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기 1234] 수행을 실천하는 21세기형 생태보살

도라지
2023-09-04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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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을 실천하는 21세기형 생태보살

데이비드 로이, 『과학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때 불교가 할 수 있는 것』을 읽고

 

 

한 때 인류가 멸종이 된다고 해도 그게 무슨 문제일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지구에서 인간 종이 사라져도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며 ‘스스로 그러하게’ 존재할 테니 말이다. 인간 종이 지구에 행해왔던 일들을 생각하면 인류가 생태적 재난으로 생존을 위협받는 것은 업보일 뿐. 하지만 인간이 지구의 다른 생명들과 분리되지 않았음을 알고 느끼게 된 후로 자주 마음이 아프다. 영화 ‘수라’에서 봤던 아기 쇠제비갈매기의 안부가 궁금한 이유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잘 모르겠지만 불교 공부 이후부터였던 것은 확실하다.

 

 

영화 '수라'에서 어미 쇠제비갈매기와 아기 쇠제비갈매기

 

 

불교에서 ‘연기법’과 ‘공성(空)’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다른 이들이나 지구의 뭇 생명들과 분리되지 않았다는 깨달음을 준다. 선수행자이자 사회적 참여불교 활동가인 데이비드 로이가 우리에게 당면한 생태-사회적 위기에 ‘에코다르마’를 들고나온 이유도 불교적 깨달음의 생태적 시사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에코다르마’는 불교 전통이 최근 전개하는 새로운 용어로, 생태적인 관심(eco)에 불교의 가르침과 그에 연관된 영적 전통(dharma)을 결합한 것이다. ‘생태 불교’라고도 할 수 있는 ‘에코다르마’에서는 궁극의 깨달음을 ‘사회적 실천’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이들이 ‘생태 보살’이다.

 

 

불교의 위기인가? 아니면 불교의 기회인가?

 

환경 위기가 최근에 생겨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의 말에 의하면) 불교 수행자들과 불교단체들은 2010년 후반까지 (적어도 미국에서는) 생태위기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2009년 『기후위기에 대한 불교적 응답(A Buddhist Reponse to the Clomate Emergency)』이라는 책을 저자가 공동 편집했는데 무려 달라이 라마, 틱낫한, 비구 보디, 조애너 메이시, 조셉 골드스타인 등이 기고한 좋은 글들이 실렸음에도 이 책은 불교계로부터 놀라울 정도로 관심을 끌지 못했으며, 최근 몇 년 ‘에코다르마’에 대한 관심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참여를 중심으로 하는 불교 강연은 참가자 수가 너무 적어 취소된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한편 저자는 일부 다른 불교기관들은 재정적으로 번창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는데, 이들은 주로 개인들이 쉬면서 수행할 수 있는 인기 높은 명상센터들이다. 물론 저자가 이러한 예를 사회적 참여불교의 실패로 보고 있지는 않다. 이것은 현재 미국 불교의 양상일 뿐, 오히려 저자가 주목하는 점은 교도소 활동, 호스피스 케어, 노숙자 식당 운영 등, 불교인들의 사회적 봉사다. 우리는 고통받는 노숙자를 만났을 때 자비롭게 대응하지만 이 많은 노숙자를 양산하는 사회시스템에 대해서도 너무 자비롭다는 것이다.  

 

 

기후 위기에 대응할 개인적 행동은 많다. 하이브리드나 전기 자동차를 구입한다든지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거나 채식을 하는 등 개인의 생활방식을 바꾸는 것 말이다. 이러한 ‘녹색소비’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개인의 변화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다. 저자는 이제 이렇게 노력하는 개인들이 개인적 실천 후 사회 시스템을 바꾸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도록 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을 우리가 함께 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2500년의 불교 역사는 다양한 문화적 형태를 취하면서 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으로 전파됐다. 그 과정에서 역사적 지리적으로 진화한 불교의 다양성을 고려하면 각각 강조하는 가르침과 수행 전통이 다름은 피해 갈 수 없다. 저자는 그 과정에서 생겨난 다양한 견해들 가운데 서로 가장 당연시하는 것들에 대해 우리가 물을 때, 불교적 전통에서 생태위기를 극복할 최상의 방법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전통적인 아시아 불교, 특히 테라바다(상좌부)의 가르침과 수행의 목적은 고통스러운 윤회를 벗어나는 것.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대 불교, 특히 불교 심리치료와 대다수의 마음챙김(mindfulness) 운동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변화시킴으로써 이 세계와 조화롭게 되는 것을 강조한다. 개인의 마음이 문제이지 세계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생을 벗어나는 데 목표를 둔 내세적 불교와 우리를 이 세계에 적응하여 더 잘 살도록 돕는 현대 불교는 정반대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둘 다 현세의 문제에 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현세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서 생태위기에 대한 불교의 ‘해결책’을 찾는다. 내면(명상)과 외형(행동주의)의 두 가지 수행이 조화롭게 일어나게 하는 방법을 두 불교의 전통에서 찾으면 된다는 것이다.

