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철학학교시즌3] 스피노자 읽기 1주차 질문들

정군
2023-07-26 02:11
569

 

방학들은 잘 보내셨습니까?
2023 철학학교도 반환점을 도..돌...돌...도...도는 중입니다 ㅎㅎㅎ

작년 연말에 계획을 짤 때만 해도 꽤나 야심차게(?) 후년까지 염두에 두고 가보자...했었는데, 역시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고 내년은 또 어떻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음... 어쩐지 '반환점'이 아니라 세미나가 끝나는 분위기군요... 그런거 아니고요. 다른 이야기를 제안하려고 이렇게 게시판 앞에 앉았습니다.

 

시즌1 데카르트를 시작할 때도, 시즌2 스피노자를 시작할 때도, 제가 두 차례 학기말 에세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결과는 '미리 말하지 않았으니 쓸 수 없다'로 났고요. 일단, 지난 일이지만 제 입장을 말씀드리면, 제 실수 맞습니다. 공지에 미리 적어뒀어야죠. 그래야 '에세이가 없으니 신청한다' 하는 분들도 안 계셨을테고요. 그렇지만 변명을 하자면, 저는 시즌이 끝나면 '당연히' 정리하는 글이 한 편씩 나오리라 생각했습니다. 굳이 적어놓지 않더라도요. 무엇보다 '문탁에서 공부한다'라는 정체성을 얻은지 얼마 안 된 시점이어서 미숙했던 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당연한건 없죠.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다시 제안합니다.
스피노자 세미나 시즌3가 끝날 때, 에세이를 쓰고,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시즌1에서 공부한 데카르트가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했는지 기억 나시나요? 저는 솔직히 잘 기억이 안납니다. 물론, 저는 8월에 데카르트로 강의를 해야해서 다시 읽고 있기 때문에 새삼 상기가 되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게 기억이 나는 것인지 새로 익힌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데카르트야 이미 지나갔으니 그렇다치고, 스피노자도 그러고 싶지는 않습니다. 스피노자가 특별해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읽은 것과 쓰는 것이 함께 이루어져야 '공부'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설정하고, 나름의 논증을 전개하고, 결론을 맺는 일, 그러니까 글을 구성하는 일은 당연히 어렵고, 부담스러운 일 맞습니다. 그런데 부러 그런 걸 하려고 '공부'를 하는 건 아닐까요? 두번째로, 아마도 스피노자 세미나가 끝나고 라이프니츠로 넘어갈 때, 지금 이 멤버가 그대로 이어지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럴 경우 그분의 철학학교는 에세이 한 편 없이 끝나게 될테고요. 그래서 스피노자 세미나가 끝날 때 같이 에세이를 쓰고 싶습니다.

 

제 제안이 받아들여진다면, <에티카> 남은 부분을 읽는데 5주, <정치론>을 읽는데 3주해서, 세미나 8주를 하고요. 마지막 세미나가 예정되어 있는 9월21일(목)은 쉬고, 23일(토)에 오프라인에서 모여서 에세이데이를 갖고, 스피노자 세미나 종료기념 뒷풀이 시간을 가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세번째 제안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요? 사실 이걸 제안하고 있는 와중에도 꽤나 자괴감이 드는데, 급기야 이것도 안 된다면...음...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질문은 27일 목요일 정오까지 댓글 본문으로 올려주세요!

댓글 13
  • 2023-07-26 06:43

    공부는 글로 써야 남는다고 하니 고역이겠지만 저는 에세이를 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1주차 질문 올립니다.

    1. 4부 서문(147-148p) "선[좋음]과 악[나쁨]의 경우, 이것들은 결코 실재들 안에, 곧 그 자체로 고려된 것들 안에 존재하는 실정적인 것을 가리키지 않으며, 우리가 실재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형성하는 사고방식들 또는 통념에 불과하다...(중략)...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이 용어들을 계속 보유해야 한다."

