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습니다(16) ] 2008년, 서울의 기억 - 임정은, 『김치도 꽁치도 아닌 정치』

차명식
2019-04-06 20:12
445


일요일 2시 중학생들과  책 읽습니다 (16)

 

2008년, 서울의 기억

임정은, 『김치도 꽁치도 아닌 정치

 

 

프로필 2.jpg

   글 : 차명식 (청년길드) 

 

 

대학교를 졸업한 뒤 2015년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중학교 아이들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2년간 함께했던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문득 그 시간들을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에

그 간의 수업들을 가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나만의 글이 아니다.

나의 목소리와 더불어 아이들의 목소리 역시 읽는 이들에게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글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1.

 

  아이들에게 “정치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까? 사실 정치라는 단어만큼 아이들과 동떨어진 단어를 찾기도 쉽지 않다. 아이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경우도 드무나 어른들이 그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경향도 있는 듯하다.

 

  임정은의 책 『김치도 꽁치도 아닌 정치』는 그러한 아이들의 정치를 조망한다. 딱 보아도 아동서적‘다운’ 아기자기한 제목은 벌써부터 그 내용이 엿보이는 것만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한다. 아, 이 책은 아이들에게 정치가 뭔지 조곤조곤 알려주는 책이겠구나. 민주주의가 왜 정의로운지, 선거에 왜 꼭 참여해야 하는지, 삼권분립이 얼마나 합리적인지 그런 내용들을 친절한 말들로 설명해주는 책이겠구나 싶다. 그러나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김치도 꽁치도 아닌 정치』는 민주주의 대의제의 교과서적인 장점들을 설명하기보다 곧바로 아이들이 맞닥뜨리는 정치의 이야기로 치고 들어간다. 인문학 동아리 ‘문사철인’에 속한 중학생들이 ‘당신에게 정치란’을 주제로 동네 사람들에 대한 앙케이트에 나서고, 우연히 건물주의 급작스런 재건축으로 쫓겨나게 된 카페 주인을 인터뷰하게 된다. 그러다 정당에도 가입하게 되고, 카페를 지키기 위한 시위에도 참여한다. 그리고 그것을 목도한 건물주가 학교에 항의를 넣음으로서 “학생은 학생답게 공부를 하라”로 시작되는 레토릭이 따라붙는다. 건물주뿐만이 아니다. 교장, 교감, 학생부장, 학부모회, 귀찮은 트러블에 엮이고 싶지 않은 친구들, 주위의 모두가 주인공을 압박한다. 그렇다. 세상이 대신 답해주는 아이들의 정치란 바로 이것이다. “너희에게는 아직 어울리지 않는 것.”

 

  왜 아이들에게 정치는 어울리지 않는가? 그것은 그들이 아직 너무나 미성숙하고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정치에 대한 정의는 수도 없이 많으나 적어도 그 중 어떤 정의도 정치가 ‘세상, 즉 공공의 무언가에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의사를 반영코자 하는 행위’임은 부정할 수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아이들에게 정치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 된다. 세상에 대한 아이들의 미성숙한 생각과 의지는 도통 믿을만한 게 못 되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직 공공의 일에 참여할 권리가 없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이 전제는 비단 꼬장꼬장하고 보수적인 노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의 민주시민교육’을 강조하는 이들 중에서도 아이들이 ‘반동적인’ 정치적 의사를 표할 때 그를 유치한 이기심의 발로나 세뇌의 결과로 몰아가는 이들은 존재한다.

 

  그처럼 말하는 사람들에게 『김치도 꽁치도 아닌 정치』는 ‘문사철인’이 받아온 열여섯 장 설문지를 흔든다. 이 설문지는 물론 가상의 것이지만 그 한 장 한 장이 말하는 각계각층 남녀노소의 ‘정치’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익숙한 리얼리티가 살아있다.

 

  정치는 ‘나랏님’이 하는 것이며 나라가 있어야 정치도 있으니 국가 안보가 가장 중요하고 그 뒤로 빨갱이, 이북, 연평도와 백령도 등이 따라붙는 설문지.
  블로그와 SNS의 정치적 기능을 강조하고 왜곡된 언론과 교육 문제, 정치에 관심이 없는 젊은 세대를 지탄하고서 귀하가 하고 있는 정치 참여를 묻자 멋쩍은 ^^;;가 달린 설문지.
  그 외에도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열을 올리는 친구에 대한 불평, 부패한 정치인들에 대한 혐오. ‘참여’, ‘분배’, ‘국민의 정치의식’ 등의 단어들이 변주되는 문장들. 때때로 섞인 무관심한 대답들. 대부분 ‘투표’로 귀결되는 정치 활동에 대한 문항,

 

  과연 중학생들의 ‘미성숙한’ 정치의식과, 이 설문지들에 실린 – 우리가 흔히 듣고 말하는 성인들의 ‘성숙한’ 정치의식 사이에는 과연 절대적이라 할 만한 질적 차이가 있는 것일까?

