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기 1234] 유교, 악령이 아닐 수 있을까?

고은
2023-09-04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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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즘과 나는 애증의 관계다. 아마도 내가 일방적으로 느끼는 애증일 테지만, 나는 한때 주위에 페미니즘을 강매하는(?) 열성도였고, 또 어떤 때는 그 한계를 느끼며 버리고자 했다. 지금은 죽지 않고 다시 또 살아 돌아온 심지어 확장되어 나부끼고 있는 페미니즘의 깃발을 보며 겸손하게 그 부름에 응답하기로 마음먹었다. 페미니즘은 내가 갖거나 버릴 수 있는 이론이 아니라, 내 친구들이 구체적인 현실에서 절실한 필요를 느끼며 부여잡고 일종의 인식론, 실천론에 가깝다. 유교를 공부하고 있는 젊은 여성인 나는 오늘날의 페미니즘적 맥락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며, 오히려 꺾이지 않는 페미니즘에 유교만의 방식으로 응답해야 한다고 느낀다. 유교와 페미니즘이 결합하는 것은 가능할까?

 

 

 

1. 유교를 구원하던 페미니즘

 

  유교와 페미니즘이라니, 조합이 매우 낯설게 느껴진다. 나의 또래 페미니스트들 중에 유교가 우리 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이 한국 여성의 삶에 악영향을 끼친 원흉이자 여태껏 끈질기게 살아남은 악령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내가 읽어온 페미니즘 책에서는 고대부터 여성들은 차별당해 왔다는 이야기를 했다. 특히 고대 동양 여성들의 삶에 대한 안쓰러운 시각은 오래전부터 기정사실화되어 왔다. 

 

  초기 프랑스 페미니스트인 쥘리아 크리스테바는 1974년 <중국 여성에 관하여>에서 한 장의 제목을 ‘공자-여자를 잡아먹는 자’라고 붙이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도 유교는 서구적 삶의 방식보다 뒤떨어지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상징했다. 마저리 울프에게 유교란 여성 혐오와 동의어였다. “상하이의 젊은이들이 스탠포드대학교 MBA를 취득하고 다국적 기업이 중국의 푸젠성에 있는 이 시대에, 위계적 권위 구조와 가부장적 구조 질서를 정당화하는 유교적 원리들은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보인다.” 

 

  서구에서 유교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이 시작되었듯, 역시 서구에서 유교에 대한 페미니즘적 가능성을 먼저 보고 있는 것 같다. 중국 철학, 서양윤리학, 페미니즘을 연구하는 하와이대학교 철학 담당 교수 리-시앙 리사 로즌리는 <유교와 여성>에서 오리엔탈리즘적 페미니즘을 넘어서 유교와 고대 여성들의 삶을 다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유교를 철저히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로 규정짓는 것은 유교 자체를 강등시키면서 서구(=현대)에 비해 열등한 위치에 놓이게 한다고 말한다. 

 

 

 

 

 

 

2. 이원적으로 쓰이지 않았던 내-외

 

  페미니즘이 어떻게 오리엔탈리즘적으로 유교를 다루었다는 말일까? 나는 책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 중 하나인 ‘내외’에 대해서 적어보고 싶다. ‘내’와 ‘외’의 구분이 또래 페미니스트들에게 얼마나 큰 반감을 불러일으키는지 모른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바로 그 전형을 보여준다. 여성과 남성의 영역이 분명한데 여성이 자신의 자리를 이탈하면,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면 사회에 망조가 들 것이라는 말에 분노하지 않을 젊은 여성이 어디 있을까? 내외에 대해 이처럼 분노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외’는 사회적 영역을 뜻하고, ‘내’는 사회적인 영역 밖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내와 외의 구분을 오늘날의 가족과 국가 혹은 사적과 공적 개념과 등치시켜선 안 된다고 말한다. ‘시민사회’와 ‘공공 영역’의 개념은 역사적 맥락 위에서 탄생한 개념이다. 이것들은 서구 자유주의 전통의 발명품으로 도시의 부르주아 계급이 부상하고 지식인의 결사가 등장하며 생겨난 영역이다. 그러니까 저자에 따르면 동양 사회에서 ‘공공 영역’ 혹은 ‘시민 사회’의 존재 여부를 따져 묻는 것을 얼토당토않은 접근, 즉 오리엔탈리즘적인 접근인 셈이다. 여성들의 존재가 집안에, 그러니까 가족 영역 안으로 가두리 지어진 것이 여성 혐오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내-외는 고대에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던 것일까? 

