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쓰기1234] 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아?

봄날
2023-09-05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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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관주의와 신비주의

자여가 병에 걸렸습니다. 자사가 문병을 가서 자여를 보고 말했습니다.

“위대하구나, 조물자! 그대를 이렇게 곱사등이로 만들었구나!”

그의 창자는 위쪽으로 올라붙었으며, 턱은 배꼽에 파묻혔고,

어깨는 정수리보다 높았으며, 상투만 달랑 하늘을 향해 있었습니다.

음양의 기가 흐트러져 많이 아파보였으나 마음은 평온해 보였습니다.

자여는 비틀거리며 우물로 가서 자신을 비춰보고 말했습니다.

“위대하구나, 조물자! 나를 이렇게 곱사등이로 만들었구나!”

자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그 모습이 싫은가?”

자여가 말했습니다.

“아니네, 그럴 리가 있는가? 내 왼팔이 점점 변해 닭이 된다면 나는 새벽을 알리겠네. 내 오른팔이 점점 변해 활이 된다면 나는 올빼미를 잡아 구워먹겠네. 내 꼬리뼈가 점점 변해 수레바퀴가 되고 내 마음이 말이 된다면, 그것을 탈 테니 따로 수레가 필요하겠는가? 삶을 얻는 것도 때를 만났기 때문이고 그것을 잃는 것도 때를 따르는 것일 뿐이네. 생사를 편안히 때의 추이에 맡기면 슬픔과 기쁨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네. 옛사람은 이를 일러 ‘하늘이 내린 형벌에서 풀려나는 것’이라 하였네. 그런데 스스로 풀려나지 못하는 것은 사물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사물이 자연의 이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오래된 진실! 내가 무엇을 싫어하겠는가?”(『장자』내편, <대종사(大宗師)>)

 

이 책의 제목 『장자, 닭이 되어 때를 알려라』가 연유한 부분이다. 『장자』 <대종사>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장자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장자가 되는’ 호접몽(胡蝶夢)의 구절 못지않게 해석이 분분하다. 중국의 근대철학자 호적(胡適)은 이 부분을 한 마디로 ‘낙천입명(樂天立命)’이라고 비판했다. 낙천입명은 하늘의 명을 따라 즐기고 이에 순응한다는 뜻의 ‘낙천지명(樂天之命)’과 같은 의미이다. 호적은 그의 사상이 변화를 인식하되 그것을 그대로 긍정하면서 사회변화의 능동성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방관자의 입장, 달관주의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정치혁명의 가능성과는 거리가 먼 출세주의이며, 극단적인 ‘수구주의’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반면 또 한 명의 중국 근대 철학자 풍우란의 해석은 달랐다. 호적이 달관주의라고 말한 바로 그 부분에 대해 풍우란은 신비주의적 관점을 제시한다. 신비주의란 궁극의 실재 즉 신이나 자연과 합일하는 경험을 이야기하는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렇게 나와 세계가 구분되지 않고 개체성이 사라진 세계에 대한 경험을 풍우란은 ‘순수경험의 세계’라고 해석한 것이다.

신비주의가 거론되어서 하는 이야기인데, 애초에 나는 두 번째 장자 텍스트를 토머스 머튼의 『장자의 도(道』)로 정했었다. 그런데 바로 위의 부분을 그가 해석한 것을 보고 텍스트를 바꿨다. 영국의 신부였던 그는 장자 텍스트를 읽으며 장자에게서 기독교의 정수를 느꼈다고 한다. 윗 부분의 물화(物化)를 주도한 ‘조물자’를 바로 ‘그분’이라고 규정했고, 모든 변화의 주체 역시 ‘그분’이라고 해석했다. 창조주가 물들의 변화 또한 주재한다는 방식의 해석은, 잘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장자의 진정한 해석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신비주의적 해석 자체가 가진 수동적인 면을 보면, 풍우란의 신비주의적 해석도 맘에 들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풍우란은, 장자의 신비주의는 세계를 마음으로 환원시키는 유심론적인 ‘만물일체’가 아니라, 순수경험을 통해 세계를 마주친 자아가 소멸해 버리는, 말하자면 ‘역방향의 신비주의’라고 저자는 규정했다. 이런 종류의 신비주의라면 내부로부터의 변화를 추동하는 어떤 능동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의 철학과도 공명한다는 저자의 해석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다만, 스피노자는 수동적인 슬픔의 정서를 이성의 인도에 따라 능동적 정서인 기쁨으로 이행하려 한다는 점에서, ‘(지식을 통해) 이치를 알게 되면 슬픔과 기쁨 같은 감정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고 말하는 장자하고는 정서에 있어서 일종의 위계적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

