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의 이뤄지지 않은 사랑 이야기

세븐
2023-07-01 21:57
440

 

”판 덴 엔덴에게는 외동딸(클라라 마리아)이 있었는데, 그녀는 음악뿐 아니라 라틴어를 완벽하게 이해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스피노자는 자신이 그녀와 사랑에 빠졌으며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고 종종 말했다.

비록 그녀의 몸이 연약하고 기형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의 날카로운 정신과 뛰어난 학식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러나 함부르크에서 태어난 그의 동료 학생인 케르크링크가 이것을 알아차렸고, 질투에 불탔다.”

<스피노자, 철학을 도발한 철학자>(내들러) 223p

 

 

지난 세미나 때 올렸던 제 질문에 포함된 스피노자의 ‘실연’ 경험 여부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인 것 같습니다.

정리15주석에 언급된 사랑, 치부, 분비물같은 표현은 너무 노골적입니다. 

제 단순 호기심은 ‘스피노자도 사랑과 질투를 느껴보지 않았을까’였습니다.

저는 결석했기 때문에 영상으로 세미나를 봤는데, 정군샘은 “해본 사람만이 (이렇게) 쓸 수 있다”로 다소 긍정적이었고, 다른 분들은 대체로 결혼설이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는 쪽이었습니다.

내들러도 “마리아에 대한 스피노자 자신의 사랑과 그녀와의 결혼에 대한 그의 좌절된 염원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개연성이 없다”(같은 책 547p)고 주장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내들러 반박 주장의 근거는 ‘나이 차’입니다.

그래서 ‘딸뻘’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습니다.

내들러는 이렇게 자신의 주장 근거를 펼칩니다.

 

”(디르크) 케르크링크가 1657년에 판 덴 엔덴의 학교에 들어왔고, 그때 클라라 마리아는 겨우 13세였다. 그 시절이라고 하더라도 스피노자와 같이 25세인 사람이 관심을 갖기에는 다소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18세인 케르크링크에게는 너무 어리지 않았다. 그와 마리아는 시간과 이별의 압력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서로의 사랑을 발전시켰음이 틀림없다. 케르크링크가 판 덴 엔덴 학교를 떠난지 12년이 지난 1671년 그들이 결혼했기 때문이다.”(같은 책 224p)

 

내들러의 주장에 공감이 가시나요?

그때 스피노자의 나이는 52세가 아닌 25세였고, 스피노자는 44세의 나이에 사망했습니다.

 

저는 오히려 내들러 주장에 더 신빙성이 없어 보입니다.

내들러가 인용한 글은 스스로 “스피노자의 완전한 생애를 서술하려는 가장 중요한 노력”이라고 추켜세운 독일 철학자 야코프 프로이덴탈의 책 <스피노자의 생애>(1899년 출간)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내들러는 이 책을 교과서 삼아 자신의 책을 전개합니다.

책 맨 뒤쪽 주석에 보면 각 장마다 프로이덴탈의 책을 수없이 인용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스피노자와 케르크링크가 마리아를 놓고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 관계였음을 인정합니다.

 

”콜레루스에 따르면 이런 (스피노자와 케르크링크간) 직업적 우정은 클라라 마리아의 애정을 얻으려는 경쟁에서 시작되었다.”(같은 책 223p)

 

그리고 내들러는 발을 살짝 뺍니다.

 

”만약 그것(스피노자의 이뤄지지 않은 사랑)이 진실이라면, 그의 친구(케르크링크)의 결혼은 그(스피노자)에게는 달콤 씁쓸한 경험이었으리라.”(같은 책 547p)

 

내들러 반박 주장의 문제점은 그것의 명확한 근거를 대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선, 판 덴 에덴에게 클라라 마리아라는 딸이 있었고, 당시 아버지의 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칠 수 있을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가졌다는 점은 사실(팩트)에 가까운 듯 합니다. 

그녀의 몸이 연약하고 기형적이었다는 점과 스피노자와 케르크링크가 스승의 딸인 마리아의 관심을 받기 위해 경쟁했다는 점도 대체로 동의하는 지점인 것 같습니다.

다만, 스피노자가 실제로 그녀의 '날카로운 정신과 뛰어난 학식'에 마음을 빼앗겼는지, 그리고 '그녀와 사랑에 빠져 그녀와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종종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내들러는 이 부분에 대해선 반박 근거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가 근거를 내세운 건 단지 '나이'와 관련된 것 뿐입니다.

그래서 내들러의 주장에 신뢰를 보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앞서 처음 인용한 글의 주인공이자 스피노자 연구자였던 프로이덴탈은  스피노자 연구를 위해 1898년 네덜란드행을 감행합니다.

거기에서 많은 자료들을 수집했고,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 <스피노자의 생애>였습니다. 내들러보다 적극적이고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 스피노자의 전기를 쓸 수 있었습니다.

내들러가 자신의 책을 쓰는 데 빚진 프로이덴탈을 반박하려면 그것에 걸맞는 충분한 근거를 제시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만약 그것이 진실이라면..."식으로 자신의 탈출구를 마련하며 반박하는 건 온당치 못하다는 느낌입니다.

 

 

 

 

댓글 7
  • 2023-07-01 23:35

    음, 강성 댓글용 포스트를 이번에는 세븐샘께서 파 주신 건가요? ㅋ ‘어떤 이’의 이름이 케르크링크였으리라는 말씀이로군요ㅎㅎ 스피노자가 좀 더 인간적으로 다가오네요:)

    • 2023-07-03 07:36

      '어떤 이'가 곧바로 케르크링크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둘이 한때 연인을 둘러싼 경쟁 관계였다고 하더라도 둘의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는 판 덴 엔덴 학교를 떠난 뒤에도 한동안 케르크링크와 친분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해부학과 화학 분야에서 명성을 쌓은 케르크링크는 스피노자가 깎은 렌즈를 자신의 현미경에 사용했고, 스피노자는 서재에 케르크링크의 책 몇 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케르크링크가 결혼할 때 스피노자가 초청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참석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를 질투의 대상으로 계속 생각하지는 않은 듯 합니다. 다만 저는 스피노자의 사랑 이야기에 대한 내들러 반박 주장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 2023-07-03 23:48

    뭐 내들러를 편들 이유가 없어서 샘의 씁쓸함에 뭐라 말을 보태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댓글 인정만 해주십시오. ㅎ

    • 2023-07-04 09:02

      '씁쓸함'은 (마음이나 기분이) 유쾌하지 못하고 언짢은 슬픔의 계열 정서인 것 같습니다. 제가 씁쓸할 것까진 없고 내들러의 표현을 패러디한 것이었는데, 조금 과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ㅎㅎ.

  • 2023-07-04 01:26

    충분히 가능한 일 아니겠습니까. 저는 에티카의 그 문장들이, 차분하지만 꽤나 감정적? 회상적?으로 느껴져서 그렇게 이야기했었습니다. 아무래도 내들러도 그와 비슷한 수준으로 짐작한게 아닐까 싶고요 ㅎㅎㅎ

  • 2023-07-04 12:57

    음..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그래도 지구는 돈다"카더라 처럼 독일 철학자 야코프 프로이덴탈의 스토리텔링이 아닐까 싶네요. 실제로는 훨씬 미지근한 정도의 애정이었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진위여부야 알 수 없으니 내들러가 그렇게 애매한 서술을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ㅎㅎ 재밌는 글 감사합니다~

  • 2023-07-04 16:15

    하드코어 댓글의 자기 고백이 이어지는 이 후기들 너무 재미있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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