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철학학교시즌2] 스피노자 읽기 8주차 질문들

정군
2023-06-28 20:00
346

여기에 댓글로, 정오까지 올려주세요

댓글 12
  • 2023-06-28 20:32

    내일은 회사 행사 관계로 저녁 늦게까지 하루 종일 매달려야 해서 '결석'해야 할 것 같습니다. ㅠㅠ.
    그래서 질문은 2개만 준비했습니다. 세미나 내용은 줌 영상으로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1. 정리 35(112p)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실재가 그가 그 실재를 유일하게 소유하게 했던 애정의 끈과 동일한 끈 또는 그것보다 더 긴밀한 끈으로 다른 이와 결합되면 그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실재에 대해 미움을 갖게 될 것"이라며 연인의 변심에 대한 질투(시기의 대상인 다른 이에 대한 관념에 수반하는 사랑과 미움에서 함께 생겨나는 마음의 동요)를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어 같은 정리35의 주석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이에게 몸을 맡긴다고 상상하는 이는 단지 자기 자신의 욕구가 억제됨으로 인해 슬퍼지게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이미지를 그가 싫어하는 다른 이의 치부 및 분비물과 결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이라며 노골적인 표현을 담고 있습니다.

    질문1) 스피노자가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았지만 '실연'의 경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생생하면서도 적나라한 표현은 철학자의 용어로는 다소 생경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노골적 표현이 스피노자의 개인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고 봐야 할까요?

    2. 정리39의 주석(115p) "나는 여기서 좋음(선)을 모든 종류의 기쁨과 함께 이러한 기쁨으로 인도하는 모든 것, 특히 아쉬움에 대해 만족을 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나쁨(악)은 모든 종류의 슬픔, 특히 아쉬움을 낳은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각자'는 자신의 정서에 따라 좋은 것과 나쁜 것, 더 좋은 것과 더 나쁜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을 평가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질문2) "우리가 좋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욕망하기 때문에 그것을 좋은 것이라 명명한다"고 스피노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좋음과 나쁨을 '각자'의 정서에 따라 평가한다면 우리들은 선악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요?

  • 2023-06-28 21:55

    스피노자가 말하는 이 많은 감정들은 그 자체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코나투스를 위해서든 그 자체의 운동(?)에 의해서든 항상 변용된다고 읽힙니다. 뭐랄까, 감정은 항상 우연적이고 일시적이라는 점과 또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으므로 나에게 그런 감정을 일으킨 원인에 대해서 상대방이 아닌 그 주변의(?) 다양한 양태들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질문)
    정리 39. 어떤 이를 미워하는 사람은, 그 자신에게 더 큰 해악이 생겨나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에 대해 나쁜 일을 행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반대로 어떤 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같은 법칙에 의해 그에게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앞의 문장은 ‘보복이 두렵지 않으면 나쁜 일을 행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확장하면, 개인의 복수를 금하고 공공(국가)의 폭력(단죄)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전개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뒷 문장에서 사랑도 같은 법칙이라고 하는데요. 이것을 문장으로 만들면, ‘그 자신에게 더 큰 사랑이 생겨나는 것이 두렵지 않으면, 그에게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입니다. 자신에게 더 큰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이 두려우면, 좋은 일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인데..... 그럴 수 있나요? 왜냐하면, 정리13 주석에서 사랑은 외부원인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고, 정리 11의 주석에서 기쁨을 정신이 더 큰 완전성으로 이행하게 되는 수동정념이라고 하였으며, 사랑은 결국 코나투스를 증대시킬 것인데...... 사랑이 두려울 때에도 있나요? 미움과 사랑을 동일 법칙으로 ‘정리’하려다가 좀 무리수를 둔 것은 아닐까요?
    (음......가만히 생각해 보면, 있을 수도 있을 듯 합니다. 내가 정군을 사랑하여 철학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했더니, 이를 본 정군이 나에 대한 사랑으로 온갖 철학관련 책비를 내려 줄 것인데, ‘책비 사랑이 두렵지 않으면 더욱 정군을 사랑해라’로 해석되는 바, 이제 에티카식으로 정당하게 ‘정군 사랑’을 끝내야 할 듯! 맞나요?)

