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대로42길 31회]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청량리
2024-02-19 01:24
182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죽은 시인의 시간(hours)

<디 아워스>(2002) | 감독 : 스티븐 달드리, 주연 : 니콜 키드만, 메릴 스트립, 줄리앤 무어 | 114분

 

 

 

영화 <디 아워스, The Hours>(2003)는 버지니아 울프(니콜 키드먼), 로라 브라운(줄리앤 무어), 클라리사 본(매릴 스트립) 세 명의 여성이 보내는 하루의 시간을 중첩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간 순으로 1923년 ‘버지니아’로 시작해서 1951년 ‘로라’와 2001년 ‘클라리사’로 이어진다. 이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세 명을 관통하는 매개 역할을 한다. ‘댈러웨이 부인’은 버지니아가 집필 중인 소설이며, 로라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며 삶의 위안을 얻고,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영화의 첫 장면,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버지니아의 모습은 영화의 엔딩과 서로 맞닿아 있다. 단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게 아니라, 리처드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그 장면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인물은 리처드(에드 해리슨)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옛 연인이면서, 영화 속에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이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리처드를 중심으로 영화를 읽어나가면 영화의 제목이 ‘댈러웨이 부인’이 아니라 왜 ‘디 아워스(hours)’인지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흐름을 바꿔 읽어보면 어떨까? 시간 순서대로 흐르는 ‘버지니아 – 로라 – 클라리사 – 버지니아’의 구조에서, 앞부분을 연결되는 맨 뒤로 배치하면 로라 클라리사 버지니아의 흐름이 된다.

 

 

01 로라 × 리처드

신해철의 노래가사처럼 로라는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나에게 쓰는 편지, 1991)’을 모두 갖춘 미국 중산층 집안의 아내이다. ‘남편들은 그런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회 속에 대해서 불만이 있으나, 그녀는 밖으로 드러내기보다는 혼자 속으로 삭인다.

누군가와의 어떤 관계 속에서 ‘착하다’는 것이 꼭 ‘좋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몸이 안 좋은 로라 대신 아들의 아침을 챙기는 ‘착한’ 남편 댄은 그런 의미에서 ‘악하진’ 않지만, 로라에게는 ‘나쁜’ 사람인지도 모른다. 댄은 로라가 읽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 대해서 공감하지 않거나 못한다. 화목한 가정이 목표인 댄은 ‘악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것이 왜 로라의 숨통을 조이는지, 그래서 자살이나 가출로 이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착함’은 의도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나쁨’이 되기도 한다.

 

 

여하튼 로라 역시 남편의 생일파티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구색을 갖추려고 그저 생일 케이크를 굽는 것뿐이다. 눈치가 빤한 아들 리처드도 이미 알고 있다. 사실 엄마에게는 아무런 관심도 계획도 없다는 걸. 그리고 둘째를 임신 중이지만, 엄마는 이웃집에 사는 부인 ‘키티’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도 리처드는 알고 있다. 남편이 출근 후, 키티가 로라를 찾아온다. 로라, 우리집 개 밥 좀 줘. 그 말 하려고 왔어? 음....사실 자궁에서 뭔가 자라고 있대. 로라는 걱정마라며, 괜찮다고 키티를 안아주며 그녀에게 키스를 한다.

키티가 병원으로 떠나고, 리처드는 거실에서 불안한 엄마를 바라보고 있다. 뭐, 왜? 어쩌라고?? 로라는 리처드와 눈이 마주치자 괜히 쏘아붙이고는 방으로 들어간다. 한참을 누워 있던 로라는 불현듯 일어나 수면제를 모두 챙기고는 리처드에게 말한다. 우리 다시 케이크 만들자. 그리고 밖으로 나가는 거야. 아빠가 오기 전에 할 일이 생겼어. 리처드는 엄마의 변덕을 이해할 순 없지만, 로라가 하고 싶은 걸 같이 하기 위해 식탁으로 온다.

