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이 예술 7회] 한자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

동은
2024-01-11 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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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에서 느껴지는 모든 것

 

동은

 

 

 

1. 한자의 느낌적인 느낌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 말 단어의 상당수는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서서히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게 되면서 이른바 우리나라 고유어와 한자어의 구분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에 어떤 한자가 사용되었는지 알아차리기가 어려워졌다. 예를 들면 ‘유람’과 ‘유랑’은 ‘여유롭게 돌아다닌다’는 어감이 비슷해보이지만 각각 놀 유遊와 흐를 류流로 다른 한자가 사용되어 ‘놀면서 돌아다니다’와 ‘목적없이 물 흐르듯 다닌다’는 차이가 있다. 이런 경우도 있다. ‘사전’은 ‘단어들을 모아 그 의미를 밝혀놓은 책’으로 말씀 사辭와 책 전典을 쓰는데, ‘백과사전’은 ‘여러 분야의 지식을 압축해 분류하고 모아 현상과 상태 자체를 모아 설명해 놓은 것’이라 이 때는 일 사事자를 사용한다. 이 事는 원래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 한자였는데 오늘날에는 어떤 사건이나 일 자체를 의미하기도 해서 ‘일事’이 포괄하는 용례를 살펴보면 한자 하나로 얼마나 다층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아시아의 근대화와 함께 중국 철학은 서구에서 성립된 근대 학문 체계로 편입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중국 철학을 중국 자체의 시선으로 바라보려 했던 마르셀 그라네는 『중국 사유』에서 한자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중국의 단어는 하나의 개념에 부응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단순한 기호도 아니며, 문법이나 통사의 기교를 통해서 생명을 부여받은 추상적 기호도 아니다. 그것은 불변의 단음절 형식과 중성적 양상 속에 작용을 미치는 데 필요한 모든 힘을 지니고 있다. 단어는 작용력의 소리로 된 조응물이며, 또한 작용력의 표상이다.”

 

  한자의 개수가 많은 이유는 글자마다 상응하는 구체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글자들이 표현하는 의미나 개념들은 서로 겹치면서 모호한 의미의 경계를 넘나들기도 한다. 또 ‘끊다’는 의미를 가진 한자만 해도 다섯 개(切, 絕, 截, 絶, 撧)가 넘어가는 것처럼 하나의 같은 개념을 표현하는 여러 개의 글자가 있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 한자들도 같은 뜻을 가졌음에도 그 세세한 결을 살피면 모두 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르게 사용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흐를 류流, 놀 유遊, 말씀 사辭와 일 사事, ‘끊다’의 여러개의 한자를 아는 게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 한자를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비슷한 듯 서로 다른 한자들 사이에서 빚어지는 차이들을 살피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것들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아차릴 때 느껴지는 그 ‘느낌’이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감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한자’와 관련해서 느끼는 만큼 세상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우리의 언어가 다른 글자가 아닌 그 글자가 꼭 사용된 이유, 어떤 단어를 이루는 요소들로서 한자들이 각각이 어떤 의미연관 속에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2. 느낌感을 알아차리기覺

 

