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회> 유학점검기

현민
2024-02-16 09:11
305

글쓴이 현민

친구들과 함께 동천동의 책방 우주소년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을 운영하며 스쿨미투집 <밀려오는 파도 막을수는 없다> 1권과 같은 이름의 공동체 탐구집 2권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독일에 삽니다.

 

 

 

 

 

 

유학점검기

 

독일에는 아우스빌둥(Ausbildung)이라는, 직장과 직업학교를 번갈아가며 배우는 제도가 있다. 영어로는 Apprenticeship이고 한국어로는 직업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회사에서 실질적인 교육을 받고 직업학교에서 이론적인 것을 배운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고 아우스빌둥을 하는 경우도 줄곧 있다. 독일의 오기 전 나의 계획은 일년 간 어학연수를 하고 출판사에서 아우스빌둥을 하는 것이었다. 최근 나는 출판사들에 이력서와 커버레터를 넣고 인터뷰를 다닌다. 자본주의의 빈틈에 껴서 살다가 제발 일 시켜달라고 스스로를 둘도 없는 인재처럼 소개하려니 어색하다.

독일에 와서 변한 것이 많다. 코코넛밀크로 맛있는 커리를 만들 수 있고, 알리오 올리오를 먹고, 핸드크림을 바르고, 외식은 잘 하지 않는다. 전에는 곁에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던 친구들과는 어쩌다 한번 연락한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과 익숙한 공간들이 생겼다. 한 해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돌아보는 마음으로 유학점검기를 쓴다. 나를 아시는 분들께는 그래서 얘가 지금 독일에서 뭐하며 사는건지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보실 수 있을 것 같다.

 

독일의 여름을 믿지 마세요

 

2022년 6월부터 9월 독일 지인 댁에서 아름다운 여름을 보냈다. 그즈음 나는 이러다간 익숙함에 속아 한국을 떠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여름이 지난 뒤, 나는 독일에 와서 살아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내가 태어난 나라, 하지만 낯선 타지.

한국에 돌아가 비자 받기를 기다리면서 4년간 일하던 서점을 정리했다. 떠난다고 동네방네 광고를 하고 같은 해의 초겨울, 독일에 다시 똑 떨어졌다. 한국보다 시원하고 오후 10시까지 해가 짱짱한 여름만 알았던 나는 물론 독일의 겨울 해가 그렇게 빨리 지는지 몰랐다. 독일 겨울 날씨에 대한 충격과 함께 집도 없었던 나는 척박한 겨울 3개월간 홈리스 생활을 했다. 사이비 교회에서 3주, 그 후로는 텅 빈 아파트에서 2달간 지냈다. 꽤나 유명한 사이비였는데 편견이 너무 없었던 건지 교회 안에 즐비한 힌트에도 거리낌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두 달 간 지냈던 아파트는 곧 독일로 이민 올 한국 가족이 미리 계약해놓은 집이었다. 전에 지내던 교회보다는 나았지만, 가구 하나 없는 곳에서 가끔 혼자 말을 하면 메아리가 울려서 공허함이 크게 느껴졌다. 세탁기가 없어서 손으로 빨래를 하고, 열심히 밥을 차려 먹는 일이 빈 시간들을 견뎌내는 데 중요했다. 외국에서 혼자 사는 게 그닥 나와 맞는 일은 아니라는 걸 깨달을 때쯤, 사람들과 연결되는 일이 간절해졌다.

 

독일은 어디를 가도 집을 구하기가 너무 힘들다. 한국에서 자취 집 구할 때는 그나마 고를 수라도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다른 감각이 필요했다. 집 구하는 앱을 통해 몇백 통 넘는 메세지를 보내야 한두 곳에서 인터뷰 연락이 왔다. 그러다 지금 사는 셰어하우스에 오게 되었다. 2월에 입주해 11명의 친구이자 가족을 얻고, 그들과 두텁게 신뢰할 수 있는 관계가 되면서 독일에서의 삶이 견딜 만 해졌다.

