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흐름으로서의 세계

진달래
2023-09-11 14:33
188

흐름으로서의 세계

 『운행과 창조』 프랑수와 줄리앙

 

 

예전에 어떤 다큐에서 서양 사람들과 동양 사람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물고기가 들어있는 수조를 보여주고 이후에 기억나는 것을 이야기하도록 하는데 서양 사람들은 주로 물고기의 움직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고, 동양 사람들은 수조 안에 수초나, 돌이 놓인 위치 등 물고기뿐 아니라 배경에 대한 묘사를 꼭 넣어서 이야기를 했다. 주체를 중시하는 서구인에 비해 배경을 고려하는 동양인에게는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이 그 다큐의 마무리였다.

얼핏 보기에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책들도 그 다큐와 비슷해 보인다. 서구사상과 동양사상을 비교하는 것이 말이다. 『운행과 창조』 역시 동양의 ‘운행(運行)’을 서구의 ‘창조(創造)’와 비교하며 동양사상의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줄리앙의 책은 ‘어렵다’

 

 

  1. 왕부지의 주역

 

줄리앙의 책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은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를 읽은 뒤였다. 동양 철학을 공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맹자도 잘 모르는데, 칸트까지. 어려움이 이중 삼중으로 느껴졌다. 그 뒤에 만나는 줄리앙의 책은 공부를 하는 만큼만 쉬워졌다. 그리고 이 책 『운행과 창조』는 제일 먼저 만났던 『맹자와 계몽철학자의 대화』만큼, 어렵다. 왜냐하면 맹자와 칸트가 낯설었던 만큼, ‘왕부지’가 낯설기 때문이다.

왕부지(王夫之:1619~1692)는 명말청조의 학자이다. 그가 과거에 막 합격했던 시기에 ‘이자성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그는 항청(抗靑) 투쟁을 했으나 그의 바람과 달리 청나라의 세력은 더욱 강고해졌다. 말년에 왕부지는 청에 대한 투쟁을 접고 호남의 석선산에 은거 한다. 은거 후에는 교육과 저술 활동에만 매달렸다고 하는데 왕부지는 역사와 철학뿐 아니라 정치, 사회, 문학 등 광범위한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經)과 사(史), 문예 등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왕부지의 사상은 명나라의 멸망의 원인을 사색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으며 특히 그는 북송의 장재(張載:1020~1077)의 ‘기일원론(氣一元論)’을 계승하여 주자학이나 양명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현대 중국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유물론자로 평가 받고 있다.

『운행과 창조』는 왕부지의 『주역내전』을 통해 ‘운행사상’을 풀어내고 있다. 즉, 『주역』으로 동양의 사유체계를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동양사상이라고 하면 유학(儒學), 혹은 유교(儒敎)를 떠올리지만 실제 동양사상에서 가장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주역』의 역(易), 즉 ‘변화’에 대한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주역』이 오래된 텍스트인 만큼 『주역』에 대한 주석서도 많다. 문탁에서도 우응순선생님과 『주역전의(周易傳義)』를 읽었다. 『주역전의』는 정이의 『이천역전』과 주희의 『주역본의』가 합쳐진 것으로 철학서와 점서(占書)의 두 측면을 모두 포괄하고 있으며 가장 기본적으로 읽어야하는 주석서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보니 줄리앙은 왜 많은 『주역』의 주석서들 중에 왕부지의 『주역내전』을 선택했을까?

