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치 벼락치기] <학교없는 사회>2회차 후기

히말라야
2016-01-31 11:36
851

이번 주에도 뚜버기, 히말라야, 뿔옹 셋이 둘러 앉아서... <학교 없는 사회> 뒷부분 4장부터 7장까지를 마무리했습니다.

 

4장 제도의 스펙트럼에서 일리치는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를 크게 공생적convivial 제도와 조작된manipulative 제도 두 가지로 구분하고 그것을 스펙트럼의 극좌와 극우에 배치합니다. 그 스펙트럼의 중간지대에는 공생과 조작이 혼합된 다양한 제도들이 펼쳐지게 됩니다. 이러한 좌/우 구분은 이데올로기의 구분과는 다른 것이며, 극좌적 이데올로기의 산물도 이 스펙트럼에서는 극우 쪽인 조작적 제도에 위치할 수 있습니다. 두 제도는 근본적인 생활양식에서 차이가 납니다. 공생적 제도는 인간의 자발적 활동과 관계를 맺으며 존재하는 생활양식을 만들어 내고, 조작된 제도는 생산과 소비의 생활양식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일리치는 군대와 교도소를 대표적인 조작된 제도로, 우편사업이나 지하철망 등을 대표적 공생적 제도로 들고 있습니다.

 

우측 스펙트럼에서의 활동이 자기한정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약간 혼동스러웠죠. 그걸 다시 정리해보면, 조작적 제도의 이용은 중독에 빠지게 되고, 습관화 되어 점점 더 많은 이용량을 원하게 되는 그 제도의 이용 자체가 인간의 활동 목적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공생적 제도는 그 제도의 사용을 통해 달성하려는 다른 목적이 존재하고, 같은 목적을 위해서 다른 방법을 선택할 자유도 허락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내가 친구에게 전화를 하는데 그 목적이 어떤 이야기의 전달이라면 전화 대신 편지를 쓸 수도 있고, 직접 만나서 이야기 할 수도 있는 것일 때 전화의 사용은 공생적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나 지금 누구나 카톡을 쓰기 때문에 카톡과 앱 같은 것 자체를 이용하는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전화라면 조작적 제도인거겠죠. 자동차와 같은 대개의 소비재는 당연히 조작적 제도입니다. 일리치는 호텔이나 카페를 스펙트럼의 중앙에 놓았지만, 요즈음의 호텔과 카페는 극히 우측에 놓여있지 않나하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공생적 제도의 가장 중요한 점은 그게 누구에게나 접근이 쉬우면서도 남용이 방지될 수 있 법규가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자율을 강조하는 일리치는 또한 이렇게 모두를 위한(모두의 자율이 존중될 수 있는) 규칙도 강조합니다.

 

일리치는 고속도로와 같이 공공의 비용을 가로채 실제로는 자동차의 생산과 소비에 복무하는 제도를 가식적인 공익사업이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학교는 그 대표주자이죠. 고속도로가 자동차의 대한 욕망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수요로 전환시키듯이 학교는 인간이 성장하고 배우고자 하는 자연적 경향을 교육에 대한 수요로 끊임없이 전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조된 상품을 구입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인간의 자발적인 활동의욕을 상실하게 한다는 점에서 학교가 더 나쁜 것이지요. 그는 이렇게 단정합니다. “학교는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포기하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정신적 자살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자살하지 않을 사람들이 있다!고 하면서 우리는 희망을 품어 보았습니다.

 

4장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발견했다는 제작(making/poiesis)과 행위(action/praxis)가 다르다는 것에 대해서 한참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제작은 그 제작 행위 이외의 다른 목적을 갖는 것이고 행위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행위인데, 현재 조작적 제도하에서는 제작만이 행위로 인정을 받습니다. 원래 행위 자체가 목적인 행위는 쓸데없는 짓이고 비생산적인 것이 되면서 사라져버린(있어도 보지 않는 거겠죠?)거죠. 뭔가를 생산하는 것에 복무하지 않는 행위는 그저 슬픈 실업상태가 됩니다. 그러나 공생적 제도 하에서는 반대로 행위를 위한 행위는 즐거운 여가가 될 수 있습니다.