 

 

 

  2.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은 ‘국가란 무엇인가’이었다. 국가란 무엇일까? 우리는 학교에서 국가가 성립되는 요소는 국민, 영토, 주권이라고 배운다. 그러나 과연 이 세 가지가 모두 충족되었다고 해서 ‘나라’라고 부를 수 있을까? 국가가 국민을 죽이는 상황에서도 국가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광주 5.18 민주화운동 당시 참여한 시민군의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럴 수 없다면 잘못된 지식을 배우는 걸까?”

  “생각하지 않고 위에서 주어진 명령을 따르는 것은 쉽다. 『쥐』를 보면 수많은 잔인한 군인들이 나온다. 그들 모두가 태어나기를 잔인하게 태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위에서 내려온 지시를 무조건 따랐다. 그들이 전달된 명령에 관하여 심각하게 고민했더라면 그렇게 잔혹하게 행동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들이 명령의 부당함을 인식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당장 그 사회에 대항할 수 있을까?……” - 아이들의 『쥐』, 『소년이 온다』 감상문 중에서

 

  광주에 대하여 아이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 아우슈비츠에 대하여 나누었던 이야기들. 그리고 가을, 여름, 봄에 아이들이 썼던 글들을 들춰보며 한 가지 확신만이 강해졌다. 적어도 나에게는 녀석들에게 정치가 ‘답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가까운 집과 학교부터 마을을 거쳐 과거의 기억들까지, 나는 녀석들에게 자신들의 세상을 돌아보고 곱씹어보기를 권해왔다. 자기 세상을 보는 스스로의 눈을 가지고 세상에 대해 저마다의 질문을 던지기를 바라왔다. 아이들은 느리고 빠른 차이는 있을지라도 글과 말을 통해 자기들에게 그럴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왔다. 정치라고 하는 것이 그 시선과 질문들을 마침내 삶과 행동으로 옮기는 행위라고 한다면. 자신과 세상을 잇는 걸음을 ‘어떻게 걸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자 실천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나는 그 아이들에게 정치가 아직 어울리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한 확신을 가지고 나는 이제 조금 다른 고민을 시작한다. 그렇다면 그 How, 어떻게 세상에 자신의 뜻과 질문을 맞부딪힐 것인가에 대하여 나는 녀석들에게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이 때도 답은 명확하다.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어떤 정답이 아니라, ‘나의 경우’ 뿐이다.

 

  그 순간 나는 말문이 막힘을 느낀다.

 

  나는 어떤 방식으로 그 How를 실천했던가. 말해줄 만한 것이 곧바로 떠오르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말했던 선거와 투표는 지금 이 아이들에게는 불가능할 일일뿐더러 내가 느낀 바로는 지나치게 간접적인 수단이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일단 데모나 시위부터 하라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그 외에 우리에게는 어떤 How가 있는가.

 

  여기서 나는 다시 책으로 돌아간다. “정치란 중학생들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이란 레토릭 아래 자신들의 정치적 행위를 반성하길 요구받던 주인공들, 그 이야기의 끝은 어디로 향했을까.

 

  「통쾌하게 웃는 사람들을 보며 일선은 코끝이 칭했다. 낱낱으로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손에 손을 잡는다. 나란히 어깨를 겯는다. 내 일처럼 힘을 보탠다.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된다. 내가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된다. 너와 내가 우리가 된다. 거대한 두려움 앞에 다윗처럼 맞선다.
  “연대…….”
  일선은 자신도 모르게 나지막이 읊조렸다.」 - 『김치도 꽁치도 아닌 정치』, 260-261p

 

  사실, 이 책의 ‘아동서적 다움’은 시작이 아닌 끝에 있다. 『김치도 꽁치도 아닌 정치』는 전혀 동화답지 않게 아이들이 정치의-공공의 의사결정 구조에서 배제되는 현실을 폭로하지만, 그러한 현실을 극복하는 과정에서는 다소 일반적인 방식을 택한다. 주인공은 학교에 대자보를 붙인다. 주인공들을 지지하는 다른 학생들의 포스트잇들이 나부끼고, SNS를 통해 지지의 메시지가 날아들고, 학생 인권조례를 준수하고 학생의 정치활동을 인정하라는 현수막이 펄럭이고, 아이들은 지역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다. 물론 그 사이사이에는 여전히 비난의 목소리들이 섞여있지만 주인공들에겐 함께 해주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기쁨이 더욱 크다. 기쁨은 다시 희망이 되고, 주인공들은 이 모든 게 끝이 아닌 시작임을 다짐한다. “정치란 무엇인가”의 질문을 ‘연대’라는 힘이 마무리한다.

