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o-sociolgy
‘진보’의 이름으로 버려진 자는 ‘누구’인가? -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Wasted Lives)』 근대 사회는 오랫동안 ‘진보’와 ‘성장’을 인류의 목표로 상정해왔다. 합리성과 효율성을 기반으로 한 근대화 과정은 신앙과 위신을 중시하는 중세적 비합리성에서 벗어나 이성적 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눈부신 발전의 이면에는 늘 그림자가 따르는 법이다. 근대화의 과정에서도 ‘진보’라는 미명 아래 그늘 속으로 밀려난 이들이 있었다. 사회가 효율적으로 작동할수록 질서에서 벗어난 인간들은 점점 더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되었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Wasted Lives)』에서 이러한 근대성의 그림자를 ‘쓰레기’라는 은유로 명료하게 드러낸다. 유동적 현대 세계의 거주민들과 그들의 노고와 창조물들 위에 유령이 떠돌고 있다. 잉여라는 유령이. 유동적 현대는 과잉, 잉여, 쓰레기, 그리고 쓰레기 처리의 문명이다. - 『쓰레기가 되는 삶들』, 지그문트 바우만, 정일준 옮김, 새물결, 176쪽 - 바우만은 근대화를 단순히 혼돈 속에 질서를 세우는 과정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그것은 동시에 질서의 외부를 만들어내는 과정, 즉 사회가 관리할 수 없는 인간들을 ‘불필요한 존재’로 규정하는 배제의 체계이기도 하다. 근대 사회의 이면에는 외부로 드러난 질서 잡힌 세계를 지탱하는 불순물의 체계가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합리적 질서를 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질서의 외부를 정리하기 위해 끊임없이 ‘불순물’을 제거하는 행위, 곧 ‘쓰레기 생산’이 반복된다. 바우만은 이를 근대의 설계도 속에 내재된 구조적 메커니즘으로 분석한다. 다시 말해, 쓰레기의 존재는 근대성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근대가 성공적으로 작동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진보’의 이름으로 버려진 자는 ‘누구’인가? -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Wasted Lives)』 근대 사회는 오랫동안 ‘진보’와 ‘성장’을 인류의 목표로 상정해왔다. 합리성과 효율성을 기반으로 한 근대화 과정은 신앙과 위신을 중시하는 중세적 비합리성에서 벗어나 이성적 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눈부신 발전의 이면에는 늘 그림자가 따르는 법이다. 근대화의 과정에서도 ‘진보’라는 미명 아래 그늘 속으로 밀려난 이들이 있었다. 사회가 효율적으로 작동할수록 질서에서 벗어난 인간들은 점점 더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되었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Wasted Lives)』에서 이러한 근대성의 그림자를 ‘쓰레기’라는 은유로 명료하게 드러낸다. 유동적 현대 세계의 거주민들과 그들의 노고와 창조물들 위에 유령이 떠돌고 있다. 잉여라는 유령이. 유동적 현대는 과잉, 잉여, 쓰레기, 그리고 쓰레기 처리의 문명이다. - 『쓰레기가 되는 삶들』, 지그문트 바우만, 정일준 옮김, 새물결, 176쪽 - 바우만은 근대화를 단순히 혼돈 속에 질서를 세우는 과정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그것은 동시에 질서의 외부를 만들어내는 과정, 즉 사회가 관리할 수 없는 인간들을 ‘불필요한 존재’로 규정하는 배제의 체계이기도 하다. 근대 사회의 이면에는 외부로 드러난 질서 잡힌 세계를 지탱하는 불순물의 체계가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합리적 질서를 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질서의 외부를 정리하기 위해 끊임없이 ‘불순물’을 제거하는 행위, 곧 ‘쓰레기 생산’이 반복된다. 바우만은 이를 근대의 설계도 속에 내재된 구조적 메커니즘으로 분석한다. 다시 말해, 쓰레기의 존재는 근대성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근대가 성공적으로 작동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기학잡담
