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주역이야기 2회] 양생의 방법, 호시탐탐(虎視眈眈)

봄날
2021-09-27 02:33
684

** 주역공부 4년차. 여전히 해석도 어렵고 뜻을 알아내는 것도 어렵다. 하지만 읽을 때마다 나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실천을 추동하는 주역은 매력적인 텍스트가 아닐 수 없다. 그 감동을 함께 나누려 용기내어 글을 쓴다. 봄날이 픽(pick)한 주역의 말들!

 

, 貞吉 觀頤 自求口實(이 정길 관이 자구구실)

이(頤)는 곧게 하면 길하니, 길러주며 스스로 음식[口實]을 구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初九 舍爾靈龜 觀我朶頤 凶(초구 사이영귀 관아타이 흉)

초구는 너의 신령스러운 거북을 버리고 나를 보고서 턱을 늘어뜨리니, 흉하다

六二 顚頤 拂經 于丘頤 征 凶(육이 전이 불경 우구이 정 흉)

육이는 거꾸로 길러주기를 구하니 바른 도리에 위배되고, 언덕에서 길러주기를 구하여 가면 흉하리라

六三 拂頤貞 凶 十年勿用 无攸利(육삼 불이정 흉 십년물용 무유리)

육삼은 기르는 곧은 도에 위배되기 때문에 흉하여 십년이 되어도 쓰지 못하니, 이로운 바가 없다

六四 顚頤 吉 虎視耽耽 其欲逐逐 无咎(육사 전이 길 호시탐탐 기욕축축 무구)

육사는 거꾸로 길러주기를 구하나 길하니, 호시탐탐하여 하고자함을 좇고 좇으면 허물이 없으리라

六五 拂經 居貞 吉 不可涉大川(육오  불경 거정 길 불가섭대천)

육오는 바른 도리에 위배되나 곧음에 거하면 길하지만, 큰 내를 건너서는 안 된다

上九 由頤 厲 吉 利涉大川(상구 유이 려 길 이섭대천)

상구는 자신으로 말미암아 길러지므로 위태롭게 여기면 길하니, 큰 내를 건너는 것이 이롭다

 

호랑이의 눈으로 엑스텐을 쏘다

무관중이라는 전대미문의 도쿄 올림픽이 끝났다. 운동경기 외의 모든 접촉은 금지되었고, 관중의 뜨거운 응원은 사라졌다. 어쨌건 그 난리 속에서도 ‘양궁DNA’를 타고 났다는 우리의 양궁선수들은 금밭을 일구었다. 나는 스포츠 경기를 즐겨 보는 편은 아니다. 양궁이나 사격같은, 정적인 경기는 더욱 재미없다. 하지만 이번 올림픽에서 우연히 양궁경기를 보게 됐는데, 한발 한발 신중하게 활을 쏘는 과정의 긴장감이 의외로 흥미로웠다. 정해진 화살을 다 쏘고 동점을 이룬 사수들은 이제 마지막 한 발로 승부를 내려 하고 있었다. 도쿄의 바람은 활은 물론이고 사수의 몸을 휘청거리게 만들만큼 거칠었다. 그것을 이겨내면서 오직 과녁을 바라보며 미동도 하지 않는 그들의 눈빛은 일종의 경외감을 느끼게 했다.

 

