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과 후 고전 중
《주역》은 정치텍스트다!? : 범중엄과 정이천의 《주역》 읽기     점서, 자기계발서 그리고 정치텍스트 지금은 흡사 자기계발서나 운명과 인생의 길잡이처럼 읽고 있지만, 《주역》은 ‘정치텍스트’로 읽혀 왔다. 오늘날 《주역》을 개인의 수신에 방점을 두는 것과는 달리 이전에는 수신의 영역까지도 정치의 영역에 포괄되어 다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즉 과거에는 자연계의 법칙과 인간사의 변화 법칙이 연동되어 읽혔고, 거기에 정치는 수신을 포함해서 구상되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주역 다시 읽기 작업은 기존의 정치와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를 구상하고자 하는 당시 지식인들의 열망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사고 아래에 깔려 있는 것은, 주역을 점서로 읽지 않겠노라는 자세(주자는 근원을 따져서 주역은 점서라고 말하지만, 그것의 작금의 용법에서 점서로 사용해야 함을 말하진 않는다)다. 《주역》에서 우리는 운명에 대한 사랑이나 수동성을 발견할 수 있으나, 주역을 풀이한 전에서는 그것조차도 맹목적인 믿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나름의 합리주의적 이성주의적 인식론적 틀과 체계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해석이 가능했던 요건을 설명할 때면 항상 자연 과학 기술의 발전을 언급한다. 세계를 읽어내는 시선의 전환이 《주역》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을 새롭게 했으며 기존의 주류 사상을 비판하고 보완할 수 있는 사상서적이나 학문의 태도가 주역을 새롭게 읽게 만들었다. 가령 송의 경우, 불교와 대적하는 유가는 자신들의 무기로 《중용》과 《대학》에서 그 힘을 찾았다.   *중국 관련 이미지를 찾을 때면 '바이두'를 이용한다. 저작권 문제 등에서 자유롭고 다양한 이미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혹 이런 이미지가 왜 있을까란 생각이...
《주역》은 정치텍스트다!? : 범중엄과 정이천의 《주역》 읽기     점서, 자기계발서 그리고 정치텍스트 지금은 흡사 자기계발서나 운명과 인생의 길잡이처럼 읽고 있지만, 《주역》은 ‘정치텍스트’로 읽혀 왔다. 오늘날 《주역》을 개인의 수신에 방점을 두는 것과는 달리 이전에는 수신의 영역까지도 정치의 영역에 포괄되어 다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즉 과거에는 자연계의 법칙과 인간사의 변화 법칙이 연동되어 읽혔고, 거기에 정치는 수신을 포함해서 구상되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주역 다시 읽기 작업은 기존의 정치와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를 구상하고자 하는 당시 지식인들의 열망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사고 아래에 깔려 있는 것은, 주역을 점서로 읽지 않겠노라는 자세(주자는 근원을 따져서 주역은 점서라고 말하지만, 그것의 작금의 용법에서 점서로 사용해야 함을 말하진 않는다)다. 《주역》에서 우리는 운명에 대한 사랑이나 수동성을 발견할 수 있으나, 주역을 풀이한 전에서는 그것조차도 맹목적인 믿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나름의 합리주의적 이성주의적 인식론적 틀과 체계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해석이 가능했던 요건을 설명할 때면 항상 자연 과학 기술의 발전을 언급한다. 세계를 읽어내는 시선의 전환이 《주역》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을 새롭게 했으며 기존의 주류 사상을 비판하고 보완할 수 있는 사상서적이나 학문의 태도가 주역을 새롭게 읽게 만들었다. 가령 송의 경우, 불교와 대적하는 유가는 자신들의 무기로 《중용》과 《대학》에서 그 힘을 찾았다.   *중국 관련 이미지를 찾을 때면 '바이두'를 이용한다. 저작권 문제 등에서 자유롭고 다양한 이미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혹 이런 이미지가 왜 있을까란 생각이...
