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 돌아왔다 3회]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를 싫어해

새털
2018-07-31 07:18
690

[플라톤이 돌아왔다 3회]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를 싫어해

-국가1

 

 

 

 

 

 

 

문탁에서 공부하고 생활한 지 어느새 9년째다. 시간은 정말 자~알 간다. 정신없이 후딱 지나갔다

세미나에서 오고간 말들을 모아서 ‘10주년 자축이벤트를 준비중이다. 거기엔 분명 당신의 생각도

단팥빵의 앙꼬처럼 들어있다는 사실을 이 연재를 통해 확인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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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털

 

 

 

 

문탁샘도 아닌데 문탁에 왔더니 쪼는인간으로 살고 있다

요즘 먹고 사는 시름에 젖어 쪼는 각이 좀 둔탁해졌다

예리해져서 돌아갈 그날을 꿈꾸며 옥수수수염차를 장복하고 있다

 

 

 

 

 

 

 

 

 

 

 

 

 

 

 

 

 

 

1. 현수막을 걸다, “목격자를 찾습니다

목격자를 찾습니다 모월모시 좌회전하는 은색 아반떼와 흰색 소나타 택시의 충돌사고 목격하신 분 연락주세요차가 막히는 도로에서 가끔 이런 현수막을 보게 된다. 정체중인 차량의 행렬을 지켜보다 따분해져 눈을 돌렸을 때, 이런 현수막을 읽게 되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과연 목격자를 찾을 수 있을까?’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누가 일부러 자기 시간을 내야 하는 귀찮은 일을 하려 할까?’ 그런데 교통사고의 정도는 어느 정도길래 저렇게 현수막까지 달았을까? 사람이 크게 다쳤나? 피해자가 아이나 어느 집 가장이라면...이렇게 머릿속으로 아침드라마를 찍다, 슬슬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몽상과 잡념은 끝이 난다.

사실 저 위 현수막은 내가 걸었던 현수막의 내용이다. 노면이 살짝 결빙되기 시작하던 12월의 어느 날 자정 가까운 시각, 독서실에서 집으로 오는 아이를 태운 은색 아반떼와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는 회사원을 태운 택시가 충돌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은색 아반떼는 좌회전중이었고 택시는 직전중이었다. 두 대 가운데 한 대가 명백히 신호위반을 한 사고였다. 누가 신호위반을 했을까? 택시 운전자는 삿대질을 하며 차에서 내렸고, 은색 아반떼 차량 운전자는 순간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자정이 넘은 시각 경찰서에서 경찰과 운전자들과 보험사 직원이 대면했다. “아줌마, 잘 기억해보세요. 좌회전 신호 맞아요?” “...너무 놀라서 기억이 안나요...근데 아까 거기는 불법좌회선하기 힘든 곳이에요. 지하도로가 있어 도로폭이 엄청 넓어요. 저는 애까지 태우고 오밤중에 신호위반을 할 정도로 강심장이 아니에요.” 사고 장소는 유명한 포털사이트 본사에서 200미터쯤 떨어진 곳으로, 야심한 시각 서울번호판을 단 택시들이 한시 빨리 귀가를 희망하는 회사원들을 태우고 신호위반을 밥 먹듯 하는, 그런 위치였다. 그러나 그건 그냥 정황일 뿐이다. 베테랑 택시 기사가 차량이 거의 없는 야밤에 신호위반하는 건 흔하고 흔한 일이지만, 그날 그 시각 그 흔한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언제나 신호를 지키는 운전 미숙의 운전자가 불법좌회전을 하는 매우 드문 사건이 그날 그 시각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근거 또한 어디에도 없다. 택시 승객은 기사가 신호를 지켰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는 승객은 차에 타자마자 잠이 들지 않았을까? 혹은 그들은 택시에서 내리기 전에 기사에게 유리한 진술을 하기로 입을 맞춘 게 아닐까?

 

 

 

야심한 밤 경찰서에서 피곤에 지친 세 남자-경찰, 보험사 직원, 택시 기사와 대치하며 나는 누구도 내 편이 아님을...누구도 사건의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경찰은 그저 사건경위서를 작성하면 그만이고, 보험사 직원은 과실여부에 따라 매뉴얼대로 사고처리하면 그만이고, 택시기사는 100% 상대차량 과실을 확신하며 뒷목을 잡고 있었다. 그때 나는 어떤 억울함 혹은 불의를 느꼈다. 세 남자가 자기들끼리 꿍짝이 맞아 멋대로 빨리 사건을 끝내버리는 것은 아닐까? “목격자를 찾겠어요!” 새벽 1시 반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반격이었다.