 

 

명상은 자아의식을 해체하여 자아를 구성하는 생각, 느낌, 행위 등 습관적인 패턴에 변화를 주고 일상을 재구성하도록 돕는다. 이것은 타인과 관계 맺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또한 테라바다 전통에서는 최종적으로 육체가 소멸할 때의 ‘반열반’보다 붓다가 보리수 아래서 성취한 ‘열반’의 토대가 되는 ‘연기법’을 가져올 수 있다. 우주의 모든 것들이 상호 의존하며 존재한다는 ‘연기법’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지구의 다른 생명들과 분리되지 않았음을 알아차리게 하여 지구와 관계 맺는 행동 방식에 전환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저자의 고민은 초기불교의 가르침과 수행 전통, 그리고 대승의 ‘보살(보디사트바)’이라는 말로 불교 역사에서 이미 구현된 것이 아닐까? ‘보살’이란 ‘보리(보디)’와 ‘살타(사트바)’의 합성어. 이때 ‘보리’란 연기적 존재(空)를 이해하는 관점 곧 깨달음이고, ‘살타’는 중생을 뜻한다. ‘보살’이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에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보리’ 즉 깨달음에 근거한 행동양식을 실천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사회적 참여불교 활동가인 저자도 이를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짐작하건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미국 불교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해결하고 현시점에서 참여불교가 가져야 할 생태위기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그들에게 친숙한 명상수행과 테라바다 전통에서, ‘에코다르마’와 ‘생태 보살’의 개념을 설명하려고 시도한 것 같다. 저자는 보살의 길에 대한 현대적인 재검토를 요구하며 사회제도나 구조로 인해 쌓여버린 집단적 고통에 적합한 21세기형 보살을 질문한 것이다.

 

 

저자는 불교의 가르침은 이제 새로운 보살도로 확장되어 사회적으로 참여적인 독특한 특징을 갖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연기법의 상호의존성과 비폭력을 강조하는 불교는 분노가 아닌 사랑과 자비에 의한 정치를 의미하기에,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사회의 기본적인 문제는 부유하고 힘있는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변화되어야 할 집단적인 탐욕과 분노와 무지로 제도화된 구조이다. 불교의 가르침은 지금껏 많은 진보적 운동을 약화시킨 이념적 다툼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며 역사적 맥락에 따라 방편을 만들어온 대승의 지혜는 지속가능한 사회운동에 필요한 창의적 상상력의 필요성을 추동할 수 있다. 

 

 

 

 

 

생태보살의 길

 

사회참여의 시대적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은 보통 자기 마음의 평화에 집중하라는 가르침을 받은 불교인들에게는 큰 진전일 것이다. 한편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은 그 결과에 따른 좌절, 분노, 우울, 피로감 등에 시달리는 경향이 있어 왔다. 여기에 참여적 보살, 생태보살의 길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제공한다. 명상은 평정심을 지탱하는 내적 통찰을 길러주기 때문에 목표지향적인 사회적 활동가들이 자신의 심리상황에 빠지지 않고 깨달음의 방향으로 나가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제 세상의 문제에 관한 참여는 개인의 영적 수행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변화에서 핵심으로 이해될 수 있다. 통찰력과 평정심을 기르는 것으로 행동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행동하는 보살의 길을 갈수 있게 된다.

