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와 라깡 2강 후기] 에라, 이 라깡같은 눔! ^^

히말라야
2015-01-16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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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음악

음악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파토스Pathos이다. 이것은 무언가의 Actio(Action)을 통해 만들어진 정서인데, 음악을 통해 누군가의 감정(I feel)이 타인에게 공감되고 객관화된다. 음악을 듣는 동안 욕망과 음악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잠시 생각해본다. 결국 음악도 누군가의 욕망일 텐데, 숨겨지거나 왜곡하지 않고 예술로 승화시켜낸 욕망은 불멸을 만들어 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월광에는 월광이 없고, ‘비창에는 슬픔이 없다. 그것은 또 다시 누군가 자신의 욕망에 따라 그 음악을 해석한 결과이다. 베토벤의 음악에는 제목이 없고, 번호만 있다. 욕망에는 제목이 없고, 번호만 있다. 우리도 우리의 욕망에 억지로이름과 제목을 달기보다 그저 번호만 붙여놓고 본다면 무수한 굴절과 왜곡이 줄어들지 않을까. 앞으로 발제를 할 때도, 후기를 쓸 때도, 에세이를 쓸 때도 그저 히말라야의 XX번째 글이라고 적어보는 건 어떨까. 음악을 들으며 음악을 듣지 않고 나는 나의 욕망에 따라, 요따구 생각을 했다.

 

2.

지난 시간 강의를 복습하는 시간. 프로이트가 꿈을 해석한 아주 유명한 일화조차 모르는 우리에게 깜놀하신 선생님께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조금 상세히 복습해 주셨다. 꿈은 소망의 텍스트인데, 꿈 사고(숨겨진 사고)와 꿈 작업에 의해 복잡결정(overdetermination, 알튀세가 한 말이라고 한다)된 것이라 그것을 해석해 내기가 어렵다. 내 소망인데, 내가 못 알아먹게 하기위해 여러 가지 생각을 하나로 압축하고 자리를 마구 뒤섞어 버리는 전치’displace의 기법을 사용한다. (후에 라깡은 이들을 은유와 환유로 바꾸어 말했다.) 그리고는 마치 안 꾸민 듯 시치미를 떼고 무대 위에서 상연하듯 표상화하여 꿈으로 보여준다. 그리하여 밤마다 왜곡된 욕망의 예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달 동의보감 강의를 들었었는데, 거기에선 꿈은 병증이라고 했다. 잠을 잘 때 사람의 기가 오장육부 속 각자의 자리로 완전히 돌아가서 쉬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눈과 머리주변에서 머물 때 꿈을 꾼다고 한다. 금지되어 해결하지 못한 욕망과 쉬지 못하는 기, 뭔가 다른듯하지만 또 다시 생각해보면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아무튼 꿈은 이루어진다가 아니고, 절대로 아무것도 꿈꾸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걸로!

 

3.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뒤바뀐 오이디푸스 신화

금지되고 억압된 것은 반복강박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그런 금지가 일어나게 된 원인이 된 원 장면으로의 회귀가 자꾸만 일어난다는 것. 프로이트는 이런 히스테리 증상의 원인으로 그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콤플렉스는 사랑과 미움의 양가감정을 나타낸다)를 가설로 세운다. 남자아이는 원초적으로 어머니를 사랑-대상 집중investment-하는데 그러다보면 어렴풋이 어머니의 아내인 아버지-자기보다 센 경쟁상대-로부터 거세의 위협을 느껴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게 된다는 것. 그러나 억압된 욕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어머니와 닮은 여자에게로 전이되고, 아이는 센 아버지와 자기를 동일시하고 남성성을 강화한다. 아이가 아버지에게 느끼는 감정이 바로 콤플렉스한데, 아버지처럼 세지고 싶기에 선망하기도 하고 자신의 경쟁자이기에 미워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본래 오이디푸스 신화에서는 오이디푸스의 아버지가 아들이 태어나면 자신을 죽일 거라는 신탁이 두려워 아들을 죽이려고 한다. (권력자의 두려움) 그런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아들이 아버지가 자기를 거세할까봐 무서워서 알아서 기는 것이니(약자의 두려움) 프로이트는 이름만 가져왔을 뿐, 신화의 내용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셈이다. 근데, 궁금하다. 말해지지 않은 어린 아들의 욕망과 말해지지 않은 거세의 위협을 어떻게 알았지?

 

