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마음의 본체를 회복하라 『양명철학』, 진래, 예문서원(2003)   올해 나의 1234 주제는 양명철학이다. 강독중인 『전습록』의 단편적으로 뚝뚝 끊어지는 내용만으로는 양명의 철학을 이해하기 힘들어 시작한 공부였다. 양명의 전기를 시작으로 여러 권의 양명과 관련된 책을 읽었다. 모두 양명을 이해하기에 도움이 되는 책들이었지만 양명의 철학 이론 자체를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아서 뭔가 답답함이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세 번째 1234에서 참고했던 책이 있었는데 바로 이번에 쓰게 된 진래의 『양명철학』이었다. 그 때는 격물과 성의 중심으로만 읽었는데, 읽다보니 양명 철학에 대한 개설서로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1234 마무리를 이 책으로 하게 되었다.   진래는 북경대학 철학과 교수로 리학理學의 중심 사상인 주자학과 양명학을 연구하고 책을 쓴 학자이다. 하버드 대학에 잠시 머물 때 진영첩과 두유명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전통을 현대화시키는 문제에 대해 두유명과 마음이 잘 맞았다고 했는데, 이 말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마도 진달래샘이 작년 1234에서 썼던 두유명의 책이 기억에 남아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진래 교수의 책은 국내에 여러 권이 번역되어 있다. 이 책을 알기 이전에 이미 나는 『서경』에 관한 글쓰기를 하면서 저자가 쓴 책을 참고하기도 했다.         유有와 무無, 두 경지의 합일   이 책의 원제는 『유무지경有無之境 - 왕양명 철학의 정신』이다. 번역본의 제목 『양명철학』 보다 원제가 저자의 주장을 보다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어 번역본의 평범한 제목에 아쉬움이 남는다.   ‘유무지경有無之境’이란 ‘유의 경지와 무의 경지의 통일’을 가리킨다. 곧 유아지경有我之境과...
마음의 본체를 회복하라 『양명철학』, 진래, 예문서원(2003)   올해 나의 1234 주제는 양명철학이다. 강독중인 『전습록』의 단편적으로 뚝뚝 끊어지는 내용만으로는 양명의 철학을 이해하기 힘들어 시작한 공부였다. 양명의 전기를 시작으로 여러 권의 양명과 관련된 책을 읽었다. 모두 양명을 이해하기에 도움이 되는 책들이었지만 양명의 철학 이론 자체를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아서 뭔가 답답함이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 세 번째 1234에서 참고했던 책이 있었는데 바로 이번에 쓰게 된 진래의 『양명철학』이었다. 그 때는 격물과 성의 중심으로만 읽었는데, 읽다보니 양명 철학에 대한 개설서로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1234 마무리를 이 책으로 하게 되었다.   진래는 북경대학 철학과 교수로 리학理學의 중심 사상인 주자학과 양명학을 연구하고 책을 쓴 학자이다. 하버드 대학에 잠시 머물 때 진영첩과 두유명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전통을 현대화시키는 문제에 대해 두유명과 마음이 잘 맞았다고 했는데, 이 말이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마도 진달래샘이 작년 1234에서 썼던 두유명의 책이 기억에 남아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진래 교수의 책은 국내에 여러 권이 번역되어 있다. 이 책을 알기 이전에 이미 나는 『서경』에 관한 글쓰기를 하면서 저자가 쓴 책을 참고하기도 했다.         유有와 무無, 두 경지의 합일   이 책의 원제는 『유무지경有無之境 - 왕양명 철학의 정신』이다. 번역본의 제목 『양명철학』 보다 원제가 저자의 주장을 보다 분명하게 전달하고 있어 번역본의 평범한 제목에 아쉬움이 남는다.   ‘유무지경有無之境’이란 ‘유의 경지와 무의 경지의 통일’을 가리킨다. 곧 유아지경有我之境과...