같은 문장을 가지고 완전히 상반된 해석이 오가고,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엇갈리는 독해가 여전한 것은 장자의 텍스트가 가진 표현의 난해함, 은유의 거침없음, 폭력적인 축약에 기인할 것이다. 저자의 이 책 1부를 통해 위의 사례 말고도 동서양의 해석서들의 갈래를 조금이나마 파악하게 되었다.

 

만물제동(萬物齊同)과 물화(物化)

그러나 이 책을 만난 소중한 소득은 2부에 있었다. 이전에 읽었던 왕보의 책에서 <소요유>편의 일화가 관심거리였다면, 이번에 내 눈을 이끈 것은 <제물론>이었다. 앞에서 예를 들었던 문장도 <대종사>편에 들어있기는 하나, ‘변화’를 주제로 삼은 점에서 <제물론>의 다른 문장처럼 눈길이 갔다.

일단 나카지마 다카히로는 2부를 ‘물화(物化)의 핵심을 둘러싸고’ 장자를 읽어보겠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2부를 읽으면서 나는 장자가 말한 물화의 핵심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장자의 물화는 ‘변화’에 초점을 맞춘 사유방식이다. 사물이 그 사물이게 하는 본질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물이 다른 사물이 되는 ‘생성변화’의 관점에서 세계를 본다는 것다. 대표적인 예가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나비의 꿈(胡蝶夢)’이다.

 

어느 날 장자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였습니다. 마음 내키는대로 날아다니다 보니 자기가 장자라는 것도 몰랐습니다. 퍼뜩 깨어 보니 놀랍게도 다시 장자였습니다. 장자가 꿈을 꾸어 나비가 되었는지, 나비가 꿈을 꾸어 장자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장자와 나비는 반드시 구별이 있습니다. 이것을 일러, ‘만물의 변화(물화)’라 합니다.(『낭송장자』<제물론>)

 

많은 해석자들이 이 부분을 장자의 ‘만물제동(萬物齊同)’, 즉 모든 것은 평등하며 그런 점에서 나와 타자의 구별은 없다는 식으로 풀이한다. 가령 모리 미키사부로 같은 학자는 “구별이 있다면 단지 상대적으로 표현한 것, 즉 하나의 사물이 다른 사물로 변할 때, 거기에는 일방과 타방의 구별이 있다. 그거나 그것은 (인간의)상식적인 입장이고, 모든 것은 평등하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자기와 타자의 구별이 없으므로 나비는 그대로 장주”라고 말한다. 여기에는 모든 구별을 뛰어넘는 초월적 사유가 작동한다. 그러나 장자의 ‘물화’를 즉시 ‘제동’에 갖다 붙이는 것에 대해 나카지마는 ‘장자는 물화를 그런 의미에서 쓰지 않았다’고 반박한다.

장자의 물화가 뭇 해석자들이 말하는 ‘만물제동’과 다른 함의라는 근거를, 나카지마는 위 일화의 뒷부분에 있는 ‘장자와 나비는 반드시 구별이 있다’는 대목에서 찾는다. 제동의 입장에서 보자면 꿈도 현실도 사실은 같은 것이고 장자가 곧 나비이고 나비가 곧 장자라면 구태여 반드시 구별이 있다고 말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나카지마는 이 부분이 장자의 ‘물화’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즉 장자의 물화는 자타의 구별을 절대 가볍게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물화’를 통해 자타의 구별이 없고 자타가 융합된 만물일체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라면, ‘물화’라는 변화는 본래부터 쓸데가 없다”(198p)고 저자는 말한다. 그는 물화에 한정해서 곽상과 견해를 같이 한다. 곽상은 이렇게 말한다. “각몽(覺夢)의 구분은 사생(死生)의 구분과 다르지 않다. 지금 스스로 즐겁고 유쾌한 것은 그 구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지 구분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라고. 그러니까 그 구분이 있음으로 해서 장주는 나비로, 나비는 장주로 변화되면서 즐거움과 유쾌함을 느끼는 것이다. 물화라는 역동이 없고서는 장자는 끝내 나비를 알 수 없고, 꿈과 깸도 서로 알 수 없으며 죽음과 삶도 마찬가지다. 장자의 물화의 즐거움은 마치 전지적 관점처럼 멀리 떨어져 ‘무차별하게’ 조망하는 것으로는 얻을 수 없다. 장자는 장자로서, 나비는 나비로서 각각 절대적인 자기충족의 존재로 있다가 기꺼이 변화에 참여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 이때 세계도 함께 변용한다. 여기에서 ‘물화’는 하나의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사물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세계 자체의 변화까지 추동한다.(203p)

