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가 테크트리] 삶의 지혜를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것은 합당할까? : <철학 입문> 세미나를 들어야 하는 이유

우현
2024-02-05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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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테스형!” 삶의 지혜를 소크라테스에게 묻는 것은 합당할까?

: <철학 입문> 세미나를 들어야 하는 이유

 

 

 

‘깨달은 자’의 대명사 소크라테스

 “아 테스형!” ‘까’와 ‘빠’를 모두 미치게 만드는 ‘슈퍼스타’ 나훈아는 3년 전 자신의 신곡에서 이렇게 외쳤다. 살아가기 힘겨운 세상을 어떻게 견뎌낼 수 있냐는 질문을 소크라테스 ‘형’에게 물은 것이다. 오랜만에 컴백한 나훈아이기도 했지만, 재미있는 가사로 더욱 이슈가 됐었다. 특히 가사가 ‘철학적’이라는 반응과 함께, 힘든 세상에 대해 한탄하는 내용이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다. 그렇다고 이 곡에 ‘소크라테스’의 철학이라던가, <독서가 테크트리>에서 다룰만한 ‘철학적’인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그저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의 전형으로, 머나먼 인생의 선배이자 ‘진리를 깨달은 자’의 의미의 ‘테스형’으로 쓰였을 뿐이다.

 ‘소크라테스’의 이런 사용법은 흔한 편이다. 나도 온라인 대전 게임을 하다보면, 드물게 ‘소크라테스 컨셉’을 잡고 행동하는 유저를 만나곤 한다. 닉네임을 ‘Socrates’로 짓고, 칭호를 ‘철학가’나 ‘깨달은 자’로 달고, 게임 내내 채팅으로 ‘너 자신을 알라’고만 하는 식이다. 이처럼 소크라테스는 세상 만사를 깨달은 ‘철학자’의 아이콘이며, 근엄하고 흔들리지 않는 캐릭터로 인식되는 듯하다. 하지만 정말 소크라테스는 그러한 일반적 이미지와 같은 사람이었을까? 철학사에서 다뤄지는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와 어떤 점이 다를까?

 

 


나훈아의 <테스형!> 무대. 배경 이미지로 올림푸스 신전과 소크라테스의 그래픽이 나타나는 게 나의 '웃음벨'이었다.

 

 

‘철학의 아버지’, 그리고 ‘슈퍼스타’

 우선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의 아이콘이라는 것에 대해 반론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자연 철학’이라고도 불리며 만물의 생성과 소멸, 천문학 등을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반면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하늘로부터 땅으로 불러 내린 최초의 철학자였다.(키케로, 『투스쿨룸 대화』 中) 소크라테스는 인간사를 중심으로 철학적 성찰을 개진했으며, 철학의 목적을 개인 및 공공의 영역에서 ‘좋은 삶’을 살아내는 것으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를 철학사에서는 ‘소크라테스적 전회’라고 한다. 그렇게 ‘최초의 철학자’는 아니었지만,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제2의 탄생을 주도했다고 여겨지기에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이밖에도 소크라테스가 대중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 이유는 전해져 오는 그의 삶의 모습들에서 볼 수 있는 ‘스타성’에 있다. 그는 기원전 469년에 아테네에서 태어났는데, 그의 젊은 시절과 사생활에 관해 알려진 바는 많지 않다. 하지만 그의 나이가 40대에 접어들었을 때는 이미 아테네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져 있었다. 그는 매일같이 누추한 차림으로 거리에 나와, 소위 현명하다고 여겨지는 자들을 붙잡고, 밥까지 굶어가며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유익한 말’도 여러 번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은 게 사람 마음인데, 그는 상대방이 질려할 때까지 질문을 반복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난 정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네.” “정의란 의로운 것입니다.” “그럼 의로움이란 무엇인가?”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입니다.” “그럼 배려란 무엇인가?” .... (무한 반복)

 

 이 끝없는 질문 공세는 결국 상대방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로부터 그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가 나온 것이기도 하다. 꾀죄죄한 옷차림으로 거리를 쏘다니며 사람을 붙잡고 면박을 주는데, 그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그는 악명이 매우 높았지만, 반대로 수많은 ‘팬’들을 거느리기도 했다. 그의 ‘논박술’에 기분이 상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소크라테스에게 배움을 구하고자 했던 사람들, 소크라테스의 깊은 지혜로부터 나오는 용감함과 대담함, 정의로움 등의 반한 젊은이들이 결코 적지 않았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결국 자신의 ‘까’들에게 미움을 사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명목으로 고발되었고, 친구들과 제자들의 도움으로 보석금을 내거나 탈옥할 수 있었음에도 당당히 독배를 들이키며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정말 ‘까’와 ‘빠’를 모두 미치게 만드는 ‘슈퍼스타’가 아닐 수 없다. 그를 슈퍼스타로 만든 그의 논박술, ‘엘렝코스Elenchos’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보자.