 

  첫 번째, 지금 내-외 개념이 대단한 전통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묘사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후대의 의례서와 지침서에 잘 발견될지언정 초기 경전 문헌에서는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오경 중 <예기>의 ‘내칙’과 <역전>의 ‘가인괘’를 제외하고는 내외는 주변부적인 개념이었다. 두 번째, 내-외는 젠더와 연결되어 사용되지 않았다. 사서 중 <논어>에는 내외 관념이 존재하지 않으며, <대학>과 <중용>에 나오는 내외는 젠더가 아니라 덕德이나 부富와 관계가 있다. (<대학> 10장, “덕은 근본이요 재물은 말단이다. 근본을 밖으로 하고 말단을 안으로 하면, 백성들을 다투게 하고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이다.”) 세 번째, 내-외는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라 관계적인 개념이었다. <맹자>에는 맹자와 고자의 인내의외(仁內義外) 논쟁이 있다. 이분법적으로 인의를 분리하는 고자에 반해 맹자는 내외를 완전히 다르다고 분류하지 않았다. 그에게 내외는 상호 보완적이고 상호의존적인 개념에 가깝다.

 

 

 

3. 문명화와 내-외의 이원성

 

  그렇다면 지금처럼 대비적으로 보이는 내-외 개념은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내-외가 이원적으로 사용된 최초의 용례는 <서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서경>에서 내-외는 나랏일에 대한 점을 치는 상황에서 언급된다. “네가 따르고 거북점이 따르며, 시초점이 거스르고 경사가 거스르고 서민이 거스르면 안의 일을 하는 것은 길하고 밖의 일을 하는 것은 흉할 것이다.”(-‘홍범’) <서경>에서는 내부 영역은 황실과 그 신하들을 의미하고, 외부 영역은 국제 사무를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황실은 질서정연함을, 외부 세계는 혼란스러움을 뜻한다. 이 구분은 후대에 내-외 구분과 젠더 구분이 긴밀한 관계를 갖는 데 토대가 된다.

 

  이민족의 침략이 절정에 이른 한나라에서는 한족과 이민족 사이의 경계 짓기는 다양한 층위에서 이뤄졌는데, 특히 한족에게 이민족은 무엇보다 남자와 여자를 구별하지 않는 것으로 특징되었다. 이때 내-외는 공간적 경계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내-외 구분 자체가 문명화된 사회의 표식이 된다. 내-외 경계로 말미암아 적절한 사회적/젠더적 구분이 만들어짐으로써 인간사회의 예가 표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서로 다르지만 상호보완적인 의무와 활동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 남경여직은 젠더화 과정뿐만 아니라 문명화 과정을 상징하기도 한다. 한나라 후기와 위나라 초기의 ‘문명화’ 프로젝트에서는 이민족들에게 쟁기질하고 베를 짜도록 가르치는 것이 그들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정착된 삶의 장식과 성별 분업을 통해 존속을 장려하고, 지역사회를 발전시켜, 중앙집권적인 과세를 촉진했다. 즉, 규범적인 성별 분업은 협동적인 삶의 요구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상보적인 역할을 통해 문명을 일궈나가는 표식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한나라에 와서 내-외가 절대적인 경계를 의미하게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내-외는 가변적인 경계로, 상충하는 두 영역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동심원을 묘사하는 것에 더 가깝다. 가령 한족과 비한족의 경계는 제국의 중심과 얼마나 근접한지에 의존했다. 또 내-외 구분은 한나라 내부지역에 적용되기도 했다. 한나라 왕실의 중앙과 근접한 내륙 지방은 내군이라고 불렀고, 국경 근처에 있는 지방을 외군이라고 불렀다. 또 이민족에도 내-외를 측정할 수 있었는데, 조공을 바치는 이민족을 내이라고 불렀고, 불규칙하게 조공하며 침략을 일삼는 이들을 외이라고 불렀다. 