 

장자와 혜시

그렇다면 장자의 주요 사상인 ‘만물제동’과 ‘물화’는 서로 어떻게 다른가? 저자는 혜시를 불러낸다. 명가(名家)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혜시의 제동(齊同)론에서는 모든 구별, 심지어 시공간적인 구별도 없다. 말장난 같은 혜시의 “오늘 월나라로 떠나서 어제 도착했다”는 말도 그의 논리라면 충분히 성립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장자는 ‘있을 수 없는 것을 있다고 한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제물론」에서 가장 어려운 문장이라 할 수 있는 ‘도의 지도리(道樞)’편을 읽어보면 장자가 말하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동시에 이것 아닌 것이 없습니다. 저것에서 보면 저것이 저것인 줄 모르고, 이것에서 봐야 저것이 저것인 줄 알게 됩니다. 저것은 이것에 의해, 이것은 저것에 의해 인식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것과 저것이 서로에 의해 성립한다는 세상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고, 좋은 것이 있기에 싫은 것이 있고, 싫은 것이 있기에 좋은 것이 있다는 주장은 옳고 그름의 근거를 상대에게서 찾는 데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은 이러한 주장에 따르지 않고, 자연의 이치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모두 긍정(因是)하는 것’입니다.

자연의 이치에서는 저것은 이것이고 이것이 저것입니다. 저것도 하나의 시비(是非)이고 이것도 하나의 시비입니다. 과연 이것과 저것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없을까요? 이렇게 옳고 그름의 상대적 구별을 넘어서는 것을 ‘도의 지도리(道樞)’라고 합니다. 지도리가 원의 중심이 되면 끝없는 변화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옳은 것도 끝없는 변화의 하나요, 그른 것도 끝없는 변화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밝은 지혜에 따르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장자』내편, <제물론(齊物論)>)

 

“장자는 ‘이것’이라는 가깝고 곁에 있는 것 혹은 이 세계에 뿌리내리는 것을 우선 중시한다. 그 다음에 ‘이것’이 ‘저것’으로 변용되고, ‘저것’이 또 하나의 ‘이것’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사태를 보려 한다.”(211p) 그것은 마치 회전축이 원의 중심에 놓일 때 무한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이것’은 ‘저것’과 짝을 이루지 않고 무한하게 된다. “요컨대 장자의 제동은 ‘이것’과 ‘저것’이 절대적으로 구별된 뒤에, ‘이것’이 ‘저것’으로 변용되는 사태(물화)를 기술하기 위한 개념이다.” 혜시의 제동이 초월의 관점이라면, 장자는 이것을 변용시켜 저것으로 향하는 ‘물화’에 집중하며 제동을 그 연장선 위에 놓는, 하나의 사태를 다른 각도에서 보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우리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 수 있을까

장자가 말하는 ‘타자성’에 대한 문제를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로웠다. 앞에서 인용한 ‘도의 지도리’편에는 이것과 저것이 등장한다. 그리고 나카지마는 물화에서 ‘이것’이라는 가깝고 곁에 있는 이 세계에 충실한 것을 우선시한 다음, 이것이 저것으로 변용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변용된 ‘나’와 ‘이 세계’는 타자와 만날 수 있을까. 저자는 『장자』 「추수」편의 ‘물고기의 즐거움’을 말한 부분을 들어 설명한다.

