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공방> 5회차 과제

깨알
2016-08-24 20:54
298

올립니다.

피터볼 1~3장 질문

1. 지식인의 시대적 질문과 과제에 대하여

피터볼은 국가와 그 속에서의 사의 역할을 750(안녹산의 난, 당나라 귀족 계급 몰락의 시작)1050(왕안석 신법 1069, 왕안석 신법에 대한 대안이 신유학)의 비교를 통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데, 750년과 1050년의 시대 선택 속에 바로 질문과 답이 거의 다 들어 있는 것 같다.

11세기 송나라와 21세기 대한민국은 대외적 관계(송은 복잡한 주변이민족의 정세와 조공, 국방비 부담 과중, 한국은 미북의 대외관계와 미군 주둔유지비 등 국가예산 10%, GDP 2.5%의 국방비/북한은 국가 예산 15.9%, GDP 23.8%의 국방비) 남북 분단 및 남북의 경제력 차이 등에 있어서 공통점이 아주 많다고 생각된다.

11세기 송나라 사 계급의 국제적 현실에 대한 이해와 그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질문과 답(정치 시스템에 대한 질문, 전통에 대한 해석과 의 개념에 대한 변화, 국가 지배의 중앙과 지방 사회 속의 사 계급의 활동 등)이 도덕적 보편주의를 주장하는 신유학 철학의 성립과 발전을 이루었다면, 21세기 우리들의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은 무엇을 통해 얻을 수 있을까? 우리는 고대(정치 시스템)에 대한 모델과 질문도, 통일 제국에 대한 모델과 질문이 가능한 역사도 없다.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역사 속의 신유학을 공부하면서 시대가 당면한 질문을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줄은 몰랐다. 기존에 성리학에 대한 철학적 질문들에 막연히 쫄아 있었던 것 같고, 공부란 자신의 不知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공자의 말이 더욱 생각났다.

2. 왕안석 신법의 실패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신법 개혁의 실패 원인을 왕안석의 고집불통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어떻게 봐야 할까? 국가 중심의 중앙집권적 부국강병책인 왕안석 신법은 그 당시의 중간 계층인 사 계급의 지지를 잃으면서 실패했다. 개혁은 결국 계급 간의 이데올로기 투쟁인가? 공교롭게도 왕안석 신법 실패 후 신유학은 더욱 발전하였고, 문화대혁명 이후 현대 신유학 철학사도 더욱 발전하였다. 이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3. 피터 볼은 서론에서 자신은 신유학의 철학적 사고방식과 역사적 사고방식의 중간 입장이라며, 신유학을 12세기에서 17세의 사람들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과 그 세계에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대한 선택에 심오한 영향을 준 운동이라고 말한다. 신유학자들은 이전 전통을 완전히 뿌리 뽑는 것이 아니라 한나라와 당나라의 문화적 산물과 그 수사법에 새로운 층위를 더한 어떤 것이며, 그것은 대안적인 문화체계인 동시에 부합하지 않는 것을 걸러내는 필터이기도 하다는 참으로 중간적인 결론을 피터 볼은 내리고 있다.

4. 신유학이 중국사에서는 송, , , 청 사들의 정신계를 전적으로 지배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왜 조선 성리학은 원조 중국의 성리학과 다르게 래디컬 근본주의로 가게 된 것일까? 이것은 첫번째 질문과 연결되는 나의 질문이며 중국 역사 속의 성리학과 성리학 속의 우리의 역사도 한번 검토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댓글 16
  • 2016-08-24 21:38

    올립니다.

    피터볼 1~3장 질문

    1. 신유학을 “11세기 도덕철학자들의 가르침에 기초한 사상의 학파이자 12세기에 형성된 엘리트 사회운동이라 했는데, 엘리트 사회운동이 걸린다. ‘엘리트 사회운동이라...개인의 인격수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회운동이었나? 피터볼은 신유학을 이론적인 측면에서만 생각하지 않는다. 신유학은 신봉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게 만들어 주는 사회적 활동을 지칭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피터볼이 사회적 활동이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이론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되 그것이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시대에 통용될 수 있는 하나의 이론이 애초에 불가능 한 것이다. (3장 참고)

    2. 피터볼은 신유학철학사 보다 신유학과 세계와의 교섭을 탐구하고자 함. 그런데 교섭이 무엇이지? 관계로 해석할 수 있을까? , 피터볼의 문제의식은 개인의 인격수양보다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

    3.1050년 사들은 고대에 주목함. 현실 정치의 혼란은 도가적 이상의 잘못된 사용에서 기인하기 때문. 범중엄, 구양수를 비롯한 이들은 소극적 통치는 현실과 맞지 않다고 판단. 제대로 된 정부는 사물의 질서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일해야 한다고 요구.