    질문1) 스피노자는 선악이 '같은 종(種)이나 유(類)에 속하는 개체들을 비교해 만들어낸 통념'이라고 말하면서도 이 용어를 계속 사용할 뜻을 밝힙니다. 다소 이중적인 태도인데, 유용성을 이유로 재사용하는 걸 어떻게 봐야 할까요?

    2. 4부 서문(148p)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염두에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인간 본성의 모형'으로서 인간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려고 욕망하는 까닭에, 내가 말했던 의미대로 이 용어들을 보유하는 것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하에서 좋음[선]을 우리가 설정하는 인간 본성의 모형에 우리를 좀 더 가깝게 해주는 수단이라고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나쁨[악]은 우리가 이 동일한 모형을 본뜨는 것을 가로막는다고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질문2) 스피노자는 4부 서문에 딱 한 번 등장하는 '인간 본성의 전형(Exemplar naturae humanae)'을 선악의 판단 기준이자 우리들이 따라야 할 '모범적 인간상'으로 제시합니다.
    그러나 인간 본성의 전형은 어떤 보편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스피노자가 비판해왔던 '목적론'으로 흐르는듯한 인상을 줍니다.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는데 유용하다면 이런 기준을 사용해도 괜찮은 걸까요?

    3. 4부 정리 18 주석(160p) "우리의 지성은 정신이 홀로 있고, 자기 자신 이외의 어떤 것도 이해하지 못할 때 더 불완전하다는 점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 바깥에는 우리에게 유익하고, 이로 인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이것 중에서 우리의 본성과 완전히 합치되는 것들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낼 수 없다."

    질문3) 우리에게 유익한 것 가운데 '우리의 본성과 완전히 합치되는 것'을 무엇으로 이해해야 하나요?

  • 2023-07-26 22:46

    일전에 읽은 모로의 글에서는 스피노자의 공리에 시비를 걸면 그의 글을 읽을 수가 없다고 그러니까 받아들이라는 내용이 나온 것 기억하실 것입니다.
    받아 들이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나는 의심의 여지없이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뻘스러울 수 없지만 그의 보석같은 사유를 읽기 위해 감안으로서 그냥 그러려니 받아들이는 것.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두 번째로 기우는 것 같습니다. 아울러 모로 역시 스피노자 공리의 무책임함을 어느 정도는 인정하는 것으로 여긴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4부의 공리는 단 하나인데요. 다음과 같습니다.
    “자연 안에는 그보다 더 역량이 크고 더 강력한 다른 것이 존재하지 않는 독특한 실재는 아무것도 없다. 어떤 것이 주어지든 간에, 주어진 이것을 파괴할 수 있는 더 역량이 뛰어난 것이 존재한다.”

    이 공리가 4부의 이번 시간 진도에서 무지막지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눈여겨 봤습니다만,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두 번째 방법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공리라 여겨지지 않는데, 이거 잘해야 요청(공준) 정도 될 거 같은데, 스피노자에게는 공리라는군요. 여러분들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그럴듯한 말이긴 하지만 일단 그 자체로 자명해야 공리인데, 자명하지 않습니다. 스피노자 식의 여러 증명을 동원해서 맞는 말이라고 여길 여지는 있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공리가 아닌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자명하지 않은 것이 공리가 된 채 4부를 종횡무진합니다. 4부 전반부는 그야말로 이 공리의 동어반복입니다. 우선 정리 3은 공리와 동어반복입니다. 주어가 독특한 실재에서 인간으로 바뀌었을 뿐 같은 말입니다. 정리 6 및 정리 15도 여기에 의존합니다. 기본적으로 외부가 더 셉니다. 그게 기본값이고 그래서 인간은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말을 하려고 스피노자는 저 말을 요청도 아니고 정리도 아닌 공리로 놓을 수 밖에 없지 않았나 뭐 이런 시비를 걸어봅니다. 여려분들은 어떠신지요? 불편함 없이 말끔하게 읽히시는지요?