 

장자와 혜시가 호수의 다리 위에서 노닐고 있었습니다. 장자가 말했습니다.

“피라미가 유유히 헤엄치고 다니는군.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구만!”

혜시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장자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못한다는 것을 아는가?”

혜시가 말했습니다. “나는 자네가 아니니까 물론 자네를 알지 못하네. 그렇다면 자네도 물고기가 아니니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는 것도 분명하지 않은가?”

장자가 말했습니다. “자, 처음으로 돌아가 보세. ‘자네가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라고 말한 것은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물은 것 아니겠나? 나는 그것을 호수의 다리 위에서 알았다네.”(『장자』 외편, <추수(秋水)>)

 

혜시는 타자의 경험을 알 수 없다고 단정한다. 알 수 있는 것은 자기의 고유한 경험뿐이다. 그러므로 장자가 물고기가 아닌 이상,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고 한 장자의 말은 틀렸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혜시의 말이 일리가 있다. 나아가 혜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험의 공유도 불가능한데, 사람과 물고기라는, 이종(異種)간의 경험이 공유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고 말한다. 장자는 경험구조의 일반적 차이(이종간의 경험의 차이)와 개체간 경험 내용의 차이(장자와 혜시의 차이) 모두를 해명해야 하는 지경에 빠졌다. 여기까지로 보면 일단 장자의 ‘의문의 일패’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장자가 이 토톨로지(tautoloty)의 덫을 ‘가까움의 논리’와 ‘지각의 명증성’으로 벗어났다고 해석했다. 문장의 끝부분에 그 논리가 숨어있다. 장자는 ‘자네가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라고 한 것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물은 것’이라고 말한다. 경험이란 원리상으로 이미 장자와 혜시 사이에 어느 정도는 공유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경험이 경험인 것은 다른 사람에게 열려있기 때문에 경험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혜시는 정말로 장자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형식상으로는 이해하는 것처럼 되어버린다. 그리고 여기에 장자는 ‘나는 그것을 호수의 다리위에서 알았다’고 덧붙였다. 나는 호수라는 구체적인 장소에서 물고기와 가깝게 있음으로써 의심할 여지없이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았다는 것. 하지만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남는다.

나카지마는 쿠와코 도시오의 논의를 인용해 ‘신체 배치의 체험’이 이것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쿠와코는 모든 인간과 모든 물고기 사이에 서로의 기분을 알지 못한다는 혜시의 논박에는 관심이 없다. ‘장주의 인식이 특정한 시간 속에 놓인 특수한 신체, 그 신체에 대해 어떤 관계에 있는 물고기와의 배치 관계’에서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호수 다리 위에서 알았다’는 말이 그래서 중요하다. 즉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 것은 신체 배치를 가진 체험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 호수 다리를 오가는 모든 사람들이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는 못한다.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 것은 매우 특수한 사태이다. 장자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호수 다리 위에서 우연히 만났고,‘물고기의 즐거움’에 수동적으로 촉발되어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 장자’로 변용된 것이다. 장자와 물고기가 단지 물리적으로 가까워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것은 아니다. 어떤 체험은 환경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고, 장자와 물고기는 환경을 공유하고 있음으로 해서, 스피노자식로 말하면 물고기라는 외부 원인의 관념에 생겨나는 즐거움을 느낀 것이다. 이때의 즐거움은 타자(물고기)로부터 선행하는 것이지, 주체가 지각하는 행위를 통해 능동적으로 획득하는 경험이 아니다. 수동성의 경험으로부터 내가 변용되는 것이다. 이때 이미 나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향유하는 새로운 세계를 살게 된다.