자작나무
2025.10.28 | 조회 259
토용의 서경리뷰
천명은 변한다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무왕은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를 올려 주나라가 승리했음을 고한다. 주나라의 탄생과 번영을 기원하는 제사에서 왕을 비롯해 많은 주나라 귀족과 신하들은 감격과 흥분을 느꼈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낯빛을 드러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주공이다. 주공은 승리에 도취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웅장하고 화려한 제사를 올렸던 상나라의 고귀한 귀족들이 주나라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자리에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다. 천명이 바뀐 결과이다. 그것을 본 주공은 아찔했다. 지금 주나라가 천명의 주인이 되었지만 언제든 주나라도 상나라처럼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천명은 영원하지 않다. 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주나라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천명을 잃어버리지 않고 주나라를 대대손손 장구히 존속시킬 수 있을까?   주공은 천명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천명은 언제든 하늘이 거두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나라가 천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답은 상나라의 멸망 원인에서 찾아야 했다. “상나라를 거울삼기를 큰 명은 지키기 쉽지 않네.”(『시경』 <문왕>) 주공은 상나라를 교훈으로 삼아 대비했다.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紂)는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유명했다. 주지육림은 후대에 사치스러운 향락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는데, 당시에 상나라가 호화로운 인신공양제사를 많이 지냈기 때문에 나온 말인 것 같다. 상나라, 주나라의 청동기 유물을 보면 예기(禮器) 중에 상나라는 주기(酒器)가 많고 주나라는 식기(食器)가 많았다고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상나라의 지배계층이 술을 많이 마시고 정사에 안일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이를 반증하듯 <주고酒誥>는 술을 경계하라는 내용으로 가득 차...
천명은 변한다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무왕은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를 올려 주나라가 승리했음을 고한다. 주나라의 탄생과 번영을 기원하는 제사에서 왕을 비롯해 많은 주나라 귀족과 신하들은 감격과 흥분을 느꼈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낯빛을 드러내고 있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주공이다. 주공은 승리에 도취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웅장하고 화려한 제사를 올렸던 상나라의 고귀한 귀족들이 주나라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는 자리에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다. 천명이 바뀐 결과이다. 그것을 본 주공은 아찔했다. 지금 주나라가 천명의 주인이 되었지만 언제든 주나라도 상나라처럼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천명은 영원하지 않다. 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주나라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천명을 잃어버리지 않고 주나라를 대대손손 장구히 존속시킬 수 있을까?   주공은 천명의 무게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천명은 언제든 하늘이 거두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주나라가 천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답은 상나라의 멸망 원인에서 찾아야 했다. “상나라를 거울삼기를 큰 명은 지키기 쉽지 않네.”(『시경』 <문왕>) 주공은 상나라를 교훈으로 삼아 대비했다. 상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紂)는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유명했다. 주지육림은 후대에 사치스러운 향락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는데, 당시에 상나라가 호화로운 인신공양제사를 많이 지냈기 때문에 나온 말인 것 같다. 상나라, 주나라의 청동기 유물을 보면 예기(禮器) 중에 상나라는 주기(酒器)가 많고 주나라는 식기(食器)가 많았다고 한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상나라의 지배계층이 술을 많이 마시고 정사에 안일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이를 반증하듯 <주고酒誥>는 술을 경계하라는 내용으로 가득 차...