 

 

대승의 보살은 네 가지 큰 서원을 한다. 사홍서원이라고 하는데 그중에는 “중생의 수가 셀 수 없이 많더라도 나는 그들을 모두 해탈시키기를 서원합니다.” 라는 내용을 담은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가 있다.  서원에 필요한 실천과 성취가 실제 가능한지를 생각하기도 전에 서원의 스케일에 먼저 압도당한다. 대체 이러한 서원의 성취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성취하기 불가능한 것을 맹세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원이 실현될 수 없다는 것. 이것은 문제가 아니라 핵심이기도 하다.

 

 

어떠한 보살도 자신의 서원을 완벽하게 수행할 수 없다. 그래도 괜찮다. 그의 임무는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최선을 다하는 것. 성취될 수 없기에 서원이 진정으로 요구하는 것은 삶의 방향을 새롭게 조정하는 것이다. 자아에 집착하던 일상이 모든 존재의 행복을 위한 관심으로 향하게 된다. 하지만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 그래서 더욱 명상을 통해 영적인 바탕으로 수행하는 보살이 요구된다.

 

 

깨달음으로 인한 사회적 참여와 명상 수행을 통한 영적인 변모, 이 두 가지 수행을 조화롭게 실천하는 것이 저자가 말하는 ‘에코다르마’이며 그들이 ‘생태 보살’이다. 현세에 대한 관심과 함께 생태적 사회적으로 참여하는 방식을 고민하고, 제도적인 구조의 문제까지 해결하려 노력하는 생태 보살! 크게 새롭게 느껴지는 보살의 정의는 아니었지만 정확히 지금 당면한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영적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겠다.

 

 

‘에코다르마’나 ‘생태 보살’이 어떤 특별한 개념에 한정되는 말은 아닌 것 같다. 또한 반드시 불교적 언어만으로 표현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도래한 생태-사회적 위기에 예견된 미래를 모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최선을 다하는 행동이 ‘에코다르마’이며 그들이 ‘생태 보살’이 아닐까.  최근에 나는 그들을 전장연에서 보았고, 영화 ‘수라’에서 보았다. 그리고 종종 문탁 안에서도 본다.

 

 

문득 친구들과 함께 책만 읽을 것이 아니라 명상을 하는 기회도 종종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 어느 길 위에서 함께 손잡을 친구들이 많아질 것만 같다.

댓글 2
  • 2023-09-04 17:51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 하기, 우리 모두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지구를 위한 일을 하기, 결국 지구를 위한 일도 꼭 잘 되어야 한다는 집착없이 할 수 있는 만큼 기쁘게 하기~ 왠지 마음 가볍게 만드는 도라지님의 보살글이네요.

  • 2023-09-29 11:50

    뒤늦게 잘 읽고 갑니다.
    불알못이라 다 알아듣기는 어렵지만, 무슨 메세지를 전하는지는 이해했어요.