많은 해석자들이 ‘물화’를 말하지만 그들은 ‘나’와 ‘이 세계’가 새롭게 편성되더라도 끝내 개방되지 않고 자기동일화의 문제를 넘지 못한다. 나카지마 다카히로는 장자의 타자성이 이들과의 변별점이 된다고 말한다. 나와 세계의 변용은 타자와의 가까움에서 성립하고, 그것은 타자에 열려 있다. 그것은 자기 동일성의 해방, 현해(懸解)로 가는 길을 동시에 열어놓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 여기에서 장자가 정말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았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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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하지 않는 글쓰기 : <망고와 수류탄>(기시 마사히코)를 읽고       잘 이해하고 잘 전달하기     인터뷰를 시작하고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은 상대의 이야기를 어떻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제대로 전달하기’란 것은 무엇일까? 내게 그것은 때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가독성을 높이는 것이었고, 또 때론 독자가 동감할 포인트를 짚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함께 살 수 있을까> 원고를 쓰며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이 글로 인해 인터뷰이들이 곤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나의 인터뷰이들은 흔히 말하는 사회적 소수자였고, 이미 자신에 대해 떠들어지는 수많은 말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잘 전달하기 위해 그들의 말을 가능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옮겨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야 그들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사람 중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야기를 세계와 고립시키는 상대주의       기시 마사히코가 쓴 <망고와 수류탄>의 부제는 ‘생활사 이론’으로 오키나와 전후를 연구한 사회학자가 작성한 에세이이자 이론서이다. 저자는 책에서 ‘구축주의’라는 이론을 비판한다. 그가 이 책에서 주로 비판하는 구축주의는 사쿠라이 아츠시라는 사람의 이론이다. 사쿠라이 아츠시가 만들어낸 조사 방법론은 현재 일본에서 사회학 질적조사의 기준이라고 한다. 그는 구축주의 사회 이론을 흡수하여 일본 사회학 생활사 연구에 접목시킨 사람으로, 생활사 연구 자체를 대표하고 있기도 하다. 그가 애초에 시도하고자 했던 것은 사회적 소수자인 구술자를 이해하고 보호하는 것이었다. 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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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2023.11.06 | 조회 310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공동체에서 철학하기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피에르 아도   서양철학 공부와 1234 내가 서양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작년 문탁2층 운영위원들이 공통감각을 키우고자 함께 했던 비전세미나 대신 철학학교 세미나에서 『차이와 반복』을 읽었다. 그 때 서양철학에 대한 어떤 지식도 없이, 고대와 중세의 철학도 전혀 모르면서 현대 철학을 읽자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동안 나는 어떤 공부를 하든지 크게 상관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저 문탁에 왔더니 많은 사람들이 동양고전을 공부하고 있었고, 따라서 하다 보니 어찌어찌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그리고 사실 실천학문으로서 유가는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했고, 이것도 제대로 못하면서 다른 공부까지 기웃대는 건 지식확장에 대한 욕망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들뢰즈를 읽으면서 이건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였고, 내가 앞으로 계속 문탁에서 공부를 하려면 서양철학도 어느 정도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다시 들뢰즈 세미나를 했던 것처럼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르니까, 유비무환!   마침 올해 철학입문 세미나가 생겨 서양철학사를 훑어볼 수 있었고 결론적으로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 거기다가 공부방 회원들의 읽고 쓰기 프로그램인 1234를 통해 고대 철학 원전들을 같이 읽다보니 서양철학사를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원래 계획은 올해 1234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스토아의 원전을 한 권씩 읽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스토아 철학을 읽을 차례였는데, 마지막이기도 해서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일단 한 번 정리를 해보고 싶었다.   이 책의 저자 피에르 아도는 한마디로 고대 철학을 ‘생활양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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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3.11.05 | 조회 385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고라니의 얼굴을 본 적이 있나요? 문선희,「이름보다 오래된」을 읽고     알지도 못하면서   반촌(半村) 생활을 하면서 관계 맺게 된 비인간 동물들은 도처에 있다. 