 

“그의 저술은 정통유가사(正統儒家史)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하지만 분명 그의 저술은 중국사상의 탐구의 각별한 적소(適所)로서 중국 사상의 전개 방식을 가장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사상에 실린 여러 입장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활성화시킨다. 따라서 우리가 그의 저술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은 일련의 주장들이나 체계화된 하나의 교의가 아니라 유가의 직관에 담긴 잠재성이 어떻게 철저하게 표출되며 엄격함과 명석함을 통한 가장 강도 높은 노력으로서의 사유가 그 준거인 정신적 틀에 대해 어떻게 항상 능동성을 견지하는가 하는 점이다.”p19

 

줄리앙은 『운행과 창조』를 네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먼저 ‘운행’에 대한 고찰을, 두 번째는 유가 사상에 나타난 ‘비가시’와 ‘초월’의 위상에 대하여, 세 번째는 운행 사상이 어떻게 윤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는 시(詩)를 통해 예증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운행’과 ‘창조’를 서로 비교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왜 왕부지의 사상을 통해서 운행을 설명하고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왕부지 초상 - 바이두

 

  1. 이롭고도 규칙적인 운행

 

『주역』은 음·양으로 세계를 설명한다. 『운행과 창조』에서는 이를 “태초에 교대가 있었다.”라고 시작하고 있다. 이러한 교대의 예로 낮과 밤, 가시와 비가시, 수축과 팽창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서로 대립되는 것으로 보이지만 왕부지는 사실 대립이 아니라 시간적 대조일 뿐이고 현동(現動)과 잠재(潛在)의 연쇄로 보아야 한다고 한다.

 

“교대의 순환논리를 따르면서도 척박한 반복과는 상반된다. 교대가 있기에 흐름이 펼쳐지며 운행도 나아가게 된다.”(p37)

 

교대는 반복이 아니라 상호 자극과 조절에 의한 끊임없는 상호작용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하며 흐름으로 펼쳐진다. 낮과 밤은 분절이 아니라 흐름이다. 이들은 연속적이고 규칙적으로 ‘운행’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운행을 ‘흐름’으로 본다는 것이다. 왕부지는 장재를 이어받아 이 세계를 기의 흐름으로 설명하고 있다. 장재는 이 세계는 기로 꽉 차 있으며 이 기가 응축되거나 분산되면서 변화한다고 하였다. 여기에 왕부지는 음(陰)과 양(陽)을 기의 본체로 보는데 이 두 기의 인(絪)·온(縕)운동으로 세계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줄리앙은 왕부지가 말한 음·양의 운동을 ‘감응을 통한 영향(感通)’으로 설명하는데, 이것으로 존재의 발생기원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즉 모든 실재는 상호감응(相感)으로서 음·양의 작용에 의해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 때 상호감응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갖추어져야 한다. 존재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어야 하며 한편,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공통된 토대를 가져야한다. 즉, 같음은 다름(非同則不能異)을 다름은 같음(非異則不能同)을 상정한다.

왕부지는 다른 신유학자들과 달리 태극(太極)과 같은 하나의 근원에서 음·양이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고, 음·양 자체가 태극이라고 본다. 즉 음·양이라는 이원성을 근원적인 것으로 본다. 왕부지는 『주역』에서도 건괘(乾卦)와 곤괘(坤卦)를 다른 괘들과 분리해서 본다. 이 두 괘를 가장 기본적인 괘라고 보는데 음과 양이 그 자체로 태극이 된다면 이 두 괘 사이에는 어느 것이 먼저라거나 더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없다. 건(하늘)과 곤(땅)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한다.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는 이 두 괘는 교대를 통해서 변화를 만들어내지만 이들이 만들어내는 것은 분절적이지 않고 운행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1. 잠재성의 세계

 

왕부지는 신유학자들이 사용하는 태극의 개념과 헷갈리지 않도록 장재가 말한 태허(太虛)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우주 전체에는 기(氣)가 꽉 차있으나 이는 비가시의 상태로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부지에게 있어서 가시와 비가시의 상태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변화로서의 운행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왕부지는 비가시의 상태를 주목하여 이러한 빔(虛) 속에 무한한 잠재성을 부여하며 실재 안에 흐름을 내재시켰다.

