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커피믹스와 딱복

도라지
2023-08-22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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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스탁이 4월에 시작됐고. 아빠는 4월 17일 병원에 처음 입원하셨다. 이후 나는 문스탁에 내내 아빠 이야기만 올렸다. 당연했다. 내 머릿속에는 아빠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8월 1일 아빠가 돌아가셨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삼우제 지나 아빠한테 남편이랑 둘이 간 날. 아빠 앞에 처음 절을 했다. 엎드려 한참 울었다. 교회 권사인 엄마와 집사인 올케의 신앙적 체면과 가정의 평화를 위해 십분 백분 양보한 끝에 생긴 웃픈 일이었다.

 

 

(아직 비문을 못 새겨서 아빠한테 가면 아빠 묘가 맞는지 잘 확인해야 한다. 안 그러면  엄한 고인께 실례를 범할 수 있다...)

 

 

엄마와의 카톡을 뒤져 원본 없이 미리보기 파일만 있는 아빠의 사진을 의뢰해 인화했다. 책장 한켠에 두고 수시로 아빠와 눈을 맞춘다. 의식을 놓기 전 응급실에서 마지막으로 드시고 싶어하셨던 물도 항상 놔드린다. 병원에 계셨던 석 달을 입으로 아무 것도 못드신 게 사무쳐 아빠 사진 옆에 먹을 걸 항상 둔다. 다 내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일.

 

좋아하시던 믹스커피도 아침마다 드리는데, 드리고 나서 내가 가져다 마시다 보니 이제 내가 마시고 싶어서 아빠를 드리는 것 같다. 며칠 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먼저 한 입 마시다가 아차! 싶어 "아빠~ 미안~"하며 아빠한테 놔드리고는 금방 도로 호록 마셨다. 마침 정군쌤이 고급진 향을 선물해주셔서 향도 아빠 옆에 두고 자주 태운다. 향이 퍼지면 마치 다녀가신 것 같다.

 

 

이제 바람처럼 공기처럼 편안하시기를...

 

 

아빠가 돌아가신 여름. 식구들에게 말했다. 올 여름 복숭아는 안 먹을 거라고. 그게 자식된 우리의 도리라고. 아빠가 제일 좋아하셨던 과일이 복숭아였다. 그런데 긴 무더위에 갈수록 사먹을 과일이 없다.

 

아! 있다... 그런데 그것은...복숭아!

아... 우짜지... 복숭아?

 

 

타협을 했다. (누구랑?)
복숭아를 아빠 먼저 드리고. 내가 먹는거다!

 

 

 

나는 딱복을 좋아하고 아빠는 물복을 좋아하기 때문에.
당연히
딱복을 샀다.
아빠~ 딱복도 달고 맛나요~

.

.

.

.

.

아빠는 이제 안계시지만,

내 옆에 더 많이 계신다.

 

"당신에게 행복과 행복의 원인이 있기를. 당신이 고통과 고통의 원인에서 해방되기를..."

_()_

 

(1234는 안 쓰고 문스탁만 썼다네~~~~)

 

댓글 9
  • 2023-08-23 04:04

    _()_
    아버님 물복은 그럼 제가 대신..

    209_shop1_268689.jpg

  • 2023-08-23 09:39

    도라지의 의례를 보니 예전에 할아버지 장례 후에도 일정기간 집에 빈소를 차려놓고 아침을 먹기 전에 먼저 밥과 국을 올리던 생각이 납니다.
    근데.. 도라지 아버님 묘 앞에 놓인 커피를 보니.. 문득 나도 달달한 믹스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어지는군요.

  • 2023-08-23 11:42

    보내드린 아버지를 이렇게 추모할 수도 있군요.
    다른 종교의례 때문에 맘 놓고 울지도 못한 도라지....많이 우셨길 바래요.
    사랑스런 딸 도라지를 보는 아빠의 눈빛에 하트뿅뿅 보이세요?ㅎㅎ

  • 2023-08-23 20:50

    음... 저도 작년까진 비타협적 물복파였는데... 올해는 어째 딱복이 더 맛있다고 느낍니다... 이런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말이죠. 흠흠.
    과거의 제 사치가 이렇게 적절하게 쓰일 수 있다니 어쩐지 다행이라 느낍니다요 ^^

  • 2023-08-24 16:40

    내일을 위해 딱복과 물복을 준비했어요~~^^

  • 2023-08-24 18:09

    아버님과 작별과 재회를 잘하고 계시군요. 편안하실거 같아요. 아픈거 정말 고통스럽잖아요.
    부처님처럼 아버님도 무여열반하셔서 자유로우실 거 같아요. 도라지님도 열반을 향해 고고씽~ 하시길 응원합니다~

  • 2023-08-25 22:43

    우리 아빤 어떤 과일을 좋아하시나? 문득 ...전화해서 물어봐야겠다.

  • 2023-08-29 06:49

    저도 복숭아 좋아하는데 도라지 아버님도 그러셨군요. 도라지의 애도의례가 따숩네요. 마음속에서도 잘 보내드리세요.

  • 2023-08-29 11:40

    삶이 추억이 되는 데는 시간이 꽤나 필요한 듯 합니다.
    아주 많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