    (질문2)
    p.115 주석에서 ‘좋음(선,bonum)은 모든 종류의 기쁨과 함께 이러한 기쁨으로 인도하는 모든 것으로 이해한다’고 합니다. 중간쯤에는 ‘자신의 정서에 따라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판단하거나 평가한다’고 합니다. 정리하면, ‘선’은 나의 정서에 따른 나의 판단이라는 것입니다. 즉 선악의 판단은 개인의 못이라는 얘기로 읽힙니다. 먼저 ‘선’에 대한 정의(공통관념?)가 있고 그에 따른 나의 감정을 생각하는 게 윤리고 생각하는데, 스피노자는 그게 아니라는 전개를 하는 것이지요? 궁극적으로 에티카가 윤리를 말하려는 것으로 예상되어서 미리 확인해 봅니다.

    추신 : 딸내미가 어쩐 일로 ㅇㅇㅇ공연을 예약해 주었네요. 근데, 공연일이 내일 목요일입니다. 미움 1, 기쁨 99 입니다. 정리 47이 말하는 기쁨이 슬픔을 동반하는 경우가 이런 경우는 아닐 것 같지만, 우리 학인들은 상대방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하셨으니까 마음 편하게 결석합니다. ㅎㅎ

  • 2023-06-28 23:52

    1.
    정리37 정서가 크면 클수록 정서에 의해 생겨나는 욕망도 커진다.
    스피노자는 1차 정서를 기쁨, 슬픔, 욕망입니다.(정리11의 주석) 그런데 정리37을 보면 정서와 욕망은 비례관계에 있다고 합니다. 정리37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이 경우 정서는 기쁨과 슬픔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기쁨, 슬픔의 정서 안에는 욕망이 없는 경우가 없다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시 말해 코나투스(즉 정신의 경우, 욕구를 의식하는 욕망)는 인간의 본질인데, 정서와 떼려야 뗄 수 없으며, 정서의 크기와 비례관계를 갖는다고 이해하면 될까요?

    2.
    정리 39의 주석 각자는 자신의 정서에 따라 좋은 것과 나쁜 것, 더 좋은 것과 더 나쁜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을 판단하거나 평가한다.
    정서들의 발생과 소멸의 과정을 살펴보면 정서는 언제나 필연적으로 마음의 동요와 함께 하는 것 같습니다.(정리17 주석 상반된 두 개의 정서에서 생겨나는 이러한 정신의 상태는 마음의 동요라 불리며, 이것은 불확실성이 상상과 맺고 있는 것과 동일한 관계를 정서와 맺고 있다.)
    스피노자의 정서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정서는 외부원인에 의한 신체의 변용이자 역량의 이행인데, 우리 신체는 외부대상과 독립되어서는 단 한 순간도 실존할 수 없기에 수많은 외부원인들과의 관계 속에 놓입니다. 그런데 이 외부적인 것들에 대해 우리의 통제력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게다가 우리와 유사한 실재들, 즉 타인들의 정서를 모방하고 영향받는 것이 필연적이므로, 우리는 서로 다른 수많은 정서들(우리 신체가 복합개체이므로 다양한 변용이 계속해서 생겨납니다)과 서로 상반되는 정서(가령 사랑과 미움, 타인과 하나되려는 암비치오와 타인을 지배하려는 암비치오, 희망과 공포 등) 하에 놓이기 쉽고, 그 결과 마음의 동요는 계속해서 생겨날 수 밖에 없습니다.(정리 51 상이한 사람도 동일한 실재에 대해 상이한 방식으로 변용되고, 동일한 사람도 동일한 실재에 대해 상이한 순간에 상이한 방식으로 변용된다.) 정서 자체가 수동이고, 동요하는 것이므로 정서의 지배 하에 있는 한(다시말해 부적합한 관념이나 상상 하에 있는 한), 좋음과 나쁨, 선과 악 역시 언제나 불확실하고 계속해서 동요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개인적 차원의 좋음과 나쁨이 그러하다면 사회적 차원의 좋음과 나쁨, 선과 악은 정치 혹은 권력관계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요?

    3.
    정리52에서는 놀람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요. 놀람은 정신 안에 독특한 한 실재에 대한 상상만이 존재하는 한에서 이 실재에 대한 상상이라고 합니다.
    데카르트는 경이를 기본 정념으로 놓았는데요(경이가 있어야 동물정기가 움직이기 시작하여 영혼의 동요를 일으킨다고 했던 듯), 스피노자에게 놀람은 그저 상상일 뿐이라는 것 같습니다. 정리 52에서 놀람은 정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려깊음에 대한 놀람인 경외와 어리석음에 대한 무시인 업신여김(경멸)의 경우, 정리 55의 주석에서 말하듯이 사려깊은 자의 미덕도 시기하지 않고, 어리석음과 같은 악덕에도 동요하지 않는다고 이해하면 될까요? 그런데 이 경우에 상상과 정서는 어떻게 구분되는 것일까요?