 

4장의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5장은 간략하게 불합리한 일관성의 의미에 대해서만 짚고 넘어갔습니다. 제도 자체가 가진 모순과 불합리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고, 겉으로 드러난 요인들 간에만 계속적으로 일관성을 유지하려는 것이 결국에는 자체의 모순을 강화시키고 유지시키기만 한다는 것으로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의 싸움에 휘말려서 정치자체의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점을 떠올려보면 쉬울 것 같습니다. 학교도 역시 대안학교냐 일반학교냐 홈스쿨링이냐 등의 의견대립들이 사회의 학교화라는 것 자체를 못 보게 하고 더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6장 학습망에서 일리치는 4가지의 새로운 교육제도를 제안합니다. 일리치가 제안하는 교육제도는 학습을 잘 하기 위한 어떤 고안물이 아니고, 인간과 환경 사이의 교육적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들입니다. 그 제도 자체의 실효성 여부 자체보다는, 일리치가 실제로 왜 그런 제도를 제안하는가의 이유와 그런 제도를 시행할 때 기존의 사회체계를 흔들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일리치는 첫째로 교육적 사물에 대한 쉬운 접근을 말합니다. 현재 학습을 위한 자원이 교육자료라는 이름으로 제한되어 있는데, 그렇게 이름 붙지 않은 것들이 오히려 학습을 위해 더 많은 쓰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위대한 고전이 교과서에 수록되는 순간 고전에 대한 자율적인 접근은 오히려 사라집니다. 예전의 아이들은 라디오든 뭐든 집안의 물건을 분해해 보고 다시 조립해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안을 도저히 들여다 볼 수 없게 된 물건들뿐이지요. 휴대폰을 분해해도 얻을 수 있는 것은 작은 칩 하나와 배터리 뿐 이니까요. 그렇더라도 지금 교사가 일방적으로 만들어 낸 학습목표가 아니라 뭔가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 직접 스스로의 목표를 만들어 낸다면 더 많은 사물이 스스로의 교육을 위해 활용될 수 있습니다. 일리치는 이러한 학습을 위해 모든 사물과 장소가 공공에게 개방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사물들에 대한 통제를 개방하게 되면 공공의 소유권에 대한 의식이 되살아 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기능의 교환입니다. 기능을 잘 익히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에게 직접 즐겁게 보여주면서 배우고 싶은 마음을 더욱 가중시켜 주는 역할을 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런 역할을 하는 이가 어떤 자격증이나 전문가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격증은 희소성으로부터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고, 교육전문가는 전문가라는 특권으로 교육의 자유를 박탈합니다. 여기서 일리치는 이러한 전문가나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모든 이가 자유롭게 자기가 아는 바를 말하는 것을 언론의 자유라고 이야기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주로 영업비밀이거나 특허거나 저작권이라는 말로 이를 법률로 보호해 주고 있는데, 일리치는 오히려 언론의 자유가 법률로 보호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함께 공부할 동료 찾기입니다. 나와 같은 관심사를 가진 동료를 찾아내는 일은 의사소통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가능하며 이는 실제로 민주주의 시민활동인 자유로운 집회의 권리를 시험해 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학교는 연령에 따른 강제집회입니다. 학교와 같은 형태의 강제집회가 실제로 시민의 자유로운 집회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으며, ‘학교화 되지 않는것은 의무집회에 대한 출석 요구권한에 대한 폐지를 요청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함께 공부할 동료를 왜 자연스러운 지역공동체에서 찾지 않고 컴퓨터로 인위적으로 찾느냐는 반론에 대해 일리치는 현존하는 이웃의 유대에는 정치적 의미가 제거되었다고 말합니다. 같은 관심사를 지속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동료를 찾아내는 것은 사회에 잠재된 정치적 공동체를 발견할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동네 아줌마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문탁을 찾아 온 저에 대해서 다시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때 빠졌었던 (그 역시 동네 아줌마들과 어울리지 못했던 이유로 빠졌었던) facebook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페이스북 친구들은 저에게 좋아요만을 표시하지만 문탁의 친구들은 저에게 무수한 욕을 해대지요. 문탁의 친구와 페이스북 친구에 대해 언젠가 한 번 상세히 비교분석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전문적인 교육자에 대해 언급합니다. 전문가가 우리를 쓸모없게 한다고 하는 일리치가 '전문적인'이라는 말을 쓰니 이상합니다만 이 전문가는 어떤 지식의 내용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지성을 갖추고 있지만 상상력과 협력의욕 역시 갖추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지적탐구의 길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이며 전혀 새로운 표준을 예언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공동체의 지도자? 선지자? 예언가?와 비슷해 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문적인 교육자와 학생간의 관계는 사제관계라기 보다는 우정과 애정과 자비를 베푸는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한다고 일리치는 말합니다.