    **신유학자들이 고대를 주목한 이유. 중용에서 제시된 사물의 질서를 실현하는 것이 적극적인 정치. 즉 현실의 문제를 타개할 대안이라고 생각. 또한 그들은 더 이상 당나라의 집약된 경전을 암송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음. 스스로 해석하고, 철학을 만들 수 있으려면 원문을 주목할 수밖에 없었음.

    4.천지에 대해 저술한 이들은 한 대에 성행했던 우주감응이론을 회피하려하였음. , 11세기 초의 사들은 천지를 이해하려는 사들은 고대의 성인들은 하늘의 패턴을 문명의 패턴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송대에 이르면 우주감응이론은 회피하려 했는데 왜인가? 고대로 돌아가면서 천지감응은 회피하려했던 그들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5. 송의 사들이 천지의 패턴이 아닌 마음에 주목한 연결고리가 잘 이해 안됨. 과거시험에서 창의성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마음의 관계. 공자도 마음에 주목했던가? 피터볼의 주장대로라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불교관념의 차용()이 사실이 아니라 송대의 사들이 이미 마음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들이 마음에 주목하게 된 역사적, 철학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잘 되지 않음

  • 2016-08-24 22:58

    우선 중용해석부터 올립니다.

  • 2016-08-24 23:23

    질문은 파일말고 그냥 올려주세요. (위의 두 분은 제가 입력해드릴게요) 그래야 발제자 및 친구들이 바로바로 볼 수 있으니까요.. ㅋㅋ

    어쨌든 전 지금 서울서 돌아왔는데 , 발제는 낼 아침 직접 뽑아갈게요. 할 수 있는 한 친구들 질문을 반영해서 어떻게든 한장으로 만들어가겠습니다. ^^

    • 2016-08-25 07:21

      한장으로 만드는 신공을 발휘했어요. 아래 자누리샘 발제 보니까 더 줄였어도 되었건만.....ㅠㅠㅠ

      • 2016-08-25 07:43

        여러분들이 올린 질문 중에 2장에 해당하는 것만 정리했시유. 1장과 3장 질문은 풍경과 자누리 몫? ㅋㅋㅋ

  • 2016-08-24 23:24

    올려요.

    피터볼 1~3장 질문

    당은 이전의 왕조가 그러하듯 황제가 다스렸다. 당이 멸망후 510국 사이에서 송나라가 건국된다. 송은 여진족에 의해 남송으로 옮겨갔고 몽고족에 의해 멸망했다. 강력한 통치자가 있던 한족이 아닌 다른 민족들의 국가였다.

    송이 하나의 제국으로 세력을 확장 시키지 못한 채 주변 국가들과 대외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나아간 것이 주변의 요..원나라가 다른 민족들의 국가이고 송나라는 중국인의 국가라는 생각에 기초해서 민족성 개념을 추구해 가는 것과

    신유학자들이 모든 존재는 같은 도덕적 본성을 부여 받기 때문에 여진. 몽고족도 인간적 본성을 수양하는 학의 전통을 존중해야 한다는 선언하는 보편주의의 변형은 같은 흐름으로 봐도 되는 것인지?

     

    북부에서는 변방의 수비가 주된 관심사로 군대를 위한 보급, 노동력 확보를 위해 토지를 장악 하여 인력과 경제적 잉여를 쓰는 동안, 남부는 국방의 부담이 적고, 생산력이 더 높았으며, 물류비용이 더 낮았고 상업을 통해 돈을 벌어 들였다. 이러한 남부의 약진은 행정기구가 인구 증가를 따라 잡지 못해 통치에 쇠퇴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제도적 능력을 고양해야 한다는 주장의 왕안석의 신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큰 정부가 사회에 개입해야 한다는유학의 통치 철학과 맞아 떨어지는 것 같은데 신유학자들은 정부의 확장, 중앙집권을 거부 하고 지방의 자율적 통제, 도덕적 리더십, 서원 처럼 공동체를 위한 자발적 제도에 대해 논하였다는 것은 신선했다.