  • 2023-06-29 00:44

    '암비치오'는 영어 ambition, 흔히 '야망'으로 번역되는 말의 라틴어 어원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암비치오'는 '보통 사람좋음'으로 해석된다고 하는군요. 특히 '사람 좋음'의 원어가 humanitas인 점이 재미있습니다. 『에티카』에서 '암비치오' 개념의 핵심적인 내용은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욕망'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이 노력이 의식적이지 않다는 데, 그래서 이득을 노리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암비치오'는 오직 '그 사람이 기쁘게 하기 때문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재미있는 것은 정리31의 주석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인정하게 만들려고 하는 노력은 사실 암비치오다'라는 구절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을 다른 이도 따르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요컨대 갈등과 미움의 근원이 바로 이 '암비치오'에 있는 것이죠(사실 전 여기서 약간 소름이 돋았습니다 ㅎㅎㅎ) 그러면, 질문입니다. 전자의 의미인 '사람좋음'의 의미에서 '암비치오'와 후자의 '인정욕망'의 의미에서의 '암비치오'가 같은 것일까요? '암비치오'가 현실에서는 두 가지 모습으로 다 드러나는 것이라고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 2023-06-29 07:40

    정리35
    [정리 35]는 미움과 시기심에 대한 부분이고 그다지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증명]의 6번째 줄 "그런데 이러한 코나투스 또는 욕구는, 그가 사랑하는 실재가 자신과 결합시키는 어떤 이의 이미지를 수반하는, 그가 살아하는 실재의 이미지에 의해 억제된다고 간주된다. 따라서 (3부 정리 11의 주석에 의해) 이로 인해 그는 원인으로서의 그가 사랑하는 실재에 대한 관념과 더불어 다른 이의 이미지를 수반하는 슬픔에 의해 변용될 것이다" 부분은 여러 번 읽어보아도 의미가 잡히지 않네요.

    정리45
    [정리]45는 '미움'에 대한 내용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과 유사한 누군가가, 자신이 사랑하는 자신과 유사한 어떤 실재에 대해 미움으로 변용된다고 상상한다면, 그는 그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 이게 어떤 의미일까요? <증명>에 따라서 추론해 보면, '내가 사랑하는 대상을 싫어하는 놈이 있다면, 그를 싫어하게 될 것이다'는 뜻 같습니다. 그런데 이 정리에서 "자신과 유사한 누군가", "자신과 유사한 어떤 실재"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유사하다는 게 어떤 뜻인지 다소 모호합니다.

  • 2023-06-29 07:52

    정리 39에서 "그 자신에게 더 커다란 해악이 생겨나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에 대해 나쁜 일을 행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이 문장을 성찰적 차원에서 읽으면 자기가 깨달아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더 커다란 해악이 생겨나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을까'라는 걸 보면 그럼 나쁜 일일 행하지 못하게 하려면 이런 두려움을 만들어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렇다면 형벌의 엄중함 등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처럼 보이는데요. 그렇지는 않겠죠?

  • 2023-06-29 08:28

    1. 정리 32 주석에서 "따라서 우리는 인간들의 본성으로 인해 대개 다음과 같은 같은 일어난다는 것을 보게 된다. 곧 그들은 불행한 이들에 대해서는 연민을 품고, 잘 사는 이들에 대해서는 시기심을 갖게 되며..." 라고 하며 나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고 따라서 직접적인 정서 관계를 맺지 않는 대상의 고통이나 슬픔에 나도 모르게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는 연민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정서모방이 슬픔과 관련될 경우에는 연민이라 불린다"는 정리 27의 주석이나 맹자의 측은지심같은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만, 정리13에서 스피노자는' 미움'은 외부 원인에 대한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기에 나에게 슬픔을 안겨주는 그 대상을 내가 미워해야 하는게 정상이고, 고로 미워하는 이는 자신이 미워하는 것을 멀리하고 파괴하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슬픔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할 수 있는 한 구해주려고 노력한다는 '정서모방으로서의 연민'과 기본정서인 '슬픔과 기쁨의 구조로써 보는 연민'은 좀 모순적인 것으로 느껴집니다.