  • 2023-07-27 02:45

    서문에서 스피노자는 '선[좋음]과 악[나쁨]의 경우 이것들은' 특정한 객관적이거나 절대적 범주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곧장 정의1과 2에서 '선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으로 알고 있는 것', '악은 좋음을 소유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스피노자의 이와 같은 정의를 따라가다보면, 선과 악은 주관적 범주로 보입니다만 그럴리가 없죠. 정리8의 증명 '우리는 우리의 존재의 보존에 이롭거나 해로운 것을 좋음이나 나쁨이라고 부른다'에서 이 범주는 주관성을 넘어섭니다. 핵심적인 것은 '좋음'과 '나쁨'이 결국에는 존재의 존재역량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일 겁니다.
    존재의 코나투스를 잘 유지하게 해주느냐, 아니냐 이게 앞에서도 몇차례 이야기한 바 있는 '적합도'를 말하는 것이니까요. 요컨대 '좋음'과 '나쁨'은 '존재역량'의 증감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객관적인 범주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 범주는 '좋음-선-기쁨-적합-덕'과 (개념적으로 구별될 뿐인) 한 묶음을 이루고, '나쁨-악-슬픔-부적합-덕없음'이 (실정적 힘이 없는) 한 묶음을 이룹니다. 4부의 앞부분은 일관되게 이 주장을 관철하는 것으로 이루어진 듯 보입니다. 이에 따라 보면 오늘 분량의 마지막 명제인 정리31의 '어떤 실재는 우리의 본성과 합치하는 한에서 필연적으로 좋다'는 주장이 가능해집니다. '좋음-선-기쁨-적합-덕'의 토대에 '인식'이 있고, 그러한 '인식'은 '공통통념'에 다름 아니기 때문에 그 '실재'는 우리에게 더 큰 좋음, 선, 기쁨, 적합성, 덕을 줄테니까요. 그런 실재들은 '유용'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유용함'이 어쩐지 걸립니다. 세븐샘께서 언급한 정리18의 주석에서는 '같은 본성을 가진 두 개인이 결합한다면 그들은 두 배나 강한 개체를 합성할 것'이라고 말하며 '인간에게 인간보다 유익한 것은 없다'고 선언하는 부분까지 고려해 보면, 이 '유용함'이 무엇인지 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가령 인간과 분자단위에서 거의 비슷한 구조를 가진 '고기화된 동물'과 그걸 먹음으로써 그것을 유용하게 자신의 신체로 만드는 인간 사이의 관계도 스피노자가 말하는 '연합'이라고 볼 수 있을텐데, 이는 인간적으로는 '좋음'이지만 소牛적으로는 '나쁨'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인간적 좋음'은 부적합한 인식의 결과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스피노자의 논의구도 안에서 그게 정말 부적합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문제를 다시 인간 사이의 문제로 가져와 보면, 스피노자의 구도 안에서 어떤 '적합한 것'은 동일한 본성을 가진 신체들이라는 의미에서 인간 모두에게 '적합한 것'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적합성을 지탱하는 것은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컨대 스피노자의 논의 구도 속에는 객관적으로 좋은 것이 있습니다. 그걸 모르는 것은 '부분적(부적합한)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이고요. 이 경우에 (맑스도 사유한 바 있는) 같은 진리값을 가진 두 권리가 충돌하는 문제 같은 것에 대해서 스피노자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정리하면, 스피노자에게 '객관적으로 좋은 것'은 있을까요? 사회적, 생태적 문제에서 확인되는 좋음과 좋음의 충돌 상황에서 스피노자의 주장들은 어떻게 사용될 수 있을까요?

  • 2023-07-27 07:46

    정리 31 증명
    "왜냐하면 어떤 실재는 우리의 본성과 합치되는 한에서 (앞의 정리에 의해 ) 나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실재는 필연적으로 좋거나 무관할 것이다. 만약 이 후자가 정립된다면, 곧 이 실재가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다면 (4부 공리 3에 의해) 이 실재의 본성 자체로부터 우리의 본성의 보존에 기여하는 어떤 것도 따라 나오지 않을 것이다. 곧 (가설에 의해) 이 실재 자체의 본성에 기여하는 하는 어떤 것도 따라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부조리하다(3부정리 6에 의해) 따라서 이 실재는 우리의 본성과 합치하는 한에서 필연적으로 좋을 것이다."
    제가 이해하기에 이 증면의 내용은 '어떤 실재가 우리의 본성과 합치 되는 한에서는 무관할 수 없다' 인 듯한데 "이는 부조리하다"에서 뭐가 부조리하다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3주 정리 6의 내용은 "각각의 실재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한에서 자신의 존재 안에서 존속하려고 노력한다"인데요.

