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클리드 기하학을 왜 읽을까? - 1회차 후기

여울아
2023-07-31 04:23
282

여름방학 단기세미나로 읽는 <유클리드원론>, 다시 신자진(申子辰)이 뭉쳤습니다. 

 

갈릴레이의 <TNS>를 어찌어찌 끝내고 <유클리드원론>을 읽기전 2주간의 방학 동안 진공묘유님은 명상센터로 떠나며, 다른 분들이 우리의 공부에 합류하길 기도하겠다고 했으나... 기도발보다 무서운 <유클리드원론>이라는 것만 입증된 셈입니다!! 저는 최근 몇 년간 여름엔 과학이나 수학책처럼 평소 읽지 않을 것 같은 책들을 읽으며 여름을 나보자고 단기세미나를 열었었는데요. 올 여름을 끝으로 이제 더이상 여름방학 세미나는 열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숨이 턱턱 막히는데, 무슨 책인가 싶어서 말이지요. 게다가 이번 책은 새로운 신청자는 늘지 않았지만 주변에서들 핫했던 모양입니다. 곰곰님이나 진공묘유님은 도대체 왜 "유클리드기하학"을 읽느냐질문공세를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한동안 왜 기하학을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 얘기를 나눴습니다. 

 

정의1. 점이란 부분이 없는 것이다.

 

2023년 뜨거운 여름, 제가 기하학과 씨름하리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간만에 기하학이라는 말을 되새긴 것은 작년 여름 문탁에서 열린 김상욱 교수의 강좌에서였습니다. 그는 양자역학을 얘기하기 위해 기하학의 첫번째 정의 "점은 부분이 아니다"로부터 시작합니다. 여기서 부분이 아니라는 의미는 더이상 쪼갤 수 없다는 것이며, 이는 오늘날의 원자 개념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이었습니다. 기원전 300년 전 고대그리스의 수학이 지금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점은 부분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점이 모여 선이 될 수도 없습니다. 적어도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말이지요. 나중에 데카르트의 좌표계에서 점은 위치를 갖는 값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에서도 비슷한 시기, 전국시대 묵자들의 과학책이라 불릴 만한 <묵경> 두 번째 정의에서 부분과 전체에 대한 정의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이 청대에 정리된 것임을 감안하면 <원론>을 비롯한 서양의 수학과 과학기술이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묵경>의 순서나 체계가 다분히 의도적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2천년 간 가치가 폄훼되거나 축소되었던 중국 과학기술의 성과를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던 셈입니다.

 

기하학에 대한 관심에 더 불을 지른 것은 작년 여름 단기세미나에서 읽은 <미적분의 힘>이라는 책 때문입니다. 정말정말 미적분이 뭔지도 모르는 제가 미국에서 히트한 수학 대중서니까 좀 쉽지 않을까 싶어 골랐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온통 "기하학" 얘기뿐이었습니다. 미적분학은 기하학으로부터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의2. 선은 너비가 없는 길이이다. 

 

<원론>에서 선은 직선이거나 곡선입니다. 이 선들에 너비가 없다는 것은 폭이 없다는 것이고, 다만 길이만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정삼각형, 직사각형, 마름모, 마름모꼴, 사다리꼴 등 다양한 직선뿐 아니라 원과 반원에 대한 정의도 모두 선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유클리드 기하학 원론에서는 원의 넓이를 구하지 못하고, 이후 기원전 250년 경 아르키메데스가 "극한"이라는 무한 원리를 이용해서 원의 원주 길이를 계산하고 파이 값을 구했습니다. 여기서 무한 원리란 원이나 구와 같은 곡선 형태를 무수히 많은 직선과 평면으로 깎아서 근사한 모양으로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어떤 곡선도 무한히 쪼개면 직선과 평면으로 계산할 수 있게 됩니다. 이때 무한히 작게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고, 이것을 통해 무한히 많은 조각의 극한값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조각낸 값들을 합치면 원이나 곡선의 면적을 구할 수 있게 됩니다. (미분=>적분)  

 

그런데 저는 <원론> 정의1과 2를 읽는 순간 아르키메데스에게 무한이라는 영감을 준 것은 결국 기하학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점은 부분이 아니기에 선으로 이을 수는 없지만, 대신 무수히 많은 점들이 선에 놓일 수 있습니다. 특히 정의 2에서 선에 너비가 없다는 것은 점과 마찬가지로 우리 눈에는 보이지만 없는 셈이고 또 없지만 있는 셈입니다. 이렇듯 너비가 없는 선들이기에 아르키메데스는 어떤 곡선이든 무수히 나눌 수 있게 된 것 아닐까요. 