두더지, 너구리, 고양이, 쥐, 멧돼지, 고라니, 뱀, 계곡의 물살이, 그리고 각종 곤충들. 그들 중에 내가 특별히 관심을 두게 된 종이 있다면 그 이유는 틀림없이 우리 사이에 있는 불편하고 두려운 어떤 감정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잘 지내보자는 화해의 마음을 내어본 적은 없다. 내가 시도하고 궁금했던 것은 그들을 피하거나 내쫓거나 없애는 방법. 그나마 피하는 정도면 평화롭다. 가끔은 생포하거나 죽이는 방법들도 궁리했다. 이들은 나의 건강을 위협하며 농사를 어렵게 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뱀을 쫓기 위해 떠돌이 산속 고양이들을 사료로 유인하여 우리 집 근처에 살도록 하고, 집 둘레는 백반으로 결계를 쳤다. 불청객들이 실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살충제는 언제든 손이 닿기 쉬운 곳에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남편이 해답을 찾지 못한 것은 멧돼지, 고라니, 두더지. 이 녀석들은 번갈아 가며 우리 살림과 밭작물과 과실수들에 큰 해를 끼쳤다. 특히 올해는 고라니가 그 역할을 단단히 했다.   고라니는 해마다 빌런이 아니었던 적이 거의 없다. 항상 잔잔하게 우리의 농사를 방해해왔다. 나보다 더 콩잎에 환장하는 고라니 때문에 콩 농사는 반촌 첫해부터 포기했다. 녀석들은 녹즙 해먹을 기대로 사다 심은 비싼 와송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 버리기도 했다. 고라니를 막기 위한 울타리를 쳐도 허술한 구석을 용케...
고라니의 얼굴을 본 적이 있나요? 문선희,「이름보다 오래된」을 읽고     알지도 못하면서   반촌(半村) 생활을 하면서 관계 맺게 된 비인간 동물들은 도처에 있다. 두더지, 너구리, 고양이, 쥐, 멧돼지, 고라니, 뱀, 계곡의 물살이, 그리고 각종 곤충들. 그들 중에 내가 특별히 관심을 두게 된 종이 있다면 그 이유는 틀림없이 우리 사이에 있는 불편하고 두려운 어떤 감정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잘 지내보자는 화해의 마음을 내어본 적은 없다. 내가 시도하고 궁금했던 것은 그들을 피하거나 내쫓거나 없애는 방법. 그나마 피하는 정도면 평화롭다. 가끔은 생포하거나 죽이는 방법들도 궁리했다. 이들은 나의 건강을 위협하며 농사를 어렵게 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뱀을 쫓기 위해 떠돌이 산속 고양이들을 사료로 유인하여 우리 집 근처에 살도록 하고, 집 둘레는 백반으로 결계를 쳤다. 불청객들이 실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살충제는 언제든 손이 닿기 쉬운 곳에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남편이 해답을 찾지 못한 것은 멧돼지, 고라니, 두더지. 이 녀석들은 번갈아 가며 우리 살림과 밭작물과 과실수들에 큰 해를 끼쳤다. 특히 올해는 고라니가 그 역할을 단단히 했다.   고라니는 해마다 빌런이 아니었던 적이 거의 없다. 항상 잔잔하게 우리의 농사를 방해해왔다. 나보다 더 콩잎에 환장하는 고라니 때문에 콩 농사는 반촌 첫해부터 포기했다. 녀석들은 녹즙 해먹을 기대로 사다 심은 비싼 와송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 버리기도 했다. 고라니를 막기 위한 울타리를 쳐도 허술한 구석을 용케...
도라지
2023.11.05 | 조회 357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1.칠원의 관리, 장자   들꿩은 열 걸음을 걸어야 모이 한 번 쪼고 백 걸음 걸어야 물 한 모금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새장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먹이를 찾는 수고로움이야 없겠지만 자유롭게 살려는 본성에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澤雉十步一啄,百步一飮,不蘄畜乎樊中. 神雖王,不善也.) 「양생주」 『낭송장자』 100쪽     『사기열전』에 의하면 장자는 몽(蒙)땅 칠원(漆園)의 관리(吏)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몽 땅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칠원이 옻나무를 심어 놓은 동산이라는 것에서는 이견이 없다. 장자가 살았던 시기에는 종이와 먹이 발명되기 전이라 대부분 죽간에 써서 기록을 남겼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옻액을 대나무로 만든 펜으로 찍어 죽간에 썼다고 한다. 그런데 옻나무는 아무데서나 흔히 자라는 수종이 아닌데다, 씨앗의 발아율도 낮고 잔뿌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는 데도 3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런 상황이니 옻액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라도 옻나무 동산을 관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칠원의 관리는 중요한 직책은 아니어서 하급말단직이었을 것이라는 데도 이견은 없다.        「양생주」 3장에는 들꿩의 살이가 나온다. 꿩은 땅 위를 걷는 새로 몸이 길고 날씬하며, 발과 발가락이 발달되었으나 날개는 둥글고 짧아 멀리 날지 못한다. 먹이는 나무 열매나 풀씨 등의 식물성 먹이를 주로 섭취하는데, 작은 곤충도 먹는 잡식성이라고 한다. 먹이 대부분이 땅바닥에서 쪼아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보니, 사냥감으로 노출되기 쉬워 식용으로도 널리 애용된 조류이기도 하다. 옛 문헌에 의하면 늦봄 풀숲에 숨어서 피리로 장끼소리를 내면 꿩이 그 소리를 듣고 날아오르기도 하는데 그때...
