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지 부루쓰 2탄 : 신들과 함께

히말라야
2019-01-26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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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들과 함께

드디어! 그날이 왔다. 레몬 썰기는 점심 먹고 하기로 약속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 레몬을 깨끗이 씻어서 말려놔야한다.  전날 홀로 병소독의 수레바퀴 속에서 괴로웠던 나는, 이웃에 사는 화끈한 친구 콩땅을 마치 물에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듯이, 마치 물귀신처럼, 아주 꽈~아~악. 붙잡았다.

 “칭구야~ 같이 하자!”

수입 레몬이었다면 좀 더 수고로울테지만, 청정 제주에서 유기농로 재배된 레몬 세박스를 씻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이는 물론 ‘도망가고 싶은 고관절과 병 몇개만 닦아도 시큰해지는 손모가지를 지닌' 내가 아니라, ‘화끈한 성품에 힘도 센’ '콩땅에게'는 간단한 일이라는 말이다. 콩땅과 함께 레몬을 식촛물에 담가 흐르는 물에 박박 씻고 있으려니, 지난 겨울의 일이 떠오른다.

강추위 끝에 우리집 수도관이 얼어터져 물을 쓸 수 없어 정말 난감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그는 곧바로 물이 가득 든 무거운 김치통을 날라왔다. 그 뿐인가. 파지사유 커피머신이 고장나자마자, 그 무거운 것을 번쩍 들고 혼자서 AS센터로 당장 달려갔던 일도 있다. 그런 생각들과 함께 레몬을 박박 문지르는 내 마음은, 전날의 수레바퀴 아래서와는 달리 훈훈하고, 든든하고, 촉촉하다.

콩땅의 뒤테.jpg
(앞모습 찍지 말라며 도망가는 화끈한 콩땅의 뒷테)


콩땅과 함께 (사실 대부분은 콩땅이^^) 정성들여 잘 씻은 레몬을 파지사유 한켠의 테이블 위에 잘 쌓아올려 놓고 보니, 마치 신전에 바친 제물같다.  파지사유에 사는 신들은 그 노랗게 반짝거리는 향기로운 제물에 관심을 보이면서 점차 모두들 어여쁘게 돌아보기 시작한다.

“어머, 레몬 색깔이 너무 예쁘다!”

“레몬, 언제부터 썰거야?”

“이거 씻은 거야? 물기도 잘 닦아내야 해.”

“작년보다 적네, 금방 썰겠다!”

점심상이 치워지기 무섭게 칼질의 신, 씨빼기의 신, (설탕과 레몬의 무게) 계량의 신, (설탕과 레몬을 서로) 휘젓기의 신, (레몬청을) 병에 담기의 신 등등...모든 신들이 일거에 달라붙어 순식간에 수십병의 레몬청이 만들어졌다. 이런 것이 신의 기적이 아니면 무엇이랴! 옛날 이야기 속에서 이 많은 일을 언제 하냐며 울고있는 콩쥐랑 신데렐라에게 나타난 선녀랑 요술할멈의 정체도 바로 이런 신들이었을테지! 이런 신들을 바로 옆에 두고 나는 왜 그렇게 걱정을 했던가!


각종신들.jpg


지난 2년간 에티카를 열나게 읽었어도, 나는 아직도 신이 무엇인지 모르나 보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 신”이라고 말한 스피노자 선생은, 자기 주변에서 신을 알아보는 것을 ‘지성’이라고 불렀다. 그에 따르면 나는 아직도 지성적이지 못하다.

결혼식장에 섰을 때 이미 임신 6개월이던 우리 엄마의 딸답게,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따져보기 전에 이미 (사랑에?) 빠지는 타입의 인간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면서 대가족의 장남과 결혼을 한 것처럼. 또 문탁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그저 거리에서 용감하게 ‘탈핵’을 외치는 모습들이 아름다워  쫄레쫄레 따라 들어온 것처럼. 내게는 늘 “저 사람과 함께 해야겠다”가 먼저 오고, 그들과 함께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가”는 뒤에, 너무 늦게, 온다. 그래서 일상은 늘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의 연속이다.

어떤 철학자는 새로운 것을 낳는 것이야 말로 혁명이고 삶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지성적인 철학자들과 달리, 무지한 내 곁에는 낯선 것이 언제나 이미 생겨나 있고 그제서야 나는 내가 무엇을 사랑했는지 알게 된다. 그저 한 남자를 사랑했는 줄 알았는데, 맏며느리나 엄마라고 불리며 내가 사랑해서 낳았지만 내가 전혀 알 수 없는 낯선 존재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낯선 존재들에 시간을 들이며 온몸으로 부딪히고 겪어내면서 그제서야 내가 사랑한 것은 그저 한 남자였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을 했다.jpg


큐레이터로서의 활동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나는 언제나 그저 칼질에 손 한번 보태고 맛있는 레몬차를 마시려고만 했지, 레몬청을 만드는 처음부터 끝까지를 염두에 두며 거기에 일일이 내 품을 들이려고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이럴려고 큐레이터를 하겠다고 결심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여기서 만난 누군가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내게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이럴려고 사랑한 건 아니지만, 사랑하니 벌어지는 일 앞에서 어찌할 것인가...

나는 때때로 내 사랑을 부정하고, 나 없이도 잘 살거라 믿고, 도망가 버리고 싶다. 그러나 또 때로는 내 나름대로 어떻게든 잘 해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웃는 모습을 보고도 싶다. 나는 늘 그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래서, 자기가 낳은 자식들에게 신경질 한 번 부리지 않고 늘 유쾌하던 우리 엄마 딸 답지않게, 나는 내 사랑이 낳아버린 존재들에게 (웃게 만들기는 커녕!) 화를 버럭 낼 때가 많다. (ㅠㅜ) 이런 나에게 (파지사유) 신들의 가호가 있기를!


파지사유 신들.jpg


(공유지부루쓰 2탄 드디어 끝!)
댓글 2
  • 2019-01-28 10:48

    배움은 늘^^ 가장 나중에 온다고 했던가.

    "일상은 늘 예측하지 못했던 사건의 연속이다."

    사건은 연속되고 배움은 가장 늦게 오는 속도에 적응하는 몸^^

    2019년 큐레이터 히말에게 신의 가호로 그 속도를 즐기게 되기를 나 역시 바랍니다그려~

  • 2019-01-28 14:20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조금 더 단단히 엮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드네. ^^

    이런 멋진 친구와 함께 큐레이터 활동을 할 것을 생각하니, 2019년이 넘 신날 것 같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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