     

    사회적 변화

    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의 역사적 변화

    사의 용어 : 교육받은 적이 있고 정부에서 일한 적이 있는 전통을 가진 가문 출신을 의미.

    도덕적 수준과 문화적 세련도가 대부분 조상이 누구였는가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전제할 수 있다. 정치적 권력의 위계와 사회적 신분의 위계는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당은 관리가 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뚜렷이 제한한 반면 그들의 친족 구성원에게도 공식 신분을 부여하여 시스템 내로 흡수하였기에 사족신분은 의미가 있었다.

    1050년에 이르면 과거시험은 관료제도에 들어갈 수 있는 주단 수단이자 고위관직에 오르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과거시험은 교육과 재능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사에 맞는 교육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사로 대접을 받아야 하지만 갈등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 12세기 중반에 이르면 사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 더 이상 관직봉직이 아니라 과거시험이 테스트하는 종류의 교욱을 획득하였느냐 여부가 조건이 된다. 부의 증가와 교육의 확대와 출판의 역할로 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졌다. 사란 관직에 봉사하는 이 라는 인식이 약해지면서 점점 자신이 속한 지방에 관계하게 되었다. 신유학들은 이런한 결과에 부응하여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신유학자들이 지방정부, 공동체를 지지했다는데 신선하기는 하지만 그 근거를 더 찾아보고 싶다.

  • 2016-08-24 23:51

    올립니다

  • 2016-08-25 00:01

    1:

    신유학자들이 변두리에서 변혁의 비전을 가진 것을 중앙의 관직 부족만으로 해석할 수 없는 지점, 신유학자들이 통일과 분열을 반복하는 역사를 통해 1인 천자 전제체제에 대한 불신이 깊어졌고 그에 대처하는 대안으로써 고대 경전을 읽었던 것은 아닐까? 새로운 대안을 찾는 의도로 경전을 읽으면서 천인상관등의 천견론 등을 벗겨내자, 경전에 오롯이 남은 인간에게서 또다른 희망을 본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가 경전을 읽는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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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고문의 스타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시험장에서 테스트되는 류의 사회적으로 무난한 스타일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동기에 의한, 스스로의 발전을 위한 배움을 의미하였다.

     

    당나라 모델의 재현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 스스로 발전을 위한 배움을 통해 자각한 주체가 서양의 주체와 다른 까닭은 그 근원이 여전히 고대에 있기 때문일까?

     

    3:

    역사적 행위자로써 신유학을 탐구하겠다는 저자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신유학의 역사를 훑는 장. 이 중에서 신유학을 수사학적 입장이라 정의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과거 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사서를 충분히 숙지해야 하는 조건에서 신유학이 자신의 사유를 밝힐 수 있는 수사로써 활용된 입장을 설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입신양명을 위해 사서를 숙지하는 부류와 사서의 내용을 자신의 정체로 삼는 부류 사이에 간극이 분명 존재했을 터. 그 간극을 둘러싼 수많은 평판. 사들이 사서를 숙지함에 자신의 내부적 균열을 감당하고 그로인해 치국 평천하까지 감당할 성인이 되는 완성으로 과거를 통과하리라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는 부류와 수신에서 평천하에 이르는 과정에서 구현되는 삶의 통치는 자신이 처한 그 자리에서 이룩하려는 부류의 양적 차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수사학적으로 텍스트를 활용한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정체성임을 체득한 경우 두 가지 모두 신유학의 입장에 충실한 삶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無道함이 계속 반복되고 있었고, 이전의 황금시대 有道한 시대의 이치를 깨닫고 그것을 수많은 저작물로 표현한 신유학자들. 결국 조정에 나가는 삶과 재야에 묻혀 저술에 생을 바치는 두 부류가 극단적으로 나뉜다. 그 극단 사이에 있는 사회활동, 공동체 활동?

  • 2016-08-25 00:04

    올립니다.