 

“가시에 대한 비가시의 관계는 현동에 대한 잠재의 관계이다. 우리가 운행의 논리에 따라 아무런 동인의 개입이 없는 이행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잠재상태의) 비가시가 운행의 본체이며 비가시의 현동이 운행의 작용을 형성한다는 이 유일한 사실에 의해서이다. 본체와 작용은 불가분하다. 내재라는 것은 반드시 펼쳐지게 마련이다.” p123

 

이 책이 ‘운행’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창조’와 달리 운행에는 외부적인 간섭이나 외적 규범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조물주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물주가 ‘창조’하는 세계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변화의 흐름’인 운행은 어떤 의도를 지니게 할 수 없다.

왕부지가 설명하는 『주역』이 다른 주석가들과 다른 점은 왕부지는 하나의 괘(卦)가 여섯 개의 효(爻)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효에 드러나지 않은 부분까지 고려하여 열두 개의 효(爻)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았다고 한다. 비가시의 영역까지 고려한 것이다.

흔히 눈에 보이지 않는 비가시의 영역은 신비주의로 치부되면서 신(神)적인 것으로 분리된다. 그러나 가시와 비가시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모든 현동(現動)은 잠재(潛在)를 품고 있다. 줄리앙은 이러한 비가시의 영역을 동양사상의 핵심이라고 본다. 전통사회에서 삶에서 죽음으로의 이행을 비극적으로 보지 않는 것도 세계를 ‘변화의 흐름’으로 보기 때문이다. 산자의 정신(神)과 죽은 자의 혼(鬼)을 이어주는 것도 바로 이 잠재와 현동 혹은 음양 개념으로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으로 조상과 후손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여기게 되었다.

 

 

동양 사상에서 운행의 논리는 도덕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인간의 덕성은 세계의 운행과 유사 관계 속에서 고찰되고 있기 때문이다. 흐름으로 인식하는 세계에서 인간의 도덕 행위는 늘 조절해야 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조절 행위는 신이나 신성한 중개자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할 수 있으며 쉼 없이 해야 하는 것이다.

비가시의 세계는 흐름과 같다. 흐름 안에서 ‘비편파성(中)’은 운행이 어긋나거나 정체되지 않도록 조절한다. ‘비편파성’은 단지 어디에 치우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에 따라 고정되지 않는 것이다. 운행의 순간에 언제나 완벽하게 부응하는 것이다. 운행에 잠재하는 바탕처럼 현자(賢者)는 자기 안에 잠재하는 모든 덕성을 지닌다. 현자는 완벽한 중(中) 속에 머무른다.(隨時而得中) 이 때 필요한 것은 운행의 흐름과 분리됨이 없이 나가는 ‘수행력’이다.

 

  1. 윤리적 삶의 가능성

 

줄리앙은 가시에서 비가시에 이르기 위해서는 중간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유가에서는 이 중간단계를 특히 강조한다고 보았다. 이 단계를 섬세함, 혹은 미묘함의 단계로 보는데 ‘전조’단계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단계의 설정은 초월이나 신비주의 없이 가시와 비가시를 연결하고 이를 분리하지 않고 연속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서구 전통의 조물주 사상은 우주 창조론적 상상만으로 가득한 것도, 또한 원동인에 대한 철학적 필요성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적어도 다음 두 사항이 이 사상에 근본적으로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한편으로는 유일함과 동시에 의지의 요체로서의 주체-행위자의 범주를 인류학적으로 부각시켰던 점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물주와 창조물간의 근본적 위상의 차이를 이념적으로 부각시켰던 점이다.” p103

 

흐름 안에서는 위계를 정할 수 없다. 게다가 흐름 속에서 실재들은 서로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

『주역』은 이러한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텍스트이다. 하나의 괘(卦)를 이루고 있는 여섯 개의 효(爻)를 통해 다양한 배치를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왕부지는 이 여섯 개의 효 중에 2와 5의 자리에 있는 두 개의 효가 중심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중심이 하나라면 구조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두 개의 중심은 대립, 보완하면서 밀고 당기기 때문에 연속적인 변화를 만들어낸다.