집을 찾고 나서는 아침에 일어나 어학원을 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수업을 듣고, 집에 돌아와 밥을 먹고, 숙제를 하고, 낮잠을 자거나 산책을 하고, 저녁엔 둘러앉아 수다를 떨면 하루가 금방 갔다. 혼자일 땐 이 겨울을 보내야 봄이 온다는 게 막막했는데, 겨울은 함께보내야 하는거구나 싶어졌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서 맨몸으로

 

한국이 지겨웠다. 조그만 동네에도 문제가 너무 많았고, 가족도 나의 삶을 자꾸 어렵게 만들었다. 어느 날은 거창한 명분을 위해 거리로 나갔고 어느 날은 숨이라도 쉬어보려고 친구들을 찾아갔다. 무언가 바꿔보려고 애를 쓰다가 두 권의 책도 만들어버렸다. 변화라는 게 금방 오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소진됐다. 상담 선생님은 말했다. 사실 상담을 해야 할 사람은 현민씨가 아니에요. 위로를 받으면서도 동시에 화가 났다. 그럼 내가 뭘 더 할 수 있단 말인가. 자꾸만 좁아지고, 슬퍼지고, 예민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새로운 공간에서 새사람을 만나도 새롭지 않았다. 어디 사는지,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어떤 이들과 친구인지, 어떤 가치를 중요시하는지에 따라 사람들은 나를 그것으로 받아들였다. 나를 소개하는 설명들이 가치가 없어지는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삶을 결핍이 아니라 풍족함으로 감각 할 수 있을까? 오랜 질문이었다.

 

독일에서의 3개월 이후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셰어하우스였다. 이사한 직후에는 밉보이지 않으려고 지나치게 긴장하고 친절하게 행동했다. 누군가 청소를 안 해서 다른 플랫메이트들이 화가 나면 대신 청소를 한다던지 말이다. 그러나 살아보니 플랫메이트들의 생활방식은 예의나 성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가끔은 묻지 않고 서로의 냉장고에서 음식을 꺼내먹었고, 제때 집 청소를 하지 않았고, 가끔은 싸가지 없어 보일 만큼 자기주장을 했다. 그런데 아무도 서로를 미워하지 않았다. 짜증은 나지만 왜 그랬는지 이유를 이해해보려고 했고, 그러다 서로의 습관이나 상황을 알게 되었다.

내가 지나치게 친절했던 이유는 내가 그들의 마음에 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에서였다. 이사 온 뒤 어떤 일에도 굳이 의견을 피력하지 않았던 나에게 플랫메이트들은 나의 의견을 계속 물으며 이곳은 너의 집이기도 하다고 말해주었다. 어느새 나도 배고프고 요리하기 싫을 때는 하루 종일 친구들에게 빌붙어 먹었고, 가끔은 집을 더럽힌 뒤 치우는 것을 잊어버렸고, 누가 청소를 제때 하지 않을 때는 문제제기를 했다. 미움받지 않으려고 애쓰기보다 그들이 나를 이해할 거라는 신뢰가 생겼다. 잘못을 했다면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다. 좋은 게 있으면 그들이 생각났고, 나누는 기쁨에 몰두했다. 12명이 모두 너무나 다른데, 함께 지낸 시간 동안 그들이 나와 완전히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24년 1월 1일 우리 중 몇은 함께, 몇은 따로 새해를 맞았다. 모두들 새해가 되자마자 단톡방에 메시지를 보냈다. 나도 할 말이 있었다.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받는지 너희로부터 배웠다고. 보내고 곱씹어보니 정말 맞는 말이었다. 느낀만큼 표현하고 받은 걸 느끼면 되었다. 그걸 이들로부터 배웠다.

 

집 계단에 걸려있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T의 그림

 

최근엔 첫 면접을 봤다. 나는 출판사에서 원고부터 책 홍보까지 전반적인 일을 경험하는 직종 Medienkauffrau Medien und Print(영어나 한국어로는 정확히 어떤 직업인지는 모르겠다)에 지원하고 있다. 독일어로 하는 첫 면접에 지나치게 긴장한 데다가 도움을 청하는 일도 어색해하는 나를 친구들이 잡아 앉혔다. 헝가리인이지만 독일에서 자란 티는 나와 면접 시뮬레이션을 시작했다. 그는 내가 말을 하다가 막히면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해주었고, 말이 막힐 때는 물을 마시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뼛속까지 독일인이자 네덜란드 컨설팅 회사에서 일을 하는 니키는 전날 함께 침대에 앉아 나와 책의 역사를 다시 재점검하면서 내게 어떤 경험과 강점이 있는지 되짚어주었다. 긴장감에 질린 나는 내가 너무 부족한 것만 같은데 자신감 넘치는 척하는 거 너무 싫다고 징징댔다. 니키는 이렇게 말했다. 너에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억지로 척할 필요 없다고, 하지만 네가 이미 해낸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자신감을 갖고 자랑스러워 할 수 있다고.