 

 

소크라테스의 철학과 방법론 - ‘엘렝코스Elenchos’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방법론이기도 한 ‘엘렝코스Elenchos’-논박술-에 대해서는 아직도 다양한 해석이 오간다. 그가 엘렝코스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기본적인 철학 배경을 이해해야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의 중심 주제를 자연학에서 윤리학으로 이동시킨 첫 번째 인물로 그는 앎episteme과 덕arete이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이라 여겼다. 앎은 무언가에 대한 지식이나 지혜이고, 덕은 윤리적 좋음善, 최고의 상태, 신神적인 것을 의미한다. 가령 자신이 ‘정의’에 대한 앎이 확실하게 있다면, 결코 그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의도적으로 악한 행위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반대로 이야기하면 어떤 앎에 대해 그것이 삶의 실천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진정한 앎을 깨닫지 못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앎은 선善이자 신神의 근원이요, 무지는 악의 근원이다. 따라서 ‘앎’은 ‘신적인 것’과 동일한 위상을 같는다. 이처럼 ‘앎’과 ‘신적인 것’이 같은 위상에 놓이게 되면 ‘신의 존재’는 곧 ‘보편적 앎’을 실증하게 된다. 이와 같은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비춰 볼 때, 생활 전반에 종교적 세계관이 스며들어 있었던 고대 아테네라는 조건에서 완전한 앎과 지혜는 오직 신들에게서만 가능한 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그와 같은 경지에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인간적 삶이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임은 분명하다. 그런 맥락에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지속적으로 앎을 추구하는 것, 윤리적인 삶을 살아나갈 것을 요구한다.

 

 


플라톤과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모에 대해 아첨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눈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도 결코 '미남'은 되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외모지상주의'가 심했던 고대 그리스에서 그가 큰 인기였던 건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자신의 철학에 따라 살아가던 소크라테스에게 어느날 하나의 신탁이 전해져 내려온다. 신녀로부터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는 신탁을 듣게 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과 반대되는 신탁의 내용에 혼란을 겪는다. 스스로를 무지하다고 생각해온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롭다니? 신탁의 내용에 소크라테스는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당대의 아테네에서 신탁의 진실성을 의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스스로를 신들 앞에서 ‘경건한 사람’이라고 밝히지 않았던가? 따라서 그는 이것이 자신에게 내려진 일종의 수수께끼라고 생각하며, 그 숨은 의도를 밝히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에 지혜롭다고 여겨지는 정치가, 시인, 장인 등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그 과정 속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치인들이 스스로를 지혜롭다고 하지만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 조차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신들이 지혜롭다는 착각에 빠져 그들의 무지를 보지 못하는 크나큰 악행을 저지르고 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로써 신탁의 수수께끼를 해결한다. 역설적으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해온 자신은 저들보다 지혜로운 것이다. 또한 신으로부터 그 깨달음을 전파하는 임무를 받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즉 엘렝코스는 신탁으로부터 시작된,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해주기 위한 일종의 방법론인 것이다.

 

 따라서 그의 엘렝코스는 ‘나는 무지하다’는 선언으로 시작하며, 상대방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지식을 펼치게끔 만든다. 그리고 질문을 반복하여 그 지식을 분해하고, 상대방이 진정한 앎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게 만든다.

 한편 이런 엘렝코스의 방식은 기만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마치 소크라테스는 무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는 채로, 상대방의 지식을 받아들이는 ‘척’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피에르 아도P. Hadot를 비롯한 몇몇의 학자들은 결과적으로는 상대방에게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해주는 게 목적이더라도, 그를 위해 기만적인 태도를 취하는 엘렝코스의 기만적 성격을 비판하기도 한다.

 

 

엘렝코스의 주술성과 관계성

 나는 엘렝코스 자체가 상대방의 무지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 본인은 상대에게 안겨줄 수치심과 모멸감을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상대방이 느낄 수치심에 대해 알았음에도, 그리고 실제로 그에 대한 보복을 당했음에도 소크라테스가 엘렝코스를 멈추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오, 소크라테스! 나로 말하자면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당신이 자기 자신을 “어려움에 빠드림aporeis”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도 “어려움에 빠뜨리게 한다aporein”는 얘기를 익히 들어왔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도 내가 보기에 당신은 나에게 주술을 걸고, 나를 중독시킨 것도 모자라 최면까지 걸어대니, 결국은 내가 “어려움”의 한복판에 빠져버린 듯합니다! ... 나는 적어도 덕에 관한 한, 수도 없이 많은 논의를 여러 사람에게, 그것도 아주 잘 이야기했다고 자부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이 무엇인지 조금도 이야기를 할 수가 없군요.