한 남자양궁선수는 사대(射臺)에 들어서면 맥박수가 뚝 떨어진단다. 살기 위해서는 꼭 뛰어야 하는 맥박이기는 하나, 깃털처럼 미세한 떨림의 오차도 용납할 수 없는 세밀한 과녁 겨냥에는 맥박도 방해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맥박수를 줄이면서까지 집중해서 얻으려는 것은 ‘텐(10)’이라는 점수이다. 그런데 텐(10)이라고 해도 모두 같은 텐은 아니다. 양궁 과녁의 10점을 표시하는 원 안에는 또 하나의 작은 원이 있다. 그 작은 원안에 화살이 꽂히면 ‘엑스텐(X10)’이라고 한다. 엑스텐과 텐의 점수 차이는 없다. 하지만 엑스텐은 텐이라는 점수에 궁사의 실력에 대한 일종의 권위가 더해진다. 나에게는 이 엑스텐을 기대하며 과녁을 노려보는 궁사의 눈빛과, 산뢰이괘(山雷頤卦)의 육사효(六四爻)에 등장하는 호랑이의 눈빛이 오버랩되었다. 산뢰이괘의 육사효는 “전이 길 호시탐탐 기욕축축 무구(顚頤 吉 虎視耽耽 其欲逐逐 无咎)”이다.우리가 자주 듣는 ‘호시탐탐’이라는 말이 바로 주역에서 유래된 것이다.

 

‘호시탐탐’이라는 말은 흔히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부정적인 표현으로 쓰인다. 오늘날에는 이처럼 원래의 의미가 퇴색해서 다른 뜻으로, 혹은 정반대의 의미로 쓰이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전전긍긍(戰戰兢兢)’이라는 말은 자신의 잘못이나 실수가 드러날까 봐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시경(詩經)에 나오는 이 말은 폭정 속에서도, 현자들이 다가올 위험에 대해 신중하게 자신을 다스리는, ‘좋은 의미의 두려움’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호시탐탐의 본래 뜻은 무엇일까?

 

양생의 도, 산뢰이괘

 

이괘(頤卦)의 이(頤)라는 글자는 턱을 상징하고, 기른다(養)는 의미도 가진다. 여기서 기른다는 것은 양적 성장보다 ‘생명을 보존한다’는 의미에 가깝다. 이괘는 위 아래의 강건한 양효를 턱에, 가운데 네 개의 음효를 음식물이나 말(言)을 형상화한 것이다. 인간을 비롯한 대부분의 생명체는 입을 통해 영양을 섭취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런데 입을 통해 들어가는 것이 영양이면 살지만, 독이 들어가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그리고 생명체마다 ‘기름’에 득이 되는 것과 독이 되는 것이 각각 다르다. 그러니 무엇이 영양이 되고 독이 되는지를 잘 살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늘 바르게 영양을 취하라는 것이 이괘의 괘사에 나오는 ‘정길(貞吉)’의 의미이다. 또한 이괘의 ‘기름(養)’은 남을 기르는 일과 더불어 나 스스로를 기르는 일을 함께 말한다. 남을 기르는 일과 나를 기르는 일은 원래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내가 먹는 음식, 내가 한 말, 나의 지혜가 나에게는 영양이 될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독이 되지 않는지 총체적으로 살피는 것. 그렇게 총체적인 삶의 방식, 양생(養生)의 도를 안내하는 것이 이괘이다.

 

주역의 효들은 상괘와 하괘의 효끼리 대응하는 관계가 있는데, 초효와 4효, 2효와 5효, 3효와 상효가 각각 짝지워져서 서로 이끌리는 것으로 풀이한다. 가령 이괘에서 초구와 육사는 정응(正應)관계라고 해서 양-음으로 만나면 같은 성질(양-양 혹은 음-음)끼리 만나는 것보다 바람직한 관계로 푼다.

 

그러나 괘에 따라서 정응관계가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가령 이괘의 초구는 자신이 양생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이 있는데도(주역에서 양효는 강건한 힘이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자신과 이해관계에 있는 윗사람(육사)을 부러워하며 턱을 벌리고만 있다. 초구의 효사에 나타나는 신령스런 거북(靈龜)은 초구가 원래 장착하고 있는 능력이다. 거북은 오래 전부터 영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초구 스스로 양생을 꾀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힘을 가진 것조차 알지 못하고 그저 바깥의 유혹에 이끌린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초구가 자신의 힘을 기를 생각을 하지 않고 의타적인 존재로 만든다는 점에서 정응관계가 오히려 부정적이다. 뜻을 세우고 굳세게 밀어붙일 수 있는 양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시적인 다이어트 식품에 한눈을 팔거나, 근육질 트레이너에 자신을 투영해버리는 것이 초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전이(顚頤), 거꾸로 기른다는 것은