그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나의 서점와 내가 만든 책들이 더 좋아졌다. 혼자한 일은 아니지만 그들도 내가 없었다면 하기 힘들었을 일이다. 정상규범에 맞게 살지 않았다는 사실에 이해받기 어려울거라고 생각하면서 시도하기를 두려워했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날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온 후, 나는 처음 학교를 다녀온 아이처럼 경험담을 떠들었다. 그들은 내가 독일에서의 첫 인터뷰를 마쳤다는 사실에 오랫동안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우리가 함께 살지 않았던 시간이 무수한데도 그들이 오늘의 나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창문에 해가 들면 보이는 필름

 

지난 한 해의 기억이 선명하다. 일년 동안 새롭고 기묘하고 아름다운 일들을 종종 겪었다. 요새는 숨쉬기가 편하다. 가끔 살아서 좋다고 말하고 놀란다. 지도를 보지 않고도 길을 갈 수 있고, 먼 곳에 갔다 돌아오면 집 앞 대로에서부터 익숙함에 마음이 놓인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이 껄끄럽지 않아졌고, 어느 날은 잠깐 내가 동양인 여자애라는 사실을 잊기도 한다.

배낭 메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기보다 한 곳에 머무르면서 나의 공간의 이름을 부여하고 섬세하게 가꾸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어졌다. 새로움을 받아들이고 익숙함을 탐험하면서 작년과는 또 다른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가장 최근에 했던 모험

댓글 5
  • 2024-02-16 20:35

    저의 첫 해외여행지가 독일이었어요.
    독일에 도착했을 때, 여기서 살고 싶다. 딱 5년만.. 이런 생각을 했는데 ㅋㅋㅋㅋ
    익숙했던 곳을 뒤로 하고 완전히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저의 오랜 꿈이 생각나는 글이네요.
    저도 언젠간...!!!

  • 2024-02-16 20:36

    현민이에게 좋은 친구들이 곁에 있어서 안심이 됩니다.
    아마 현민이가 좋은 친구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2024년, 독일에서, 또 한국에서 우정을 쌓고 지지받고 지지하고 연대하며 함께 잘 살아 봅시다!!

  • 2024-02-17 08:22

    글에서 뭔가 변화의 바람이~~ 현민의 바람을 응원합니다 ~

  • 2024-02-17 10:50

    살짝 울컥한 느낌은 뭘까?
    늙은게구나...쩝!

