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나의 길티플레져 그리고 번아웃

정군
2023-09-02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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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분기 1234가 끝난지 벌써 일주일이 되었네요. 그런데, 저는 어쩐지 1234가 계속 이어져서 5678..9...1.2.3.4....10으로 이어지고 있는 기분입니다. 

당장 지난주에 1234 끝나고 뒤풀이까지 했는데, 그러고 다음날 아침부터 강의에 세미나에 또 강의에 세미나에 줄줄줄 '해야할 일'들이 이어져서 그런 듯 합니다. 그래서 지금 약간 번아웃 상태입니다.

그리하여, (아무도 묻는 사람은 없지만) 누군가 '요즘 제일 하고 싶은게 뭐니?'라고 물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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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이겠지'라고 생각하셨나요? ㅋㅋㅋ 그것도 아주 틀린 답은 아니옵니다만, 사실 그건 아닙니다. 

게임은, '하고 싶은 것'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거든요. 그건 그냥 생활, life인 것입니다. 

진정 제가 요즘 하고 싶은 것은 '읽어야 하는 책' 말고 서가書家를 스윽 훑어 보다가 '오 이거 재미있겠는데!' 싶은 책을 하나 골라 끝까지 좌아아악 읽는 겁니다. 그럴 수 있는 책들이란 대개 역사나 소설이나 어쨌든 '이야기'가 있는 책들이죠. 그런 걸 하고 싶어요. 다음 스케쥴 따위는 생각하지 않은 읽기. 중간중간 간식도 퍼먹고, 음악도 틀어놨다가, 누웠다가 앉았다가, 기대기도 하고, 책상에 발도 올리고.... 아 얼마나 좋을까요. 눈 감았다 뜨면 12월26일이면 좋겠습니다. 왜 26일냐 하면, 보너스로 '크리스마스' 정도는 피할 수 있는거 아니겠어요? ㅋㅋㅋ

 

자 그래서, 이 바람을 담아 문스탁에, 막상 읽자면 읽을 수 있는 형편이 전혀 아니 관계로 읽기를 계속 미루고 있는 책들을 골라서 올려보자 했습니다. 그런데 또, 그것만 하자니 딱히 '재미'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 또 한번 내장內臟을 전시해 보려고 합니다.

 

네... 제가 전쟁과 무...무기 기술 이런 걸... 조... 좋아합니다. 그와 더불어서, 자동차의 엔진, 축성술... 기계들의 매커니즘 같은 걸 도안과 함께 보는 것도 좋아하고요. 말하자면, (군사) '작전'과 그것의 성공적 '수행'을 위한 기술적 기반 따위에 뭐라 말하기 힘든 '매력'을 느끼곤 합니다. ㅠㅠ

그래서 이게 왜 '길티 플레져'냐...하면, 아시다시피, 이게 말이 좋아서 저렇게 표현되는거지, 사실은 '저는 전쟁무기와 전쟁사를 즐겨봅니다'라는 말과 다름 없으니까요.

 

이게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 하면, 모든 시작은 <붉은 돼지>부터 였던 것 같습니다. 실제 항공기 모형을 엄청나게 좋아했던 저희 중학교 기술 선생님께서, 고등학교 배치까지 모두 끝난 중3 2학기 어느 날, 수업시간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 비디오를 틀어주셨거든요. 거기 나오는 포르코의 비행기 Macchi M33 수상기나, 포르코의 라이벌 커티스의 사보이어 수상기 등에 매료되었던 게 첫 시작이었습니다. 으으... 그러다가 이제 컴퓨터가 생기고 제1차 세계대전 항공전을 배경으로 하는 게임 레드바론 속 포커Dr1이라는 삽엽 프롭기에 매료되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항공기 프라모델부터, 1, 2차 세계대전사 등등에 빨려들어갔던 그런 청소년기를 보냈달까요...

 

 

당연히 이쪽 덕후라면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덩케르크 철수작전, 영국 본토 항공전, 바르바로사 작전 같은 전쟁사나 전략-전술에 해당하는 기동전, 진지전, 종심작전이론, 회전문 효과 등등 전쟁 이론까지 관심을 넓혀 갑니다. 아 물론 프라모델도 만들고요. (어쩐지... 어디선가 '정군 너란 놈은 참...'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군요) 

그러면 현대전에만 관심이 있었느냐, 아니죠. 그럴리가요.

나중엔 전쟁사 전반으로 관심을 넓혀 갑니다. 고대 전쟁의 기본이었던 망치와 모루 전술부터, 중세의 공성전, 성곽 중심 전투를 해체한 화기의 발명까지 이쪽분야는 이쪽 분야대로 파고 들어갔습니다. 

 

넷플릭스에 <탱크의 시대>가 떴을 때, 내심 얼마나 반가웠던지요. '탱크 오오 탱크' 이러면서요.

 

네... 저도 압니다. 이거 참... 꽤나 부도덕한 관심이라는 걸요. 그런데 아주 조금... 아주 조금 변호를 해 보자면, 결과적으로 이런 관심이 저한테는 '공부'를 하는데 꽤 많이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근대적인 '보통참정권'의 확보는 '화약무기'의 일반화와 뗄 수 없는 관련을 맺고 있다라거나, 프로이트의 죽음충동이론은 1차 세계대전 속에서 태어났다거나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시간이 좀 넉넉하게 나면... 이런 책들을 읽고 싶었어요. 아...어쩐지 떳떳하지 않은 가운데, 모아 놓으니 더 읽고 싶군요.