케이크를 다 만들고 나서, 잠깐 있다 올 것처럼 옆집 아줌마에게 리처드를 맡기고 떠나는 로라. 그런데 엄마가 흐느끼는 모습에 리처드는 뭔가 이상함을 느낀다. 엄마!!!! 엄마!!!! 뒤늦게 리처드는 엄마를 애타게 부르며 쫓아가지만 로라의 차는 그대로 멀어진다. 리처드는 엄마에게 버림받았음을 직감한다.

 

 

영화는 로라의 모습을 버지니아 혹은 소설 속 댈러웨이 부인으로 이어지도록 여러 장면들을 의도적으로 ‘오버랩’시키면서 보여준다. 버지니아가 자신의 세계 혹은 자신의 소설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로라 역시 버지니아와 댈러웨이 부인에게 자신을 투영하며 그들과 ‘공명’한다.

로라는 급하게 차를 몰고 어느 호텔방으로 들어간다. 약을 꺼내놓고 ‘댈러웨이 부인’을 읽다가 로라는 침대에 눕는다. 영화의 첫 장면, 버지니아의 몸이 강물에 잠겨 흘러가듯, 로라가 누운 침대 주변으로 순식간에 (강)물이 차오르며 로라를 집어 삼킨다.

바로 다음 장면, 버지니아는 소설을 구상하며 혼자 중얼거린다. 그래, 그녀가 죽을 필요는 없겠어. 대신 다른 사람이 죽어야 할 것 같아. 그러자 로라는 마치 소설의 주인공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울부짖는다. “안 돼, 도저히 못 하겠어!!” 결국 로라는 집으로 돌아간다. 둘째가 태어나면 집을 나가겠다고 다짐하면서.

 

 

02 클라리사 × 리처드

리처드는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차로 떠났던 그 시간에 갇혀 살고있다. 게다가 리처드의 동성애적 성향 역시 엄마로부터 영향 받은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처드는 에이즈에 걸렸고, 그의 남자친구는 떠난 지 오래다. 뉴욕의 허름한 건물 꼭대기 자신의 방에 갇혀 사는 리처드를 방문하는 유일한 사람은 옛 연인 클라리사다. 허나 클라리사도 이제는 자신의 여자친구와 동거 중이다.

오늘은 리처드의 문학상 수상을 기념하는 파티가 있는 날이다.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첫 문장처럼 “직접 꽃을 사와야겠어”라고 클라리사는 말했다. 소설의 주인공 ‘클라리사 댈러웨이’와 이름이 같은 클라리사 본의 별명은 그래서 ‘댈러웨이 부인’이다.

오래 전 리처드와 하룻밤을 보낸 해변의 어느 아침, 리처드가 클라리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인사한다. “안녕, 댈러웨이 부인” 클라리사는 고백한다. 그때 이후로 리처드에게 갇혀 있었다고. 리처드는 엄마가 떠났던 시간에 붙잡혀 있고, 클라리사는 리처드와 함께 했던 어느 아침으로부터 벗어나질 못한다. 나에게 커다란 고통(리처드) 또는 행복의 전부인 시간(클라리사) 속에 그들은 멈춰 있다. ‘시계는 아침부터 똑딱’이지만, 실상 우리의 시간은 째깍째깍 초침을 따라 흐르지 않는다.

 

 

리처드가 자살하기 전 흘리는 눈물은 엄마 로라에게 갇혀 지낸 자신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누군가를 떠나야만 했던 엄마를 뒤늦게 이해하게 된 어리석음에 대한 후회였을까? 클라리사가 자신에게 묶여있지 않기를 바라는 리처드는 결국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려고 한다. “당신은 늘 자부심과 용기를 가장하며, 침묵을 덮으려고 항상 파티를 열지. 내가 죽으면 당신은 행복해 할까?" 리처드는 클라리사에게 묻는다.