    멋있다, 현민아.
    올해는 꼬박꼬박 글쓰자^^

  • 2024-02-18 07:21

    더 설명이 잘 되는 느낌! 그래서 읽기 좋았음^^

일상명상
다시 돌아온 ‘명상의 시간’   국민학교 저학년 때였을 것이다. 대략 1980년대 초반.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위치한 우신국민학교는 당시 한 교실에 60명 이상의 학생들이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오전형 콩나물도 있고 오후형 콩나물도 있던 시절. 몇 교시였을까? 수업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교실에는 "끼이이이이~ 끼~이이이~" 하는 바이올린 선율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곡명은 '타이슨의 명상곡' 또는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닐 수도 있다. 이어 "명상의 시간~"이라는 우아한 멘트가 전교에 울려 퍼지면 우리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명상의 시간'을 왜 갖는 건지 어떻게 명상하는 건지 아무도 알려준 적 없었지만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명상의 시간’은 학교 전체가 잠시 고요해지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끼이이이~이~"하던 그 바이올린 연주곡은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까지 극기훈련, 수학여행, 임원 수련회 등에도 종종 따라다녔다. ‘명상의 시간’은 손 안 대고 아이들을 차분하게 만들기 위한 학교 측의 전략이었을까? 공식적인 침묵의 시간 같았던 ‘명상의 시간’에 이따금 소리 내어 우는 친구들도 있었으니 어쩌면 누군가에겐 반성의 시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의문 가득했던 '명상 시간' 아니 추억 속의 '명상의 시간'. 오랫동안 잊고 있던 ‘명상의 시간’이 세월을 훌쩍 지나 어느 날 내게 다시 돌아왔다.             십 분을 견디기 힘들었다.   명상 방석 위에 앉아 반가부좌를 한다. 방석이 좋긴 하지만 잠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명상을 하거나 여행지에서 명상을 하는 경우엔 이불을 접어 엉덩이에 받치고...
다시 돌아온 ‘명상의 시간’   국민학교 저학년 때였을 것이다. 대략 1980년대 초반.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위치한 우신국민학교는 당시 한 교실에 60명 이상의 학생들이 콩나물처럼 쑥쑥 자라나고 있었다. 오전형 콩나물도 있고 오후형 콩나물도 있던 시절. 몇 교시였을까? 수업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교실에는 "끼이이이이~ 끼~이이이~" 하는 바이올린 선율이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곡명은 '타이슨의 명상곡' 또는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로 기억하고 있는데 아닐 수도 있다. 이어 "명상의 시간~"이라는 우아한 멘트가 전교에 울려 퍼지면 우리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명상의 시간'을 왜 갖는 건지 어떻게 명상하는 건지 아무도 알려준 적 없었지만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명상의 시간’은 학교 전체가 잠시 고요해지는 시간이었을 뿐이다.   "끼이이이~이~"하던 그 바이올린 연주곡은 중학교를 지나 고등학교까지 극기훈련, 수학여행, 임원 수련회 등에도 종종 따라다녔다. ‘명상의 시간’은 손 안 대고 아이들을 차분하게 만들기 위한 학교 측의 전략이었을까? 공식적인 침묵의 시간 같았던 ‘명상의 시간’에 이따금 소리 내어 우는 친구들도 있었으니 어쩌면 누군가에겐 반성의 시간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의문 가득했던 '명상 시간' 아니 추억 속의 '명상의 시간'. 오랫동안 잊고 있던 ‘명상의 시간’이 세월을 훌쩍 지나 어느 날 내게 다시 돌아왔다.             십 분을 견디기 힘들었다.   명상 방석 위에 앉아 반가부좌를 한다. 방석이 좋긴 하지만 잠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명상을 하거나 여행지에서 명상을 하는 경우엔 이불을 접어 엉덩이에 받치고...
도라지
2024.03.10 | 조회 329
기린의 걷다보면