한마디 더 하자면, 제가 전쟁을 좋아하느냐... 그건 전혀 아닙니다. 전쟁 반대합니다. 어느 경우에도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모순이기도 합니다. 

 

이쪽(모순) 계통의 선배이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님의 인터뷰를 끝으로 이만 물러 납니다.

 

질문 : 전쟁을 비판하는 한편, 제로센이라는 무기에는 애착을 갖는다. 모순이지 않습니까?

미야자키 하야오 : 모순 덩어리입니다.

 

 인간이란... 참 복잡하네요....(유체이탈화법?)

 

댓글 10
  • 2023-09-02 21:45

    ㅋㅋㅋㅋ 전 붉은돼지 보면서 ‘노래 죽인다~’ 생각밖에 안했는데 이렇게 말하면 정군쌤은 “아! 노래도 죽이지!”라고 할 것 같군요 ㅋ
    지명이든 인명이든 어떤 고유명사의 이름을 잘 못외우는 저로서는… ‘저걸 다 어떻게 알고 있는다냐?’ 싶습니다 ㅋㅋㅋㅋ
    근데 저도 중세나 과거의 전쟁에는 굉장히 관심이 가네요!?
    현대 전쟁은 별로 알고 싶지도 않고요 … 음…
    근데 동양고대전쟁사같은 책은 없나요? 그건 관심 밖인가요? ㅎ

  • 2023-09-04 07:33

    ㅋㅋ 묵자세미나를 하고 이어서 계획대로 손자병법까지 갔다면 저도 전쟁술에 빠졌을런지도... 암튼 축성술 관심이 있습니다.. 어떻게 무너지지 않게 무게 중심을 잡는지... 탱크의 포탄 기울기 같은 거 말입니다 ㅎㅎ

  • 2023-09-04 10:09

    노벨상을 두번 받은 라이너스 폴링(1901~1994)이라는 과학자가 있어요. 첫번째 상은 단백질 연구로 노벨화학상을 받았습니다.
    폴링의 대학성적증명서를 보면 기하학, 수학, 화학은 전부A였고, 체육은 F, 캠핑요리는 C였다네요.^^
    특별히 화학과 관련해서 2학년때 '폭발물'과목에서 최상위성적을 받았다는데.. 어려서부터 폭발물에 관심이 많았나봐요.ㅎㅎ
    제2차 세계대전후 폴링은 핵실험 중지를 요구하는 평화운동에 뛰어 들었고, 1962년에 두번째 노벨상인 노벨평화상을 받습니다.
    폭발물에 대한 관심이 핵실험 중지를 위한 운동으로 이어진 걸까요?(평화주의자인 아내의 영향도 컸다고 하더군요.^^)
    정군님의 전쟁과 무기에 대한 관심은 어디로 나아갈까요? 기대가 됩니다.ㅋ

    • 2023-09-04 10:44

      반대는 모르면 못해요. 성찰 수준에 다다라야지.. ㅎㅎ

  • 2023-09-04 10:12

    환절기에 번아웃이라니...
    건강도 잘 챙기세요.

  • 2023-09-04 15:26

    밀덕이라고는 생각지도 ㅋㅋ 정말 관심 분야 다양~~

  • 2023-09-04 15:41

    붉은돼지 LP를 소장하고 있는 입장에서.. (그러고보니 어디로 갔는지 기억이 안나네..)
    참으로 흥미롭네요ㅎㅎ

    전쟁과 전쟁무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폭력적인 게임을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처럼 여겨지는 것 같아요.
    엄밀히 따지자면 좋아하는 대상의 속성과 무엇을 좋아함의 속성은 다르다고 봐야하지 않을까요?ㅎ 물론 애매한 지점이 많지만 번아웃도 왔는데 좋아하는 것 쯤은 눈치보지 말고 즐기시라며..

  • 2023-09-04 21:20

    제가 인터뷰 한 분 중에 평화주의자(?)여서 대체역 근무를 하고 계신 분이 있는데요.
    그분이 폭력, 전쟁을 그렇게 좋아한답니다. 논문도 그쪽 관련 있는 걸로 쓰시더라고요.
    흥미롭네요 큭큭

    그나저나 정군쌤은 어찌 그리 좋아하는 게 많으신가요? 저랑 정반대라 넘 신기해요.

  • 2023-09-04 21:37

    사실 전쟁중에는 보유하고 있는 모든 Resource를 퍼부어야 하죠. 그 중에 당대 지식도 예외없이 총망라됩니다.
    그렇게 전쟁 중에 적용하였던 그 모든 지식이 전쟁이 끝난 뒤에 현실/산업에 적용하여 인류발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해서, 동서고금의 전쟁사를 읽고 난 '정군'님이 '정장군'으로 변신하시어, '문탁'의 공부발전을 위하여 ㅇㅇ세미나를 선언을 하실 지도 모릅니다.

    뱀발 : 누군가가 치워버릴 지도 모르니, 동상은 아예 만들지 않을께......휘리릭.

  • 2023-09-06 15:22

    정말 하고 싶은 것 하게 해주고 싶네요
    평창 빌려줄 수 있는데
    책보며 뒹굴거리며 아무것도 안하기 딱 좋은데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