변명하지 않는 글쓰기 : <망고와 수류탄>(기시 마사히코)를 읽고       잘 이해하고 잘 전달하기     인터뷰를 시작하고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은 상대의 이야기를 어떻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제대로 전달하기’란 것은 무엇일까? 내게 그것은 때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가독성을 높이는 것이었고, 또 때론 독자가 동감할 포인트를 짚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함께 살 수 있을까> 원고를 쓰며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이 글로 인해 인터뷰이들이 곤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나의 인터뷰이들은 흔히 말하는 사회적 소수자였고, 이미 자신에 대해 떠들어지는 수많은 말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잘 전달하기 위해 그들의 말을 가능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옮겨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야 그들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사람 중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야기를 세계와 고립시키는 상대주의       기시 마사히코가 쓴 <망고와 수류탄>의 부제는 ‘생활사 이론’으로 오키나와 전후를 연구한 사회학자가 작성한 에세이이자 이론서이다. 저자는 책에서 ‘구축주의’라는 이론을 비판한다. 그가 이 책에서 주로 비판하는 구축주의는 사쿠라이 아츠시라는 사람의 이론이다. 사쿠라이 아츠시가 만들어낸 조사 방법론은 현재 일본에서 사회학 질적조사의 기준이라고 한다. 그는 구축주의 사회 이론을 흡수하여 일본 사회학 생활사 연구에 접목시킨 사람으로, 생활사 연구 자체를 대표하고 있기도 하다. 그가 애초에 시도하고자 했던 것은 사회적 소수자인 구술자를 이해하고 보호하는 것이었다. 만일...
변명하지 않는 글쓰기 : <망고와 수류탄>(기시 마사히코)를 읽고       잘 이해하고 잘 전달하기     인터뷰를 시작하고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은 상대의 이야기를 어떻게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제대로 전달하기’란 것은 무엇일까? 내게 그것은 때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가독성을 높이는 것이었고, 또 때론 독자가 동감할 포인트를 짚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함께 살 수 있을까> 원고를 쓰며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이 글로 인해 인터뷰이들이 곤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나의 인터뷰이들은 흔히 말하는 사회적 소수자였고, 이미 자신에 대해 떠들어지는 수많은 말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잘 전달하기 위해 그들의 말을 가능한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옮겨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야 그들에 대해 함부로 떠드는 사람 중 하나가 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야기를 세계와 고립시키는 상대주의       기시 마사히코가 쓴 <망고와 수류탄>의 부제는 ‘생활사 이론’으로 오키나와 전후를 연구한 사회학자가 작성한 에세이이자 이론서이다. 저자는 책에서 ‘구축주의’라는 이론을 비판한다. 그가 이 책에서 주로 비판하는 구축주의는 사쿠라이 아츠시라는 사람의 이론이다. 사쿠라이 아츠시가 만들어낸 조사 방법론은 현재 일본에서 사회학 질적조사의 기준이라고 한다. 그는 구축주의 사회 이론을 흡수하여 일본 사회학 생활사 연구에 접목시킨 사람으로, 생활사 연구 자체를 대표하고 있기도 하다. 그가 애초에 시도하고자 했던 것은 사회적 소수자인 구술자를 이해하고 보호하는 것이었다. 만일...
고은
2023.11.06 | 조회 310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공동체에서 철학하기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 피에르 아도   서양철학 공부와 1234 내가 서양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작년 문탁2층 운영위원들이 공통감각을 키우고자 함께 했던 비전세미나 대신 철학학교 세미나에서 『차이와 반복』을 읽었다. 그 때 서양철학에 대한 어떤 지식도 없이, 고대와 중세의 철학도 전혀 모르면서 현대 철학을 읽자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그동안 나는 어떤 공부를 하든지 크게 상관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저 문탁에 왔더니 많은 사람들이 동양고전을 공부하고 있었고, 따라서 하다 보니 어찌어찌 시간이 흘렀을 뿐이다. 그리고 사실 실천학문으로서 유가는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했고, 이것도 제대로 못하면서 다른 공부까지 기웃대는 건 지식확장에 대한 욕망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들뢰즈를 읽으면서 이건 욕망의 문제가 아니라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였고, 내가 앞으로 계속 문탁에서 공부를 하려면 서양철학도 어느 정도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다시 들뢰즈 세미나를 했던 것처럼 날벼락이 떨어질지 모르니까, 유비무환!   마침 올해 철학입문 세미나가 생겨 서양철학사를 훑어볼 수 있었고 결론적으로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 거기다가 공부방 회원들의 읽고 쓰기 프로그램인 1234를 통해 고대 철학 원전들을 같이 읽다보니 서양철학사를 공부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다. 원래 계획은 올해 1234에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스토아의 원전을 한 권씩 읽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스토아 철학을 읽을 차례였는데, 마지막이기도 해서 『고대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읽고 일단 한 번 정리를 해보고 싶었다.   이 책의 저자 피에르 아도는 한마디로 고대 철학을 ‘생활양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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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용