인터넷에서 현수막 업체를 알아보고, 현수막에 사건경위와 담당경찰의 연락처를 적으며, 진짜 목격자를 찾겠다는 기대는 거의 없었다. 그래도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다는 억하심정으로 가끔 경찰에게 연락해 제보가 있는지 확인하고, 택시 승객에게 전화해 그날의 기억을 되묻는 껄끄러운 일을 해치웠다. 이제 나는 가끔 도로에서 현수막을 볼 때마다, 그 현수막이 말해주는 것이 억울함의 토로와 그 한풀이라는 것을 이해한다. 그날 그 야심한 밤 경찰서에서 세 남자, 경찰, 보험사 직원, 택시 기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내게 작은 호의를 베풀었다면 나는 현수막을 내거는 귀찮은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신호위반을 했다고 치자. 그래도 아이와 함께 교통사고가 나서 얼이 나가 있는 애엄마에게 보여야 하는 인지상정이란 것이 있지 않은가? 신호위반의 진위만 가리면 공정하고 정의로운 것인가? 도대체 정의란 무엇인가?

 

 

 

2. 대화, 소크라테스 철학의 알파(Α)와 오메가(Ω)

그 당시 교통사고 시비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플라톤의 국가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10권으로 구성된 국가의 첫 번째 권의 중심테마는 정의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정의(正義)의 정의(定意)이다. 정의사회 구현을 의미하는 사회적 정의를 포함해서 무릇 올바름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소크라테스는 대화 상대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고대사회의 정의관은 범박하게 말하자면 인과응보’(因果應報)이다. ‘뿌린 만큼 거둔다는 의미의 인과응보를 달리 말하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다. 나에게 이익을 준 사람에게는 보답을 하고, 나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는 해코지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논리이다. 국가1권에서 소크라테스가 딴지를 거는 것은 이런 고대사회의 전통 통념에 대한 부분이다. ‘누군가에게 해코지를 하는 사람을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실제로 우리 생활을 돌아보자. 주차중 옆집 차가 내 차를 긁었다고, 나도 옆집 차를 긁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정의롭기는커녕 고지식하고 괴팍한 사람이라는 손가락질을 받기 십상이다. 그가 내게 손해를 입혔으니, 나에게는 그에게 손해를 입힐 권리가 있지만,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따라서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은 정의(正義)의 정의(定意)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해왔던 것이 사실은 모순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포리아(aporia)이고, 여러 사람이 함께 아포리아의 발견에 이르는 공동탐구 과정이 소위 말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이다. TV예능프로그램 <라디오스타>에서 네 명의 진행자와 여러 명의 게스트가 등장해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나누지만, 그것은 소크라테스식의 대화가 아니다. 물론 가끔 그들도 소크라테스식 대화를 하기도 한다. ‘미담제조기인 어떤 연예인의 선행이 동료 연예인들에게는 결코 미담이 아니라 부담과 괴담이 되는 순간, 스튜디오에는 한순간 정적이 머문다. 연예인의 선행이 사회에 좋은 파장을 준다면, 동업자 연예인인 그들도 선행에 동참해야 한다. 그런데 욕을 좀 먹더라도 돈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면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다. <라디오스타>의 출연자들뿐 아니라 우리도 무수한 뒷담화 사이, 무의미한 수다 사이 가끔씩 소크라테스식 대화를 한다. 소크라테스는 더 이상 아무 말이나 떠들 수 없는 정적의 순간이 바로 우리가 새로운 앎에 이를 수 있는 쪽문임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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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 2018-07-31 11:48

    <고르기아스>에서 인용한 한 대목이 <고르기아스>의 인용인 줄 모르고 읽으며

    가슴이 뜨끔했음을 인정합니다.

    오래 전 아테네에서도 아이들에게는 공부하고 철학하라고 하면서

    소크라테스에게는 나이들어 아직도 철학하는 철없는 자라고 비웃는 이들이 많았나 봅니다.

    에휴! 사람 사는 모습은 거기서 거기인가 봅니다. 그려~

  • 2018-07-31 16:22

    ㅋ 그럼 나이들면 '철학' 안 하고 뭐하남?

    '철학 속으로 멀리 질주' 하지 않고

    현실(불의가 판치는)에서 '안주' 하지 않자면...

  • 2018-08-01 14:11

    그러나 세상이 전도되어 있다면 

    그 팩트를 팩트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세상에서 펼쳐진 일은 모두 팩트들이라지만 허위가 숨어있기에

    똑바로 서서 볼 눈은 필요한 것 아닐까요?

    소크라테스의 꼰대질이 팩트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 2019-06-14 15:33

    상여금이라는 것은 회사의 잉여이익에 대해서 주는 것이니 외적인 힘에 의해서 최저임금을 강제로 올린다면 결국 회사의 잉여이익은 줄어 들 것이고 따라서 상여금을 줄이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 같은데...최저임금을 올리면 갑자기 회사의 매출이 올라가는가요?