    2. 정리 37의 증명에서 "슬픔으로 변용 된 사람이 추구하는 모든 것은 슬픔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슬픔이 더 클 수록 슬픔과 필연적으로 대립하는 인간의 행위 역량의 부분도 커진다"고 하는데 이는 작용과 반작용의 원리에서 생각해보면 슬픔이 클 수록 벗어나고자 하는 힘이 더 커진다는 말인가 보다 하고 이해가 가지만, 현실에서는 슬픔이 커지면 슬픔에서 벗어나려는 힘도 커지지만 그 슬픔에 더 침잠하게 하는 슬픔의 중력도 커져서 더 불행한 결과로 이어지는게 다반사입니다. 하여 아주 커다란 슬픔의 힘이 미약하게 나마 아주 작은 기쁨의 힘으로 변용하게 되는 그 순간이랄까, 방법이랄까, 원리랄까 여하튼 그 기저는 스피노자 식으로는 어떻게 봐야 할까요?

  • 2023-06-29 11:06

    #1
    정리 37_증명 (p.114)
    (슬픔에 대한 정의에 의해) 슬픔이 더 클수록 슬픔과 필연적으로 대립하는 인간의 행위 역량의 부분도 더 커진다. 따라서 슬픔이 더 클수록 슬픔에서 벗어나려고 추구하는 인간의 행위 역량도 더 커진다. 

    => 실재 "우울"한  상태에 놓인 사람들은 그 상태가 심할 수록 우울에서 "벗어나려고 추구하는 인간의 행위 역량"이 더 작아지는 것 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부분을 스피노자의 정리 37에 대비하여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2
    정리 55_따름정리_증명(p.128)

    우리는 어떤 사람의 사려 깊음이나 강인함 등으로 인해 어떤 사람을 외경하게 된다고 말했을 때, 이는 우리가 "이 미덕을 우리의 본성에 공통적인 것이 아니라" 그에게 독특하게 속하는 것으로 상상하는 데서 비록하는 것이며,,,

    =>이 미덕은(사려 깊음이나 강인함) 어떠한 특정한 실재에게 완전히 "있거나" 아예 "없거나"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 2023-06-29 12:04

    우리는 기쁨과 만나고 슬픔은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를 기쁨으로 이끈다고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것이 좀더 잘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정리 28). 이렇게 상상은 노력 또는 욕망을 끌어냅니다. 그렇다면 1) 상상은 현행적 본질을 일부 규정하고 구성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2) 만일 그렇다면 인간의 인식이 1종의 수준에 머물러 있을 때 인간은 상상하고, 그의 현행적 본질은 상상에 의해 규정됩니다. 현행적 본질이 곧 욕망이고 행위 역량이니, 인간의 행위 역량은 상상에 의해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겠습니다. 이에 대해 스피노자는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일까요? 사실상 상상은 인간이라는 실재가 자신의 행위 역량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이끄는 것이니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이지 않을까요? 스피노자는 다만 이것이 상상에 기반한 것이라서 스스로를 운에 맡기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 2023-06-29 12:09

    1) 정리50 의 주석에 ...왜냐하면 이 정서들에 대한 정의만으로도(우리가 적절한 자리에서 설명하게 될 것처럼) 공포 없는 희망 없고 희망 없는 공포는 없다는 점이 따라 나오며...라는 부분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겠네요. 희망과 공포는 동시적으로 생겨난다는 이야기일까요? 정리50은 "우연에 의해 희망이나 공포의 원인이 될 수 있다"인데, 그러니까 희망이나 공포의 원인은 기쁨이라 슬픔의 원인과 같고 우리는 그것들을 사랑하거나 미워합니다. 이 정서의 정의들에서 공포없는 희망없고...라는 점이 정말 저절로 따라 나오나요?

    2) 정리48과 49는 사랑과 미움에 대한 부분인데, 여기에 베드로와 바울이 다시 등장합니다. 아마도 4부에도 이들은 다시 나오는 듯 한데, 어쨌든 베드로와 바울은 대립각에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때문인지, 그리고 이들로 이야기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 2023-06-29 12:17

    정리 52에서는 우리가 이전에 전혀 접한 적 없는 대상들이라고 상상할 때 "놀람"을, 그 반대의 경우는 "무시"를 겪게된다고 한다. 125p 주석에서 "놀람과 결합된 악, 희망, 안도감"이나 "무시와 결합된 사랑, 희망, 자부심" 같은 정서들을 연역할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놀람과 결합된 안도감"이나 "무시와 결합된 자부심" 등은 그 기제가 잘 이해가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는 어떤 정서 상태일까?

  • 2023-06-29 14:08

    질문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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