줄리앙은 이런 변화가 윤리적인 차원을 포함한다고 보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용(中庸)이다. 중용은 이것과 저것 사이의 가운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비편파성’에서 본 것처럼 변화, 즉 흐름에 완벽하게 적응하는 것이다. 이를 때로는 ‘순응(順應)한다’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렇게 보면 현자는 어떤 경우에도 도드라지지 않고 심지어는 무미건조해 보기이기까지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자의 가르침에는 말이 없다. 또 여기에는 가시로 표현하기 어려운 비가시의 영역이 늘 포함된다. 예악(禮樂)은 가시의 영역에서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이 어떤 흐름에 딱 맞을 때 느껴지는 조화로움은 비가시의 영역을 고려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조화로움은 만물을 감화시키고 확산한다.

 

 

사실 운행이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던가, 『주역』이 이를 이야기하고 있는 텍스트라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왜 낯선 왕부지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지 잘 이해가 안 되었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난 뒤에는 운행만 이야기한다면 굳이 왕부지를 소환할 필요가 없겠지만 가시와 비가시의 세계가 한 흐름 안에 있음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신유학자들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무시하진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태극이라는 근원에서 음과 양이 분리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음·양 자체가 근원이며 태극은 그것이 뒤섞여 있는 상태일 뿐이라는 왕부지의 주장이 색다르게 보였다. 게다가 중심이 두 개일 수도 있다니. 읽는 동안 스피노자도 생각나고 들뢰즈도 생각이 났다. 좀 더 공부하게 되면 왕부지가 말한 것들과 같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댓글 1
  • 2023-09-13 18:20