 

3. 우리에게 과학공부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최첨단 과학의 시대. 똑똑한 과학자도 많은데 굳이 문외한인 나까지 과학 언저리를 헤매고 있느냐고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다행이 얼마전 유시민 작가가 <문과남자의 과학공부>라는 책 한 권 분량으로 저와 같은 물음에 응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추정해봅니다.(안 읽어봤지만요 ㅎㅎ) 우리에게 과학공부가 필요한 이유는 과학적 사고가 아니라 비판적 사고가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번에 문탁에서 AI강좌를 들으면서도 CHATGPT와 같은 과학기술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도 지나친 낙관도 아닌 방식에 대해 다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부디 우리의 공부도 언젠간 친구들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다음 시간에는 토마스 히드의 <기하학원론>해설서를 같이 읽기로 했습니다. <기하학원론>은 유클리드? 에우클레이데스?(둘다 같은 이름이라고 한다) 혼자 지은 책이 아니라 당대 수학적 성과를 집대성한 책이라고합니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 당대 철학자, 역사학자, 수학자들의 견해가 어떻게 다르고 유클리드가 어떤 방식으로 수렴하고 있는지 등을 자세히 비교하면서 읽으려고 합니다. 

 

  • 읽어올 분량 : 해설서 79까지 읽어옵니다. 명제(법칙)로 가기 전에 정의와 공리 등 앞부분을 꼼꼼하게 읽기 위해 나눠 읽습니다.   
댓글 4
  • 2023-07-31 07:14

    올해 과학책으로 이렇게 인생이 괴로워질줄 저또한 몰랐습니다만.... 합의 무서움과 강력함을 또한 크게 깨달았지요. 이 어마무시한책들을 합으로 엮여서 읽지 않으면 인생에서 저혼자 과연 어찌 읽을까요? 그런데 이 단순한 원론이 고전인 이유를 너무나 많은 곳에서 숨결마다 저는 느낍니다. 결론은 언제나 단순하다! 는 말은 언제나 옳습니다.

    저는 정의들에 자꾸 철학을 대입해보게 되는데.... 수학이 계산과 증명의 옷을, 과학이 관찰과 실험의 옷을 입고 태어난것이 결국 철학이기 때문 이라는 말에 동의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최소한 내 삶을 잘 못 들여다본다!!! 하시는 분들은 관찰과 실험으로 시작하는 과학부터 하시면 된다~ 싶습니다.

    부분이 없는 점, 너비가 없는 길이의 선

    부분이 아닌 단 하나의 점이 되어라!
    나아가는길은 옆길, 샛길이 아니라 방향성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리라! 부처님 보다 몇백년 후 이지만, 유클리드는 삶의 의미를 기하학적 코드로 심어놓았다고 계속 가슴으로 느끼고 있습미다. (머리로 잘 안 읽힌다는 뜻이죠. ㅋㅋㅋㅋㅋㅋㅋ)

    우리는 이미테이션게임속 앨런 튜링처럼 그 우주의 강력한 암호를 해석하는 중대한 임무를 완수하는 중이구요. ^^ 아마도 이런류의 책은 21세기의 인강형태가 아닌 우파니샤드적으로 전수되어야 하나 봅니다.

    면,선,점의 순서로 도형을 보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점,선,면으로 재해석한 유클리드.
    세상의 일들은 무언가의 위에 다른 무언가를 쌓고, 늘 새로이 세상을 해석해 나가는 일인것 같습니다.

    점선면수업은 또다시 지금 호암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김환기의 전시회로 이어졌습니다. 초기 한국 ㅡ 파리시절 ㅡ 뉴욕시절로 이어지는 그의 그림전시 자체가 그가 어떻게 아리스토적으로 면선점을 따라갔는지 아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결국 적분에서 미분으로의 전환 아닐까요? 세상을 미세하게 쪼개어 보는것. 하나의 점이 될때까지. 김환기는 너무나 멋진 면들의 세계에서 작품을 마무리 할수도 있었습니다. 하루 17시간씩 점만 찍으며 그는 네모난 우주를 완성합니다. 그림에 혼을 담아내었습니다. 숨이 턱턱 막히고 어지러운 그 네모난 우주를 마주하고는 왜 그가 면에서 멈출수 없었는지 알것 같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우리 자신보다 다 위대한것이 숨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내면의 소리를 따라 갈수밖에 없구요. 인간은 아무것도 안하는 존재가 되면 미칩니다. 무언가를 해야죠. 뭘 해야할지 모르면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고요.

    물론 고생스러웠지만 너무나 값진 과학세미나 입니다. 세상에 이런 세미나라니!!!! 신자진을 안깔고 있어 합류하지 못하신 많은 안타까운분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 ㅎㅎㅎ 🙏

    • 2023-08-05 17:20

      심심한 위로.... 라니요 ㅋㅋㅋㅋㅋ
      아휴, 이렇게 잘 풀어내고 계신 샘들을 보니 텍스트면 겨우 겨우 읽고 있는 저는 또한번 작아지네요 --;;
      에서 많이 괴로웠어서 그런지, 유클리드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습니다. 다 안다고 생각했던 개념들을 짚어보는 것이 흥미로울 수 있구나... 싶기도 하고요.

  • 2023-07-31 11:02

    와우! 후기와 댓글이 모다 에세이 수준입니다! 그것은 기하학의 힘이다라고 말하는 듯...ㅎㅎ

  • 2023-07-31 19:43

    신자진 아닌 사람들을 위해, 유클리드 세미나 마치고 1회용 미니강좌 같은 거 한 번 해주세요. 유클리드 기하학을 알려주마!! 이런 컨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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