경강선을 타고 여주역에 도착하니 11시가 넘었다. 세 번 째로 여강길을 걷게 되었는데, 제일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여강은 여주지역에서 부르는 남한강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남한강이 흐르는 길을 따라 여주 지역을 이은 여강길은 현재 총 11개의 코스가 있다. 1코스인 옛나루터길은 물길을 따라가며 옛 나루터를 통과하는 18키로 정도 되는 길이다.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때는 혼자 걸었는데, 이번에는 친구와 함께 걷게 되었다. 긴 코스이기도 하지만 외진 곳도 있어서 같이 걸을 친구가 있어서 든든했다. 여주 터미널까지 걸어와서 점심을 해결하고 영월루로 향해서 길을 나섰다.     영월루에 올라서 보면 아래로 남한강과 여주 일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강 건너 편으로 천년고찰 신륵사도 보였다. 여강길 4코스를 걸을 때는 신륵사에서 출발했다. 대부분의 사찰이 깊은 산속에 위치해 있는데, 신륵사는 강줄기와 너른 모랫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절 이름의 유래로 고려시대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진다니 천년이 넘은 시간의 두께가 느껴졌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의 수피에 푸른 이끼가 뒤덮여 있었다. 평일(월요일) 오후 한가롭게 경내를 거니는 사람들이 멀리서도 보였다. 친구가 그걸 보다가 뭔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운전해서 오면 먼 거리도 아니었는데, 신륵사까지 말이야. 근데 고작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 대놓고 시간을 보냈다니까.   자식 셋을 연이어 키워내느라 고단하던 어느 날의 순간, 집을 벗어나 바람 쐬러 나올 여유도 없었던 시절이었단다. 아름다운 풍광에 깃든 여유가 좁은 차안에서 시간을 때워야 했던 옹색한 순간을 환기시켰던...
경강선을 타고 여주역에 도착하니 11시가 넘었다. 세 번 째로 여강길을 걷게 되었는데, 제일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여강은 여주지역에서 부르는 남한강의 옛 이름이라고 한다. 남한강이 흐르는 길을 따라 여주 지역을 이은 여강길은 현재 총 11개의 코스가 있다. 1코스인 옛나루터길은 물길을 따라가며 옛 나루터를 통과하는 18키로 정도 되는 길이다.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때는 혼자 걸었는데, 이번에는 친구와 함께 걷게 되었다. 긴 코스이기도 하지만 외진 곳도 있어서 같이 걸을 친구가 있어서 든든했다. 여주 터미널까지 걸어와서 점심을 해결하고 영월루로 향해서 길을 나섰다.     영월루에 올라서 보면 아래로 남한강과 여주 일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강 건너 편으로 천년고찰 신륵사도 보였다. 여강길 4코스를 걸을 때는 신륵사에서 출발했다. 대부분의 사찰이 깊은 산속에 위치해 있는데, 신륵사는 강줄기와 너른 모랫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고, 절 이름의 유래로 고려시대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진다니 천년이 넘은 시간의 두께가 느껴졌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의 수피에 푸른 이끼가 뒤덮여 있었다. 평일(월요일) 오후 한가롭게 경내를 거니는 사람들이 멀리서도 보였다. 친구가 그걸 보다가 뭔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운전해서 오면 먼 거리도 아니었는데, 신륵사까지 말이야. 근데 고작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 대놓고 시간을 보냈다니까.   자식 셋을 연이어 키워내느라 고단하던 어느 날의 순간, 집을 벗어나 바람 쐬러 나올 여유도 없었던 시절이었단다. 아름다운 풍광에 깃든 여유가 좁은 차안에서 시간을 때워야 했던 옹색한 순간을 환기시켰던...
기린
2024.03.05 | 조회 340
동물을 만나러 갑니다
  얼마 전에 구청에서 이런 문자를 받았다.             몇 년 전에 본 뉴스가 떠올랐다. 그때도 멧돼지가 출몰했다. 멧돼지는 어느 고깃집에 들이닥쳤고 사람들은 깜짝 놀라 방방 뛰었다. 몇몇은 의자 위로 올라갔고 몇몇은 그릇이 잔뜩 깔린 테이블을 뒤집어엎었다. 몇몇은 칸막이를 들고 돼지를 출구로 몰았다. 멧돼지는 식당을 한바퀴 돌고 잠깐 버티다가 큰 저항 없이 식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영상에서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은 댓글 하나. "웃긴 게 식당 아수라장 된 이유 자세히 보면 멧돼지는 하나도 안 건드렸는데 손님들이 다 때려부셔서 아수라장 됨."   당시에 나는 돼지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고, 돼지의 '출몰'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웃어넘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안전안내문자에 등장한 동물이, 행정전산망에 포착된 멧돼지가 먼저 눈에 띄었다. '안전', '출몰', '유의' 등의 말들 하나 하나가 도드라져 보였다. 카페에서 문자를 보고 있는 '나' 또한 낯설었다. 돼지는 어쩌다 '출몰'하는 자리에 있을까. 나는 어떻게 '안전'에 유의하는 자리에 있을까. 돼지의 출몰이 왜 더이상 하나의 해프닝으로 보이지 않을까.         바이러스와 식물     코로나 시국에 세계를 달리 감각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확진자로 자가격리를 하던 나는 이렇게 썼다. "백신을 맞았음에도 통증은 상당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바늘로 찌르듯 목이 아프고 발열 증상은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러면서도 통증 뒤에는 순간적인 쾌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 그것은 단순히 내 몸을 수호하는 면역 세포와 내 몸을 침범한 바이러스 간의...