 

  젠더가 내-외의 구분과 밀접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이민족) 문명화 과정과 함께 한다. 중국이 문명화하는 과정은 제국주의적인 면이 있다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다. 이러한 역사성을 빼놓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적어도 내가 배운 바에 따르면 중국사유에서 ‘문명’이라는 개념은 다른 이들을 배타적으로 내모는 제국주의적인 과정이 아니었다. 문명화란 구체적으로 우리가 발을 딛고 설 기반을 만드는 과정grounding이다. 조금 더 공부 해봐야겠지만, 내-외, 남-녀의 이원론은 남-녀가 서로 함께 살아갈 땅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 남-녀에 대한 구분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방식으로 다뤄지지 않고, 철저히 구체적인 삶의 양식에 기반하여 다뤄지고 있다.

  

 

 

4. 고대 여성이 갇혀 살았다는 오해

 

  젠더화 과정은 일상의 신체, 소유, 의례용품 사용 등을 규제함으로써 시작되었는데, 그중에는 공간의 경계 짓기도 있다. 소년과 소녀는 다른 교육 과정을 통해 다른 영역에 상주한다. 소년은 외의 영역에서 육예, 경전, 공직을 염두에 둔 공손한 행동을 배운다. 소녀는 내의 영역에서 베짜기, 실뽑기, 수놓기, 제사를 위한 음식 준비, 아내의 공순한 태도를 배운다. 또 남녀는 같이 앉지 않고, 옷걸이, 수건, 빗을 함께 사용하지 않고, 무언가를 직접 주고받지도 않는다. 남녀의 물리적 분리는 황실 내부와 외부 이민족의 경계를 성벽과 성문으로 구획한 용례와 맥을 같이 한다. <관자>에서 성곽과 마을, 집과 담장의 경계가 중요함을 말하며 마지막에 남녀의 구분을 연결 짓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마을의 문에 문짝이 없으면 안팎이 서로 통해 남녀 사이에 분별이 없다.”

 

  그러나 저자는 이때 장벽(경계)이란 분리를 의미하기 위한 장소일 뿐이며, 기능적인 개념이라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질서와 안전을 위한 장벽은 사실상 의례적인 경계선이며 표상이다. 즉 남자와 여자를 외와 내라는 젠더적 영역으로 구별하는 것은 질서의 번영과 문명화된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지, 여성이 내부에 속박되거나 여성의 역할이 사회로부터 소외되거나 단절되는 것이 아니다. 가정세계의 여성 영역은 정치세계의 남성 영역과 분리된 독립체로 취급되지 않았다. 여성들은 별도의 안채에 격리되지 않았으며, 남성적 영역과 단절되어 있지도 않았다. 

 

  “내-외는 사적-공적 또는 가족-국가라는 서구의 이원론적 패러다임과는 다르다.”(176)

 

  내는 공적인 덕목들의 근원이고, 여성적 덕목과 예의범절은 가족, 공동체, 국가라는 동심원들 가운데 구심점이 된다. 가족과 국가, 내와 외는 모순적이거나 분리되어 있지 않고 관계적이다. 내의 영역은 이 구심원의 중심, 즉 정치 질서의 중심에 있다. 가족적 덕목들은 주변부로 취급되지도 않는다. 저자는 유교 내 여성의 지위와 역할을 드러내 주는 ‘삼종지도’를 ‘삼종의 종속’이 아니라 ‘삼종의 추종following’ 또는 ‘삼종의 의존dependence’로 해석해야 한다고 말한다. 삼종지도는 여자들이 예속되었다거나 선천적으로 열등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외의 영역에 접근하기 위해서 실질적인 연결고리가 필요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어떻게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까? 당시의 내 영역이 오늘날 (국가/공적인 영역을 지탱하는) 가정/사적인 영역이 아님을 이해한다면, 당시 여자들의 역할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많이 찾을 수 있다. 유교 사회에서 어머니는 어떤 형식으로든 아들에게 종속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볼 수 있다. 꼭 극단적인 모권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열녀전>에 등장하는 현명한 어머니들의 사례, 맹모지교의 사례, <안씨가훈>의 교훈서 등을 보면 일상생활 속 어머니의 권위는 높게 평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부부 관계도 마찬가지다. 아내는 남편과 같이 동등하게 존중받았다. 그 권위가 남편의 지위에서 유래되긴 했지만, 중요한 것은 부부가 서로 동등한 하나의 몸으로 개념화되었다는 것이다. 부부관계는 일방적인 지배 관계라기보다는 상호존중 하는 평등한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

