그런 배경 속에서 사토시가 제시한 해법은 탈중앙화되고 강력하게 암호화된 화폐를 만들어 그에 대한 신용을 이용자 전체가 보증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비트코인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러나 비트코인이 성공했다고 보긴 힘들다. 사토시의 의도와는 별개로, 지금의 비트코인은 대안화폐로서 기능한다기보다는 일종의 투기 상품에...
우현
2025.08.22 | 조회 515
한문이예술
  질문의 힘을 가진 한자      동은     1. “하고 싶은 말 있어?”     <한문이 예술>은 2020년 하반기부터 시작했지만, <문탁 네트워크>에는 훨씬 전부터 아이들과 함께 고전 원전을 읽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내가 처음 아이들과 한자로 만났던 건 2017년 겨울, <천자문>을 주제로 했던 수업에 보조로 참여했을 때였다. 사실 그때 까지만 해도 나는 고전 원문을 잘 읽는 것도 아니었고, 원문을 읽으며 큰 감흥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보조선생님이 될 수 있었던 건 <예술프로젝트>에서 한자를 주제로 했던 예술 작업 <천자 중에 한자> 덕분이었다. 내가 예술 작업에서 시도했던 것처럼, 수업에서도 아이들과 다양한 방법으로 한자를 이해하고 표현하며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작정 한자를 외우기만 했던 내 어린시절의 경험 때문에 과연 아이들이 얼마나 한자에 관심이 있을지 걱정했는데, 생각보다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보조교사로 나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한시간 남짓이었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벌써 수업을 마칠 때가 되어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고서도 수업이 끝나고 나면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나서 아쉬울 정도였다.      성인이 된 이후로 언젠가부터 어떤 말이라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누군가 내게 “하고 싶은 말 있어?”라고 물으면 그런거 없다며 손사레를 치기 바빴다.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대자면 무엇이든 이유가 될 수 있었고, 그런 상태가 익숙해졌다. 그러다보니 수업 이후에 느껴졌던 아쉬움과, 뭐라도 말하고 싶어했던 내가 낯설었다. <한문이 예술>을 준비하면서 그 말들을 어떻게하면...
  질문의 힘을 가진 한자      동은     1. “하고 싶은 말 있어?”     <한문이 예술>은 2020년 하반기부터 시작했지만, <문탁 네트워크>에는 훨씬 전부터 아이들과 함께 고전 원전을 읽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내가 처음 아이들과 한자로 만났던 건 2017년 겨울, <천자문>을 주제로 했던 수업에 보조로 참여했을 때였다. 사실 그때 까지만 해도 나는 고전 원문을 잘 읽는 것도 아니었고, 원문을 읽으며 큰 감흥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보조선생님이 될 수 있었던 건 <예술프로젝트>에서 한자를 주제로 했던 예술 작업 <천자 중에 한자> 덕분이었다. 내가 예술 작업에서 시도했던 것처럼, 수업에서도 아이들과 다양한 방법으로 한자를 이해하고 표현하며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작정 한자를 외우기만 했던 내 어린시절의 경험 때문에 과연 아이들이 얼마나 한자에 관심이 있을지 걱정했는데, 생각보다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보조교사로 나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한시간 남짓이었는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벌써 수업을 마칠 때가 되어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고서도 수업이 끝나고 나면 하고 싶은 말이 생각나서 아쉬울 정도였다.      성인이 된 이후로 언젠가부터 어떤 말이라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누군가 내게 “하고 싶은 말 있어?”라고 물으면 그런거 없다며 손사레를 치기 바빴다. 말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대자면 무엇이든 이유가 될 수 있었고, 그런 상태가 익숙해졌다. 그러다보니 수업 이후에 느껴졌던 아쉬움과, 뭐라도 말하고 싶어했던 내가 낯설었다. <한문이 예술>을 준비하면서 그 말들을 어떻게하면...
동은
2025.08.19 | 조회 482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공성의 지혜'를 주제로 올해 불교학교에서 공부하는 요요, 인디언, 두루미가 릴레이로 글을 올리는 코너입니다. <금강경>과 <반야심경> 등의 경전을 읽는 불교학교의 공부와 연재 글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공 가운데는 ...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으며... 空中 ...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반야심경>   <반야심경>에는 무(無) 즉, 없다고 말하는 것이 많다. 그 중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도 없고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도 없다’는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자.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다는 것은 십이처(十二處)가 없다는 것이다. 십이처는 십팔계(十八界), 오온(五蘊)과 더불어 초기불교에서부터 설해진 대표적인 교리이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이것들이 다 없다고 말한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십이처란 무엇인가   <니까야>나 <아함경>은 세계를 오온과 십이처, 십팔계로 설명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오온으로, 세계는 무엇인가는 십이처와 십팔계로 설하고 있다. 십이처는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능력)이 있다. 눈, 귀, 코, 혀, 피부(몸). 그리고 이것들을 종합해서 판단하는 의식(의)이다. 이 여섯 가지를 육근(六根) 혹은 육내처(六內處)라고 한다. 육근은 이에 상응하는 대상을 인식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색),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성), 냄새(향), 맛(미), 만져서 느껴지는 감촉(촉), 그리고 마음(의식)의 대상인 어떤 생각, 관념 등(법)이 그것이다. 이 여섯 가지는 육경(六境) 혹은 육외처(六外處)라고 한다. 육근과 육경을 십이처라고 한다. 십이처인 육근과 육경은 각각 상응하는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 안-색, 이-성, 비-향, 설-미, 신-촉, 의-법. 눈이 소리를 볼 수 없고, 귀가 형색을 들을 수는 없다.   붓다는 이 세계가 바깥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공성의 지혜'를 주제로 올해 불교학교에서 공부하는 요요, 인디언, 두루미가 릴레이로 글을 올리는 코너입니다. <금강경>과 <반야심경> 등의 경전을 읽는 불교학교의 공부와 연재 글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공 가운데는 ...