  얼마 전에 구청에서 이런 문자를 받았다.             몇 년 전에 본 뉴스가 떠올랐다. 그때도 멧돼지가 출몰했다. 멧돼지는 어느 고깃집에 들이닥쳤고 사람들은 깜짝 놀라 방방 뛰었다. 몇몇은 의자 위로 올라갔고 몇몇은 그릇이 잔뜩 깔린 테이블을 뒤집어엎었다. 몇몇은 칸막이를 들고 돼지를 출구로 몰았다. 멧돼지는 식당을 한바퀴 돌고 잠깐 버티다가 큰 저항 없이 식당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 영상에서 ‘좋아요’를 가장 많이 받은 댓글 하나. "웃긴 게 식당 아수라장 된 이유 자세히 보면 멧돼지는 하나도 안 건드렸는데 손님들이 다 때려부셔서 아수라장 됨."   당시에 나는 돼지보다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고, 돼지의 '출몰'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웃어넘겼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안전안내문자에 등장한 동물이, 행정전산망에 포착된 멧돼지가 먼저 눈에 띄었다. '안전', '출몰', '유의' 등의 말들 하나 하나가 도드라져 보였다. 카페에서 문자를 보고 있는 '나' 또한 낯설었다. 돼지는 어쩌다 '출몰'하는 자리에 있을까. 나는 어떻게 '안전'에 유의하는 자리에 있을까. 돼지의 출몰이 왜 더이상 하나의 해프닝으로 보이지 않을까.         바이러스와 식물     코로나 시국에 세계를 달리 감각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확진자로 자가격리를 하던 나는 이렇게 썼다. "백신을 맞았음에도 통증은 상당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바늘로 찌르듯 목이 아프고 발열 증상은 몸을 움츠러들게 했다. 그러면서도 통증 뒤에는 순간적인 쾌감이 찾아오기도 했다. (...) 그것은 단순히 내 몸을 수호하는 면역 세포와 내 몸을 침범한 바이러스 간의...
경덕
2024.03.02 | 조회 362
아스퍼거는 귀여워
  아이는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진통이 시작된 건 토요일. 39주 차인 만삭의 임산부가 절물휴양림으로 산책을 나갈 참이었다. 그 당시 젤 좋아했던 양념 돼지고기를 구워 먹고, 휴양림 주차장에 주차하는 순간 딱 느낌이 왔다. ‘오늘이다! 오늘 나온다!’ 뭔가 세상 처음 느껴보는 진통인데도 오늘인 거 같다는 느낌이 빡 드는 순간이었다. 다니던 산부인과에 전화해 진통 정도를 이야기하자, “그 정도로 아파서는 아이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좀 더 기다려보고 진통이 규칙적으로 오기 시작하면 병원에 들르란다. 나랑 남편은 그 길로 차를 돌려서 집으로 향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서 아기를 낳으면 한동안은 차가운 것은 못 먹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평소에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빠삐코를 사서 입에 물었다. 그리고 세차를 하고 미리 사둔 카 시트를 설치했다. 몇십 번 시뮬레이션을 돌린 탓에 출산하는 날 해야 할 것들이 메뉴얼화 되어있는 느낌이었다. 집에 들어가선 간단하게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통 밑에 있는 거름망까지 탈탈 털어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렸다. 조리원에 들고 갈 짐을 싸고 있는데 진통이 왔다 갔다 한다. 어느 정도면 병원에 가야 할까. 왠지 병원에 너무 일찍 가면 혼날 것 같았다. 그래도 편한 집이 낫겠지 싶어서 개그콘서트를 보고 있는데, 진통의 간격이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다. “이제 가자!” 비장한 마음으로 일어나 병원으로 향했다.     사실 처음에는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고 싶었다. 제주도에는 오랫동안 산파일을 하신 조산사가 계셨다. 내 주변의 몇몇 지인이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았고, 무통 주사도, 회음부...
  아이는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진통이 시작된 건 토요일. 39주 차인 만삭의 임산부가 절물휴양림으로 산책을 나갈 참이었다. 그 당시 젤 좋아했던 양념 돼지고기를 구워 먹고, 휴양림 주차장에 주차하는 순간 딱 느낌이 왔다. ‘오늘이다! 오늘 나온다!’ 뭔가 세상 처음 느껴보는 진통인데도 오늘인 거 같다는 느낌이 빡 드는 순간이었다. 다니던 산부인과에 전화해 진통 정도를 이야기하자, “그 정도로 아파서는 아이가 나오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좀 더 기다려보고 진통이 규칙적으로 오기 시작하면 병원에 들르란다. 나랑 남편은 그 길로 차를 돌려서 집으로 향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서 아기를 낳으면 한동안은 차가운 것은 못 먹는다는 말이 생각났다. 평소에는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빠삐코를 사서 입에 물었다. 