 

그렇다면 초구와 호응하는 짝인 육사는 어떠한가. 음의 성질을 가진 육사는 전이(顚頤), 즉 거꾸로 기르는 덕을 발휘한다고 한다. 거꾸로 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때 나오는 것이 ‘호시탐탐’이다. 호시탐탐은 호랑이가 사냥을 하기 위해 몸을 최대한 낮추는 모양을 가리킨다. 먹잇감을 잡기 위해서 호랑이는 그런 자세로 상대를 집요하게 노려본다. 그러니까 전이는 호랑이가 자신이 잡을 상대를 노려보는 것처럼, 기르는 상대를 잘 살피기 위해 몸을 낮춰 관찰하는 것이다. 상괘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몸을 낮추고 충분히 하괘의 아랫사람을 살피는 것. 양생으로 이끌되 자신이 기획한 양생의 깃발을 들고 초구를 끌고가는 것이 아니라, 초구의 상황을 세밀하게 살피고 그의 역량에 맞게 양생의 기술을 적용하는 것이 바로 전이이다. 전이(顚頤)는 육이효에도 등장하는데(六二 顚頤 拂經 于丘頤 征 凶), 육사효의 전이가 길(吉)한 반면, 육이의 전이는 흉하다. 육사가 아랫사람을 잘 살펴서 그를 양생으로 이끄는 전이를 수행한다면, 육이는 그저 초구가 가진 것에 마음을 빼앗겨 자신이 윗자리임에도 불구하고 초구에게 이끌려 가기 때문이다. 이때의 전이는 기르고 기름을 받는 관계가 역전된 것이므로 흉하다.

 

일상의 단단함과 호시탐탐이 만나다

 

처음에 내가 호시탐탐하는 호랑이와 과녁을 노려보는 궁사의 눈빛에 경외감을 느낀 것은, 목표를 향한 백 퍼센트의 집중력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를 돌아봤을 때 ‘나는 한 번이라도 저렇게 목표에 집중한 적이 있었던가?’하는 자괴심이 나를 덮쳤던 것이다. 나를 기르는 것도 대충, 자식들을 기르는 것도 대충이었던 삶을 정면으로 보면서 나는 이괘의 초구처럼 그저 부러워만 하고 턱을 늘어뜨렸던 것만 같아서 ‘그래, 나도 한번 호시탐탐해보자’는 당치도 않은 의욕을 다졌었다.

 

하지만 나는 육사효를 곰곰이 따져 보면서 호시탐탐은 ‘기욕축축(其欲逐逐)’과 함께 함으로써 가능해지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욕축축은 하고자 하는 바를 계속해서 쌓아간다는 의미이다. 양궁선수들은 엑스텐을 쏘기 위해 평소 하루에 천 개의 화살을 쏜다고 한다. 처음부터 ‘쏘기만 하면 엑스텐’을 만든 건 아니었을 것이다. 경기에서 엑스텐을 쏘는 궁사의 적중력은 천 개의 화살을 쏜 하루하루가 쌓여 얻어진 결과이다. 그러니 내가 우선 감탄하고 따를 것은 과녁을 노려보는 양궁선수의 호시탐탐이 아니라, 천 개의 화살을 쏘는 그의 일상의 노력, ‘기욕축축’이어야 하지 않을까.