4. 죽은 아버지가 더 무섭다

나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듯, 프로이트는 다시 아주 오래전에 맨 처음으로 죽은 아버지 이야기를 해준다. 원시적 관습에서 토템동물은 신성시 되는데, 의례를 거행할 때에만 예외적으로 그 동물을 잡아먹는다. 프로이트는 이런 토템숭배가 족외혼과 결부된다고 지적하면서, 동물을 잡아먹는 행위가 형제들이 단합해 최초의 모든 여자를 독점하는 원초적 아버지를 죽이고 잡아먹은 행위의 재현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강력한 아버지를 죽이고 나서 생각해 보니 누군가 그 자리에 가면 또 죽겠구나 싶고,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데 계속 자리를 비키지 않아 미워서 죽여 놓고 나니 아버지가 잘해줬던 기억도 나고...그래서 그 자리를 비워 놓은 채 근친상간을 금하기로 결정했다는 것. 아버지를 죽이고 나서도 결국 아버지의 여자들을 차지하지 못하고, 아버지 말을 더 굳게 지키는 도덕을 만들었다. 어쨌든 아버지의 억압은 계속되는 것이며, 도덕적인 사람일수록 더 많이 억압될 수밖에 없는 것.(도덕의 역설) 조금 웃기지만 슬픈 이야기를 다시 말해보면, 도덕은 죽은 아버지이며, 강력한 누군가가 다시 나타나지 못하게 약자들이 단결하는 것이 우리의 사회적 유대인 것이다. 다시 써 놓고 보니, 니체의 도덕의 계보와 비슷하다. 양성애가 아니라, 이것 때문에 프로이드가 당대에 좌파로 불린 건 아닌가 싶기도. 아무튼, 그래서 그 기억은 유전되어 애들은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것이다!

 

5. 아버지의 이름으로 ; 라깡의 구조화된 오이디푸스

라깡은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를 가족 삼각형으로 구조화하고, 욕망의 본성에 대한 해명보다는 주체형성에 대한 보편적 이론으로 만들었다. 진짜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이 아니라, 기능화 된 역할로 오이디푸스를 설명하고, 인간은 누구나 기능적인 어머니와의 관계인 상상계로부터 기능화 된 아버지(아버지의 이름)와의 관계인 상징계로 들어가야만 인간화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nom은 그 유명한 안 된다non’이다. 모든 것이 다 되다가 안 된다라는 말을 들을 때, 알게 되며 인간의 사고는 분열(되다/안되다)되고 보편화된 언어를 사용하는 규범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다. 라깡에게 오이디푸스의 극복은 주체인 어린아이가 법과 질서의 체계인 상징계에 성공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라깡은 아버지가 세 명이다. 상상적 아버지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아버지고(프로이트의 거세위협을 당한 적 없는 원초적으로 센 아버지) 내가 동일시하고 싶은(어머니의 사랑의 파트너가 되는) 아버지이다. 상징적 아버지는 대타자인 질서다(프로이트의 죽은 아버지). 요 둘 간의 간극을 표현하는 것이 ‘$ <> a’ 라는 요상한 공식인 것 같은데, 자신의 욕망을 결코 말로서 요구하지 못하는 차이에서 생겨나는 욕망이라는. 아 어렵다! 그래서 나는 아직 라깡이 밉다! (요즘 누군가 나에게 어려운 말로 시비를 건다면 에라, 이 라깡같은 눔아!’라고 불러줘야쥐!)

 

6. 연극은 이제 그만~!

그럼 실재의 아버지는? “너 자꾸 엄마 좋아하면 거시기 잘라버릴 거야!”라고 위협하는 사람인데, 실제로 그런 말을 내뱉는 인간(동물은 있을 수도!)은 없으므로 실재의 아버지는 늘 부재하다. 근데, 부재한 걸 왜 실재의 아버지라고 한 걸까? 프로이드가 분석한 꿈이 욕망의 연극처럼 상연되었듯, 라깡도 금지와 금지된 대상을 둘러싼 사건들도 연극이라고 지적한다. 자신의 욕망에 금지를 행하는 실재의 아버지는 부재한데, 우리는 마치 누군가가 계속 나에게 금지하는 것처럼 연극을 하고 있는 것이다. 거세위협을 가정하고 금지와 욕구 간에 욕망이 생겨나는 것인데, 실상 거세하는 자는 없다. 프로이트와 라깡을 잘 공부하고 싶은데(욕구),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금지) 내가 마음먹은 대로 잘 안 되는 것(결핍)도 사실은 나의 연극이라는 얘기다. 솔직하게 걍 내가 공부하기 싫어서 안하는 거라는 실망스러운(?!) 사실에 직면하자. 그게 쉽잖아~!

댓글 2
  • 2015-01-16 12:49

    제목만 보고 히말라야님에게 낚였네요.. 후기가 더 어려워요 엉엉 ㅜㅜ

  • 2015-01-17 14:50

    오늘 <소학>의 명륜편의 부부유별장을 읽었어요. 

    부부는 인륜의 시작인지라..  

    부의 연을 맺는 것은 멀리 있는 자를 가까이 하여 분별을 두터이 하는 것이라고 하는 부분이나(족외혼), 

    부자 사이의 친함이 이루어지려면 부부 사이의 분별이 있어야 한다는 부분을 읽으면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떠올린 건 자연스러운 일이겠지요?

    유가의 부부유별은 바로 인륜의 시초, 부부가 분별없이 친하면 결국 부자유친을 해친다는 것이었어요.

    부부란 부자를 낳는 매개이기도 하지만, 세대와 세대를 이어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려면

    부부가 너무 친해도 안된다는 것이겠지요.

    농경사회에서 대가족 혹은 씨족 공동체 안에서의 부부유별의 질서가

    산업자본주의사회에서는 부모와 자식이라는 가족의 삼각형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치환되는 것인가..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답니다.^^(웃자고 하는 이야기여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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