토용
2025.10.22 | 조회 262
Socio-sociolgy
  ‘진보’의 이름으로 버려진 자는 ‘누구’인가? -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Wasted Lives)』       근대 사회는 오랫동안 ‘진보’와 ‘성장’을 인류의 목표로 상정해왔다. 합리성과 효율성을 기반으로 한 근대화 과정은 신앙과 위신을 중시하는 중세적 비합리성에서 벗어나 이성적 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눈부신 발전의 이면에는 늘 그림자가 따르는 법이다. 근대화의 과정에서도 ‘진보’라는 미명 아래 그늘 속으로 밀려난 이들이 있었다. 사회가 효율적으로 작동할수록 질서에서 벗어난 인간들은 점점 더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되었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Wasted Lives)』에서 이러한 근대성의 그림자를 ‘쓰레기’라는 은유로 명료하게 드러낸다.   유동적 현대 세계의 거주민들과 그들의 노고와 창조물들 위에 유령이 떠돌고 있다. 잉여라는 유령이. 유동적 현대는 과잉, 잉여, 쓰레기, 그리고 쓰레기 처리의 문명이다. - 『쓰레기가 되는 삶들』, 지그문트 바우만, 정일준 옮김, 새물결, 176쪽 -   바우만은 근대화를 단순히 혼돈 속에 질서를 세우는 과정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그것은 동시에 질서의 외부를 만들어내는 과정, 즉 사회가 관리할 수 없는 인간들을 ‘불필요한 존재’로 규정하는 배제의 체계이기도 하다. 근대 사회의 이면에는 외부로 드러난 질서 잡힌 세계를 지탱하는 불순물의 체계가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합리적 질서를 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질서의 외부를 정리하기 위해 끊임없이 ‘불순물’을 제거하는 행위, 곧 ‘쓰레기 생산’이 반복된다. 바우만은 이를 근대의 설계도 속에 내재된 구조적 메커니즘으로 분석한다. 다시 말해, 쓰레기의 존재는 근대성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근대가 성공적으로 작동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진보’의 이름으로 버려진 자는 ‘누구’인가? -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Wasted Lives)』       근대 사회는 오랫동안 ‘진보’와 ‘성장’을 인류의 목표로 상정해왔다. 합리성과 효율성을 기반으로 한 근대화 과정은 신앙과 위신을 중시하는 중세적 비합리성에서 벗어나 이성적 질서를 구축하려는 시도로 이해되어왔다. 그러나 눈부신 발전의 이면에는 늘 그림자가 따르는 법이다. 근대화의 과정에서도 ‘진보’라는 미명 아래 그늘 속으로 밀려난 이들이 있었다. 사회가 효율적으로 작동할수록 질서에서 벗어난 인간들은 점점 더 ‘쓸모없는 존재’로 취급되었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Wasted Lives)』에서 이러한 근대성의 그림자를 ‘쓰레기’라는 은유로 명료하게 드러낸다.   유동적 현대 세계의 거주민들과 그들의 노고와 창조물들 위에 유령이 떠돌고 있다. 잉여라는 유령이. 유동적 현대는 과잉, 잉여, 쓰레기, 그리고 쓰레기 처리의 문명이다. - 『쓰레기가 되는 삶들』, 지그문트 바우만, 정일준 옮김, 새물결, 176쪽 -   바우만은 근대화를 단순히 혼돈 속에 질서를 세우는 과정으로만 보지는 않았다. 그것은 동시에 질서의 외부를 만들어내는 과정, 즉 사회가 관리할 수 없는 인간들을 ‘불필요한 존재’로 규정하는 배제의 체계이기도 하다. 근대 사회의 이면에는 외부로 드러난 질서 잡힌 세계를 지탱하는 불순물의 체계가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합리적 질서를 세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질서의 외부를 정리하기 위해 끊임없이 ‘불순물’을 제거하는 행위, 곧 ‘쓰레기 생산’이 반복된다. 바우만은 이를 근대의 설계도 속에 내재된 구조적 메커니즘으로 분석한다. 다시 말해, 쓰레기의 존재는 근대성의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근대가 성공적으로 작동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효주
2025.10.20 | 조회 369