  • 2023-07-27 10:06

    정리 18 증명 마지막 부분
    "왜냐하면 가령 정확히 같은 본성을 가진 두 명의 개인이 서로 결합한다면, 그들은 개인 혼자보다 두 배나 더 강한 개체를 합성할 것이기 때문이다...이것이 이성이 명령하는 것이며, 내가 좀 더 길게 순서에 따라 증명을 시작하기 이전에 여기에서 간략하게 보여주겠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 이 부분은 좀더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요? '마르크스 / 엥겔스'처럼 서로 동일한 이성을 지니고 최고의 결과물을 낸다는 의미일까요? 2002년 월드컵처럼 '정념'에 의해 하나가 되는 것은 부적합한 예시일까요?

    정리 7
    "정서는, 억제되는 그 정서와 상반되고 더 강한 다른 정서가 아니고서는 억제될 수도 제거될 수도 없다."
    질문이라기 보다 정서의 속성에 대해 다른 샘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요. 가령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보람도 처음에는 쉬운 난이도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좀 더 어렵고 디테일한 공부를 해나가야지 '만족함의 정서'를 느낄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통속적으로 예로는 '이별의 아픔은 새로운 사랑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 2023-07-27 11:02

    네. 9월23일 토요일 에세이데이로 메모해두겠습니다.

    정리18에서 기쁨에서 생겨나는 욕망은 슬픔에서 생겨나는 욕망보다 더 강하다고 합니다. 3부 정리 11의 주석에 의하면 기쁨의 욕망은 기쁨의 정서로 인해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고 슬픔의 욕망은 슬픔의 정서 때문에 더 작은 완전성으로 이행하게 됩니다. 이에 따라 기쁨의 욕망(힘)은 인간의 역량과 동시에 외부 원인의 역량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고 하며, 슬픔의 욕망(힘)은 인간의 역량에 의해서만 정의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쁨과 슬픔 모두 외부 원인에 영향을 받는데, 왜 기쁨만이 외부 원인의 역량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하는 걸까요?

  • 2023-07-27 11:05

    1. 정의1과 정의2는 선(좋음)과 악(나쁨)은 ~이라고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와 관련해서 정리8과 정리 14, 정리27을 참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리8에서는 좋음과 나쁨에 대한 인식을, 정리14에서는 좋음과 나쁨에 대한 참된 인식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종적으로 정리27이 정의1을 완성형으로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좋음과 나쁨은 기쁨과 슬픔의 정서에서 시작하여 여러 단계를 거쳐 결국 이성적 인식으로 인도하는 것과 방해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습니다. 서문에서 좋음과 나쁨의 출발점은 분명 실정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통념이라는 것이었는데, 도달한 곳은 덕이군요.^^ 스피노자에게는 결론이 아니라 이 과정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2. 정의3과 정의4는 우연적인 것들과 가능한 것들을 구분합니다. 스피노자는 1부 정리33의 주석에서는 이 둘을 구분하지 않았는데, 이제 4부에서는 구분한다고 말합니다. 1부에서 이것을 구별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는 1차적으로 실체/양태의 구별이 중요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실체의 입장에서는 우연적인 것도 가능한 것도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필연적이고 자기원인인 것이니까요. 우연적인 것과 가능한 것은 양태의 차원에서 혹은 정서의 차원에서 중요한 구별이 된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우연적인 것은 양태의 본질과 관련되고, 가능한 것은 원인과 관련됩니다. 우연적인 것은 양태의 본질과, 가능한 것은 양태의 생산원인과 관계되는데, 4부에 와서 이 둘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으면 합니다.