토용
2025.03.13 | 조회 411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이런 '이상한' 사회학이라니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2005)』, 게오르그 짐멜, 김덕영 옮김, 새물결             ‘주류’ 고전 사회학자를  접해보는 중이다.하여 뒤르켐과 베버를 거쳐 짐멜로 왔다. 그러나 주류라는 단어에도 다양한 함의가 있을 수 있고, 또 짐멜을 과연 주류로 볼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도 있을 수 있다. 더구나 그는 살아생전 독일 지성계의 ‘이방인’으로 살아갔다고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의구심의 장면들에서 짐멜이 더욱 궁금해지는 지점이 있다.   주변인으로서의 짐멜의 정체성은 그가 유대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당시의 지적 분위기가 체계적인 사고와 논리적인 전개, 거시 구조적 담론이 중요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추적이고 단편적인 글과 에세이 형식의 글을 그가 주로 썼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러한 주변인 취급은 살아생전만이 아닌 사후에도 이어지는데, 1980년대까지도 짐멜은 사회학에 관한 한 막스 베버나 칼 마르크스, 에밀 뒤르켐의 그늘에 언제나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사실 외에 무엇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짐멜의 지적 세계에서 철학과 미학, 심리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 크다는 사실이다. 그는 모더니티의 다양한 현상들에 관심을 가졌고, 그것들을 다양한 화풍으로 그려낸다. ‘돈’, ‘유행’, ‘장신구’, ‘손잡이’, ‘얼굴’ 등과 같은 이 책의 주제들은 언뜻 보면 맥락 없는 단편들로 보일 수도 있다. 몇몇 주제들은 사회학이라기보다는 철학과 미학, 심리학에 더 가깝다.   무수한 모더니티 현상들을 스케치하는 짐멜의 사회학을 그가 보여주는 몇 가지 주제에 근거하여 범주화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흔히...
이런 '이상한' 사회학이라니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2005)』, 게오르그 짐멜, 김덕영 옮김, 새물결             ‘주류’ 고전 사회학자를  접해보는 중이다.하여 뒤르켐과 베버를 거쳐 짐멜로 왔다. 그러나 주류라는 단어에도 다양한 함의가 있을 수 있고, 또 짐멜을 과연 주류로 볼 수 있을까에 대한 논의도 있을 수 있다. 더구나 그는 살아생전 독일 지성계의 ‘이방인’으로 살아갔다고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의구심의 장면들에서 짐멜이 더욱 궁금해지는 지점이 있다.   주변인으로서의 짐멜의 정체성은 그가 유대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당시의 지적 분위기가 체계적인 사고와 논리적인 전개, 거시 구조적 담론이 중요시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추적이고 단편적인 글과 에세이 형식의 글을 그가 주로 썼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러한 주변인 취급은 살아생전만이 아닌 사후에도 이어지는데, 1980년대까지도 짐멜은 사회학에 관한 한 막스 베버나 칼 마르크스, 에밀 뒤르켐의 그늘에 언제나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사실 외에 무엇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짐멜의 지적 세계에서 철학과 미학, 심리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 크다는 사실이다. 그는 모더니티의 다양한 현상들에 관심을 가졌고, 그것들을 다양한 화풍으로 그려낸다. ‘돈’, ‘유행’, ‘장신구’, ‘손잡이’, ‘얼굴’ 등과 같은 이 책의 주제들은 언뜻 보면 맥락 없는 단편들로 보일 수도 있다. 몇몇 주제들은 사회학이라기보다는 철학과 미학, 심리학에 더 가깝다.   무수한 모더니티 현상들을 스케치하는 짐멜의 사회학을 그가 보여주는 몇 가지 주제에 근거하여 범주화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그를 흔히...