    도시 개발자가 원주민을 몰아 낸다는 것은 무슨 일제시대도 아니고 토지를 강제 수용할 수 잇는 것도 아닐 것인데, 원주민이 팔았으니 도시개발자가 사서 새로 짓겠지요.

    위의 글이야 말로 궤변으로 혹세우민하고 있는 것 같군요.

두루미의 알지만 모르는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한비자의 법.술.세. 탐구 첫 번째 이야기 법은 왜 존재할까?   17년간 버스 기사로 일한 A씨는 2010년 10월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요금 6천400원 중 6천원만 회사에 납부하고 잔돈 400원을 두 차례 챙겨 총 800원을 횡령했다는 이유였다. <2022년 8월 3일 연합뉴스 일부 발췌>   이 뉴스는 한동안 떠들썩했던 “800원 횡령 버스기사 해고” 사건이다. 내가 이 사건에 주목한 이유는 법의 형평성과 공정성이 의심받을 만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사측은 버스기사가 잔돈 400원으로 두 번 자판기 커피를 마시는 장면을 CCTV로 낱낱이 찾아냈다. 사측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무얼까? 그 버스기사가 당시 노조활동을 시작한 것이 화근이었다. “800원 횡령죄라니... 이게 법이야?”라고 내가 푸념하자 사람들은 말했다. “법은 원래 그런 거야.” 법은 정말 원래 그런 걸까? 법의 존재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내가 『한비자』를 다시 읽은 이유이다.     1. 자산의 성문법 – 귀족의 전횡을 막다   춘추시대는 법이 아니라 예(禮)로 다스려지는 시대였다. 그렇다고 법이 없던 것은 아니다. 다만 법은 백성에게만 적용되었다. 다시 말해 백성이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지만, 귀족(대부 이상)은 열외였다. 귀족은 형벌의 규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 입맛대로 법을 적용하고 해석해서 백성을 처벌하기까지 했다. 이 당시 법은 공개되지 않고 전적으로 특권층의 재량에 맡겨졌다. 법가는 주나라 말기 심해지는 귀족의 횡포를 막기 위해 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오늘날 우리가 법이라고 말하면 이런 성문법을 의미한다.   출처 :...
두루미
2024.03.26 | 조회 171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두 번째 영화는 <도니 다코>(2001)입니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이는 것 도니 다코 Donnie Darko | 미스터리/판타지/드라마 | 미국 | 112분 | 2001       ※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도 ‘도니 다코(제이크 질렌할)’는 잠결에 어딘가를 헤매다가 ‘프랭크(제임스 듀발)’를 만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는 “28일 후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알려준다. 정확히 말하자면, ‘28일6시간48분12초 후’란다. 도니의 왼쪽 팔뚝에도 ”28:06:48:21“이라고 쓰여 있다. ‘네임펜’으로 잠결에 써서 그런지 글씨가 삐뚤빼뚤하다. 불행히도 프랭크를 볼 수 있는 것도, 이 세계가 곧 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도 오직 ‘도니’ 혼자뿐이다. 말한다고 믿어줄 친구도 없다. 그렇게 밤새 헤매다 아침이 되면 도니는 늘 엉뚱한 곳에서 일어난다.   일그러진 얼굴의 토끼가면을 쓴 프랭크. 가면을 쓴 이유는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도니 다코>(2001)의 카메라의 시선은 심플하게 ‘도니’의 행동을 쫓는다. 영화의 배경도 그의 집, 학교, 좀 더 넓게는 마을이 전부다. 극의 흐름은 단순해 보이지만 이 영화를 명료하게 이해하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청량리
2024.03.20 | 조회 242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주역64괘에서 42번째 풍뢰익(風雷益)괘는 산택손(山澤損)괘의 다음에 배치된 괘이다. ‘덜어낸다’는 뜻의 손괘와 ‘보탠다’는 뜻의 익괘를 보면 어딘지 경제적인 관점이 생기는 듯 하다. 그 관점으로 보면 손은 손해, 익은 이익으로 보게 되고, 결국 손괘는 안좋은 괘이고, 익괘는 좋은 괘라는 일차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다. 경제는 고대사회에서도 그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영역 중 하나였으니 주역에 경제개념을 다루는 괘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주역에서 다루는 손과 익은 기업의 ‘손익계산서’같은 단순한 숫자의 문제에 국한하는 것은 아니다. 손괘와 익괘 모두 풍요로움, 풍성함, 여유있음을 상징하는 부(富)를 소재로 하고 있는 것은 맞다. 그리고 손괘의 손이라는 의미가 덜어내거나 빼는 마이너스(-)를 뜻하고, 익괘의 익이 더하다는 의미의 플러스(+)를 가리키는 것도 맞다. 하지만 손괘가 무작정 마이너스나 손해를, 익괘가 무한정한 플러스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은 부의 크고 작음, 부의 커지고 작아짐의 관점보다는, 오히려 ‘유동하는 부(富)’, 즉 고정되어 쌓이지 않고 끊임없이 흐르는 부가 만들어내는 ‘효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탠다는 뜻은 이천은 손괘와 익괘를 비교하면서 “손괘는 아래를 덜어 위에 더하는 것이며,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하면 익괘가 된다. 백성의 위에 있는 자가 은택을 베풀어서 아래에 미치면 익(益)이 되고, 아래의 것을 취하여 자신을 후하게 하면 손(損)이 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손괘와 익괘는 무언가 흐르는 방향이 정반대로 대비되는데, 흐르는 것이 부(富)라고 했을 때, 손괘의 부는 아래에서 위를 향하고(↑) 익괘의 부는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는 것이다. 조금 더...