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으며... 空中 ...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반야심경>   <반야심경>에는 무(無) 즉, 없다고 말하는 것이 많다. 그 중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도 없고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도 없다’는 부분에 대해 생각해보자. 안이비설신의도 없고 색성향미촉법도 없다는 것은 십이처(十二處)가 없다는 것이다. 십이처는 십팔계(十八界), 오온(五蘊)과 더불어 초기불교에서부터 설해진 대표적인 교리이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이것들이 다 없다고 말한다. 이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십이처란 무엇인가   <니까야>나 <아함경>은 세계를 오온과 십이처, 십팔계로 설명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는 오온으로, 세계는 무엇인가는 십이처와 십팔계로 설하고 있다. 십이처는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다섯 가지 감각기관(능력)이 있다. 눈, 귀, 코, 혀, 피부(몸). 그리고 이것들을 종합해서 판단하는 의식(의)이다. 이 여섯 가지를 육근(六根) 혹은 육내처(六內處)라고 한다. 육근은 이에 상응하는 대상을 인식한다.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색),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성), 냄새(향), 맛(미), 만져서 느껴지는 감촉(촉), 그리고 마음(의식)의 대상인 어떤 생각, 관념 등(법)이 그것이다. 이 여섯 가지는 육경(六境) 혹은 육외처(六外處)라고 한다. 육근과 육경을 십이처라고 한다. 십이처인 육근과 육경은 각각 상응하는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 안-색, 이-성, 비-향, 설-미, 신-촉, 의-법. 눈이 소리를 볼 수 없고, 귀가 형색을 들을 수는 없다.   붓다는 이 세계가 바깥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디언
2025.08.11 | 조회 466
방과 후 고전 중
<역전>, 점서를 철학화하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주역周易>>을 읽고 있다. 중국의 사상사와 철학사적 맥락에서 읽어내려는 사람도 있지만, 명리학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사람도 있다. <<주역>>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과거를 설명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나아가 불안한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자들이 <<주역>> 읽기를 통해서 하나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함을 볼 수 있다.     이번 고전학교에서 <<주역>>을 다루는 방식은 철저하게 ‘철학사’적 입장에 있다. 철학사라고 하였으니 <<주역>>을 철학서로 본다는 의미일 텐데, 그러면 <<주역>>은 어떤 점에서 철학적이라는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철학의 ‘역사’를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서 ‘철학’이 무엇인지, 중국에 철학이 있었는가 등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주역>>이 철학서이기에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태생적으로 점서였던 것을 이후 사람들이 철학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철학서적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요즘의 어떤 책(<<상나라 정벌>>, 이숴, 글항아리)은 <<주역>>을 주나라의 ‘역사’로 읽어내기도 하는 걸 보면, 역대로 <<주역>>은 사실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대상이었다. 그것을 정치, 사회, 도덕 철학적으로 읽어내는 해석들의 역사가 바로 주역철학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종교적으로 혹은 예언서적이나 신선이 되기 위한 매뉴얼북처럼 읽는 해석들은 ‘주역철학사’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그래서 도교나 불교 경전에 있는 자료들은 다루지 않는다). 고전학교에서 다루는 것도 이렇게 <<주역>>을 철학적으로 읽어온 해석의 역사이다.     <<주역>>을 철학화하는 과정은 주역이 점서로서의 면모를 잃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먼저 주역 책의 편제 상에서의 문제로 풀...
<역전>, 점서를 철학화하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주역周易>>을 읽고 있다. 중국의 사상사와 철학사적 맥락에서 읽어내려는 사람도 있지만, 명리학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사람도 있다. <<주역>>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과거를 설명하고 미래를 예측하며 나아가 불안한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자들이 <<주역>> 읽기를 통해서 하나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함을 볼 수 있다.     이번 고전학교에서 <<주역>>을 다루는 방식은 철저하게 ‘철학사’적 입장에 있다. 철학사라고 하였으니 <<주역>>을 철학서로 본다는 의미일 텐데, 그러면 <<주역>>은 어떤 점에서 철학적이라는 것인가. 그리고 그러한 철학의 ‘역사’를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서 ‘철학’이 무엇인지, 중국에 철학이 있었는가 등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주역>>이 철학서이기에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태생적으로 점서였던 것을 이후 사람들이 철학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철학서적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요즘의 어떤 책(<<상나라 정벌>>, 이숴, 글항아리)은 <<주역>>을 주나라의 ‘역사’로 읽어내기도 하는 걸 보면, 역대로 <<주역>>은 사실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대상이었다. 그것을 정치, 사회, 도덕 철학적으로 읽어내는 해석들의 역사가 바로 주역철학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종교적으로 혹은 예언서적이나 신선이 되기 위한 매뉴얼북처럼 읽는 해석들은 ‘주역철학사’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그래서 도교나 불교 경전에 있는 자료들은 다루지 않는다). 고전학교에서 다루는 것도 이렇게 <<주역>>을 철학적으로 읽어온 해석의 역사이다.     <<주역>>을 철학화하는 과정은 주역이 점서로서의 면모를 잃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먼저 주역 책의 편제 상에서의 문제로 풀...
자작나무
2025.08.04 | 조회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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