    . 11세기의 신세계 : 750년도와 1050년도의 비교

    복지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어떤 방법으로 펼치려 했는지 ? 의 주장을 보면, 보수들은 사회에 변화를 그만 일으켜서 사회를 안정화 시키고 효과적이되 제한된 정부를 유지하자는 입장이었고, 일부는 토지재분배체제로 돌아가자 주장하여, 토지재분배체제하에서는 모든 이가 설자리가 있고, 각자 충분한 것을 누리고 조화를 이룬다고 하였다. 또 다른 사들은 큰 정부를 만들어서 사회에 더욱 개입하고 경제성장을 지도할 수 있는 제도적 능력 고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왕안석과 그를 이은 신법정권하에서 특히 그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신유학자들은 정부확장. 신법에 의해 요구된 중앙집권거부와 그에 대응하는 지방의 자율적 통제. 도덕적 리더십.서원. 의창처럼 공동체를 위해 선행을 행할 방법을 제공하는 제도 등..지방 엘리트들을 조직할 다양한 자발적 제도에 대해 논하였다. 들은 엘리트들인데 당나라 중앙집권적 정권하에서는 귀족층에게 그 권한이 대부분이었으니, 지방관직의 사들이 중앙으로의 진출은 힘들었을 것이다. 제도적으로 그들이 유리하게 하려면? 최우선은 과거시험개선. 혈통 있는 가문이 아닌 을 내세워 그것이 관직으로 진출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것은 아니라도 고르게 정부에 진출하는 기회는 생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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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장 새로운 기초를 찾아서 ; 11세기

    군사적으로 강대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한 나라, 부유하되 모두에게 공정한 몫의 토지를 나누어주며 모든 이들의 교육과 도덕적 가르침을 주어 사회적 조화가 가득한 나라가 되길 원해, 통합된 제국을 창조하는데 있어 송나라가 성공한 것은 을 존중하고 을 중시한데서 온 분명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이 내부적인 비판에 직면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과거 시험공부대신 고문 古文이라는 것을 진흥, 고대인의 글을 배우고, 고대인의 스타일대로 글을 쓰기 위해 성인의 도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이 고문을 주장하는 이유는 고문을 배우는 것은 이상세계의 통일된 체계와 그 세계가 인도하는 가치들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텍스트를 익힘이라고 한다. ‘고수다에서 질문으로도 나왔던 송나라가 왜? 고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는지? 그 이유는 고대에 존재 했던 통합된 사회질서가 완전했다고 하는 삼대의 시대여서인가? 송나라는 이전의 나라 즉, 제국의 역사에 의지해서는 안 되고 그 역사와 단절하여야만 고대의 성취에 갈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당제국과 그 이전의 나라는 어떠하였는지 궁금하다.

     

    3. 신유학자들

    신유학이 초기 단계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야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현 전망은 낮았던 지방 엘리트 사들에게 교육, 사회적 관계, 자기 정당화의 계기와 지방 리더십을 발휘할 기회와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면 희망과 야망은 있으나 그것의 미래로의 실현 전망은 낮고, 사회는 겉으로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사람은 구분되어져 있다. 성실과 노력만 있으면 된다는 쓸모없는 이 말을 쓸모 있게 하려면?

  • 2016-08-25 00:06

    난 처음부터 고전을 공부하고자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유가에 대한 생각은 더 없었다. 그런데 어찌어찌하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신유학계의 공자에 해당하는 주희. 공자로부터 주희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갈래가 있었더라.

     쭉 한길로 곧장 달려 온건 아니더라. 문탁에서는 주자의 계보를 잇는 유학에 대한 공부.

    왜 이 공부를 택해서 하게 되었는지 묻고 싶었다.

    이 갈래 아니고도 많은 갈래가 있었지만 이것이 주류라서?

     아님 가장 많은 참고도서가 있어서? 어떤 사연으로 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주자학이 우리나라에도 당연히 연결되었을 것인데, 예를 들면 이황? 그건 관심이 없었나?

    찾아 공부하기가 너무 어려운가? 이왕 공부할거면 원조를 찾아서 하고 싶었나?

  • 2016-08-25 00:07

    역사속의 성리학 질문

    11-17세기의 사들은 스스로를 공적인 삶에의 참여자라고 간주하는 교육받은 사람들로서 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처음으로 묻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념을 공유한 실천가이고 사회운동가이다.