 

  여기서 내가 지적하고 싶은 ‘아동서적다움’은 동화적인 플롯이나 이미 판에 박힌 이미지가 되어버린 연대의 수단들 따위가 아니다. 물론 그것들을 너무 뻔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포스트잇도 SNS도 라디오 방송도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연대도 여전히 현실 곳곳에서 실존하고 있으며 그 나름의 실제적 힘을 가지고 작동하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이 끝난 지점이다.

 

  「“차일선, 설마 이게 끝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너의 대자보에 학교는 아직 응답하지 않았잖아. 응답할 때까지 계속 두들겨야지, 안 그래? 우리는 이제 시작인데?”
  일선은 다리를 꼰 채로 삐딱하게 걸터앉은 현서를 동그란 눈으로 올려다봤다.
  “끝이 아닌 시작?”」 - 『김치도 꽁치도 아닌 정치』, 267p

 

  여기가 책의 끝이다. 연대의 힘을 확인하고 그것이 끝이 아닌 시작임을 알려주면서도 책은 그 다음을 이야기해주지는 않는다. 나는 그 사실에 아쉬움을 느낀다. 그것이 아동서적으로서의 이 책의 한계라고 느낀다. 그리고 그 아쉬움을 통하여 깨닫는다.
  내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정치에 대한 나의 경험이 무엇인지를.

 

 

 

  3.

 

  나는 살면서 두 번의 촛불시위를 경험했다. 한 번은 2008년의 광우병 촛불시위였고 다른 하나는 2016년의 탄핵 촛불집회였다. 그 중 내게 더 깊은 인상을 남긴 건 전자였다. 그 때 나와 내 친구들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그 해 말 수능시험을 치를 예정이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초를 사서 서울로 갔다.

 

  그 시위의 나날들 동안 서울에서 우리가 체험한 연대의 힘은 난생 처음 맞닥뜨린 것이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열을 지어 도로를 행진하며 구호를 외쳤고, 길거리 곳곳에서 자유롭게 무리를 지어 앉아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광우병 문제는 수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였다. 입시 위주 교육의 병폐, 늘어나는 비정규직과 불안정해진 노동시장, 한미 FTA로 인한 농산물 개방이 가져올 농업의 위기, 편향된 언론과 민주화 운동에 대한 폄하……수많은 사람들이 각기 세상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말하고, 듣고, 다시 말했다. 나는 세상을 보는 눈도 살아가는 방식도 저마다 다른 사람들, 그것도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일체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곤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건 하나의 스펙타클이었다. 우리는 (거기 있는 이들은 모두 ‘우리’였다.) 연대하고 있었고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연대한다면 당연히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되리라 믿었다. 거기서 깨달은 나의 정치는 세상을 바꾸는 힘, 연대의 힘이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나에게 그 스펙타클은 한조각 좌절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적어도 그 때 우리가 바꾸고자 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이명박은 무사히 임기를 마쳤고 그 다음은 박근혜가 당선되었다. 그 10년 남짓한 시간 속에 한때 우리를 가슴 뛰게 했던 2008년의 촛불시위는 기억은 지나간 찻잔 속 태풍으로 남았다. 누군가는 그 연대의 대중들이 얼마나 감정적인 충동에서 움직였는가를 비판한다. 또 누군가는 그 때 광우병의 위험성이 얼마나 부풀려져 퍼졌는가를 짚어낸다. 또 누군가는 정부가 깐 컨테이너로 도로가 봉쇄되었을 때 그것을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로 사람들이 사분오열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그 시위가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음’을 – FTA를 무르지도, 이명박을 퇴진시키지도 못했음을 주장한다.