 

 

 

5. 물리쳐야 할 악령이 아닌 든든한 뿌리

 

  또 이 글에서 다 다루지는 못했지만, 고대 문학에서 여성이 딸, 아내, 어머니와 같은 젠더 역할에 국한되지 않은 모습도 많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열녀전>에서 다뤄지는 여섯 가지 덕목은 후대 왕조가 칭송하던 ‘여성적 덕목’이 아니었으며, 그들에게서 수동적인 모습 역시 찾아볼 수 없다. 과거에 실제로 내-외에서 내가 외만큼 중요하게 다뤄졌다는 것은 여성의 영역이 우월했다는 이야기라기 보단, 여성 역시 사회적인 영역에서 역할과 비중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였다는 의미라고 봐야 한다. 여성은 만년 피해자가 아니었으며, 억압당해 꼼짝 없이 눌려있는 생명체도 아니었다. 

 

  물론 저자는 내-외 관념에 근거한 성별 분업에 성차별적 요소가 있으므로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오늘날 내-외 개념을 다시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는 내-외 개념이 절대적인 우월함이나 열등함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상호보완성과 호혜성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교윤리학에서 절대 권력은 고사하고 의무 없는 권리란 없다. 여기서의 요점은 각각의 사회적 관계가, 비록 본질적으로는 위계적일지라도, 호혜적이고 상호보완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유교페미니즘은 기본적으로는 위계적이지만 또 상호보완적이고 호혜적인 인간관계 구조를 주장한다.”(314)

 

