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연히 조우한 후쿠시마 이야기

요요
2017-02-18 19:06
370

며칠 전 새 책을 한 권 구입했습니다.

오에 겐자부로가 쓴 <읽는 인간>이라는 책입니다.

사사키 아타루의 <이 치열한 무력을>을 읽다보면 수많은 일본작가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특히 오에 겐자부로를 읽어보고 싶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그의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집을 한 권 주문했지요.

오늘 그 책을 읽으며 

읽는 것과 쓰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말들 속에서

깊은 감동을 받은 대목이 한 두 곳이 아니었습니다만..

2011년 동일본대지진에 대해 쓴 부분이 있어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대지진과 후쿠시마 사고 직후 오에 겐자부로는 평소 알고 지내던 프랑스 저널리스트로부터 전화를 받습니다.

지진 이후 느낀 것을 단 한마디로 어떻게 표현하겠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리하여 그곳을 나와 다시 하늘의 별을 우러렀다."

뭔가 심쿵하지 않으신가요? 

알고보니 이 대목은 <신곡>의 지옥편 마지막 부분이라는군요.

하늘이 없는 지옥에서 빠져나와 연옥의 하늘을 보는 장면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요?

마침 당시 그는 자신의 최후의 소설이라고 여겨지는 장편을 쓰던 중이었습니다.

3.11을 겪은 뒤 오에겐자부로는 이렇게 씁니다.

"그 사건을 통해 내면으로부터 격렬하게 동요한 저는, 

이제껏 쓴 걸 모조리 다시 써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번 대지진으로 세상을 떠난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시대를 살아온 우리에게 뭔가 근본적인 '전달'을 남겼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다만 멀리서 생각했을 뿐이지만요.

제가 죽고 난 후 장애를 가진 아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그를 쭉 보살펴온 딸과,

또 그 딸이 살아갈 장래에 원전 대사고 이후 방사능 물질이 가져올 영향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이상,

저 혼자만의 확신이라 해도 그건 분명한 전달이었습니다."

그리고 오에겐자부로는 엘리엇의 시 <네 개의 사중주>의 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오에 겐자부로는 정말 엄청난 암송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 이 소절을 보시고 앞으로 책에서 다시 읽을 기회가 생기신다면,

여러분 각자 고유의 이해에 도달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대지진과 같은 엄청난 경험이 자신에게 무엇을 가져오는지를,

그날 그날 생각하며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동안 이 시구를 함께 떠올려주세요."

"And what the dead had no speech for, when living.

They can tell you, being dead: the communication

Of the dead is tongued with fire beyond language of the living."

일본의 뛰어난 번역자가 이 구절을 여섯행으로 옮겼다고 하는군요.

이렇습니다.

"또한 죽은 자들이 살아있을 때에

말로 꺼내지 않은 것을

죽은 뒤에는 말할 수 있다.

죽은 자들의 전달은 살아있다

인간의 언어를 초월하여 불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the communication, 불로서 말하는 죽은 자들의 전달.

아마 '다시 후쿠시마를 마주한다'는 것은,

그렇게 전달된 불의 언어를 각자의 언어로 해석하고 나누는 것이 아닐런지요?

이번 주에 밀양 어르신들 두분의 부고를 접하고

또, 어제 막 기억방석 작업을 마무리 한 터라 

낯선 노작가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예사롭지가 않게.. 마음 깊숙이 들어오는군요.

댓글 3
  • 2017-02-19 09:05

    하하...신기하군요.

    전 올해 강의땜시 <읽는 인간>을 구입했어요.

    일리치와 사이드와 사사키아타루와 오에 겐자부로를 어떻게 엮나...고민하면서요...ㅠㅠㅠ...버뜨,

    공리적 목적으로 구입했지만... 책이 넘 아름다워서...아껴가며 책장을 넘기고 있었죠. 근데 요요도 이 책을 만났네요.

     

    그리고 전 모든 곳이 좋았지만, 챕터5의 소제목이 특히 맘에 들었어요. 제목은 "인생의 모든 순간 책이 있었다." 인데...

    <도깨비>식으로 이야기하면,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책과 함께 하는) 모든 날이 좋았다!" 정도 될까요? ^^

    • 2017-02-19 15:12

      오홋! 정말 신기한 우연의 일치!!

      아침에 일어나 책을 펼쳐서 몇 장 넘기다 순식간에 홀딱 빠져서

      과학강좌에 지각할 뻔 했다우..

      이 책을 읽다보니 영시도 도전해보고 싶어지고

      사이드도 읽고 싶어지고.. 이런 벅찬 감정은 저절로 지나가게 잠시 내버려 두는 수밖에^^

  • 2017-02-22 23:29

    최근 <신곡>의 지옥편을 다 읽었었는데...저도 신기하네요.

    <읽는 인간> 읽어봐야 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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