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진보를 마치며
누룽지
2023-05-18 03:00
207
<古文眞寶>는 주나라(혹은 전국시대)에서 송나라에 이르는 동안의 시와 문장들을 모아 엮은 책이라고 한다. 14세기 무렵 조선에도 전래 되었으며 柳夢寅의 <於于野談>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어린이들의 배움은 대개 <十九史略 > · <古文眞寶>를 익히는 것으로 학문에 들어서는 문으로 삼았다.”라고 씌어 있다고 한다.
이런 책을 내가 드디어 다 읽었단다. 차마 내 입으로 다 읽었다 말할 자신은 없고 팀이 다 읽었으니 나도 다 읽은 셈이 되었다.
한자가 무늬로 보이던 내겐 焉敢生心 꿈꿀 수도 없는 일이었는데 버티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뭘 한거지?
왜 이렇게 헛헛할까?
‘다 읽고 나서 돌아보니 이랬다’ 라는 걸 쓰는 게 이번 후기 내용이어야 하는데 잡히는 게 없다. 뿌연 이 느낌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처럼 돌아보면 나는 정말 이상한 순서로 공부를 했다. <書經>과 <唐詩 三白首>를 읽고 그 다음 <古文眞寶>를 공부했다. 이제 <大學>과 <中庸>을 읽을 차례다. 그래서 내친김에 <童蒙先習>을 꺼내 읽어봤다. 웃음이 난다.
굳이 마지막 책장을 덮은 소감을 말해보라면 도망가지 않고 앉아 있으면 1cm라도 앞으로 가게 된다는 걸 알았다고 할까?
내가 뿌연 느낌이라고 한 것은 유몽인의 ‘<古文眞寶>로 학문에 들어서는 문으로 삼았다’라는 말에 가슴이 덜컥해서이다.
알 수 없는 인연으로 <千字文>이 아닌 <書經>으로 글자를 익힌 나지만 그 때는 워낙 황무지를 개간하는 수준이라 급급하더라도 나아가는 느낌이 있었다. 안 그런 게 더 이상하겠지만.
이제 한자 한자 찾아야 될 지경은 면했다. 글자를 안다고 문장을 해석할 수는 없으니 필요한 글을 읽으려면 꾸준히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어야겠다 생각하면서도 ‘넌 그게 다니?’라고 문득문득 묻게 되었다는 게 문제다.
나는 왜 계속 읽을까?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을 억지로 글로 옮기려 애쓰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아는 나이는 되었다.
지금 가슴에 남아 있는 생각은 내게 오래 머무르는 글을 지은 분들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다가가고 싶다는 것이다. 방향과 목표를 갖은 생각이 아니고 그냥 그 분들 언저리를 서성이는 나를 보게 된다.
고문진보에서 마지막으로 읽은 것이 ‘離騷經’이다. 굴원의 근심과 슬픔이 절절해서 어느 구절은 책장을 넘기는 손 끝이 아렸다.
이 분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향초가 나오는 문장의 앞뒤를 가늠해 보면 어느 향초는 알싸했을 것 같고 어느 향초는 그윽했을 것 같다.
나도 모르게 향초들을 메모하고 찾아봤다. 혹여 이 향초들의 약성이 실제로 굴원을 버티게 혹은 위로해 주기도 했었나 하고. 끝내 멱라에 몸을 던졌다지만.
江離/辟芷/秋蘭/木蘭/宿奔/申椒/菌桂/蕙/留夷/揭車/杜衡/芳芷/秋菊/茞/薛荔/胡繩/椒/芰/荷/芷/荃/樧
기본 지식이 없는 나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혹시 이 후기를 읽으신 분 중에 향초에 대해 댓글을 달아 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할 것 같다.
향초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지 몰라 향초 나오는 문장을 아래에 적어 본다.
*扈江離與辟芷兮 강리와 벽지를 몸에 걸치고
*紉秋蘭以爲佩 가을 난초 엮어 허리에 찼다오
*朝搴阰之木蘭兮 아침에는 비산(阰山)의 목련을 뜯고
*夕攬州之宿奔 저녁에는 섬(물가)의 묵은 풀을 뜯노라
*雜申椒與菌桂兮 신초와 군계가 섞여 있어
*豈維紉夫蕙茝 어찌 혜초와 채초만 찼겠는가?
*畦留夷與揭車兮 유이와 게거를 두둑에 심고 (두둑으로 나누고)
*雜杜衡與芳芷 두형과 방지도 섞어서 심었노라.
*夕餐秋菊之落英 저녁에는 추국에서 떨어지는 꽃잎을 먹네
*擥木根以結茞兮 나무 뿌리를 캐어 신(채)초를 묶고
*貫薛荔之落蕊 벽려의 떨어진 꽃술 꿰 차며
*索胡繩之纚纚 호승으로 새끼꼬아 늘어뜨리네
*馳椒丘且焉止息 산초 언덕을 달리며 또 여기에서 쉬리라
*製芰荷以爲衣兮/集芙蓉以爲裳마름과 연꽃으로 저고리 짓고 연꽃을 모아 치마를 만들리라
*戶服艾以盈腰兮 집집마다 쑥을 허리에 가득 차고는
*蘭芷變而不芳兮 난초와 지초는 변하여 향기를 잃고
*荃蕙化而爲茅 전초와 혜초는 변하여 띠풀이 되었네
*樧又欲充夫佩幃 수유나무 또한 향낭(香囊)이나 채우려한다.
나는 ‘학문에 들어선다는 것’이 뭔지 감히 알지 못한다. <古文眞寶>의 묵직함이 버겁기도 하지만 설레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했던 문장들을 만났던 것이 감사했고 그 분들의 언저리를 서성이게 되는 것도 좋았다. 이런 호젓한 길을 거닐게 해 주신 세미나팀 여러 분들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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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강독은 강독의 특성상 책 한 권 읽기 시작하면 최소한 2년 이상은 읽게 되지요.
처음에는 책 한 권이 끝날 때마다 뿌듯하고 기뻤는데 이젠 그다지 감흥이 없어요.
그저 이렇게 계속 함께 공부할 수 있어 감사하다는 생각뿐입니다.
오래오래 같이 읽어요.^^
하하 한문강독 세미나 회원을 감흥없이 읽는 사람과 감흥을 느끼며 읽는 사람, 두 그룹으로 나눈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때 그때 달라지지만 누룽지님은 언제나 후자의 그룹에 속하지요.^^
아마도 누룽지님이 우리에게 한문으로 쓰여진 옛날 요리서에 대해 이야기해줄 날도 머지 않은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