2023.11.05 | 조회 386
세미나 에세이 아카이브
고라니의 얼굴을 본 적이 있나요? 문선희,「이름보다 오래된」을 읽고     알지도 못하면서   반촌(半村) 생활을 하면서 관계 맺게 된 비인간 동물들은 도처에 있다. 두더지, 너구리, 고양이, 쥐, 멧돼지, 고라니, 뱀, 계곡의 물살이, 그리고 각종 곤충들. 그들 중에 내가 특별히 관심을 두게 된 종이 있다면 그 이유는 틀림없이 우리 사이에 있는 불편하고 두려운 어떤 감정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잘 지내보자는 화해의 마음을 내어본 적은 없다. 내가 시도하고 궁금했던 것은 그들을 피하거나 내쫓거나 없애는 방법. 그나마 피하는 정도면 평화롭다. 가끔은 생포하거나 죽이는 방법들도 궁리했다. 이들은 나의 건강을 위협하며 농사를 어렵게 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뱀을 쫓기 위해 떠돌이 산속 고양이들을 사료로 유인하여 우리 집 근처에 살도록 하고, 집 둘레는 백반으로 결계를 쳤다. 불청객들이 실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살충제는 언제든 손이 닿기 쉬운 곳에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남편이 해답을 찾지 못한 것은 멧돼지, 고라니, 두더지. 이 녀석들은 번갈아 가며 우리 살림과 밭작물과 과실수들에 큰 해를 끼쳤다. 특히 올해는 고라니가 그 역할을 단단히 했다.   고라니는 해마다 빌런이 아니었던 적이 거의 없다. 항상 잔잔하게 우리의 농사를 방해해왔다. 나보다 더 콩잎에 환장하는 고라니 때문에 콩 농사는 반촌 첫해부터 포기했다. 녀석들은 녹즙 해먹을 기대로 사다 심은 비싼 와송을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먹어 버리기도 했다. 고라니를 막기 위한 울타리를 쳐도 허술한 구석을 용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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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지
2023.11.05 | 조회 357
기린의 공동체가 양생이다
1.칠원의 관리, 장자   들꿩은 열 걸음을 걸어야 모이 한 번 쪼고 백 걸음 걸어야 물 한 모금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새장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먹이를 찾는 수고로움이야 없겠지만 자유롭게 살려는 본성에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澤雉十步一啄,百步一飮,不蘄畜乎樊中. 神雖王,不善也.) 「양생주」 『낭송장자』 100쪽     『사기열전』에 의하면 장자는 몽(蒙)땅 칠원(漆園)의 관리(吏)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몽 땅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칠원이 옻나무를 심어 놓은 동산이라는 것에서는 이견이 없다. 장자가 살았던 시기에는 종이와 먹이 발명되기 전이라 대부분 죽간에 써서 기록을 남겼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옻액을 대나무로 만든 펜으로 찍어 죽간에 썼다고 한다. 그런데 옻나무는 아무데서나 흔히 자라는 수종이 아닌데다, 씨앗의 발아율도 낮고 잔뿌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는 데도 3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런 상황이니 옻액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라도 옻나무 동산을 관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칠원의 관리는 중요한 직책은 아니어서 하급말단직이었을 것이라는 데도 이견은 없다.        「양생주」 3장에는 들꿩의 살이가 나온다. 꿩은 땅 위를 걷는 새로 몸이 길고 날씬하며, 발과 발가락이 발달되었으나 날개는 둥글고 짧아 멀리 날지 못한다. 먹이는 나무 열매나 풀씨 등의 식물성 먹이를 주로 섭취하는데, 작은 곤충도 먹는 잡식성이라고 한다. 먹이 대부분이 땅바닥에서 쪼아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보니, 사냥감으로 노출되기 쉬워 식용으로도 널리 애용된 조류이기도 하다. 옛 문헌에 의하면 늦봄 풀숲에 숨어서 피리로 장끼소리를 내면 꿩이 그 소리를 듣고 날아오르기도 하는데 그때...
1.칠원의 관리, 장자   들꿩은 열 걸음을 걸어야 모이 한 번 쪼고 백 걸음 걸어야 물 한 모금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새장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먹이를 찾는 수고로움이야 없겠지만 자유롭게 살려는 본성에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澤雉十步一啄,百步一飮,不蘄畜乎樊中. 神雖王,不善也.) 「양생주」 『낭송장자』 100쪽     『사기열전』에 의하면 장자는 몽(蒙)땅 칠원(漆園)의 관리(吏)였다고 전해진다. 현재 몽 땅의 위치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칠원이 옻나무를 심어 놓은 동산이라는 것에서는 이견이 없다. 장자가 살았던 시기에는 종이와 먹이 발명되기 전이라 대부분 죽간에 써서 기록을 남겼다. 옻나무에서 채취한 옻액을 대나무로 만든 펜으로 찍어 죽간에 썼다고 한다. 그런데 옻나무는 아무데서나 흔히 자라는 수종이 아닌데다, 씨앗의 발아율도 낮고 잔뿌리가 완전히 자리를 잡는 데도 3여 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런 상황이니 옻액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라도 옻나무 동산을 관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칠원의 관리는 중요한 직책은 아니어서 하급말단직이었을 것이라는 데도 이견은 없다.        「양생주」 3장에는 들꿩의 살이가 나온다. 꿩은 땅 위를 걷는 새로 몸이 길고 날씬하며, 발과 발가락이 발달되었으나 날개는 둥글고 짧아 멀리 날지 못한다. 먹이는 나무 열매나 풀씨 등의 식물성 먹이를 주로 섭취하는데, 작은 곤충도 먹는 잡식성이라고 한다. 먹이 대부분이 땅바닥에서 쪼아 먹을 수 있는 것들이다 보니, 사냥감으로 노출되기 쉬워 식용으로도 널리 애용된 조류이기도 하다. 옛 문헌에 의하면 늦봄 풀숲에 숨어서 피리로 장끼소리를 내면 꿩이 그 소리를 듣고 날아오르기도 하는데 그때...