    왕양명 이후 왕가의 등장이네요. 왕부지. . 다소 우습게도 들리는 이름은 들뢰즈가 말하는 식별불가능성과 차이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아 흥미롭습니다. 그게 뭐냐고 묻는다면, 아직 그쪽으로 운행 중이라고 말하는 수밖에요. . ㅎㅎ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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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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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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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05 | 조회 357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1.칠원의 관리, 장자   들꿩은 열 걸음을 걸어야 모이 한 번 쪼고 백 걸음 걸어야 물 한 모금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새장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먹이를 찾는 수고로움이야 없겠지만 자유롭게 살려는 본성에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澤雉十步一啄,百步一飮,不蘄畜乎樊中. 神雖王,不善也.) 「양생주」 『낭송장자』 100쪽     『사기열전』에 의하면 장자는 몽(蒙)땅 칠원(漆園)의 관리(吏)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몽 땅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칠원이 옻나무를 심어 놓은 동산이라는 것에서는 이견이 없다. 장자가 살았던 시기에는 종이와 먹이 발명되기 전이라 대부분 죽간에 써서 기록을 남겼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옻액을 대나무로 만든 펜으로 찍어 죽간에 썼다고 한다. 그런데 옻나무는 아무데서나 흔히 자라는 수종이 아닌데다, 씨앗의 발아율도 낮고 잔뿌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는 데도 3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런 상황이니 옻액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라도 옻나무 동산을 관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칠원의 관리는 중요한 직책은 아니어서 하급말단직이었을 것이라는 데도 이견은 없다.        「양생주」 3장에는 들꿩의 살이가 나온다. 꿩은 땅 위를 걷는 새로 몸이 길고 날씬하며, 발과 발가락이 발달되었으나 날개는 둥글고 짧아 멀리 날지 못한다. 먹이는 나무 열매나 풀씨 등의 식물성 먹이를 주로 섭취하는데, 작은 곤충도 먹는 잡식성이라고 한다. 먹이 대부분이 땅바닥에서 쪼아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보니, 사냥감으로 노출되기 쉬워 식용으로도 널리 애용된 조류이기도 하다. 옛 문헌에 의하면 늦봄 풀숲에 숨어서 피리로 장끼소리를 내면 꿩이 그 소리를 듣고 날아오르기도 하는데 그때...
1.칠원의 관리, 장자   들꿩은 열 걸음을 걸어야 모이 한 번 쪼고 백 걸음 걸어야 물 한 모금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새장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먹이를 찾는 수고로움이야 없겠지만 자유롭게 살려는 본성에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澤雉十步一啄,百步一飮,不蘄畜乎樊中. 神雖王,不善也.) 「양생주」 『낭송장자』 100쪽     『사기열전』에 의하면 장자는 몽(蒙)땅 칠원(漆園)의 관리(吏)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몽 땅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칠원이 옻나무를 심어 놓은 동산이라는 것에서는 이견이 없다. 장자가 살았던 시기에는 종이와 먹이 발명되기 전이라 대부분 죽간에 써서 기록을 남겼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옻액을 대나무로 만든 펜으로 찍어 죽간에 썼다고 한다. 그런데 옻나무는 아무데서나 흔히 자라는 수종이 아닌데다, 씨앗의 발아율도 낮고 잔뿌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는 데도 3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런 상황이니 옻액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라도 옻나무 동산을 관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칠원의 관리는 중요한 직책은 아니어서 하급말단직이었을 것이라는 데도 이견은 없다.        「양생주」 3장에는 들꿩의 살이가 나온다. 꿩은 땅 위를 걷는 새로 몸이 길고 날씬하며, 발과 발가락이 발달되었으나 날개는 둥글고 짧아 멀리 날지 못한다. 먹이는 나무 열매나 풀씨 등의 식물성 먹이를 주로 섭취하는데, 작은 곤충도 먹는 잡식성이라고 한다. 먹이 대부분이 땅바닥에서 쪼아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보니, 사냥감으로 노출되기 쉬워 식용으로도 널리 애용된 조류이기도 하다. 옛 문헌에 의하면 늦봄 풀숲에 숨어서 피리로 장끼소리를 내면 꿩이 그 소리를 듣고 날아오르기도 하는데 그때...
기린
2023.10.25 | 조회 377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노나라 대부)이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기둥머리에는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는 마름풀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논어』「공야장,17」     『논어(論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더불어 당대 혹은 선대의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언급 되는데 생각보다 노(魯)나라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공자 당대에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논어』에 두 번 언급되는 장문중은 노나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기 전까지 장문중이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것 이외에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장식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가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불후(不朽)는 ‘썩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후라는 말은 『춘추좌전』에서 유래했는데 노나라 양공(襄公) 24년, 숙손표가 진(晉)나라의 범선자와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범선자가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숙손표가 덕을 세우는 것(立德)과 공을 세우는 것(立功), 말을 세우는 것(立言) 세 가지가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니 불후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후대에는 이 세 가지를 ‘삼불후(三不朽)’라고 칭하였다. 이 때 숙손표는 불후의 예로 장문중을 들었다.   “우리 노나라 선대부 중에 장문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노나라 대부)이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기둥머리에는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는 마름풀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논어』「공야장,17」     『논어(論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더불어 당대 혹은 선대의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언급 되는데 생각보다 노(魯)나라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공자 당대에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논어』에 두 번 언급되는 장문중은 노나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기 전까지 장문중이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것 이외에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장식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가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불후(不朽)는 ‘썩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후라는 말은 『춘추좌전』에서 유래했는데 노나라 양공(襄公) 24년, 숙손표가 진(晉)나라의 범선자와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범선자가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숙손표가 덕을 세우는 것(立德)과 공을 세우는 것(立功), 말을 세우는 것(立言) 세 가지가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니 불후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후대에는 이 세 가지를 ‘삼불후(三不朽)’라고 칭하였다. 이 때 숙손표는 불후의 예로 장문중을 들었다.   “우리 노나라 선대부 중에 장문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진달래
2023.10.01 | 조회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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