 

혼자 하는 양생은 없다

 

주역의 괘 중에 ‘기름(養)’을 이야기하는 대표적인 괘로 몽괘(蒙卦)가 있다. 몽괘는 어린아이를 키우듯 미숙한 것을 깨우쳐서 완성해가는 기름을 말해주는 괘이다. 그래서 기르는 주체와 길러지는 주체가 뚜렷하다. 하지만 이괘의 기름은 분명한 역할 구분도, 기르는 방법도 정해져 있지 않아 애매하고 어렵다. 어려운 이유는 이괘의 기름, 양생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양생이라는 말 속에는 개인 차원에서의 ‘생명 보전’외에, 복잡다단한 인간관계 전체를 다루어 ‘좋은 삶’으로 이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양생이 다른 사람에게 좋지 않다면 그 방법은 피해야 한다. 아니, 애초부터 자신과 이웃이 함께 잘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양생인 것이다. 그래서 산뢰이괘의 하괘의 효사에 흉(凶)이, 상괘의 효사에 길(吉)이 나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하괘의 세 효는 자신의 양생을 꾀하는 데 급급한 반면, 상괘의 세 효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양생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양생의 방법으로 제시되는 것이 호시탐탐이다. 호랑이가 몸을 낮추고 먹이의 움직임을 관찰하듯이, 이웃 사람의 상황과 역량을 살피고 또 살피는 것. 양생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혼자 하는 양생은 양생이 아니다.

 

댓글 7
  • 2021-09-27 10:57

    호시탐탐 양생의 도를 익혀가겠습니다. 주역 멋진 책이네요~

  • 2021-09-27 22:25

    내가 먹는 음식, 내가 한 말, 나의 지혜가 나에게는 영양이 될지 모르지만, 누군가에게는 독이 되지 않는지 총체적으로 살피는 것. 그렇게 총체적인 삶의 방식, 양생(養生)의 도를 안내하는 것이 이괘이다.

    :이웃의 상황을 살피는 호시탐탐 못지않게 '나'를 호시탐탐 살피기 위한 음식, 말, 지혜의 살핌도 필요하다는 의미로도 읽히네요^^ 그렇게 총체적인 삶에 대한 감각을 위한 호시탐탐^^ 좋네요~

  • 2021-09-28 09:01

    <니까야>에 도를 닦는 출가자가 가져야 하는 일곱 가지 인식 중에 '음식에 혐오하는 인식'이 있더라고요

    맛에 대한 갈애로부터 마음이 물러서고 움츠리고 외면하고 그곳으로 손을 뻗치지 아니하여 그것에 대한 평온이나 혹은 혐오감이 확고해진다... 

    음식은 나누면 된다고 생각한 나에게 다시한번 잘 생각해보라는 과제가 되었는데 여기 양생을 말하는 산뢰이괘도 어쩌면 맥락이 닿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봄날샘의 주역이야기 갈수록 기대되는데요?^^

  • 2021-09-28 10:57

    ‘호시탐탐’의 진짜 의미를 알아 가네요~  ‘기욕축축’도 함께 기억하겠습니다!

    양생의 도는 늘 ‘함께’ 가능하고 꾸준하고 낮은 자세여야 가능하다!

    ‘환대’의 의미도 이럴 듯합니다~~~

    주역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네요!!!

  • 2021-09-28 11:44

    가물가물 잊혀져가는 주역인데 이렇게 한번씩 글로 만나니 좋네요. 호시탐탐 노려보지 않고 잘 살펴볼게요~

  • 2021-09-29 22:14

    젊은시절 내욕심만 차리고 살았던 것이 흉하긴 하지만 이것도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에 위로가 되기도 하네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 2021-10-08 03:42

    우와~ 멋지십니다!!! 

    기욕축축!! 

    이웃을 살피는 양생!! 

