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궤범 첫 시간 후기: 한유(韓兪)의 취업에서 살아남기

콩땅
2023-02-20 17:25
238

지난주부터 문장궤범(文章軌範)을 읽기 시작했다. 문장궤범은 고문진보(古文眞寶)와 함께 송나라 때 엮어진 책으로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초학자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문장 69편이 기록되어 있다. 이 중 42편은 고문진보 안에 이미 포함되었고, 나머지 27편이 고문진보 전편 부록에 실려 있다. 69편의 글 중에서 31편이 한유의 글이라니, 그의 문장이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지난 시간 읽은 4편이 모두 한유의 글 <여우양양서(與于襄陽書)>, <대장적여이절동서(代張籍與李浙東書)>, <여진급사서(與陳給事書)>, <상재상제이서(上宰相第二書)>다. 한편은 동학인 장적을 추천하는 글이고, 나머지 3편은 한유 자신의 천거를 희망하는 글이다. 사실 한유는 내세울 문벌이나 배경이 없어서 취직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여러 번의 실패 끝에 천거되어 취업에 성공했다고 한다.

 

<한유에 대한 발칙한 상상>

“이부시(吏部試)에 불합격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실패....... 벌써 3번째 낙방....... 연이은 고배에 한유는 지난 몇 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것 같아서 형수인 정부인을 볼 낯이 없었다. 세 번의 시도 끝에 진사과에 합격했지만, 관직에 나아가려면 이부시에 합격해야만 했다.

한유는 아주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14세 때 형인 한회를 잃고 난 뒤부터 형수 밑에서 자랐다. 내세울 문벌이나 배경 없이 취직의 문턱을 넘기가 어려움을 절망적으로 느끼고 있다. 필요한 하루 식비와 난방비가 비록 지방 관리의 하루 아침거리 비용 밖에 안 되지만, 당장 그것 또한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형수도 병들어서 삯바느질을 힘겨워 하니, 눈치가 보여 막노동이라도 나가야 하나 생각에 한유는 한숨이 났다.

그렇게 삶이 헛 되다고 느껴지는 순간 오기가 생겼다. 정규시험을 통과하지 못해도, 문벌이 좋지 못해도, 그 어떤 내세울만한 빽이 없어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계를 구축해나가는 똑똑한 사람들이 있다. 나도 그러한 자 중의 한 명이다. 그에게 지금 ‘나는 이 세계에 꼭 필요한 존재다’ 라는 감각이 필요했다. 자신의 존재적 의미를 어떻게 든 증명해야 했다. 그때부터 그의 자소서는 결이 달라졌다. 호소의 글에서 당위의 글로 변화였다. 그대들이 훌륭한 재상 또는 위대한 사람들이라면 한유 자신을 마땅히 등용해야 함을 주장했다.

"물에 빠지거나 불구덩이에 놓인 자를 구함에 있어서 부모형제와 같은 자애로움이 없어도, 그 사람이 죽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누구든 그 옆에 있는 자가 손발을 적시고 모발을 태워가며 위험에 빠진 자를 구원하기를 사양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학문에 힘쓰고 행실을 올바르게 세운 지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저는 어리석어 도(道)의 험난하고 평탄함을 생각지 않고, 행하고 쉬지 아니하여 곤궁함과 굶주림의 물과 불에 빠져 위태롭고 또 급합니다. 큰소리로 구해 달라고 불렀으니, 합하(閤下)께서는 장차 온전하게 구원해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편안히 여기고 구원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구원해주지 않으면 인인(仁人)이라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군자라면 마땅히 마음을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이런 당위성의 자소서를 3번이나 재상에게 올리고서야 가까스로 천거되었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읽은 구절을 인용하여 말하자면, ‘인간은 존엄하게 태어나는 게 아니라, 존엄한 대상으로 존중하고 화답하는 상호작용을 통해 존엄한 사람이 된다’.  존엄한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그럼 저를 뽑으세요. 당당한 용기 있는 한유의 태도가 취업의 키포인트이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댓글 2
  • 2023-02-21 08:24

    ㅋㅋㅋ 인자 되기도, 취직 하기도 정말 힘든 세상!

  • 2023-02-21 19:24

    그러게요. 저도 이쯤되니 한유의 자소서가 달리 보이긴 했어요.
    늘 선비된 자로서 녹봉을 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처사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나봐요.
    당당하게 자신을 어필 하려면 갈고 닦은 자신의 실력을 스스로도 믿을 수 있어야 가능한테니
    수긍이 됩니다. 재미있게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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