플라톤, 『라케스』 中

 

 인용에서 볼 수 있듯이 엘렝코스는 일종의 마법 주문과 비슷하다. 논제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충격과 마비를 줌으로써 굳게 믿고 있던 사고에 균열을 내는 것이다. 또한 이 마비는 소크라테스 본인에게도 유효했을 것이다. 엘렝코스의 과정 자체가 답변자의 솔직한 대답과, 소크라테스가 상대방의 답변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둘 중 한 명이라도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논박은 대화자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하고 그저 허공을 맴돌게 된다. 즉 엘렝코스는 두 당사자의 몰입을 통해 기존 사고에 균열을 내며, 엘렝코스의 주체마저도 스스로의 보편적 진리를 재검증하기 위한 일종의 의례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의 저작 『변명』에서는 엘렝코스의 실천이 곧 그의 철학의 요체가 된다. 소크라테스는 철학하며 사는 것이란 곧 자기 자신과 타인을 시험에 들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이는 그가 추구하던 보편적 진리의 맥락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보편적 진리란 내적 성찰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며, 보편적 진리와 자신의 무지를 깨닫기 위해서는 타자와의 관계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은 ‘공부는 하고 싶은데 세미나는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도 적절한 조언이 된다. 소크라테스에게 공부란 타인의 삶과 자신의 삶을 포개어 봄으로써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것이다. 따라서 혼자하는 공부란 이 경우에 시작부터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러한 공부는 한시적인 체험이 아니라 곧 삶 그 자체여야만 한다.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엘렝코스를 통해 전하고자 했던 지혜가 아니었을까? 가벼운 마음으로 공부를 하고 싶다고? 우리는 ‘어려움에 빠진apories’ 상태가 아니라면 그것이 과연 공부일까? 물론 이는 처음부터 어려운 공부에 부딪혀야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를테면 <2024 철학입문>처럼 비교적 쉬운 세미나를 통해서도 엘렝코스적 관계 속에 놓인다면, 그러니까 자신의 무지를 확인할 용기를 낸다면 얼마든지 새로운 지혜와의 만남-충격과 마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가? 2024 철학입문 ‘앎과 윤리가 하나였던 시대의 철학’에서 고대적 지혜에 접속해 보는 것이 말이다.

 

 

댓글 5
  • 2024-02-06 09:04

    어려움에 빠진 상태가 아니라면 공부가 아니라는, 멋진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철학입문 세미나만이 아니라 문탁의 모든 세미나가 우리를 어려움에 빠지게 하고,
    무지를 통해 지혜로 가는 길을 여는 의례가 되기를!!

  • 2024-02-06 16:15

    와, 신기방기네유.
    테스형도 우현이도.
    우현이의 멋진 스타트를 응원합니다.
    더 좋은 글을 만날 것 같은 기분좋은 예감이 듭니다.

  • 2024-02-06 22:39

    우와 이 연재글을 철학입문 보조 텍스트로 생각하며 구독해야겠어요!! 세미나에서 이루어질 엘렝코스도 기대가 되어요!^^
    (근데 글쓰기를 비판한 테스형이 철학 에세이 발표회에 오면 무슨 질문을 던질지 궁금해짐ㅋㅋ)

  • 2024-02-07 07:58

    우현이의 공부, 화이팅!

  • 2024-02-17 23:10

    우현 역시 자신의 삶의 가능성을 시험해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현의 글은 그래서 테쓰형이 아니라,
    현재형인지도 모르겠다.
    게임+음악+철학이 만나면 무엇이 될까....어마어마 할 것 같다!!!!!!!!!!!

한문이예술
    하나의 귀와 두 개의 입 한자가 보여주는 듣기의 방법론   동은     1. 실용實用적인 한자   책을 읽다보면 모르는 단어가 등장할 때가 있다. 그러면 눈을 부릅뜨고 앞뒤의 맥락을 살펴 단어의 의미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단어가 짐작만으로는 넘기기 어려운 위치에 있거나 도무지 감도 오지 않는 경우에는 사전에서 찾아봐야 한다. 그런데 사전에는 같은 발음을 가진 다른 의미의 단어들이 여러게 있을 때가 있다. 이럴 땐 하나하나 문장 속 단어에 의미를 적용시키며 여러 개의 단어 중에서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한자를 많이 알면 이 과정이 상당히 빨라진다. 단어의 상당수가 한자어에서 유래한 우리말의 특성상, 한자를 많이 알수록 이렇게 문해력과 어휘력이 좋아진다. 그런 점에서 한자는 분명 살아가는데 실용적이다. 실용實用적이라는 건 실제로 쓰일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인데, 이런 문해력과 어휘력 외에도 한자의 실용성이 발휘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과 다르게 한자는 문자 하나에 ‘의미’가 담겨있다. 당연하게도 ‘의미’가 문자에 담기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 과정은 때로 우연히 일어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상당한 고심을 거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문자 하나가 가지고 있는 의미의 맥락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단히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건 문자 하나일 뿐일지라도 거기에 담긴 ‘이야기’는 여러가지 일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중층적으로 구성된 이야기들은 문자가 사용되는 오늘날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처음 문자가 만들어진 시기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갑골문에 대한 해석은 오늘날에도 고정되어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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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2024.03.26 | 조회 201
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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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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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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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량리
2024.03.20 | 조회 279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봄날
2024.03.08 | 조회 191
토용의 서경리뷰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토용
2024.02.29 | 조회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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