  위계적이지 않아야 상호보완적이고 호혜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위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평등해지기 원칙들을 만들지만, 위계적이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상호보완적이지 않고 호혜적이지 않을 수 있다. 평등은 쪼개진 사회를 이어 붙이는 강력한 접착제가 아니다. 물론 다시 위계적인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만약 유교에서 성별 분업과 위계성을 약간 수정할 수 있다면, 유교가 전면에 들고 나서는 상호보완성과 호혜성은 오늘날 페미니스트들에게 충분히 의미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우리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유교-감각이 서양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치유받거나 물리쳐져야 될 악령이 아니라, 든든한 뿌리이자 새로운 시각과 감각을 줄 수 있는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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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카메오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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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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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와 불교산책
  수행은 고행이 아니다   아,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원한 품은 자들 속에 원한 없이, 원한을 품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원한을 여읜 자로 살아간다. 아,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우리의 것이라고는 결코 없어도, 광음천 세계의 천신들처럼, 기쁨을 음식으로 삼아 지내리라.(『법구경』 197, 200)     고행을 멈추다   보리수 아래에서 위대한 깨달음을 얻기 전 붓다는 어떻게 수행했을까? 붓다의 수행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가 엄청난 고통스런 수행의 결과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먹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고 피가 마르고 살이 마르는 고행을 해야지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면, 우리 같은 평범한 중생에게 깨달음이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이것은 오해다.   간다라 미술품 중에 유명한 고행상이 있다. 피골이 상접하여 갈비뼈가 그대로 드러난 붓다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고행상을 사랑하고, 인간의 한계 끝까지 정진한 붓다에게 경의를 표한다. 깨닫기 전의 붓다가 한 고행은 그야말로 상상 초월의 것이었다. 하루에 곡식 한 톨로 연명하는 곡기를 끊는 수행의 결과 문제의 고행상처럼 등뼈과 창자가 들러붙었다. 영양실조 상태에서 손으로 문지르기만 해도 사지의 털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몇 개월이고 잠을 자지 않아 피부와 눈은 그 빛을 잃었고 대소변을 보려고 하면 머리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오랫동안 호흡을 멈추는 수행을 하다 보니 힘센 사람이 머리를 가죽끈으로 조이는 듯한 극심한 두통과 이명에 시달렸다.   일반적으로 붓다의 생애의 주요 장면을...
  수행은 고행이 아니다   아,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원한 품은 자들 속에 원한 없이, 원한을 품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원한을 여읜 자로 살아간다. 아,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우리의 것이라고는 결코 없어도, 광음천 세계의 천신들처럼, 기쁨을 음식으로 삼아 지내리라.(『법구경』 197, 200)     고행을 멈추다   보리수 아래에서 위대한 깨달음을 얻기 전 붓다는 어떻게 수행했을까? 붓다의 수행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가 엄청난 고통스런 수행의 결과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먹지도 않고 잠을 자지도 않고 피가 마르고 살이 마르는 고행을 해야지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면, 우리 같은 평범한 중생에게 깨달음이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이것은 오해다.   간다라 미술품 중에 유명한 고행상이 있다. 피골이 상접하여 갈비뼈가 그대로 드러난 붓다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고행상을 사랑하고, 인간의 한계 끝까지 정진한 붓다에게 경의를 표한다. 깨닫기 전의 붓다가 한 고행은 그야말로 상상 초월의 것이었다. 하루에 곡식 한 톨로 연명하는 곡기를 끊는 수행의 결과 문제의 고행상처럼 등뼈과 창자가 들러붙었다. 영양실조 상태에서 손으로 문지르기만 해도 사지의 털이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몇 개월이고 잠을 자지 않아 피부와 눈은 그 빛을 잃었고 대소변을 보려고 하면 머리가 앞으로 꼬꾸라졌다. 오랫동안 호흡을 멈추는 수행을 하다 보니 힘센 사람이 머리를 가죽끈으로 조이는 듯한 극심한 두통과 이명에 시달렸다.   일반적으로 붓다의 생애의 주요 장면을...
요요
2023.09.20 | 조회 443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치매 이후에도 삶이 있다 『내가 알던 그 사람』(2018), 웬디 미첼       지난번 1234에서 ‘유쾌한 치매관계를 위한 상상력 한 자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상상력 한 자밤을 얻어 볼까 하고 『내가 알던 그 사람』을 골랐다. 저자 웬디 미첼은 영국의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20년간 근무하던 중이었다. 이혼 후 청소부를 하며 싱글맘으로 두 딸을 키우다가 이직을 하고, 뛰어난 기억력과 일처리 능력 덕분에 간호사의 근무일정을 작성하는 복잡한 업무처리 팀의 노련한 팀장이 되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라고 생각했지만 58세에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은 웬디. ‘내가 알던 그 사람’은 치매 이전의 자신을 말한다. 85세가 아니고 58세라니! 엄마의 상상의 세계만이 문제가 아닐 듯하다.                                                         감정의 책꽂이를 채우다   웬디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의사가 ‘알츠하이머’와 ‘치매’라는 두 단어를 말하는 순간은 그냥 멍하다. 치매진단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아는 인생을 훔쳐갈 단어. 치매는 이렇게 ‘들이닥치고’ 그 이유조차 모른다. ‘거대한 시꺼먼 블랙 홀’, 완전히 백지상태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 자신이 없었다. 즉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머릿속이 목화솜이 반쯤 차 있는 것처럼 뿌예지고, 조깅을 하다가 이유 없이 넘어지고, 포크를 떨어뜨리고, 생각한 것만큼 말할 수 없고, 밑도 끝도 없는 피로감이 느껴졌다....