    3. 정의8에는 덕과 역량, 그리고 어떤 결과들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potestas이 등장합니다. 덕과 역량은 같은 것이라고 하는데, 역량과 능력은 어떻게 구별해야 할까요?

  • 2023-07-27 11:22

    1.정리 18의 주석
    스피노자는 이성의 명령 자체가 무엇인지 보여주겠다면서 '이성이 자연에 반대되는 것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이성은 ......요구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연'은 인간 본성 즉 코나투스라고 보는게 맞나요? 그렇다면 정말 이성이 본성과 대립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맞을까요?
    물론 정리 19에서 28까지 덕을 설명하며, 특히 정리 24에서 '덕'과 '이성'과 '존재 보존(코나투스)' 이 세 가지를 동일한 선상에 놓고 당연하게 이야기하고 하고 있는데..... 이런 스피노자 논리를 따라가다보면 왠지 감동적이다가도 한편으로는 이성과 본성이 대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좀 와닿지 않기도합니다.

    2. 정리 25
    '누구도 다른 것을 위해 자신을 보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증명에서는 코나투스는 다른 실재의 본질로부터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 필연적으로 따라나오기에, 다른 것을 위하여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려고 노력한다면 이는 덕의 실재적 토대가 달라지기에 부조리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희생과 같은 행동은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다른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자신을 파괴하는 행위도 결국은 궁극적으로는 이타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보존하려는 노력에 지나지 않는 걸까요?

  • 2023-07-27 11:41

    정리15: 좋음과 나쁨에 대한 참된 인식에서 생겨나는 욕망은 우리가 겪는 정서들로부터 생겨나는 다른 많은 욕망들에 의해 진정되거나 억제될 수 있다.

    질문)여기에서는 욕망의 종류가 두가지인데, 하나는 좋음과 나쁨에 대한 참된 인식에서 생겨나는 욕망이고 또 다른 하나는 정서들로부터 생겨나는 다른 욕망이라고 합니다. 어떤 욕망이 참된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고, 우리가 겪는 정서들로부터 나오는 욕망인지 구별할 수가 있는 건가요? 그리고 좋음과 나쁨에 대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기준이 있는듯한 스피노자의 이 말은 그동안 그가 했던 말과는 반대되는 표현 아닌가요?

    정리19의 주석 후반에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찾게끔 되어 있다는 원칙이 덕과 도덕pietas의 토대가 아니라 배덕impietas의 토대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다. 따라서 그와는 정반대라는 점을 간략하게 보여주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배덕의 토대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 2023-07-27 11:43

    에세이에 대해서는 슬픔의 정서가 앞서지만 그것이 좋음과 나쁨의 참된 인식에 따른 이성의 인도함과는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받아들이겠습니다.

  • 2023-07-27 12:21

    1. 스피노자는 4부 서문에서 완성과 미완성은 그 최초의 의미가 인공적 실재들에서 왔을 것이라고, 즉 인간이 어떤 목적을 염두에 두고 한 작업에 붙일 수 있는 말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자연적 실재들에 관해서도 보편 관념을 형성하고 이 관념을 마치 실재들의 모형인 양 간주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완전과 불완전을 따지는 것은 참된 인식이 아닌 편견이라고 규정합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이어 선과 악을 정의하면서 “인간 본성의 모형”이라는 말을 씁니다. 인간 자체는 인공적 실재가 아닌 자연적 실재입니다. 그럼에도 스피노자가 이 말을 쓰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이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염두에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인간 본성의 모형으로서 인간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려고 욕망하는 까닭에, 내가 말했던 의미대로 이 용어들을 보유하는 것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말한 완전성의 이행이나 역량의 증가도 인간의 관점과 차원에서 하는 유용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2. 덧붙여 이전 세미나에서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요, 형상적 본질은 어떤 이데아적인 모범을 이야기한다기보다는(이것이 스피노자가 ‘상상’이라고 분류한 보편 통념이겠지요) 범위값의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얘기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4부 서문 뒷부분에서 스피노자가 말을 사람과 벌레와는 그 본질(국문은 본성이지만 영문은 essence이고 맥락상 본질이 더 어울릴 듯합니다)과 형상이 구분되지만 “우리는 그의 본성을 통해 이해되는 한에서의 그의 역량이 증대되거나 감소된다고 인식한다”고 쓴 대목에서 형상적 본질과 현행적 본질의 그러한 구분이 뒷받침되는 것 같습니다.
    3. 정리 18에서 기쁨에서 생겨나는 욕망이 슬픔에서 생겨나는 욕망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이에 따라” 기쁨에서 생겨나는 욕망의 힘은 슬픔과 달리 인간의 역량뿐만 아니라 외부 원인의 역량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고 설명하는데 그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 2023-07-27 14:11