1.칠원의 관리, 장자   들꿩은 열 걸음을 걸어야 모이 한 번 쪼고 백 걸음 걸어야 물 한 모금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새장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먹이를 찾는 수고로움이야 없겠지만 자유롭게 살려는 본성에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澤雉十步一啄,百步一飮,不蘄畜乎樊中. 神雖王,不善也.) 「양생주」 『낭송장자』 100쪽     『사기열전』에 의하면 장자는 몽(蒙)땅 칠원(漆園)의 관리(吏)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몽 땅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칠원이 옻나무를 심어 놓은 동산이라는 것에서는 이견이 없다. 장자가 살았던 시기에는 종이와 먹이 발명되기 전이라 대부분 죽간에 써서 기록을 남겼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옻액을 대나무로 만든 펜으로 찍어 죽간에 썼다고 한다. 그런데 옻나무는 아무데서나 흔히 자라는 수종이 아닌데다, 씨앗의 발아율도 낮고 잔뿌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는 데도 3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런 상황이니 옻액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라도 옻나무 동산을 관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칠원의 관리는 중요한 직책은 아니어서 하급말단직이었을 것이라는 데도 이견은 없다.        「양생주」 3장에는 들꿩의 살이가 나온다. 꿩은 땅 위를 걷는 새로 몸이 길고 날씬하며, 발과 발가락이 발달되었으나 날개는 둥글고 짧아 멀리 날지 못한다. 먹이는 나무 열매나 풀씨 등의 식물성 먹이를 주로 섭취하는데, 작은 곤충도 먹는 잡식성이라고 한다. 먹이 대부분이 땅바닥에서 쪼아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보니, 사냥감으로 노출되기 쉬워 식용으로도 널리 애용된 조류이기도 하다. 옛 문헌에 의하면 늦봄 풀숲에 숨어서 피리로 장끼소리를 내면 꿩이 그 소리를 듣고 날아오르기도 하는데 그때...
기린
2023.10.25 | 조회 377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노나라 대부)이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기둥머리에는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는 마름풀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논어』「공야장,17」     『논어(論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더불어 당대 혹은 선대의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언급 되는데 생각보다 노(魯)나라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공자 당대에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논어』에 두 번 언급되는 장문중은 노나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기 전까지 장문중이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것 이외에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장식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가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불후(不朽)는 ‘썩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후라는 말은 『춘추좌전』에서 유래했는데 노나라 양공(襄公) 24년, 숙손표가 진(晉)나라의 범선자와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범선자가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숙손표가 덕을 세우는 것(立德)과 공을 세우는 것(立功), 말을 세우는 것(立言) 세 가지가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니 불후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후대에는 이 세 가지를 ‘삼불후(三不朽)’라고 칭하였다. 이 때 숙손표는 불후의 예로 장문중을 들었다.   “우리 노나라 선대부 중에 장문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노나라 대부)이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기둥머리에는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는 마름풀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논어』「공야장,17」     『논어(論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더불어 당대 혹은 선대의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언급 되는데 생각보다 노(魯)나라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공자 당대에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논어』에 두 번 언급되는 장문중은 노나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기 전까지 장문중이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것 이외에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장식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가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불후(不朽)는 ‘썩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후라는 말은 『춘추좌전』에서 유래했는데 노나라 양공(襄公) 24년, 숙손표가 진(晉)나라의 범선자와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범선자가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숙손표가 덕을 세우는 것(立德)과 공을 세우는 것(立功), 말을 세우는 것(立言) 세 가지가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니 불후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후대에는 이 세 가지를 ‘삼불후(三不朽)’라고 칭하였다. 이 때 숙손표는 불후의 예로 장문중을 들었다.   “우리 노나라 선대부 중에 장문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진달래
2023.10.01 | 조회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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