봄날의 주역이야기
도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을 짓고 사는 친구가, 자기가 직접 심어 싹을 틔웠다며 작은 아보카도 화분을 하나 주었다. 단단한 아보카도 씨앗 한가운데가 쩍 벌어져 있었고 그 틈으로 싹이 나고 줄기가 한 뼘만 한 길이로 자라나 있었다. 친구의 말로는 아보카도는 싹을 틔우기가 어렵지, 한번 싹이 나오면 쑥쑥 잘 자랄 것이니 어렵지 않게 키울 수 있다고 한다. 씨앗에서 싹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까지 이 식물은 얼마나 힘든 고난을 견뎌냈을까.   만물의 시작, 수뢰둔괘 주역 64괘의 세 번째인 수뢰둔(水雷屯)괘는 주역에서 시간과 공간이 열린 후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지점을 가리킨다. 하늘을 뜻하는 건괘(乾卦)와 땅을 뜻하는 곤괘(坤卦)의 다음에 나오는 괘가 바로 둔괘이다. 서괘전에서 “천지가 있은 뒤에 만물이 있다”고 했으니 둔괘는 하늘과 땅이 열리고 난 후 바야흐로 사물들이 생겨나기 이전, 혼돈(chaos)의 세상에서 무언가가 생겨나는, 우주생성의 드라마 현장이다. 원시지구의 대기상황처럼 둔괘의 상괘는 물이고, 하괘는 우레이다. 천지가 검은 먹구름으로 꽉 차있고 순간순간 그 속에서 ‘번쩍’하며 천둥과 번개가 친다. 모든 것이 시작되는 때. 둔괘는 크건 작건 모든 시작에서 만나는 고난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 우선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는 것이 어렵다. 또 언제 닥칠지 예감하는 것이 어렵고, 실천하는 것이 또 어렵다. 주역의 대표적인 난괘인 둔괘는 그 어려움이 바로 ‘시작’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다른 난괘와 비교된다. 주역이 말하는 시작의 어려움은 과연 무엇이고, 그 어려움을 이겨낼 방법은 없는지 살펴보자.   판단하기 어려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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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3.02.27 | 조회 394
봄날의 주역이야기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통해 이제는 전세계적인 놀이가 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술래가 이 문장을 말하고 뒤돌아보는 순간, 사람들은 전력질주 하다가 즉시 멈춰야 한다. 이때 앞으로 나가는 관성을 막지 못하고 움직이면 지게 된다. 움직임과 멈춤 사이를 절묘하게 조절하는 능력이 이 놀이의 관건이다. 난괘 중의 난괘로 꼽히는 수산건(水山蹇)괘의 상황이 꼭 이렇다. 마구 앞으로 달려 나가도 안되지만, 그저 멈춰 있기만 해도 패한다. 만약 사업을 하거나, 이성을 만나거나, 어떤 큰 일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시점에 점을 쳐서 수산건괘를 얻었다면, 당장 그 일을 멈추고 돌아봐야 한다. 그만큼 수산건괘는 어떤 일을 강행하는 것이 어려운 때임을 강조한다. 이 어려움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가. 수산건(水山蹇), 앞으로 가지도 말고, 절망하지도 말라 주역에서 ‘물’은 험함, 고난의 상징이다. 그래서 주역의 괘 중에 ‘안좋은 괘’ ‘어려운 괘’라고 불리는 괘에는 항상 물을 뜻하는 감괘(坎卦)가 들어있다. 수산건괘도 상괘가 감괘이다. 위는 물, 아래는 산이 놓여 있는 형상의 수산건괘는 높은 산을 간신히 넘었는데, 다시 물을 만나는 고난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앞은 험한 강이고, 뒤는 내가 넘어온 산이 있으니, 앞으로 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   괘의 순서로 볼 때 수산건(水山蹇)괘는 화택규(火澤睽)괘의 다음에 나온다. 주역 64괘를 하나의 스토리로 엮어서 해석하는 서괘전은 “규(睽)는 어긋남이니 어긋나면 반드시 어려움이 있다. 이 때문에 수산건괘(蹇卦)로 받았다”고 말한다. 규는 ‘사팔눈’처럼 서로 눈을 맞추지 못하고 반목하는 형상으로, 소통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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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2022.11.10 | 조회 404
봄날의 주역이야기
