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lay 밀양④] - 밀양과 국가폭력(2014년 6월 행정대집행)

관리자
2017-07-31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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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의 소식을 용인시민에게 알리기 위한 골목집회(2013년 5월)는 성황리에 끝났습니다.

버뜨! 송전탑건설공사는 재개되었고 

그해 10월에는 동화전마을 김정회, 박은숙 부부가 서울로 상경해 대한문 앞에서 눈물겨운 단식농성을 시작했습니다. 

밀양은 전쟁중이었고, 지는 싸움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고, 참담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우리는 작은 일들을 소소하게 해 나갔습니다. 

농활을 가고, 응원의 손수건을 만들어 보내고,  문탁의 꼬마들과 <탈탈탈 기행단>을 조직해서 순례를 떠나고...

하지만 결국!  해를 넘긴 2014년 6월11일. '행정대집행'이라는 이름의 엄청난 국가폭력이 자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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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을 접한 6월11일 새벽부터 문탁식구들의 카톡방에 불이 나고, 홈페이지에 긴급한 글들이 넘쳐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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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누리와 고은이는 한달음에 밀양으로 달려갔습니다. 생각같은 게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밀양에 못간 친구들은 아침 11시에 광화문 앞에서 규탄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서울로 달려갔습니다.

시습, 요요, 뚜버기, 무담, 스마일리, 콩세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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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네번째 리플레이 포스팅은 밀양만큼이나 긴박했던 2014년 6월 11일의 문탁. 

한달음에 밀양으로 내려간 자누리가 밀양에서 보내온 통신입니다. 

                        <밀양 4신> 밀양에서 공부하다

                                                               http://www.moontaknet.com/wp-content/uploads/migrated/attach/images/233/205/663/d7bfce505baa6ba3f7d7656c34ae9d73.jpg" width="578" height="500" rel="xe_gallery" editor_component="image_link" />

뜻하지 않게 의경, 용역들과 함께 있다가
(사복경찰들이랑 매점 테이블
하나 옆에서 음료수를 사먹는 , 그렇지만 아무사이도
아니었다.)

그들이 농성장으로 향할 때 뒤를
따라 갔다.

그리고 산 중턱에서 막혀서 이
삼십여 명이 의경들과 마주보고 대치했다.

이런 장면 한 두번 본 것도 아니건만 그 뙤약볕 싱그런 나무와 풀 속에서 서 있는 무표정의 병정들은 유독
낯설었다.

그 얼굴들을 너무 밝은데서
보았나보다....

아직 풋내도 가시지 않은 그들을
보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들은 누구고 저들은 누구인가
하는 뜬금없는 물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좁은 산 길에서 지루한 대치가 계속됐다.

밀양을 몇 번 왔던 고은이는 나름 전술가가 되어 있었다. 막는 대열이 세겹 뿐이
안되니 양끝을 치고 달리면 못 잡는다나...

그런데 같이 있는 이들의 절반은
중학생,
나머지는 나이가 많아보여서 포기..

이번에는 산을 타고 올라가면 된다고 투덜거린다. 엄마 때문에 못 간다는
말인거 같아 올라가보자 했다.(노친네 취급 당하기는
처음임..)

이미 위에서는 싸움을 시작한 거 같은데, 헬리콥터가
뜨자,
그냥 있자니 마음이 초조해지기도 했던터라...

경찰이 안보이는 뒤쪽으로 빠져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허나...산은 너무
울창했고,
결국 얼마 못가 내려와서 다시 긴 대치상태....


산 위에서는 천막이 철거되고 갈비뼈가 부러진 주민이 있어 헬기가 후송되었고,

통진당 학생 둘이 나무에 올라가 아직 싸우는 중이어서 출입 통제는 쉬이 풀리지 않고 있었다.

이미 저녁 때가 되었지만 할머니들이 무사한지 봐야겠길래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밀양2.jpg  

아래 마을로 내려오니 입구 농성장 앞에서 어르신들이 모여 계셨다.

다리 넘어 마을 입구에서는 다른
농성장에 있던 분들 30여명이 모였는데 경찰이
막아서 못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이계삼씨와 문규현 신부도 계시고
늦게 달려온 고은이 친구들도 있었다.

그렇게 다리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견우와 직녀가 되었다

 

어르신들은 들어오는 입구를 막은데 대한 항의로 나가는 곳을 쇠사슬로 막아 차량을 통제했다.

일(아, 일!) 끝내고 돌아가는
저들이 올 때마다 어르신들은 야유도 하고 못가게 실랑이도 했다.


한전 용역들이나 경찰 아랫사람(?)들은 못들은 척 그냥
간다.

그러나 윗분들은
다르다.
이분들은 당당하다. 그러니 야유를 참을 수
없다.
왜 욕하냐며 댓거리를 한다.

그 중 전경 총책임자인듯한
높은신분은 당신들 뭐야 하는 위압적인 표정으로 아랫사람에게 명령했다.

절단기
가져와

그리고 역시 즉각 절단기로
쇠사슬을 자른다. 추호의 망설임도 미안함도
없었다.

, 이런
자들이 있어 그리 가혹한 짓들을 할 수 있구나.

사람 목을 감고 있는 쇠사슬에
망설임없이 절단기를 가져다대는 잔인함이 여기에 있구나...

이번엔 그들 차량을 못나가게 어르신 몇 분이 차 앞을 막아서자 이번에도 예의 그 냉정한 얼굴로 말한다. “채증반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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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역 뒤에 전경의 긴 행렬이 끝없이 빠져 나가도 농성하던 분들은 내려오는데 오래 걸렸다.