    (질문1)
    p149. 정의 8. 나는 덕(virtus)과 역량을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를 주장하기 때문에 대의명분을 위해서 죽음을 선택하는 (안중근)의사같은 사람은 역량이 부족한, 덕이 부족한 사람이다. 라는 것이죠?

    (질문2)
    p157. 정리14. ‘좋음과 나쁨의 참된 인식은, 참된 것인 한에서는 어떠한 정서도 억제할 수 없으며, 오직 정서로 간주하는 한에서만 억제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증명에서는 ’억제되어야 하는 정서보다 더 큰 경우에, 오직! 그런 한에서만 정서를 억제할 수 있다.‘ 고 합니다.
    가)그럼, 어떤 슬픔의 정서를 느끼고 있을 때, 참된 인식으로는 안되고 더 큰 슬픔을 마주쳐야 그 슬픔이 억제된다는 것인데, 이러면 더 큰 슬픔은 어떻게 ?
    나)인식으로는 정서를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진리의 무력함?) 국가나 종교가 팔요하다?로 전개하나요?

  • 2023-07-27 17:35

    질문들입니다.

번호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762
[2023철학학교시즌3] 스피노자 읽기 5주차 질문들 (12)
정군 | 2023.08.23 | 조회 327
정군 2023.08.23 327
761
[2023철학학교 시즌3] 스피노자 읽기 4주차 후기(2종지와 3종지) (7)
여울아 | 2023.08.22 | 조회 343
여울아 2023.08.22 343
760
[2023철학학교시즌3] 스피노자 읽기 4주차 질문들 (13)
정군 | 2023.08.16 | 조회 357
정군 2023.08.16 357
759
[2023철학학교 시즌3] 스피노자 읽기 3주차 후기 (5)
봄날 | 2023.08.15 | 조회 378
봄날 2023.08.15 378
758
[2023철학학교시즌3] 스피노자 읽기 3주차 질문들 (13)
정군 | 2023.08.09 | 조회 393
정군 2023.08.09 393
757
[2023철학학교시즌3] 스피노자 읽기 2주차 후기- 정리37 세미나? (8)
세븐 | 2023.08.04 | 조회 427
세븐 2023.08.04 427
756
[2023철학학교시즌3] 스피노자 읽기 2주차 질문들 (13)
정군 | 2023.08.02 | 조회 382
정군 2023.08.02 382
755
[2023철학학교시즌3] 스피노자 읽기 1주차 후기_도의적 책임이란? (9)
호수 | 2023.07.29 | 조회 492
호수 2023.07.29 492
754
[2023철학학교시즌3] 스피노자 읽기 1주차 질문들 (13)
정군 | 2023.07.26 | 조회 569
정군 2023.07.26 569
753
'스피노자 vs 스토아학파'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 (4)
세븐 | 2023.07.25 | 조회 378
세븐 2023.07.25 378
752
2023 철학학교 시즌3 [스피노자 읽기]2가 시작됩니다! (2)
정군 | 2023.07.10 | 조회 1450
정군 2023.07.10 1450
751
[2023철학학교시즌2] 스피노자 읽기 9주차 후기 (8)
김재선 | 2023.07.09 | 조회 491
김재선 2023.07.09 491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