  고난이 연거푸 닥칠 때 나는 최근 부득이하게 한 사회적협동조합의 이사장을 맡았다. 회사의 형태를 띠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 사기업과는 달리, 그 운영과 사업은 사회적으로, 즉 공적으로 좋은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사회의 일원이던 내가 대표를 맡은 것은 이같은 공적인 기능의 유지를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고, 나를 이어서 누군가가 또 그 역할을 맡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맡은 역할을 다 파악하기도 전에 회사재정이 출렁거렸다. 적자로 시작한 회사재정 상황은 나의 임금은 둘째로 치고, 매달 직원들의 월급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웠다. 앵벌이하는 사람처럼 나는 매일같이 입출금장부를 들여다보며 노심초사했다. 한 두달 사이 이제 숨통이 트인다 싶었는데, 이번엔 일 잘하던 직원이 퇴사하겠다고 나섰다. 성격이 싹싹하고 부지런해서 고객응대는 물론이고 연차에 비해 디자인 실력도 뛰어났다. 그 사람을 대신할 새 직원을 뽑는 일은 도대체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어깨가 천근처럼 무거워졌고, 입맛이 똑 떨어졌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일에 신경질을 냈고, 모든 일에 심드렁해졌다. 도대체 내게 왜 이런 고난이 찾아오는 걸까. 나는 이런 상황을 넘겨주고 쏙 빠진 전임대표가 원망스러웠다. 전화해서 화풀이라도 해볼까 하는 쪼잔한 생각이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고난에 고난이 겹쳐 힘겨운 때가 있다. ‘엎친 데 덮친 격’ ‘갈수록 태산’ 같은 말은 이런 경우를 가리킨다. 주역의 중수감(重水坎)괘는 바로 이처럼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몰려오는 상황을 말하는 괘이다. 감(坎)은 물을 뜻하는데 중수감괘는 물(水)이 중복된다(重)는 뜻을 가진다. 주역에서 물, 즉...
  고난이 연거푸 닥칠 때 나는 최근 부득이하게 한 사회적협동조합의 이사장을 맡았다. 회사의 형태를 띠고 있기는 하지만 일반 사기업과는 달리, 그 운영과 사업은 사회적으로, 즉 공적으로 좋은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사회의 일원이던 내가 대표를 맡은 것은 이같은 공적인 기능의 유지를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고, 나를 이어서 누군가가 또 그 역할을 맡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맡은 역할을 다 파악하기도 전에 회사재정이 출렁거렸다. 적자로 시작한 회사재정 상황은 나의 임금은 둘째로 치고, 매달 직원들의 월급을 확보하는 것이 어려웠다. 앵벌이하는 사람처럼 나는 매일같이 입출금장부를 들여다보며 노심초사했다. 한 두달 사이 이제 숨통이 트인다 싶었는데, 이번엔 일 잘하던 직원이 퇴사하겠다고 나섰다. 성격이 싹싹하고 부지런해서 고객응대는 물론이고 연차에 비해 디자인 실력도 뛰어났다. 그 사람을 대신할 새 직원을 뽑는 일은 도대체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어깨가 천근처럼 무거워졌고, 입맛이 똑 떨어졌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일에 신경질을 냈고, 모든 일에 심드렁해졌다. 도대체 내게 왜 이런 고난이 찾아오는 걸까. 나는 이런 상황을 넘겨주고 쏙 빠진 전임대표가 원망스러웠다. 전화해서 화풀이라도 해볼까 하는 쪼잔한 생각이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세상을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고난에 고난이 겹쳐 힘겨운 때가 있다. ‘엎친 데 덮친 격’ ‘갈수록 태산’ 같은 말은 이런 경우를 가리킨다. 주역의 중수감(重水坎)괘는 바로 이처럼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몰려오는 상황을 말하는 괘이다. 감(坎)은 물을 뜻하는데 중수감괘는 물(水)이 중복된다(重)는 뜻을 가진다. 주역에서 물, 즉...
봄날
2022.07.25 | 조회 509
봄날의 주역이야기
