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나라를 구하기로...

도라지
2023-09-22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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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초반. 건너 건너 잘 알던 선배는 내 주변에 남자가 많을 것이라는 적잖히 기대되는 예언을 했었다. 당시 남자 친구가 이 말을 나에게 전해 듣고 당장 그 선배와 더이상 교류하지 말 것을 점잖게 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허나 선배의 예언과 나의 기대와 남자 친구의 우려와 달리 나는 몇 명의 남자를 채 만나 보기도 전에 20대 중반에 그만 결혼을 하고야 말았는데...

 

 

뱃 속에 둘째도 아들이라는 의사의 이야기를 듣던 순간. 나는 그날의 그 선배의 말소리가 동시에 겹쳐 들리는 체험을 했다. "니 주변엔 남자가 많아~" 산부인과 앞 사거리에서 보행 신호를 기다리며 속으로 선배를 향해 얌전하게 욕을 했던 것 같다. "이거였어? 아들 둘?"
아들 둘을 낳고 육아에 너덜거리던 어느 날에 심지어 누군가는 그런 말도 했다.

 

"자기야 자기는 애를 또 낳아도 아들이야~~~~"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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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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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들은 무럭무럭 자라 군대에 갈 나이가 되었고.

 

 

살다 보니 신병 훈련소를 네 번을 다녀왔다.

 

1993년 논산. 오빠가 훈련소로 갈 때는 당시 오빠의 여자친구(현 올케)가 온다는 소리에. 어쩐지... 얼굴 함 봐얄 것 같아서...다녀 왔다. 모친이 대성통곡을 하셔서 좀 부끄러웠던 기억이 있다.

1995년 논산. 당시 남자 친구를 보냈다.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 ... 그래도 그분 제대할 때 까지 신발은 제대로 신고 있었다고... ^^

 

 

 

 

 

 

2021년 논산. 큰아이 입소.  코로나 시절이라 연병장 입소 행사는 없었고. 훈련소 입구에서 38선을 사이에 둔 이산가족 처럼 헤어져야 했다. 사라지는 아이의 뒷통수를 보며 한참 울었다.

2023년 9월 5일. 충북 증평 37사단. 작은 아이가 입소했다. 사단 내 강당에서 입소 행사를 했는데. 훈련병들은 강당 앞자리. 가족과 친구들은 뒷자리에 앉아서 입소 행사를 진행했다. 모든 공식 행사가 끝나고. 훈련병들이 뒤로 돌아 가족을 향해 경례를 하는데. 말해 뭐하나... 흐느끼는 소리가 강당을 꽉 채웠다.

 

 

 

 

 

 

 

작은 아이 훈련소 따라 간다는 이야기에 문탁 어르신들께서 대학 동기들 문무대 갈 때 함께 갔었더라는 이야기를 하며 웃으셨다. 당시 나는 '문무대'라는 말을 못 알아들었는데 눈치 빠른 어르신들께서 부연 설명을 해주셔야만 했다. 집에 와서 남편한테 물으니 본인도 대학 1학년 때 갔었다고... 어르신과 함께 산다.

 

 

작은 아이가 가고 이제 이십일 정도 지났다. 집은 휑하고, 냉장고는 종종 텅 비고, 라면이 줄어들지 않고, 배달 앱을 켤 일도 거의 없다. 올 해 아버지 가시고 작은 아이 집 떠나고...헤어지는 일이 잦다.  별일인가! 그저 공부하기 좋은 시절이다. 

 

명상 방석을 작은 아이 방으로 옮겼다. 매일 아침 명상을 하며 아이와 아이 동료들의 평안도 함께 기원한다. 이렇게 18개월을 이어갈 것을 서원한다. 

 

 

이번 생은 나라를 지키는데 사랑하는 사람들을 순서대로 보냈으니... 나... 다음 생엔 뭐가 되려고...

 

 

 

 

댓글 7
  • 2023-09-24 09:46

    둘째 군대 보내고 도라지가 마음 허전해 하는 게 느껴집니다.
    저도 아들 군대보내고 처음 몇 달 사이에는 편지도 몇 번 쓰고 그랬던 기억이 나는군요.^^

  • 2023-09-24 10:02

    음ᆢ그래도 뭔가 좀 멋진듯
    그런데 훈련소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조차 못해본 저로서는 이번 생은 가보기 틀렸겠죠?

  • 2023-09-24 12:19

    두 아들을 군대보냈다는 공통점이 있군요~ 큰아이 보낼 때는 이모들까지 와서 훈련소 운동장에서 지켜봤는데 작은 아이는 주차도 못하고 차에서 내려 줄지어 들어가는 아이들과 뒤섞인 뒤통수만 봤었죠.
    먹성 좋은 아들 둘다 점심을 제대로 못 먹고 긴장한 모습에 가슴이 아팠는데, 어찌어찌 지나가고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도라지님 글에 댓글을 달고 있네요 ^^
    엄마와 아들 모두에게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군요.
    도라지님, 응원합니다 ~

  • 2023-09-24 20:29

    우리집 둘째.아침마다 전화해서 "굿모닝, 맘!" 말 해주는데...그 녀석이 군대 간다면 저도 무지무지 허젼할거예요.
    생각만해도 미어집니다. 흠.
    으른이 되는 과정일까요.....
    (으른돼서 오는거 맞는걸까요ㅋ)

    현성이의 무사안녕 군복무 기원합니다.

  • 2023-09-25 21:43

    남편과 아들 둘... 남자가 많네 ㅎㅎ
    나라지키는데 한몫하는 도라지 화이팅!!!

  • 2023-09-30 07:59

    남자복이 많다는게 흠...이런 거였군요.ㅋㅋㅋ
    저도 한번 아들을 나라 지키는데 보내봤습니다만, 속으로 그렇게 지켜질 나라가 걱정되긴 했다는...ㅋㅋ
    도라지님의 여유로운 모습이 아침명상 때문이군요....18개월, 잠깐일듯...

  • 2023-10-10 13:26

    그러고보니, 첫 휴가가 생각납니다.
    구름위를 걷는 듯 위병소를 나와 한걸음에 달려간 우리 집. 맨발로 마당까지 뛰어 나오신 어머님 모습 말입니다.
    그 뒤로 .. 상병 쯤 달았을까?(20개월쯤) 심심찮게 잦아진 (포상)휴가로 집에 오면, 군화끈 풀르고 있는 현관에서 어머니 하시는 말씀.
    "언제 들어가냐?" ㅎㅎㅎ

    지금도 생각하면 코끝이 찡합니다.
    마니 마니 표현해 주셈~~~~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