기학잡담
서울사람 최한기   대학에서 연애할 때, 상대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였고, 나는 초, 중, 고를 모두 지방에서 나온 촌뜨기였다. 인(in)서울 대학에 다녔어도, 나는 꽤 오랜 시간 서울에만 가면 동서남북도 가늠하기 어려워 주눅이 들었다. 그때 연애상대는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서울지리를 가르쳐주겠다”며 은근히 장기연애의 속내를 비쳤지만, 바로 그 말이 시골 촌뜨기의 자존심을 긁었다는 것을 그는 지금도 모를 것이다. 나는 여전히, 태생이 서울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타산적이고 개인적인 성향의 서울 사람을 ‘서울깍쟁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그 이면에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만으로 누릴 수 있는 그 문화의 혜택에 대한 시샘도 있을 것이다. 혜강 최한기는 조선조의 서울 사람이었다. 도올은 혜강 최한기가 기학(氣學)이라는 사상체계를 확립한 배경으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서울시내의 상식’이었다고 말한다. 상식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구성원들이 보편적으로 알게 되는 지식이나 가치판단 같은 것이니까, 최한기가 오랫동안 서울에서 살지 않았다면 기학이라는 사유는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아래 오른쪽 이미지는 한양 도성전도) 혜강 최한기에 대한 수사는 이것만이 아니다. 그는 평생 공부만 하며 살 수 있었던 양반이었고, 서양의 최신 학문 서적을 사서 볼 수 있는 부자였고, 생전에 천 권에 이르는 저술을 해낸 빼어난 지식인이었다. 구질서가 흔들리고 새로운 질서에 대한 전망이 들끓는 19세기 조선, 물산과 기술과 정치가 집중되는 서울, 옛날의 경학에 대한 풍부한 식견과 새로운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대학자의 호기심과 경탄이 뒤섞인 사회문화적 에토스 속에서, 그의 말대로...
서울사람 최한기   대학에서 연애할 때, 상대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였고, 나는 초, 중, 고를 모두 지방에서 나온 촌뜨기였다. 인(in)서울 대학에 다녔어도, 나는 꽤 오랜 시간 서울에만 가면 동서남북도 가늠하기 어려워 주눅이 들었다. 그때 연애상대는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서울지리를 가르쳐주겠다”며 은근히 장기연애의 속내를 비쳤지만, 바로 그 말이 시골 촌뜨기의 자존심을 긁었다는 것을 그는 지금도 모를 것이다. 나는 여전히, 태생이 서울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문화적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타산적이고 개인적인 성향의 서울 사람을 ‘서울깍쟁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그 이면에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는 것만으로 누릴 수 있는 그 문화의 혜택에 대한 시샘도 있을 것이다. 혜강 최한기는 조선조의 서울 사람이었다. 도올은 혜강 최한기가 기학(氣學)이라는 사상체계를 확립한 배경으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서울시내의 상식’이었다고 말한다. 상식은 시공간을 공유하는 구성원들이 보편적으로 알게 되는 지식이나 가치판단 같은 것이니까, 최한기가 오랫동안 서울에서 살지 않았다면 기학이라는 사유는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아래 오른쪽 이미지는 한양 도성전도) 혜강 최한기에 대한 수사는 이것만이 아니다. 그는 평생 공부만 하며 살 수 있었던 양반이었고, 서양의 최신 학문 서적을 사서 볼 수 있는 부자였고, 생전에 천 권에 이르는 저술을 해낸 빼어난 지식인이었다. 구질서가 흔들리고 새로운 질서에 대한 전망이 들끓는 19세기 조선, 물산과 기술과 정치가 집중되는 서울, 옛날의 경학에 대한 풍부한 식견과 새로운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대학자의 호기심과 경탄이 뒤섞인 사회문화적 에토스 속에서, 그의 말대로...