전쟁에 정당한 명분은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뉴스가 매일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와의 개전선언 이래, 우크라이나, 특히 동남부 돈바스, 마리우폴을 비롯한 각 지역은 포화에 휩싸여있다. 인구가 밀집된 도시지역을 빠르게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러시아의 예상은 빗나갔고, 강력한 우크라이나의 저항으로 전쟁은 석달째로 접어들었다. 이 지역의 90%이상의 집들은 파괴됐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길 위에 내던져졌다. 많은 지역에서, 어제는 러시아의 탱크가 도로를 질주했다가 오늘은 우크라이나 군대가 탈환하는 일진일퇴의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은 지옥에 다름없다. 얼마 전, 이 전쟁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니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알자는 심정으로 <봄날의 살롱>이 열렸다. 속시원한 대답이나 해결책이 있을리 만무였고, 우리는 전쟁이라는 참상 앞에서 무기력한 슬픔을 나눌 뿐이다. 아무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났고 그 피해는 오롯이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이번 전쟁의 원인에 대해 여기저기 말이 많다. 그 원인은 간단하지 않다. 전쟁의 대의는 아주 복잡하고 오래된 역사적 기반으로 세워진 것이기도 하고, 나토-미국의 연합과 러시아-유라시아 진영간의 격돌의 장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어떤 명분을 앞세운다 하더라도 전쟁이 참혹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떤 명분이건 간에 먼저 전쟁을 도발한 자는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국민이라는 이유로, 하릴없이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매일을 견뎌야 하는 운명, 부모가 죽고 자식이 죽고 집을 잃고 굶주림과 공포에 떨어야 하는 운명을 지운 사태에 대해 어떤 명분이 정당한가.  ...
전쟁에 정당한 명분은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뉴스가 매일 인터넷을 달구고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우크라이나와의 개전선언 이래, 우크라이나, 특히 동남부 돈바스, 마리우폴을 비롯한 각 지역은 포화에 휩싸여있다. 인구가 밀집된 도시지역을 빠르게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던 러시아의 예상은 빗나갔고, 강력한 우크라이나의 저항으로 전쟁은 석달째로 접어들었다. 이 지역의 90%이상의 집들은 파괴됐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길 위에 내던져졌다. 많은 지역에서, 어제는 러시아의 탱크가 도로를 질주했다가 오늘은 우크라이나 군대가 탈환하는 일진일퇴의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은 지옥에 다름없다. 얼마 전, 이 전쟁에 대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니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알자는 심정으로 <봄날의 살롱>이 열렸다. 속시원한 대답이나 해결책이 있을리 만무였고, 우리는 전쟁이라는 참상 앞에서 무기력한 슬픔을 나눌 뿐이다. 아무도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났고 그 피해는 오롯이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이번 전쟁의 원인에 대해 여기저기 말이 많다. 그 원인은 간단하지 않다. 전쟁의 대의는 아주 복잡하고 오래된 역사적 기반으로 세워진 것이기도 하고, 나토-미국의 연합과 러시아-유라시아 진영간의 격돌의 장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어떤 명분을 앞세운다 하더라도 전쟁이 참혹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어떤 명분이건 간에 먼저 전쟁을 도발한 자는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국민이라는 이유로, 하릴없이 쏟아지는 포탄 속에서 매일을 견뎌야 하는 운명, 부모가 죽고 자식이 죽고 집을 잃고 굶주림과 공포에 떨어야 하는 운명을 지운 사태에 대해 어떤 명분이 정당한가.  ...
봄날
2022.05.12 | 조회 415
봄날의 주역이야기