라겸
2025.03.12 | 조회 505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브뤼노 라투르, 갈무리(2009)   올해 내가 읽은 1234책은 아이우통 크레나키의 『세계의 종말을 늦추기 위한 아마존의 목소리』(2019), 유기쁨의 『애니미즘과 현대세계』(2023), 제인베넷의 『생동하는 물질』(2010)이었다. 첫 번째 책을 읽고 나는 아마존 원주민의 역인류학과 관점주의에 대해서 썼다. 두 번째 책에서는 애니미즘이 신비롭거나 주술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관계에 주목하는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세 번째 책에서는 근대 철학과 정치학에서 수동적 대상으로 간주되어 왔던 물질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연결망을 구성하는 능동적 행위자라는 것에 주목했다. 이 책들을 꿰뚫는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선택하게 된 네번째 책 브루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를 읽으며 알게 되었다. 올해 1234에서 내가 탐구한 것이 바로 한편에서는 비대칭적 인류학에 대한 비판이자 근대성에 대한 성찰이었다는 것을.     비대칭적 인류학에서 대칭적 인류학으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에는 ‘대칭적 인류학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이 부제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라투르는 인류학자들이 전근대사회를 그렇게 통찰력 있게 분석하면서 왜 자신들의 세계로 눈을 돌릴 때는 그토록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고, 인류학이 그동안 자연과 사회를 분리하고, 그 연구의 대상을 사회와 문화에 국한시켜 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라투르가 문제 삼는 것은 인류학이 사회를 연구했다는 것에 있지 않다. 문제는 자연과 사회를 분리하는 근대적 관점에 대해 어떤 의문도 갖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근대인이 자연과 사회의 분리를 당연시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브뤼노 라투르, 갈무리(2009)   올해 내가 읽은 1234책은 아이우통 크레나키의 『세계의 종말을 늦추기 위한 아마존의 목소리』(2019), 유기쁨의 『애니미즘과 현대세계』(2023), 제인베넷의 『생동하는 물질』(2010)이었다. 첫 번째 책을 읽고 나는 아마존 원주민의 역인류학과 관점주의에 대해서 썼다. 두 번째 책에서는 애니미즘이 신비롭거나 주술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관계에 주목하는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세 번째 책에서는 근대 철학과 정치학에서 수동적 대상으로 간주되어 왔던 물질이 우리가 사는 세계의 연결망을 구성하는 능동적 행위자라는 것에 주목했다. 이 책들을 꿰뚫는 키워드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선택하게 된 네번째 책 브루노 라투르의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를 읽으며 알게 되었다. 올해 1234에서 내가 탐구한 것이 바로 한편에서는 비대칭적 인류학에 대한 비판이자 근대성에 대한 성찰이었다는 것을.     비대칭적 인류학에서 대칭적 인류학으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에는 ‘대칭적 인류학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이 부제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라투르는 인류학자들이 전근대사회를 그렇게 통찰력 있게 분석하면서 왜 자신들의 세계로 눈을 돌릴 때는 그토록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고, 인류학이 그동안 자연과 사회를 분리하고, 그 연구의 대상을 사회와 문화에 국한시켜 왔다는 점을 지적한다. 라투르가 문제 삼는 것은 인류학이 사회를 연구했다는 것에 있지 않다. 문제는 자연과 사회를 분리하는 근대적 관점에 대해 어떤 의문도 갖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근대인이 자연과 사회의 분리를 당연시한...
요요
2025.03.10 | 조회 392
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노자의 도를 아십니까? (3)유약(柔弱) – 상선약수   상선약수(上善若水)는 『도덕경』 출전으로 유명한 말이다. 내가 앞서 풀이했던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나 “대기만성”이라는 사자성어는 노자의 말인 줄도 모르고 사용되기 일쑤이다. 그에 비하면 상선약수는 그 출전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편이다. 노자의 도는 어느 땐 너무 커서 뜬구름 잡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느 땐 너무나 소박해서 개인적 취향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노자의 도를 자기 삶에 적용하려는 시도는 쉽지 않다. 책 어디에도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상선약수는 어떻게 삶의 지혜를 전하는 노자의 도로써 널리 알려질 수 있었을까?   상선약수에 열광하는 이유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으니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도덕경』 8장 中)   노자의 도는 물(水)과 같다. 그런데 정작 물이 언급된 경우는 본문 전체에서 단 두 장뿐이다.(주석 제외) 강과 바다까지 합쳐도 채 다섯 손가락을 채우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상선약수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얼까? 물이 만물에 두루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한 알의 씨앗이 땅속을 뚫고 싹을 틔우려면 물이 필요하다. 그 씨앗이 자라서 나무가 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매순간마다 물은 그 생장을 돕는다. 그러다 가뭄이 들면 뿌리째 말라죽기도 하고 홍수가 나면 뿌리째 쓸려가 버리기도 한다. 따라서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말은 물이 만물의 생장과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만물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존재인데 반해,...
노자의 도를 아십니까? (3)유약(柔弱) – 상선약수   상선약수(上善若水)는 『도덕경』 출전으로 유명한 말이다. 내가 앞서 풀이했던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나 “대기만성”이라는 사자성어는 노자의 말인 줄도 모르고 사용되기 일쑤이다. 그에 비하면 상선약수는 그 출전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편이다. 노자의 도는 어느 땐 너무 커서 뜬구름 잡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느 땐 너무나 소박해서 개인적 취향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노자의 도를 자기 삶에 적용하려는 시도는 쉽지 않다. 책 어디에도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상선약수는 어떻게 삶의 지혜를 전하는 노자의 도로써 널리 알려질 수 있었을까?   상선약수에 열광하는 이유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으니 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도덕경』 8장 中)   노자의 도는 물(水)과 같다. 그런데 정작 물이 언급된 경우는 본문 전체에서 단 두 장뿐이다.(주석 제외) 강과 바다까지 합쳐도 채 다섯 손가락을 채우지 못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상선약수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얼까? 물이 만물에 두루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한 알의 씨앗이 땅속을 뚫고 싹을 틔우려면 물이 필요하다. 그 씨앗이 자라서 나무가 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매순간마다 물은 그 생장을 돕는다. 그러다 가뭄이 들면 뿌리째 말라죽기도 하고 홍수가 나면 뿌리째 쓸려가 버리기도 한다. 따라서 물이 만물을 이롭게 한다는 말은 물이 만물의 생장과 변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의미이다.     만물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존재인데 반해,...