  ‘느낌’은 우리 신체의 다섯가지의 눈, 귀, 코, 입, 피부와 관련이 있다. 매일 이 신체기관을 창구로 많은 것을 느낀다. 물론 일상에서는 이 다섯가지 창구로 들어오는 느낌 중에서 크게 두드러지는 것이 없다면 뭔가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코가 매번 들이쉬는 숨, 주변에 들리는 모든 소리, 피부에 닿아있는 모든 촉감을 느끼려면 그 느낌에 깊이 집중해야 한다. 요컨데 오감은 신체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느낌’은 한자로 느낄 감感이다. 한자는 느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感에는 咸과 心이 함께 있다. 咸은 무기를 든 병사들이 긴 창을 바닥으로 내리 꽂고 소리를 내면서 기합을 넣는 모습이다. 어릴 때 태권도 학원에 가면 사범님은 발차기를 할 때, 주먹을 뻗을 때 기합을 넣으라고 하셨다. 그러면 나는 온 기운을 손 끝과 발 끝으로 모아 불꽃을 날리듯 뻗으며 “하!”하고 소리를 냈다. 그 경험을 돌이켜보면 기합을 넣는다는 것은 내가 가진 기운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느낄 감感은 내가 가지고 있는 느낌을 마음心으로 모은다는 의미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고대 사람들은 ‘느낌‘을 이렇게 마음心과 연관지었는데, 心 자체가 심장의 형태를 본따 만들어진 한자라는 점에서 사람의 마음이 신체와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가끔 내가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 표현하는게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럴때면 그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신체적인 반응이 일어나기도 한다. 얼굴이 빨개지거나, 숨이 가파오르거나, 침을 삼키게 되거나... 아니면 그 느낌의 주변을 탐색한다. 부대낀다거나, 슬프다거나, 껄끄럽다거나, 뿌듯하다거나. 이렇게 느낌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살피다보면 그 정체를 찾을 수 있다. 느낌이라는게 워낙 보이지도 않고 불문명하기 때문에 그 정체를 분명히 밝혀내긴 힘들지만 고대사람들은 그 정체가 마음과 연관되었다고 생각했다. 기합으로 기운을 하나로 모으는 것처럼, 신체의 느낌을 마음으로 모아 그 정체를 깨달을覺 때, 그것을 감각이라고 한다. 느낌의 정체를 찾기 위해 집중하며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이 ‘감각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느낌은 일상적인 신체의 감각처럼 쉽게 흘러가버린다. 그렇다면 오감은 수많은 느낌들 중에서도 가장 알아차리기覺 쉬운 대표적인 느낌이 아닐까 한다.

 

 

 

3. 아픔痛에는 ‘울림’이 있다 

 

  아이들과 감각을 주제로 수업을 할 때 처음으로 다룬 감각은 촉각이었다. 촉각은 피부에 닿는 느낌을 뜻한다. 피부는 우리 신체의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런지 수많은 층위의 느낌을 겪는다. 매끈함, 끈적함, 까슬함, 따가움, 욱신거림… 피부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 수많은 느낌들 중에서도 ‘아픔‘을 잘 느끼는 것이다. ‘아픔’은 가장 즉각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위협이기 때문이다. 이 ’아픔‘을 통痛이라고 하는데 이 한자를 살펴보면 ‘아픔’의 성질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痛은 병들어 침대에 누워 있는 모습을 뜻하는 녁疒과 댕댕 울리는 종甬이 함께 있다. 종소리는 청각으로 느끼는 것인데 왜 ‘아픔’에 쓰이는 걸까? 그것은 아픔이 가지고 있는 ‘울림’의 성질 때문이다. 우리는 ‘아픔’을 느끼면 아무리 작은 부위더라도 온 몸으로 전해진다. 순간적인 자극이 온 몸으로 마치 종이 울려 퍼지듯 전해지는 것이다. 아픔은 그 ‘울림’이 가장 빠른 감각이다. 그래서 촉각을 구분 할 때 우선 우리는 아픈지 안아픈지를 가장 빠르게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울려퍼지는 아픔의 성질을 신체기관이 아니라 마음의 영역으로 바라본다면 훨씬 더 넓은 규모로 그 울림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바로 신체 내부의 울림에서 외부로 퍼지는 울림이다. 수업에서 가장 먼저 촉각에 대해서 다룬 이유는 한자가 보여주는 이런 아픔의 성질 때문이었다.