서울사람 최한기 대학에서 연애할 때, 상대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였고, 나는 초, 중, 고를 모두 지방에서 나온 촌뜨기였다. 인(in)서울 대학에 다녔어도, 나는 꽤 오랜 시간 서울에만 가면 동서남북도 가늠하기 어려워 주눅이 들었다. 그때 연애상대는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서울지리를 가르쳐주겠다”며 은근히 장기연애의 속내를 비쳤지만, 바로 그 말이 시골 촌뜨기의 자존심을 긁었다는 것을 그는 지금도 모를 것이다. 나는 여전히, 태생이 서울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타산적이고 개인적인 성향의 서울 사람을 ‘서울깍쟁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그 이면에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만으로 누릴 수 있는 그 문화의 혜택에 대한 시샘도 있을 것이다. 혜강 최한기는 조선조의 서울 사람이었다. 도올은 혜강 최한기가 기학(氣學)이라는 사상체계를 확립한 배경으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서울시내의 상식’이었다고 말한다. 상식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구성원들이 보편적으로 알게 되는 지식이나 가치판단 같은 것이니까, 최한기가 오랫동안 서울에서 살지 않았다면 기학이라는 사유는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아래 오른쪽 이미지는 한양 도성전도) 혜강 최한기에 대한 수사는 이것만이 아니다. 그는 평생 공부만 하며 살 수 있었던 양반이었고, 서양의 최신 학문 서적을 사서 볼 수 있는 부자였고, 생전에 천 권에 이르는 저술을 해낸 빼어난 지식인이었다. 구질서가 흔들리고 새로운 질서에 대한 전망이 들끓는 19세기 조선, 물산과 기술과 정치가 집중되는 서울, 옛날의 경학에 대한 풍부한 식견과 새로운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대학자의 호기심과 경탄이 뒤섞인 사회문화적 에토스 속에서, 그의 말대로...
서울사람 최한기 대학에서 연애할 때, 상대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였고, 나는 초, 중, 고를 모두 지방에서 나온 촌뜨기였다. 인(in)서울 대학에 다녔어도, 나는 꽤 오랜 시간 서울에만 가면 동서남북도 가늠하기 어려워 주눅이 들었다. 그때 연애상대는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서울지리를 가르쳐주겠다”며 은근히 장기연애의 속내를 비쳤지만, 바로 그 말이 시골 촌뜨기의 자존심을 긁었다는 것을 그는 지금도 모를 것이다. 나는 여전히, 태생이 서울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타산적이고 개인적인 성향의 서울 사람을 ‘서울깍쟁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그 이면에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만으로 누릴 수 있는 그 문화의 혜택에 대한 시샘도 있을 것이다. 혜강 최한기는 조선조의 서울 사람이었다. 도올은 혜강 최한기가 기학(氣學)이라는 사상체계를 확립한 배경으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서울시내의 상식’이었다고 말한다. 상식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구성원들이 보편적으로 알게 되는 지식이나 가치판단 같은 것이니까, 최한기가 오랫동안 서울에서 살지 않았다면 기학이라는 사유는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아래 오른쪽 이미지는 한양 도성전도) 혜강 최한기에 대한 수사는 이것만이 아니다. 그는 평생 공부만 하며 살 수 있었던 양반이었고, 서양의 최신 학문 서적을 사서 볼 수 있는 부자였고, 생전에 천 권에 이르는 저술을 해낸 빼어난 지식인이었다. 구질서가 흔들리고 새로운 질서에 대한 전망이 들끓는 19세기 조선, 물산과 기술과 정치가 집중되는 서울, 옛날의 경학에 대한 풍부한 식견과 새로운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대학자의 호기심과 경탄이 뒤섞인 사회문화적 에토스 속에서, 그의 말대로...