    그런데 지역적으로 북과 남을 구분하여 북쪽의 학풍은 중앙정부와 밀접한 상황에서 주로 정부를 정당화하고 정부정책을 적극적으로 실현하는 쪽으로, 반대로 남쪽의 학풍은 대체로 중앙정부와 거리를 두고 정부정책을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입장에서 자발적으로 지방공동체를 만들어 실천하는 쪽으로 보고 있다. 이런 남과 북의 서로 다른 학풍은 신유학 초기 뿐만 아니라 명대의 신유학에까지 이어져 나타난다.

    저자는 신유학의 성공이, 거대한 야망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현 전망은 낮은 지방엘리트 사들에게 교육, 사회적 관계, 자기 정당화의 계기, 지방리더십의 기회, 도덕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방법 등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것은 혹시 남부학풍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가?

  • 2016-08-25 00:19

    1. 피터볼은 신유학과 신유학자인 들의 등장에 경제성장이 꽤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한다고 본다. 이를테면 남송에서 신유학이 흥기한 것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문이 많아서 경제적 지원이 가능했기 때문이라는 것. 또 남송 신유학자들이 국가중심의 시스템을 거부한 측면이 사상이나 사회운동에 그대로 녹아있는데 이는 사적인 부의 증가로 국가의 전면적 관리를 거부하는 사상이 배태되어 나왔다고 보는 것 등이다. 이런 배경에서 정말로 도덕적 정치를 주장할 수 있을까? 이 주장을 조금 더 밀고 나가보면?

     

    2. 당의 사와 신유학자들의 자아관념의 변화. 이 부분에 대한 피터볼의 설명은 다른 부분에 비해 통속적이지 않은가? 모델-모방/내재화-수행으로 비교하며 당의 모방론은 , 신유학의 수행론은 으로 비교된다. 그 결과 당의 사상적 통일성은 성인이라는 모델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신유학자들은 개인 내부로 내재화되었다. 그런데 그 다음 원자론적 개인관이나 개성의 문제, 의 문제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3. 리쩌허우가 신유학자들이 심성론에 근거하여 내성에 치중하면서 외왕에 대한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고 비판한 반면, 피터볼은 외왕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뀐 것이며, 그것은 통치주체, 시스템의 구조 등이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이해하면 되는 걸까?

     

  • 2016-08-25 02:25

    <1>

    1.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에 경제를 맡기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지방 사들 아닌가? 그렇다면 초기 신유학자들이 사적인 토지시장을 없애고, 지주의 영지를 농부들에게 똑같이 분배하며, 고대 정전법의 이상에 따라 평등한 농촌 사회를 회복하자고 주장하였는데, 상반된 주장이 아닌가?

    2. 지방 사족의 특성이 변화된 까닭은 과거시험을 통한 중앙관직으로의 진출이 어려워지게 된 것 보다도 상업경제의 발달로 인한 부의 축적과 교육의 확대가 더 직접적인 원인이 아닐까? 사들은 발전된 경제하에서 자율성의 보장을 요구하였는데 그들은 방위비 등의 세금으로 북부를 되찾기 위해 자신들의 재산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사들이 공동선을 증진시키기 위해 중앙집권화를 강화시키는 신법을 거부하였을까? 자신들의 세력 확대와 이익을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2>

    11세기의 사들은 우주감응이론을 어쩌다가 언급할 뿐, 조정의 정책을 비판하는 맥락에서는 대체로 무시해 버렸다(p.112)

    어째서일까? 유학자들이 당시 조정에 봉직 중이던 관리들이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들은?

     

    <3>

    문화적 주장과 철학적 주장의 차이점을 잘 모르겠다.

  • 2016-08-25 06:02

    1. 피터볼의 주장은 제국이 망하고 불안한 남송시대의 유학자들이 과거로부터 어떤 지혜를 구하고자 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이건 마치 서양의 중세가 망하고 르네상스 시대에 고대로 돌아가자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구도를 중국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11세기의 다양한 시도들은 어쨋든 보편적인 어떤 것을 정립하기 위한 과정으로 보인다.  p122 "학이란 자기 안에다 독립적인 판단 근거를 배양하는 일이라고 보는 생각은 사들 간에 보다 큰 지적 불확실성을 초래했다." - 이러한 과정들 속에서 보편적인 도나 리 등이 정립되어 왔다?

    3. 신유학의 수사적 입장은 잘 이해되지 않음  - 불교의 유행과 함께 유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설명인가?

  • 2016-08-25 07:20
    올립니다.

  • 2016-08-25 0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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