봄날
2024.03.08 | 조회 186
토용의 서경리뷰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무슨 책을 읽을까?   한문강독세미나는 한문으로 된 동양고전을 강독하는 세미나이다. 2010년부터 시작했으니 문탁의 역사와 함께한 세미나라고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강독하던 책이 끝을 보일 무렵이면 다음 번 책을 두고 즐거운 고민을 시작한다. 『서경』을 시작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강독 중이던 『근사록』이 끝나갈 무렵 다음 책을 두고 세미나원들간에 설왕설래가 시작되었다. 동양고전의 기본이 사서삼경인데 사서는 읽었으니 이제 삼경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시경』,『서경』,『주역』 중 무엇을 읽을까? 『주역』과 『시경』은 이문서당에서 읽고 있거나 읽을 예정이니 패스.(이문서당에서는 2018년에 『주역』을 2019년에 『시경』을 읽었다.) 자연스럽게 남은 것은 『서경』. ‘그래 너로 하자. 그렇잖아도 네가 많이 궁금했다.’ 큰 이견 없이 『서경』으로 결정되었다.   그동안 사서를 읽으면서 중간 중간 튀어나오는 ‘시왈(詩曰)’, ‘서왈(書曰)’에 당혹스러운 적이 많았다. 한자와 문장도 어려운데다가 앞뒤 맥락도 모르는데 한 구절 뚝 떼어다가 써 놓았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는 대부분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로 인용을 한다. 직접 인용을 하지 않았더라도 『서경』의 내용이 문장 속에 녹아 있는 경우도 많다. 『논어』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인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소인의 덕은 풀이다. 풀 위에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눕게 마련이다.’의 출전도 『서경』이다.   『서경』은 공자가 성군으로 칭송하는 요순의 정치와 본받고 싶다던 주공의 교훈을 자세하게 싣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논어』의 마지막 편인 「요왈」은 제왕의 정치에 대해 『서경』에 나오는 요, 순, 탕왕, 무왕의 말을 간추려 전하고 있다. 맹자도 자신의 왕도정치를 주장할 때...
토용
2024.02.29 | 조회 282
영화대로 42길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언제 어디서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정작 영화에 대해 묻지 않는 시대.  우리는 영화와 삶의 사이길, 영화대로 사는 길에 대한 질문으로,  산업과 자본의 도구가 아닌 영화로서의 영화를 보고 읽습니다.   *본 리뷰에 사용된 이미지에 대한 저작권은 해당 영화에 있습니다.   • 이번에 '영화대로42길'로 가는 법은 '같은 영화 다른 이야기' 컨셉입니다. 그 첫 번째 영화는 <디 아워스>(2002)입니다.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가 -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The Hours(2002)>       <디 아워스>는 1923년 영국 리치몬드에서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미국 LA의 풍요로운 일상에서 <댈러웨이 부인>을 읽는 로라 그리고 2001년 뉴욕의 출판 편집인으로 별명이 ‘댈러웨이 부인’인 클라리사의 ‘어느 하루’를 교차 편집하며 보여준다. 버지니아와 로라가 살았던 때는 여성의 사회진출이나 동성애 자체를 감추어야 했던, 혹은 전쟁 직후의 경제 번영 속에서 미국 전체가 가부장제 질서를 견고히 하던 시대였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 직후의 삶을 살았던 앞의 두 여성과는 달리 2000년대의 클라리사를 둘러싼 사회환경은 많이 달라져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시대를 관통하는 정서가 있었다. 그것은 불안이다.     각각 버지니아, 로라, 클라리사로 분한 니콜 키드먼, 줄리언 무어, 메릴 스트립의 뛰어난 연기는 오늘날 여성의 삶으로 중첩되기도 하고 미묘하게 어긋나기도 한다. 여기서 리처드라는 인물의 등장은 의문을 낳는다. 그는 로라의 아들이자 클라리사의 첫사랑이며 버지니아와 같은 작가다. 또한 버지니아처럼 자살에 성공하는 인물이다. 여성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만으로도 영화는...
띠우
2024.02.19 | 조회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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