철거가 끝났음을 알리는 헬기가 자재를 실어나르느라 요란했다.

그 소리가 무척 스트레스를 유발했다. 할머니들은 그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 하신다.

원래 좋았던 청력이 이제는 잘
안들릴 정도로 나빠졌어.”

옆집 소는 임신을 했었는데
헬기가 뜨기 시작하자 유산을 했다고...”

송전탑으로 송전하기도 전에 송전탑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이렇게 고통을 주고 있었다.


어둑해지자 마을로 돌아온 분들과 남아 있던 분들은 무사귀환을 안도하는 격려로 분주했다.

101번 농성장이 산 위라
비교적 젊은 분들이 올라갔고 나이드신 분들은 아래 농성장에서 그렇게 싸우고 계셨던 거다.

돌아오신 분들이 전하는 저들의 폭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천막을 두고 싸우고 있는데 저들은 바로 그 옆에서 전기톱으로 나무를 잘랐다.

4분이 실신하고 한 분은
갈비뼈가 부러졌는데도 저들은 막무가내였다.

나중에 헬리콥터로 자재를 실어나를 때 사람들이 있는 바로 근처에 이착륙을 해서 모두 흙먼지를 뒤집어쓰기를
반복했다.

내가 오늘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알아?
평생 잊지 못할거야!!”

 

 

어두워지자 마침내 마을 입구에 대치하던 연대자(어르신들은 이렇게
호칭했다)들도 들어왔고

다 같이 마을 쉼터에서 정리집회를 가졌다.

 

사회를 보던 이 계삼 밀양대책위 사무처장은 걱정이 많았단다.

원래 집행되기로 했던 날이 13일의 금요일이었는데
11일로 말이 흘러나오긴 했으나
확정된건 바로 집행 하루 전날이었다.

연대자들이 모일 시간이 촉박해 어르신들을 어떻게 보호할지 막막했을거다.


제가 언젠가는 이 날이 올
거라고 상상하고 두려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 담담하고
미소가 나오네요. 왜 그런지 앞으로 찬찬히
알아봐야겠습니다.

제가 127번에
있느라 101번이 걱정되어서 진압을
앞둔 시간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박수치며 노래를 하고 있는 겁니다.

아마 그 전화기너머 울려오던 노래 소리가 지금 미소를 가져온 걸지도 모릅니다


밀양3.jpg

이제 확실히 알았다.

밀양의 투쟁은 삶정치였다!! 개념만으로는 알 듯 말듯했던
-정치,
이런거였다.


이계삼씨는 127번을 책임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곳은 움막 안에 구덩이를 파고(구덩이 앞에는
극락전이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가스통을 준비한
곳이었다.

가스통을
반출시키고,
가스통을 반출하는걸 보면서 제가 어르신들을 지켜드리겠노라는 약속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구덩이 안에 같이 들어가 어르신
두 분 사이에서 같이 쇠사슬을 감은 이유는 그거였습니다.

그러고 있으면서 저들의 군화발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들이 오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옆에 계시던 할머니가
불경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저는 그 불경소리를
평생 잊지 못할겁니다.”

 

곱디 고운 용회마을 구미현 할머니는 나지막하게 말한다.

저들이 가진 건 폭력과 돈
뿐이 없네요. 우리는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연대자로 함께 농성장에서 싸웠던 분은 이렇게 산 위의 장면을 전한다.

철거를 앞둔
시간,
우리의 수가 절대 부족해서 어떻게 할지 걱정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할머니들은 뭘 어떻게 해? 밥을 먹어야지 하시면서
밀가루를 찾아내 저희에게 김치전을 해주시는 거예요.

 밤새 연대하러 온 저희를
먹여야한다면서요. 제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정리집회를 끝까지 보지는 못하고 밤길을 달려 다시 수원으로 왔다.

새벽녘에 잠이 들어 아침에 몹시 피곤했으나 일어나기 힘들지는 않았다.

할머니들의 김치전, 나는 먹어보지 못한, 그러나 그 구수한 내로 나를 깨웠다.

나의 삶정치는 내 일상에서 멀기도하고 가깝기도 하다는걸 알려준 김치전과 할머니들.


나와 공부하기로 약속한 오늘 세미나 친구들과 어제 화장품 생산을 대신해준 친구들과의

그 약속들을 허투루 하지 않는 것,

삶-정치는 그리 가까이 있다는
걸 배운 공부의 날이었다. 어제는


그리고 혼란과 고민도 한아름
가져왔다.
 

공권력, 전경과
용역들, 서울시청 광장에서, 길거리에서 보던 것과 삶의 직접적인 터전에서 보는 건

느낌이 많이
달랐다. 훨씬 위협적이었다. 어르신들 모두 투사가 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20대에서
60대까지 보이는 용역들의 뒷모습은 비루하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했다.

저들의 자리는
어디일까. 나는 왜 저들에게서 이 시대 잉여들의 뒷 모습을 보는걸까.

버젓이 해병대
티셔츠를 입은 50대도 있었는데...


그리고 딱
180도 반대 방향에 있는 밀양 어르신들.

생존의 욕구는
같아도 그분들의 사는 방식은 빛이 난다.

'시대의 어른'을
넘어 '역사의 어른'의 얼굴을 지닌 분들이다.


어느 쪽이든 이
시대의  고단함에 가슴이 아픈 하루였다.


이계삼씨는
마지막으로 정할 구호를 며칠동안 고민했다고 한다.

'잡은 손 놓지
말아요'로 거의 정했었는데 그 현장에서 해병대 티셔츠를 보고 바꾸었단다.


"한 번 밀양은
영원한 밀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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