치매 이후에도 삶이 있다 『내가 알던 그 사람』(2018), 웬디 미첼       지난번 1234에서 ‘유쾌한 치매관계를 위한 상상력 한 자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상상력 한 자밤을 얻어 볼까 하고 『내가 알던 그 사람』을 골랐다. 저자 웬디 미첼은 영국의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20년간 근무하던 중이었다. 이혼 후 청소부를 하며 싱글맘으로 두 딸을 키우다가 이직을 하고, 뛰어난 기억력과 일처리 능력 덕분에 간호사의 근무일정을 작성하는 복잡한 업무처리 팀의 노련한 팀장이 되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라고 생각했지만 58세에 알츠하이머 초기 진단을 받은 웬디. ‘내가 알던 그 사람’은 치매 이전의 자신을 말한다. 85세가 아니고 58세라니! 엄마의 상상의 세계만이 문제가 아닐 듯하다.                                                         감정의 책꽂이를 채우다   웬디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의사가 ‘알츠하이머’와 ‘치매’라는 두 단어를 말하는 순간은 그냥 멍하다. 치매진단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 있을까. 내가 아는 인생을 훔쳐갈 단어. 치매는 이렇게 ‘들이닥치고’ 그 이유조차 모른다. ‘거대한 시꺼먼 블랙 홀’, 완전히 백지상태였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 자신이 없었다. 즉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동안 머릿속이 목화솜이 반쯤 차 있는 것처럼 뿌예지고, 조깅을 하다가 이유 없이 넘어지고, 포크를 떨어뜨리고, 생각한 것만큼 말할 수 없고, 밑도 끝도 없는 피로감이 느껴졌다....
인디언
2023.09.18 | 조회 439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차별은 없다, 정말입니까?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2023), 이주희     감정사회학을 접하면서 제일 먼저 왔던 현타는 ‘지금 내 감정이 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감정은 자발적이고 은밀한 나만의 본질같은 것이라기보다 구조적으로 만들어지고, 관리되고, 연출된다는 것.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은 바로 그런 ‘감정’과 ‘구조’의 은밀한 콜라보에 ‘차별’이라는 다소 버거운 주제를 함께 이야기 한다.         처음엔 ‘차별’이라는 주제에 오히려 좀 식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차별받으며 혹은 차별하며 살아온 사람일까?’라는 물음에 이내 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며, 차별이 식상한 주제가 아니라 그만큼 우리가 이미 ‘차별’에 너무 익숙해져서 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별받지 않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혹은 식상하다는 이 느낌은 아마 차별을 없애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더뎌지고 희미해지고 무산되는 과정에서 번번이 느꼈던 익숙한 실망감이거나, 그도 아니면 너무 어마한 주제에 대한 무기력감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마디로 언급하기엔 좀 불가능하지만 ‘감정’, ‘구조’, ‘차별’ 이라는 어마무시한 삼총사를 1234를 통해 ‘아무튼’ 만나 보았다.     차별은 ‘구조’와 맞물려 있다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에서 저자는 우리가 차별에 둔감한 이유는 우리 각자가 서로 다른 성향인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구조 속에 숨어 들어간 차별을 식별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차별은 차별하는 이나 차별당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조직과 국가, 그리고 여러 신념체계가 복합적으로...
차별은 없다, 정말입니까?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2023), 이주희     감정사회학을 접하면서 제일 먼저 왔던 현타는 ‘지금 내 감정이 내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감정은 자발적이고 은밀한 나만의 본질같은 것이라기보다 구조적으로 만들어지고, 관리되고, 연출된다는 것.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은 바로 그런 ‘감정’과 ‘구조’의 은밀한 콜라보에 ‘차별’이라는 다소 버거운 주제를 함께 이야기 한다.         처음엔 ‘차별’이라는 주제에 오히려 좀 식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차별받으며 혹은 차별하며 살아온 사람일까?’라는 물음에 이내 답이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며, 차별이 식상한 주제가 아니라 그만큼 우리가 이미 ‘차별’에 너무 익숙해져서 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별받지 않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혹은 식상하다는 이 느낌은 아마 차별을 없애기 위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더뎌지고 희미해지고 무산되는 과정에서 번번이 느꼈던 익숙한 실망감이거나, 그도 아니면 너무 어마한 주제에 대한 무기력감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마디로 언급하기엔 좀 불가능하지만 ‘감정’, ‘구조’, ‘차별’ 이라는 어마무시한 삼총사를 1234를 통해 ‘아무튼’ 만나 보았다.     차별은 ‘구조’와 맞물려 있다 『차별하는 구조 차별받는 감정』에서 저자는 우리가 차별에 둔감한 이유는 우리 각자가 서로 다른 성향인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구조 속에 숨어 들어간 차별을 식별해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차별은 차별하는 이나 차별당하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조직과 국가, 그리고 여러 신념체계가 복합적으로...
스르륵
2023.09.17 | 조회 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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