 

  나는 그 연대의 기억이 내게 선사한 충격을 부정할 수 없듯 그들이 지적한 일면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연대는 분명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답’은 아니다. 완벽하게 정의롭고 이성적이며 고결한 사람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 되어 악한 권력을 단죄하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그런 연대의 정치는 그야말로 아이들의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이데아적 혁명인 것이다. 연대하는 사람들도 격해진 감정과 유언비어에 휘둘릴 수 있다. 의견이 갈라져 누군가 이탈하거나 서로를 비난하게 될 수도 있고, 편 가르기와 증오에 사로잡혀 편협해질 수 있으며, 설사 일련의 성과를 이루어낸다 하더라도 뒤늦게 그에 실망하여 허탈해질 수도 있다. 연대가 시작되는 순간 사람들은 이제 세상이 바뀌리란 희망에 도취되지만 곧 그 속의 다른 어려움들을 목도하고 연대를 유지하는 것이 훨씬 더 고통스런 과정임을 깨닫는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등지며 때때로 그들에게 그 기억은 수치스런 것으로 남거나 아름다웠던 부분만이 미화되어 남는다. 매일매일 이어지는 힘겨운 일상 속에서 연대의 기억은, 정치의 기억은 그렇게 풍화된다. 그렇기에 연대의 시작으로 책을 마무리하면서 그 다음은 상상의 영역으로 남기는 『김치도 꽁치도 아닌 정치』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이다.

 