 

  언젠가 누군가를 이해하는 일이란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어떤 일을 직접 겪지 않는 이상, 누군가의 생각이나 감각을 온전히 이해한다고 여기는 것은 오만이었다. 설령 직접 겪었다고 하더라도 그 일이 다른 사람과 같다고 얘기할 수도 없다. 특히나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이해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아픔은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 여러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이때, 감정은 감각과 다르다. 당혹감, 불안감, 불쾌감 등등... 이런 감정들은 앞서 얘기한 ‘느낌의 작용’의 결과들이다. 누군가의 이런 느낌의 작용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극단적이긴 하지만 이런 생각은 일종의 포기였다. 

 

 

  아픔이 가지고 있는 울림의 성질이 외부의 다른 이에게도 전해진다면 무엇이 전해질까? 분명한 것은 전달되는 것이 ’통증‘은 아니라는 점이다. 통증은 ‘내가’ 느낀 것이기 때문이다. 통증이 전해지지 않는다면 통증이 불러 일으키는 감정이 전해지는 것일까? 아니다. 감정 또한 느낌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그보다 전, 감정을 이해하기 이전에 감정을 이해하기 위한 여러 요소가 있다. 그 요소가 바로 정서情緖다. 감각과 감정, 정서는 모두 다른 것을 의미하는데 그 중에서도 정서는 실마리 서緖를 사용해 느낌의 실마리를 의미한다. 나는 아픔이 가지고 있는 울림의 성질이 이 실마리를 외부로 전달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것을 느낄 수 없더라도 우리가 ‘느끼는 일’은 순간마다 계속해서 일어난다. 내가 아픔을 느낄 수 있고, 아픔 자체가 외부로 자꾸만 퍼져나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누군가의 아픔을 지레짐작하거나 그 정서를 통해 어떤 감정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나는 痛을 통해 느낌 자체가 다른 이에게 전달되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다, 없다보다도 나에게 전달된 느낌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걸 알았다. 통이 보여주는 아픔의 성질을 생각해보며 누군가를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희의적인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4. 정신운동을 통한 이해

 

  마르셀 그라네는 중국어가 감정을 일으키고 마음을 감동시키는 데 놀라운 힘이 있다고도 했는데, 사실   한자의 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중국 고대 사람들이 처음부터 마음에 대해 고민한건 아니었다. 마르셀 그라네가 말하는 힘은 한자로 할 수있는 다채로운 정신운동에서 일어나는게 아닐까 한다. 이번 글에서 살펴본 ‘느낌’과 관련된 다양한 한자들만 보아도 눈에 보이지 않는 느낌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일을 구분하고, 그 모든 과정이 ‘실마리’를 찾아내는 일이라고 한 것과, 아픔이라는 문자에 종모양을 담아 추상적이지만 ‘울림’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이 일련의 ‘정신운동’이 감정을 다루는 능력을 길러주지 않았을까?

   

“상형문자가 원래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즉 어원적 재구성이 상상적인 것인지 정확한 것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본질적인 것은 문자가 주는 느낌 그 자체, 즉 개념들이 진정한 표상과 결부되어 있다는 느낌 그 자체다.”

 

  한자마다 담겨있는 개념이나, 개념을 옮겨놓은 한자의 자형을 들여다보면 그 시를 읽을 때나 떠오르는 은유적인 비유나 아득하게 현학적으로 느껴지는 표현들을 볼 때가 있다. 그것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원래는 무엇이었는지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우리와 관계되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 복잡하고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 기원을 명확히 찾을 수 없는 한자 속에서 우리는 사유의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한자는 굉장히 감각적인, ‘느낌적인 느낌’의 문자다. 눈으로 읽고, 그 형상을 이해하고, 그 형상의 실제를 떠올리고, 그 실제를 통해 다시 한번 한자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리고 나는 이 정신운동이 우리의 ‘느낌’을 사유하는 일과도 멀지 않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내가 아이들과 하는 수업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전달되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않는 자세로 정신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다양한 실마리를 만들어내는 일일 것이다.