기린
2023.10.25 | 조회 377
논어 카메오 열전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노나라 대부)이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기둥머리에는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는 마름풀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논어』「공야장,17」     『논어(論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더불어 당대 혹은 선대의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언급 되는데 생각보다 노(魯)나라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공자 당대에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논어』에 두 번 언급되는 장문중은 노나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기 전까지 장문중이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것 이외에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장식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가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불후(不朽)는 ‘썩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후라는 말은 『춘추좌전』에서 유래했는데 노나라 양공(襄公) 24년, 숙손표가 진(晉)나라의 범선자와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범선자가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숙손표가 덕을 세우는 것(立德)과 공을 세우는 것(立功), 말을 세우는 것(立言) 세 가지가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니 불후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후대에는 이 세 가지를 ‘삼불후(三不朽)’라고 칭하였다. 이 때 숙손표는 불후의 예로 장문중을 들었다.   “우리 노나라 선대부 중에 장문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장문중(노나라 대부)이 큰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기둥머리에는 산을 조각하고 동자기둥에는 마름풀을 그렸으니, 어찌 지혜롭다 하겠는가?”(子曰  臧文仲居蔡  山節藻梲  何如其知也) 『논어』「공야장,17」     『논어(論語)』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사람들은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다. 더불어 당대 혹은 선대의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언급 되는데 생각보다 노(魯)나라 사람들이 잘 나오지 않는다. 공자 당대에 권력자였던 삼환(三桓)을 제외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노나라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논어』에 두 번 언급되는 장문중은 노나라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듯하다. 하지만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기 전까지 장문중이 노나라의 대부였다는 것 이외에 거의 아는 것도 없었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도 없었다. 게다가 ‘거북껍질을 보관하는 집’에 장식을 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 것일까?   썩지 않는 세 가지, 삼불후(三不朽)   <불후의 명곡>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여러 가수들이 다양한 장르의 명곡을 재해석하여 부르는 프로그램이다. 여기서 불후(不朽)는 ‘썩지 않는’이라는 뜻으로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불후라는 말은 『춘추좌전』에서 유래했는데 노나라 양공(襄公) 24년, 숙손표가 진(晉)나라의 범선자와 나눈 대화에 등장한다. 범선자가 사람이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숙손표가 덕을 세우는 것(立德)과 공을 세우는 것(立功), 말을 세우는 것(立言) 세 가지가 오래 되어도 폐해지지 않으니 불후라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다. 후대에는 이 세 가지를 ‘삼불후(三不朽)’라고 칭하였다. 이 때 숙손표는 불후의 예로 장문중을 들었다.   “우리 노나라 선대부 중에 장문중이라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은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가 남긴...
진달래
2023.10.01 | 조회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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