두루미
2025.03.09 | 조회 446
이 글은 2024년 4분기 '읽고쓰기1234'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이 코너를 유심히 보시면 문탁네트워크 회원들이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주로 어떤 공부를 하는지 나아가 앞으로 문탁네트워크의 공부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도(?)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신화로 바라보는 한자 문화권 『갑골에 새겨진 신화와 역사』, 김성재 지음, 동녘선서, 2000    문자가 갖고 있는 여러 요소들이 있다. 역사성, 기록의 수단, 개념의 표현... 심지어는 예술성까지. 내가 한자를 흥미롭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른 문자와는 다르게 ‘신화’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때 얘기하는 신화는 구체적인 이야기나 사물의 기원을 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고 믿는 어떤 감각이다. 이를 다르게 얘기하면 그들이 가졌던 어떤 초자연적인 감각, 보이지 않는 것과 교류하려고 했던 노력들이다. 일종의 영성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 감각을 알아보고자 신화에 뛰어들었고, 문화에 따라 변신하는 신화, 은유를 통해 기호와 상징으로 표현되는 신화의 특성, 신화와 떨어질 수 없는 종교까지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신화에 대한 공부를 이어가며 이런 의문이 들었다. 정말 한자에 신화적인 감각이 담겨 있을까? 막연한 나의 느낌이 아니라 그것을 구체적으로 애기해볼 수 있을까? <갑골에 담긴 신화와 역사>를 통해서 그 내용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문자를 만든 창힐과 갑골문의 등장배경   중국의 신화는 천지를 창조한 반고씨로 시작해 삼황(수인씨, 복희씨, 신농씨)시절을 보내고 오제(황제, 전욱, 제곡, 요, 순)의 시대로 끝이 난다. 이 중에서 문자를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창힐은 오제시대에 속한 신이다. 그는 황제의...
이 글은 2024년 4분기 '읽고쓰기1234'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이 코너를 유심히 보시면 문탁네트워크 회원들이 어떤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주로 어떤 공부를 하는지 나아가 앞으로 문탁네트워크의 공부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도(?)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신화로 바라보는 한자 문화권 『갑골에 새겨진 신화와 역사』, 김성재 지음, 동녘선서, 2000    문자가 갖고 있는 여러 요소들이 있다. 역사성, 기록의 수단, 개념의 표현... 심지어는 예술성까지. 내가 한자를 흥미롭게 생각하는 이유는 다른 문자와는 다르게 ‘신화’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때 얘기하는 신화는 구체적인 이야기나 사물의 기원을 전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고 믿는 어떤 감각이다. 이를 다르게 얘기하면 그들이 가졌던 어떤 초자연적인 감각, 보이지 않는 것과 교류하려고 했던 노력들이다. 일종의 영성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 감각을 알아보고자 신화에 뛰어들었고, 문화에 따라 변신하는 신화, 은유를 통해 기호와 상징으로 표현되는 신화의 특성, 신화와 떨어질 수 없는 종교까지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신화에 대한 공부를 이어가며 이런 의문이 들었다. 정말 한자에 신화적인 감각이 담겨 있을까? 막연한 나의 느낌이 아니라 그것을 구체적으로 애기해볼 수 있을까? <갑골에 담긴 신화와 역사>를 통해서 그 내용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문자를 만든 창힐과 갑골문의 등장배경   중국의 신화는 천지를 창조한 반고씨로 시작해 삼황(수인씨, 복희씨, 신농씨)시절을 보내고 오제(황제, 전욱, 제곡, 요, 순)의 시대로 끝이 난다. 이 중에서 문자를 만들어졌다고 알려진 창힐은 오제시대에 속한 신이다. 그는 황제의...
동은
2025.03.09 | 조회 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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