  나는 아이들에게(아마도 어른들과도)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서 정치에 대해 말하려 한다면 마땅히 희망 이외의 것에 대해서 함께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 그 뒤는 알 필요가 없다며 아름답기만 한 연대 - 이상적인 정치를 말하는 건 어떤 측면에서는 또 다른 ‘너희에겐 아직 일러’다. 아이들은 이미 자신들의 눈으로 세상을 응시하고 있다. 녀석들은 2016년, 촛불의 연대가 한국 정치의 지형을 한 번 바꾼 것을 보았고 2019년, 연대했던 사람들이 젠더와 세대와 경제적 계층과 정치적 신념으로 다시 갈라진 것을 보고 있다. 그런 녀석들에게 연대를 오직 희망으로만 말한다는 것은 얕은 기만일 따름이다. 연대는 희망이면서 또한 실패와 좌절과 고통의 과정이다. 끊임없이 걸어야 함을 믿으면서도 자신이 잘 걷고 있는지 의심해야 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시도이지만 반드시 바뀔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아이들과 정치를 말할 때 결코 피할 수 없는 질문은 이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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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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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읽기 뚜벅뚜벅 마을경제학
이년 전이었던가 지방에서 문탁네트워크에 대해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간 적이 있었다. 나는 문탁네트워크가 인문학 공동체이며 세미나와 글쓰기 등을 통해 나름대로 깊이있는 인문학 공부를 함께 한다는 것을 힘주어 설명했다. 그런데 사람들의 질문은 마을작업장이라든가, 문탁내에서 통용되는 대안화폐인 복(福)이라든가, 2,500원으로 먹을 수 있다는 문탁의 공동밥상에 집중되었다. ‘어떻게 공부를 하면서도 돈을 벌 수 있는가’ ‘어떻게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공동체를 유지해갈 수 있는가’가 그들의 관심사였다. 그리고 문탁의 차별성은 그렇게 ‘돈’과 ‘공부’를 잘 결합시킨 ‘모범적인’ 공동체라는 점으로 귀결된 것처럼 보였다. 사실 문탁에서 함께 공부하며 살아온 것이 어언 10년 쯤 되어가는 나도 처음에는 선뜻 ‘돈 버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문탁의 많은 일에는 돈이 필요하다) 공부에 나서기가 망설여졌다. 문탁의 많은 친구들도 ‘돈’이 아쉽고, ‘돈’ 문제만 해결되면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문탁네트워크의 많은 활동 중에서 마을작업장 <월든>이, 그렇게 마을에서 함께 모여 살면서 경제적인 자립을 꿈꾸면서 시작된 것도 그러한 친구들의 희망을 반영한 것이었다. ‘복’이라는 이름의 대안화폐도, 그처럼 공동체의 경제를 다른 방식으로 꾸려보려는 생각에서 시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의미있는 일이기는 했지만,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경제적 자립이라는 차원에서는 현실은 늘 ‘노답’이었다. 이때 우리는 스즈카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스즈카라는 작은 마을에 도시락 사업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살아가는 공동체가 있단다. 이것이 내가 처음 접한 스즈카 커뮤니티에 대한 정보의 전부였다. 검색을 하고, 친구들과 모여 책도...
이년 전이었던가 지방에서 문탁네트워크에 대해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간 적이 있었다. 나는 문탁네트워크가 인문학 공동체이며 세미나와 글쓰기 등을 통해 나름대로 깊이있는 인문학 공부를 함께 한다는 것을 힘주어 설명했다. 그런데 사람들의 질문은 마을작업장이라든가, 문탁내에서 통용되는 대안화폐인 복(福)이라든가, 2,500원으로 먹을 수 있다는 문탁의 공동밥상에 집중되었다. ‘어떻게 공부를 하면서도 돈을 벌 수 있는가’ ‘어떻게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면서 공동체를 유지해갈 수 있는가’가 그들의 관심사였다. 그리고 문탁의 차별성은 그렇게 ‘돈’과 ‘공부’를 잘 결합시킨 ‘모범적인’ 공동체라는 점으로 귀결된 것처럼 보였다. 사실 문탁에서 함께 공부하며 살아온 것이 어언 10년 쯤 되어가는 나도 처음에는 선뜻 ‘돈 버는 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문탁의 많은 일에는 돈이 필요하다) 공부에 나서기가 망설여졌다. 문탁의 많은 친구들도 ‘돈’이 아쉽고, ‘돈’ 문제만 해결되면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문탁네트워크의 많은 활동 중에서 마을작업장 <월든>이, 그렇게 마을에서 함께 모여 살면서 경제적인 자립을 꿈꾸면서 시작된 것도 그러한 친구들의 희망을 반영한 것이었다. ‘복’이라는 이름의 대안화폐도, 그처럼 공동체의 경제를 다른 방식으로 꾸려보려는 생각에서 시도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의미있는 일이기는 했지만,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경제적 자립이라는 차원에서는 현실은 늘 ‘노답’이었다. 이때 우리는 스즈카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스즈카라는 작은 마을에 도시락 사업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살아가는 공동체가 있단다. 이것이 내가 처음 접한 스즈카 커뮤니티에 대한 정보의 전부였다. 검색을 하고, 친구들과 모여 책도...
봄날
2020.09.24 | 조회 864
지난 연재 읽기 뚜벅뚜벅 마을경제학
  1. 거대한 전환   성격도, 생활도 깔끔한 ‘도라지’라는 친구가 있는데, 일하고 있는 작업장에 와서 불쑥 이런 말을 던졌다. “쌤, 문탁 사람들에게 미백 화장품이 필요해요. 저만 그런 줄 알았더니 많은 분들이 얼굴에 기미가 생겼네요.” 내가 하는 일이 자누리화장품에서 친구들의 화장품과 생활용품을 만드는 일이기에 하는 말이다. 문탁에는 여러 활동 단위가 있는데 자누리화장품은 마을경제의 시작을 함께 했고, 여기서 일하는 나와 뚜버기의 자립을 돕고 있다. 그리고 문탁의 월세도 소소하게 보태고 있다. 미백 기능이 쉽지 않다는 내 말에 도라지는 이렇게 대꾸하곤 웃으며 휑하니 가버렸다. “어려우니까 자누리팀이 해줘야지요~” 도라지의 무한신뢰에서 느낄 수 있듯이, 문탁의 친구들에게 자누리사업단은 장인이다. 과분하고 낯설 때도 있지만 스스로 장인으로 생각하기로 할 때가 더 많다.   장인이라 하면 타고난 손재주가 좋고 근면성실한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다. 고교 시절 한복 만들기에 실패한 이후 한 번도 손재주가 좋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더구나 ‘귀찮아’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랬던 내가 자칭 타칭 장인을 입에 올린다면 인생역전임이 분명할 테다. 십여 년의 우정일지, 능력이 일취월장한 것일지, 어쨌든 그 시작은 <마을경제세미나>에서 공부한 칼 폴라니의『거대한 전환』뒷풀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 자리는 내 인생에서도 ‘거대한 전환’이 된 셈이다.     『거대한 전환』은 꽤 두껍다. 거기에다 사람들이 대부분 어려워하는 경제에 관한 책이다. 그런 책을 끝냈으니 친구들의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뒷풀이를 처음으로, 그것도 거하게 하면서, 시장경제를...