봄날
2025.10.16 | 조회 257
방과 후 고전 중
  올해 고전학교에서 읽고 있는 『주역철학사』에서 ‘횡거철피橫渠撤皮’라는 고사성어를 보았다. 주희朱熹의 이정어록二程語錄의 설명에 따르면, “장재는 학문이 높고 강의도 잘해 그의 집은 가르침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항상 붐볐다. 어느 날 정호·정이 형제가 그를 찾아 주역에 관한 가르침을 청하면서 도道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말했다. 장재는 사람들을 향해 ‘지금까지 나의 강의는 잘못되었으니 모두 잊어버려라. 대신 정씨 형제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호피를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 고향인 섬서성으로 돌아갔다. 그는 후대 학자들의 귀감이 되었다.”는 것이다.       장재(張載,1020~1077)의 자字는 자후子厚이고 대대로 대량大樑에 거주해온 벼슬집안 출신으로, 오랫동안 섬서성陝西省 미현堳縣 횡거진橫渠鎭에 머물면서 강학講學했기 때문에 ‘횡거선생’이라 불렸다. 송명 리학의 기초를 닦은 한 사람으로 리학 4대 학파 가운데 관학파關學派의 개창자이다. 이정二程과 장재, 셋은 1056년, 북송의 수도인 개봉開封에서 만난다. 36세의 장재가 12~13세의 외종질(外從姪: 외사촌의 아들)인 정호(程顥, 1032-1085)ㆍ정이(程頤, 1033-1107) 형제를 만나 주역에 대하여 논論하고 나서 그 들의 도道에 대하여 밝고 깊다고 칭찬하며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는 것인데, 나이 차이와 관계(조카)에서 오는 ‘정말 그랬을까? 후배 리학자들의 과도한 설정이지 않을까?’하는 미심쩍은 의혹부터 든다. 동시에 호기심이 뒤따라온다. 철피撤皮했다, 낙향落鄕했다는 것을 빼고 나면, ‘그의 도가 밝다’고 칭찬한 점이 남기 때문이다. 장재가 공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대부분의 중국 고전이 존재론(본체론·우주론·생성론), 인성론(심성론), 지식론(인식론), 윤리학 등의 주제가 뒤섞여 있지만, 마지막 윤리학으로 가는 출발점은 존재론이므로 이에 대한 그들의 의견들을 정리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이정二程의 존재론 형인 정호는 천리天理는...
  올해 고전학교에서 읽고 있는 『주역철학사』에서 ‘횡거철피橫渠撤皮’라는 고사성어를 보았다. 주희朱熹의 이정어록二程語錄의 설명에 따르면, “장재는 학문이 높고 강의도 잘해 그의 집은 가르침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항상 붐볐다. 어느 날 정호·정이 형제가 그를 찾아 주역에 관한 가르침을 청하면서 도道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말했다. 장재는 사람들을 향해 ‘지금까지 나의 강의는 잘못되었으니 모두 잊어버려라. 대신 정씨 형제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호피를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 고향인 섬서성으로 돌아갔다. 그는 후대 학자들의 귀감이 되었다.”는 것이다.       장재(張載,1020~1077)의 자字는 자후子厚이고 대대로 대량大樑에 거주해온 벼슬집안 출신으로, 오랫동안 섬서성陝西省 미현堳縣 횡거진橫渠鎭에 머물면서 강학講學했기 때문에 ‘횡거선생’이라 불렸다. 송명 리학의 기초를 닦은 한 사람으로 리학 4대 학파 가운데 관학파關學派의 개창자이다. 이정二程과 장재, 셋은 1056년, 북송의 수도인 개봉開封에서 만난다. 36세의 장재가 12~13세의 외종질(外從姪: 외사촌의 아들)인 정호(程顥, 1032-1085)ㆍ정이(程頤, 1033-1107) 형제를 만나 주역에 대하여 논論하고 나서 그 들의 도道에 대하여 밝고 깊다고 칭찬하며 스스로 깨달은 바가 있었다는 것인데, 나이 차이와 관계(조카)에서 오는 ‘정말 그랬을까? 후배 리학자들의 과도한 설정이지 않을까?’하는 미심쩍은 의혹부터 든다. 동시에 호기심이 뒤따라온다. 철피撤皮했다, 낙향落鄕했다는 것을 빼고 나면, ‘그의 도가 밝다’고 칭찬한 점이 남기 때문이다. 장재가 공감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대부분의 중국 고전이 존재론(본체론·우주론·생성론), 인성론(심성론), 지식론(인식론), 윤리학 등의 주제가 뒤섞여 있지만, 마지막 윤리학으로 가는 출발점은 존재론이므로 이에 대한 그들의 의견들을 정리하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이정二程의 존재론 형인 정호는 천리天理는...
가마솥
2025.10.10 | 조회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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