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가족②] 다르다 다르다 하는데, 정말로 다른가?

명식
2020-09-16 18:31
429

 

  [청년과 가족②] 다르다 다르다 하는데, 정말로 다른가?
   - 문성환, 『사기와 가족, 고대 중국의 낯선 가족 이야기』를 읽고

 

 

  어렸을 때의 이야기다. 초등학생 때였나. 만화로 된 ‘초한지’를 읽다가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한고조 ‘유방’이 여느 때처럼 라이벌 ‘항우’에게 대패하고 달아나던 장면이었다. 장수도 병사들도 모조리 다 박살나 흩어지고 오직 유방과 그의 자식들만이 마차 하나에 의지해 도망치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며 유방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생각보다 마차의 속도가 더딘 것 같고 당장이라도 뒤에 항우가 나타나 쫓아올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이에 유방이 내린 결단은, 조금이라도 마차의 속도를 올리기 위해 자기 자식들을 길바닥에 내버리는 것이었다.
  그 대목에서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천하의 영웅이라는 사람이 자기 살자고 자기 자식을 길바닥에 내버린다고?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차를 몰고 있던 유방의 부하 ’하후영‘은 그 모습을 보고 마차를 세워 아이들을 다시 주워온다. 헌데 그 모습을 본 유방은 되레 길길이 날뛰며 아이들을 버리지 않으면 하후영도 찔러 죽이겠다며 겁박한다. 하후영은 그런 유방을 무시하고, 유방이 아이들을 계속 버릴 때마다 마차를 세워 아이들을 주워온다. 이 장면은 결국 유방이 포기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데, 그가 포기한 까닭은 뒤늦게 천륜을 깨달아서가 아니라 ’하후영을 찔러 죽이면 마차를 몰 사람이 없어서‘였다.

 

  문성환 선생의 책 『사기와 가족, 고대 중국의 낯선 가족 이야기』는 사마천의 역사서 『사기』, 그 중에서도 제후들의 가문 이야기를 다룬 ‘세가’편의 제환공과 진문공을 중심으로 이와 같은 고대 중국의 ‘잔혹한(?)’ 가족사를 다룬다. 형제들이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누고 한 핏줄끼리 몸을 섞는 근친상간이 횡행하는 모습을 보면 어렸을 적 나에게 충격을 주었던 유방의 ‘만행’은 딱히 특별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을 저지르는 이들이 적어도 역사서에 이름을 올릴만한 사람들, 즉 왕, 제후, 영웅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그 혼란스러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몇 가지 대답을 모색한다. 그중 가장 쉬이 떠올릴 수 있는 대답은 ‘시공간의 차이’다. 분명 전란의 시대였던 고대 중국과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같은 방식으로 가족이라는 개념을 해석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는 분명 설득력이 있고 우리의 혼란을 가라앉히기에도 충분하다. 헌데, 문성환 선생은 여기서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다를 거야. 다르겠지……그런데 정말 그렇게나 다를까?”

 

  다시 유방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사실 하후영은 유방의 분노에 마냥 침묵하지고만 있지는 않았다. 유방의 장수들은 본디 젊은 시절 깡패 두목이었던 유방과 형님 아우하던 한 동네 왈패들이었고 하후영은 그 옛적 기질을 한가락 끄집어내어 주군인 유방에게 역정을 낸다. “하찮은 짐승새끼들도 자기 자식 귀한 줄은 아는데 대왕은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그랬다. 구체적인 형태는 다르겠지만 부모들이 자기 자식을 아끼는 것도, 근친상간이 금기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또, 그 천륜이 짓밟히는 일이 심심찮게 일어나는 것 또한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자기 살자고 자식들을 파는 부모들이 요즘에는 없던가? 부모를 상대로, 형제자매를 상대로 패악을 부리는 이들이 요즘에는 없던가? 어쩌면 예나 지금이나 가족은 항상 중히 여겨지는 결속 집단이었고, 동시에 위태롭기 짝이 없는 그런 관계였던 것은 아닌가? 그렇다고 한다면, 가족이라는 것이 수천 년의 시간을 넘어 언제나 우리를 옭아매어 왔던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전복시키고 재배치하고자 했을 때 발생하는 효과는 우리의 삶과 사회의 구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사기』 세가편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미치광이 악한들이라서 그와 같이 가족의 질서를 어지럽히지는 않았을 것이며, 사마천이 그런 까닭에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제환공과 진문공은 모두 한 시대의 패자로 불리었다. 당연히 우리가 그들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갈 필요는 없겠지만은 가족이라는 문제에 대해 그들이 왜 그와 같이 행동했는가를 숙고해볼 필요는 있을 것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보며 혼란에 빠졌던 우리에게 있어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되돌아볼 필요도 분명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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