“글도 제대로 못 쓰는 내 꼴 좀 봐요. 그동안 내 삶과 행복을 지켜주느라 그댄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참아내며 모두가 날 떠나도 끝까지 내 곁을 지켜준 당신. 이제 당신을 놔줘야 할 것 같군요. 그래도 우리 두 사람,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잖아요.” 이건 극 중 버지니아가 남편 레너드에게 쓴 편지 내용 중 일부다. 그러나 리처드가 클라리사에게 남기는 글이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03 버지니아 × 리처드

영화 속에서 리처드는 버지니아와 함께 결국 자살에 이르는 인물로 등장한다. “나도 알아요. 내가 당신 삶을 망치고 있다는 걸. 내 인생의 행복은 당신 덕분이지만, 살아가며 더 이상 당신 삶을 망칠 수 없어요.” 당신 덕분에 나는 살아가지만, 나의 존재로 당신이 계속 불행해진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버지니아와 리처드를 보면 결국 삶의 부조리는 외부적 조건들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서 마주하게 되는 걸까?

 

 

버지니아의 남편 레너드가 어느 날 묻는다. 왜 당신의 소설에서는 누군가 꼭 죽어야 하냐고. 그러자 버지니아는 그래야 나머지 사람들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고, 그래서 시인이 먼저 죽는다고 말한다. 1941년 남편과 언니 앞으로 유서를 남기고 버지니아는 우즈 강에서 투신자살을 한다. 유서에서 버지니아는 이렇게 고백한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삶의 부조리와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시인은 죽음을 선택한다. 그러나 시인의 시간(hours)은 죽음으로 소멸되지 않고 남아 있는 이들에게 질문으로 남는다. 때문에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불현듯 자신도 모르게 솟아오르는 부조리의 감정과 마주하게 된다. 그런 차원에서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자살은 단 하나의 철학적 문제”인지도 모른다.

 

리처드는 말한다. “클라리사, 당신 삶의 의미를 나한테서 찾진 말아요.” 버지니아의 죽음이 로라에게 흐르듯, 클라리사는 리처드의 죽음을 통해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일종의 ‘의식의 시간(hours)’을 갖게 된다. 그것은 버지니아가 말하는 “삶을 회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맞서 싸우면서” 알게 되는 삶의 의미를 찾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죽은 시인의 ‘해방일지’는 지금도 계속 써지고 있다.

 

댓글 5
  • 2024-02-19 09:59

    '죽은 시인'이 들어가면 명작이 되나봐요
    띠우샘과 읽었을 때는 자신을 마주하라고,
    청량리샘의 글을 함께 읽으니 마주하고서 과감이 싸워가라
    처럼 느껴지네용

  • 2024-02-19 15:31

    삶의 부조리를 견디지 못하고 선택하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됨요, 둘이 한 영화에 대해 쓰는데 다른 문장들로 엮이네요~~ 신박한 기획^^ 연재 재개를 응원~~

  • 2024-02-19 15:47

    머무르는 시간으로
    알게되는 것이 있는거 같네요.
    오늘은 ‘하나의 영화, 두개의 시선’에
    잠시 머물러볼께요. 고맙습니다.

  • 2024-02-20 15:31

    the hours, the years
    모두 자막에서는 '세월'로 번역되었을거에요.
    원소설이 처음 우리나라에 번역되었을때도 <세월>이었대요.

    누군가는 버티고, 누군가는 사랑하고, 누군가는 삶대신 죽음을 택하고, 누군가는 죽음 속에서 삶을 택하고....
    결국엔 그 시간들이 세월이 우리를 삼키겠죠. 별 수 없어요. 최선을 다해 존재의 그 아가리를, 심연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수밖에^^

    하나의 영화, 두개의 시선. 기획 좋네요

  • 2024-02-25 13:44

    리처드를 중심에 놓고 보다니!! 생각해 본 적 없는 시선이라서 놀랐어요.ㅎ

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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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3.26 | 조회 198
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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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2024.03.26 | 조회 176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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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4.03.20 | 조회 275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봄날
2024.03.08 | 조회 191
토용의 서경리뷰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토용
2024.02.29 | 조회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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