  대학 졸업반때 처음으로 이력서를 썼던 기억이 난다. ‘00고 졸업’ ‘00대 졸업예정’이 내 이력의 전부였다. 이후 내 이력서에는 다양한 경험들이 한 줄씩 추가됐다. 줄과 줄 사이, 수많은 관계 속에서 부대끼며 울고 웃던 내력을 이력서에 표현할 길은 없지만, 어쨌든 이력서를 쓰는 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효과는 있다. 이력서의 끝에는 ‘위의 내용은 사실과 틀림없음을 증명하며, 사실과 다를 경우 그에 따른 피해를 감수한다’는 서약까지 붙어있다. 주역 천택리(天澤履)괘의 이(履)라는 글자는, 바로 자신의 살아온 내력을 거짓없이 써야 하는 이력서의 이(履)자이다. 이 글자는 ‘밟는다’ ‘신발’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천택리괘는 나 또는 누군가가 만들어낸 ‘길’에 대한 이야기이다.   천택리괘는 위는 하늘, 아래는 연못의 형상을 하고 있다. 또 상괘는 굳세고 하괘는 기뻐함이라는 각각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상체가 가진 곧은 품새를 하체가 기뻐하며 따르는 것이 천택리괘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 ‘하늘의 올곧음을 기뻐하면서 기꺼이 따르는 모습’을 주역은 리호미(履虎尾),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때 상체인 건괘는 호랑이를, 하체인 택괘는 사람을 상징한다. 사람이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뜻인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내가 천택리괘를 흥미롭게 느낀 건, 괘사와 효사에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똑같은 구절이 세 번이나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구절은 세 번 모두 각각 다르게 해석되고 각각 다른 강도로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은 예(禮)의 실천이다 천택리괘의 괘사는 ‘리호미(履虎尾) 부질인(不咥人) 형(亨)’이다. “호랑이...
  대학 졸업반때 처음으로 이력서를 썼던 기억이 난다. ‘00고 졸업’ ‘00대 졸업예정’이 내 이력의 전부였다. 이후 내 이력서에는 다양한 경험들이 한 줄씩 추가됐다. 줄과 줄 사이, 수많은 관계 속에서 부대끼며 울고 웃던 내력을 이력서에 표현할 길은 없지만, 어쨌든 이력서를 쓰는 것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효과는 있다. 이력서의 끝에는 ‘위의 내용은 사실과 틀림없음을 증명하며, 사실과 다를 경우 그에 따른 피해를 감수한다’는 서약까지 붙어있다. 주역 천택리(天澤履)괘의 이(履)라는 글자는, 바로 자신의 살아온 내력을 거짓없이 써야 하는 이력서의 이(履)자이다. 이 글자는 ‘밟는다’ ‘신발’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천택리괘는 나 또는 누군가가 만들어낸 ‘길’에 대한 이야기이다.   천택리괘는 위는 하늘, 아래는 연못의 형상을 하고 있다. 또 상괘는 굳세고 하괘는 기뻐함이라는 각각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상체가 가진 곧은 품새를 하체가 기뻐하며 따르는 것이 천택리괘의 내용이다. 그리고 이 ‘하늘의 올곧음을 기뻐하면서 기꺼이 따르는 모습’을 주역은 리호미(履虎尾),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이때 상체인 건괘는 호랑이를, 하체인 택괘는 사람을 상징한다. 사람이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뜻인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내가 천택리괘를 흥미롭게 느낀 건, 괘사와 효사에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똑같은 구절이 세 번이나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호랑이 꼬리를 밟는다’는 구절은 세 번 모두 각각 다르게 해석되고 각각 다른 강도로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호랑이 꼬리를 밟는 것은 예(禮)의 실천이다 천택리괘의 괘사는 ‘리호미(履虎尾) 부질인(不咥人) 형(亨)’이다. “호랑이...
봄날
2022.04.03 | 조회 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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