그리고 세차를 하고 미리 사둔 카 시트를 설치했다. 몇십 번 시뮬레이션을 돌린 탓에 출산하는 날 해야 할 것들이 메뉴얼화 되어있는 느낌이었다. 집에 들어가선 간단하게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통 밑에 있는 거름망까지 탈탈 털어서 음식물 쓰레기를 버렸다. 조리원에 들고 갈 짐을 싸고 있는데 진통이 왔다 갔다 한다. 어느 정도면 병원에 가야 할까. 왠지 병원에 너무 일찍 가면 혼날 것 같았다. 그래도 편한 집이 낫겠지 싶어서 개그콘서트를 보고 있는데, 진통의 간격이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다. “이제 가자!” 비장한 마음으로 일어나 병원으로 향했다.     사실 처음에는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고 싶었다. 제주도에는 오랫동안 산파일을 하신 조산사가 계셨다. 내 주변의 몇몇 지인이 조산원에서 아이를 낳았고, 무통 주사도, 회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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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5 | 조회 368
윤경이는 마을활동가
    혼자 말고 함께     내가 사는 금천은 1995년 3월 구로구에서 분구하였다. 서울 면적의 2.1%를 차지하고 중구에 이어 두 번째로 작은 구이다. 그런데도 2022년 서울시 정신건강 지표조사에 따르면 금천구는 우울감 경험률(11.9%)과 자살률(28명/10만 명당)이 서울시 평균(7.3%, 21.4명/10만 명당)보다 높다. 면적은 작지만, 인구는 적지 않고 비교적 사회적 시설과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아서 신체적 건강이나 정신적 건강 수치가 서울시 평균보다 안 좋은 것 같다. 내가 마을 일을 시작하면서 들었던 충격적인 얘기도 우리 구 청년들의 자살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금천구에서 내가 무소속 마을활동가로서 그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연한 기회에 제안이 들어온 ‘노랑식탁’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노랑식탁을 기획한 ‘청춘삘딩’은 예전에는 청소년 독서실로 쓰던 공간이었다. 구청에서 그 공간을 없애려고 할 때 지역 주민들의 제안으로 기초지자체 최초의 청년활동공간으로 탈바꿈 한 곳이다. 도시재생과 거버넌스의 좋은 사례가 되는 청년들을 위한 반짝반짝 빛나는 장소다. 그런 곳에서 청년 1인 가구를 위한 밥상을 준비한다니 더욱 기대되었다. 2023년 6월부터 사전 준비모임을 가져 메뉴 선정과 시장 조사를 했다. 7월 한차례 테스트 파일럿 식탁을 준비한 후 8월 첫 주부터 본격적으로 가동했다.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총 16회, 160명 이상(중복 제외 47명)이 참여했고, 93가지의 메뉴를 선보였다.     이름은 노랑식탁이고 형식은 집밥을 차려주는 것이었지만, 실제 그 안은 마음건강을 케어하는 것이 주요한 목표였다. 금천구에 정착한...
    혼자 말고 함께     내가 사는 금천은 1995년 3월 구로구에서 분구하였다. 서울 면적의 2.1%를 차지하고 중구에 이어 두 번째로 작은 구이다. 그런데도 2022년 서울시 정신건강 지표조사에 따르면 금천구는 우울감 경험률(11.9%)과 자살률(28명/10만 명당)이 서울시 평균(7.3%, 21.4명/10만 명당)보다 높다. 면적은 작지만, 인구는 적지 않고 비교적 사회적 시설과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아서 신체적 건강이나 정신적 건강 수치가 서울시 평균보다 안 좋은 것 같다. 내가 마을 일을 시작하면서 들었던 충격적인 얘기도 우리 구 청년들의 자살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금천구에서 내가 무소속 마을활동가로서 그들에게 힘을 줄 수 있는 활동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연한 기회에 제안이 들어온 ‘노랑식탁’사업에 참여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노랑식탁을 기획한 ‘청춘삘딩’은 예전에는 청소년 독서실로 쓰던 공간이었다. 구청에서 그 공간을 없애려고 할 때 지역 주민들의 제안으로 기초지자체 최초의 청년활동공간으로 탈바꿈 한 곳이다. 도시재생과 거버넌스의 좋은 사례가 되는 청년들을 위한 반짝반짝 빛나는 장소다. 그런 곳에서 청년 1인 가구를 위한 밥상을 준비한다니 더욱 기대되었다. 2023년 6월부터 사전 준비모임을 가져 메뉴 선정과 시장 조사를 했다. 7월 한차례 테스트 파일럿 식탁을 준비한 후 8월 첫 주부터 본격적으로 가동했다.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총 16회, 160명 이상(중복 제외 47명)이 참여했고, 93가지의 메뉴를 선보였다.     이름은 노랑식탁이고 형식은 집밥을 차려주는 것이었지만, 실제 그 안은 마음건강을 케어하는 것이 주요한 목표였다. 금천구에 정착한...
김윤경~단순삶
2024.02.20 | 조회 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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