 

학교화하지 않는방법이 비단 일리치가 말한 네 가지에 국한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회를 학교화하지 않는것은 현재의 정치와 경제와 교육 사이의 경계선을 불명확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근대 이전에는 경제가 사회 속에 묻혀있었다고 폴라니가 말했죠. 일리치도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경제에 묻혀버린 정치와 교육을 구제하자고, 그러기 위해서 각자의 상상력과 적절한 말과 관심을 개발하여 새로운 교육제도를 만들어 보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일리치가 개인의 자율을 강조하지만 그것의 배후에는 공공사회적인 것이 늘 바탕이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장에서 일리치는 기대희망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현대문명 속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늘 기대만 합니다. 기대는 인간에 의해 통제된 어떤 결과를 이미 알고 있고 예상한 결과에 대한 만족입니다. 희망은 자연의 선을 신뢰하는 것이고, 선물을 받고 싶은 상대에게 소망을 거는 것입니다. 기대와 희망을 이야기하기 위해 일리치는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재해석합니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주고 쇠사슬에 묶인 미리 아는 자를 스스로가 만든 기술 안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린 기대 하는 자로 비유하고, 오히려 열어보지 말라는 상자의 뚜껑을 열고 희망만 남겨진 상자를 간직한 인간 여자와 결혼한 뒤에 아는 자를 희망을 품은 인간으로 비유합니다.

 

수요는 생산을 부르지만, 생산 역시 수요를 만듭니다. 이 연쇄고리는 결코 그냥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영리한 프로메테우스라면 최선을 다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생산하겠죠. 그래서 생산할 수 있어도 생산하지 않는 에피메테우스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프로메테우스처럼 자신이 만든 제도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기 때문에, 그런 제도에 의존하지 않고 인간적인 선의를 믿는 에피메테우스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대보다는 희망 쪽이 가치있는 일이며, 상품보다는 인간을 더 사랑하는사람들을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이라고 부르자고 합니다.

 

군대 같은 제도의 모순은 명백하지만, 학교와 같은 비군사적인 제도의 모순을 꿰뚫어 보는 것은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며 그러기에 더욱 더 거침없이 작동하기 때문에 한층 더 무서운 것입니다. 원자력 발전소의 전원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만 학교화 하는 것의 스위치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내고 있는 것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단지 그에 대하여 마치 여행자처럼 어쩔 수 없다고 방관하면서 책임을 회피하고 있을 뿐입니다. 일리치는 우리 각자 각자가 지금보다는 조금은 더 강하고 현명했던 고대인들의 비극적인 운명애로 그 책임과 맞닥뜨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가치의 제도화를 반대한다고 해서 어떤 제도를 반대하거나 제도 제정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각자가 자각하고 각자가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성장을 멈춰라> 전체를 다 읽고 만납니다. 발제는 뿔옹임돠~

아직도 일리치 벼락치기 세미나의 문은 활짝 열려있습니다~~~ ^^*


댓글 1
  • 2016-02-01 08:54

    비로소 이 후기를 꼼꼼히 읽었습니다. 그리고 ......

     

    음....일리치는 이게 문제예요. 번역이 ...안습이라는....

    위의 논란이 된, "우측 스펙트럼에서의 활동이 자기한정적이라는 말의 의미가 약간 혼동스러웠죠"는 ..... 당근.......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어요.

    왜냐? 원문은 우측이 아니라 좌측이거든요. ㅋㅋㅋ

     

    원문을 알려드립니다.

    33.jpg

     

    피에쑤1 -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이건 도저히 오역이 될 수 없는 문장이잖아요?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전 똑같이 번역된 두 권의 책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처음에 실수(오타)...를 저질렀는데 그 다음에 누군가 그대로 베꼈다고 봐야겠죠? ㅋㅋ

    페에쑤2- 그래도 이 문장이 이상하다고 제기하고 꼼꼼히 토론하신 <일리치벼락세미나> 3인방에게 깊은 존경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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