  1. 거대한 전환   성격도, 생활도 깔끔한 ‘도라지’라는 친구가 있는데, 일하고 있는 작업장에 와서 불쑥 이런 말을 던졌다. “쌤, 문탁 사람들에게 미백 화장품이 필요해요. 저만 그런 줄 알았더니 많은 분들이 얼굴에 기미가 생겼네요.” 내가 하는 일이 자누리화장품에서 친구들의 화장품과 생활용품을 만드는 일이기에 하는 말이다. 문탁에는 여러 활동 단위가 있는데 자누리화장품은 마을경제의 시작을 함께 했고, 여기서 일하는 나와 뚜버기의 자립을 돕고 있다. 그리고 문탁의 월세도 소소하게 보태고 있다. 미백 기능이 쉽지 않다는 내 말에 도라지는 이렇게 대꾸하곤 웃으며 휑하니 가버렸다. “어려우니까 자누리팀이 해줘야지요~” 도라지의 무한신뢰에서 느낄 수 있듯이, 문탁의 친구들에게 자누리사업단은 장인이다. 과분하고 낯설 때도 있지만 스스로 장인으로 생각하기로 할 때가 더 많다.   장인이라 하면 타고난 손재주가 좋고 근면성실한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다. 고교 시절 한복 만들기에 실패한 이후 한 번도 손재주가 좋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더구나 ‘귀찮아’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랬던 내가 자칭 타칭 장인을 입에 올린다면 인생역전임이 분명할 테다. 십여 년의 우정일지, 능력이 일취월장한 것일지, 어쨌든 그 시작은 <마을경제세미나>에서 공부한 칼 폴라니의『거대한 전환』뒷풀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러고 보니 그 자리는 내 인생에서도 ‘거대한 전환’이 된 셈이다.     『거대한 전환』은 꽤 두껍다. 거기에다 사람들이 대부분 어려워하는 경제에 관한 책이다. 그런 책을 끝냈으니 친구들의 즐거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뒷풀이를 처음으로, 그것도 거하게 하면서, 시장경제를...
자누리
2020.09.22 | 조회 464
지난 연재 읽기 고은의 걸헤이 유고걸
    *[걸 헤이 유교걸]은 길드다 김고은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한때 유교를 사회악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청년이 <논어>를 읽으며 유교걸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습니다.       말해지지 않은 것까지도 살펴보기                   말은 잘해도 못해도 문제      내 친구 중 나와 가장 이질적인 감각을 가진 이는 중학교 동창 A다. A를 만나면 중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다. 우리는 구겨진 병뚜껑을 가지고도 10분을 웃는다. 물론 웃음기 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나는 종종 A에게 벽을 느꼈다. 그는 내 친구 중에서 유일하게 공무원을 준비하고, 값이 나가는 작고 귀여운 가방을 가지고 있다. 내가 질척거리는 공동체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사회문제에 감정이입 할 때면 A는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속초 영랑정에서 거센 바람을 맞고 있는 나와 A        한편으로 내 말이 A에게 전달되지 않는 건 내가 말을 잘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문제 같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듣던 때였다. 생각하는 방식이나 가지고 있는 감각이 다를수록 나의 말은 상대를 빗겨 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말을 잘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쩌다 말을 잘한 날이면 나는 종종 집에서 샤워를 하며 후회했다. 정말 내가 그걸 다 알고 있는 걸까? 진짜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겉치레뿐이지 않았나? 말에 인플레이션이 생긴 것 같았다.    ...
    *[걸 헤이 유교걸]은 길드다 김고은의 북&톡 연재글입니다. 한때 유교를 사회악이라고 생각했던 20대 청년이 <논어>를 읽으며 유교걸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습니다.       말해지지 않은 것까지도 살펴보기                   말은 잘해도 못해도 문제      내 친구 중 나와 가장 이질적인 감각을 가진 이는 중학교 동창 A다. A를 만나면 중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다. 우리는 구겨진 병뚜껑을 가지고도 10분을 웃는다. 물론 웃음기 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나는 종종 A에게 벽을 느꼈다. 그는 내 친구 중에서 유일하게 공무원을 준비하고, 값이 나가는 작고 귀여운 가방을 가지고 있다. 내가 질척거리는 공동체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거나, 사회문제에 감정이입 할 때면 A는 이해하기 어려워했다.     속초 영랑정에서 거센 바람을 맞고 있는 나와 A        한편으로 내 말이 A에게 전달되지 않는 건 내가 말을 잘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문제 같았다. 주변 사람들에게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듣던 때였다. 생각하는 방식이나 가지고 있는 감각이 다를수록 나의 말은 상대를 빗겨 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말을 잘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쩌다 말을 잘한 날이면 나는 종종 집에서 샤워를 하며 후회했다. 정말 내가 그걸 다 알고 있는 걸까? 진짜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겉치레뿐이지 않았나? 말에 인플레이션이 생긴 것 같았다.    ...
고은
2020.09.21 | 조회 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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