방과 후 고전 중
올해 고전학교에서 읽고 있는 『주역철학사』에서 ‘횡거철피橫渠撤皮’라는 고사성어를 보았다. 주희朱熹의 이정어록二程語錄의 설명에 따르면, “장재는 학문이 높고 강의도 잘해 그의 집은 가르침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항상 붐볐다. 어느 날 정호·정이 형제가 그를 찾아 주역에 관한 가르침을 청하면서 도道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말했다. 장재는 사람들을 향해 ‘지금까지 나의 강의는 잘못되었으니 모두 잊어버려라. 대신 정씨 형제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호피를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 고향인 섬서성으로 돌아갔다. 그는 후대 학자들의 귀감이 되었다.”는 것이다. 장재(張載,1020~1077)의 자字는 자후子厚이고 대대로 대량大樑에 거주해온 벼슬집안 출신으로, 오랫동안 섬서성陝西省 미현堳縣 횡거진橫渠鎭에 머물면서 강학講學했기 때문에 ‘횡거선생’이라 불렸다. 송명 리학의 기초를 닦은 한 사람으로 리학 4대 학파 가운데 관학파關學派의 개창자이다. 이정二程과 장재, 셋은 1056년, 북송의 수도인 개봉開封에서 만난다. 36세의 장재가 12~13세의 외종질(外從姪: 외사촌의 아들)인 정호(程顥, 1032-1085)ㆍ정이(程頤, 1033-1107) 형제를 만나 주역에 대하여 논論하고 나서 그 들의 도道에 대하여 밝고 깊다고 칭찬하며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는 것인데, 나이 차이와 관계(조카)에서 오는 ‘정말 그랬을까? 후배 리학자들의 과도한 설정이지 않을까?’하는 미심쩍은 의혹부터 든다. 동시에 호기심이 뒤따라온다. 철피撤皮했다, 낙향落鄕했다는 것을 빼고 나면, ‘그의 도가 밝다’고 칭찬한 점이 남기 때문이다. 장재가 공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대부분의 중국 고전이 존재론(본체론·우주론·생성론), 인성론(심성론), 지식론(인식론), 윤리학 등의 주제가 뒤섞여 있지만, 마지막 윤리학으로 가는 출발점은 존재론이므로 이에 대한 그들의 의견들을 정리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이정二程의 존재론 형인 정호는 천리天理는...
올해 고전학교에서 읽고 있는 『주역철학사』에서 ‘횡거철피橫渠撤皮’라는 고사성어를 보았다. 주희朱熹의 이정어록二程語錄의 설명에 따르면, “장재는 학문이 높고 강의도 잘해 그의 집은 가르침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항상 붐볐다. 어느 날 정호·정이 형제가 그를 찾아 주역에 관한 가르침을 청하면서 도道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말했다. 장재는 사람들을 향해 ‘지금까지 나의 강의는 잘못되었으니 모두 잊어버려라. 대신 정씨 형제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호피를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 고향인 섬서성으로 돌아갔다. 그는 후대 학자들의 귀감이 되었다.”는 것이다. 장재(張載,1020~1077)의 자字는 자후子厚이고 대대로 대량大樑에 거주해온 벼슬집안 출신으로, 오랫동안 섬서성陝西省 미현堳縣 횡거진橫渠鎭에 머물면서 강학講學했기 때문에 ‘횡거선생’이라 불렸다. 송명 리학의 기초를 닦은 한 사람으로 리학 4대 학파 가운데 관학파關學派의 개창자이다. 이정二程과 장재, 셋은 1056년, 북송의 수도인 개봉開封에서 만난다. 36세의 장재가 12~13세의 외종질(外從姪: 외사촌의 아들)인 정호(程顥, 1032-1085)ㆍ정이(程頤, 1033-1107) 형제를 만나 주역에 대하여 논論하고 나서 그 들의 도道에 대하여 밝고 깊다고 칭찬하며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는 것인데, 나이 차이와 관계(조카)에서 오는 ‘정말 그랬을까? 후배 리학자들의 과도한 설정이지 않을까?’하는 미심쩍은 의혹부터 든다. 동시에 호기심이 뒤따라온다. 철피撤皮했다, 낙향落鄕했다는 것을 빼고 나면, ‘그의 도가 밝다’고 칭찬한 점이 남기 때문이다. 장재가 공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대부분의 중국 고전이 존재론(본체론·우주론·생성론), 인성론(심성론), 지식론(인식론), 윤리학 등의 주제가 뒤섞여 있지만, 마지막 윤리학으로 가는 출발점은 존재론이므로 이에 대한 그들의 의견들을 정리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이정二程의 존재론 형인 정호는 천리天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