 

댓글 4
  • 2024-01-12 08:57

    재미있네요. 한자가 정동과 감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문자 그 자체가 이미지여서 그런 것일까요?
    생각해보면 우리말의 경우는 글자를 볼 때가 아니라 음성으로 전환될 때 정동이 일어나는 것 같아요.
    한자는 시각적으로 감응이 일어나고 우리말은 청각적인 감응이 더 강한 것 같은데.. 표음문자와 표의문자의 차이일까요?
    아무튼 한자의 특이성과 다른 문자와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인 것처럼 읽히는데, 맞나요?
    그런데 정신운동이라는 말이 쏙 들어오질 않네요. 감응? 정신활동이 포함하는 모든 것?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 2024-01-13 18:24

      ㅋㅋㅋㅋㅋ 요요쌤이 이렇게 물음표 가득한 댓글을 처음 보는 것 같은데요? ㅋㅋㅋㅋ
      이번 글은... 한자의 특이성에 조금 더 중점을 두고 싶었어요.
      한자 자체가 지금까지 쓰이는 언어중에서는 유일한 표의문자여서 그냥 한자 자체가 다른 문자와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저도 정신운동이 참 애매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감응도 가까운 말일 수도 있고 그냥 언어와 사용하는 문자가 우리의 다양한 인지에 영향을 미치는데 제 언어로는 그게 ‘느낌‘정도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연상작용? 인지반응? 고민하다가 그냥 정신운동... 이렇게...

  • 2024-02-19 01:06

    지난 번 한문이 예술 시간에 아이들이 먹을 갈고
    붓으로 자신의 글자들을 쓰는 걸 보면서 뭔가 찌릿찌릿 했습니다.
    뭔가 느낌적인 느낌??
    한자한자 한자로 풀어가는 이야기에
    점점 노하우가 쌓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2024-03-17 23:55

    다음 글도 기다려지네요!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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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띠우
2024.02.19 | 조회 330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청량리
2024.02.19 | 조회 199
논어 카메오 열전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애공(노나라 임금)이 물었다. “어떻게 하면 백성이 복종합니까?”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합니다. 부정한 사람을 등용하고 모든 정직한 사람을 버려두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哀公問曰 何爲則民服 孔子對曰 擧直錯諸枉 則民服 擧枉錯諸直 則民不服)「위정,19」   공자 말년의 군주   공자가 14년의 주유를 끝내고 노(魯)나라에 돌아왔다. 이제 막 약관의 나이를 지나고 있던 애공(哀公)은 68세의 공자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옷차림은 유자(儒者)들의 복장인가요?” 공자가 대답했다. “제가 어려서 노나라에 있어서 소매통이 넓은 노나라의 옷을 입었습니다. 커서는 송나라에 있어서 송나라의 장보관을 썼습니다. 제가 듣기에 군자는 널리 여러 곳을 다니며 배우지만 고향의 옷을 입는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유자들이 복장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魯哀公問於孔子曰 夫子之服 其儒服與 」孔子對曰 丘少居魯 衣逢掖之衣 長居宋 冠章甫之冠 丘聞之也 君子之學也博 其服也鄉 丘不知儒服)   이는 『예기(禮記)』 「유행(儒行)」의 첫 장면으로 이후, 애공이 유자들은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묻고 공자가 이에 답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애공과 공자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이런 글의 형식은 일종의 글쓰기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애공과 공자가 만나 실제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주를 단 정현(鄭玄,127년~200년)은 이때를 공자가 주유를 막 끝내고 노나라에 귀국한 직후라고 보았다. 당시 공자는 성공한 정치가는 아니었지만 명망 있는 인사였다. 그런데 공자를 만나자마자 애공이 처음 물은 것이 그의 옷차림이라니. 이를 통해 애공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나름 상상해 볼 여지가 있는 듯하다. 애공(哀公)의 이름은 장(將)이다. 혹 장(蔣)이라고도 한다. 정공(定公)의...
진달래
2024.02.08 | 조회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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