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서당>3분기 1회차 후기 '溫'한 사람

새털
2020-10-25 14:57
277

어느새 이문서당 3분기가 시작되었고, 지난 시간 <술이편>을 마쳤다. 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이 깊어가고 있는데, 내 논어공부는 올봄 막 시작했을 때와 그닥 바뀐 바가 없다. 여전히 한자 까막눈이고, 우응순샘의 설명을 들을 때는 다 알아듣는 것 같은 착각이 들지만, 책을 덮으면 백지상태다. 확실히 책만 들고 다니고 강의만 들어서는 배움이 나아지지 않는다.

 

2020년 올해 내 논어 공부는 논어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공자님에 대한 인상 수집이다. 언젠가 강의시간에 "공자님도 니체 못지 않아요!"라고 말했더니, 샘께서 무슨 뜻이냐고 질문하셨다. "니체처럼 나는 너무 똑똑해! 나만한 사람이 없어! 자뻑이 심해요!!"라고 대답했더니, 우응순샘을 비롯한 선배 동학들 왈 "네가 논어를 처음 읽어서 그래!"라고 대꾸했다. 그렇다. 나에게 공자는 자뻑이 심한 똘똘이스머프처럼 느껴지는데, 공부를 오래 하면 다른 게 보이나 보다. 그런 게 보일 때까지 공부를 계속해야 할 것 같다. 팩트와 상관 없이, 나에게 공자는 '자뻑 쩌는' 비운의 지식인상이다. 똑똑한데 세상사는 뜻대로 풀리지 않는, 역사 속 영웅의 서사처럼 느껴진다. 공부에 있어서는 디테일장인이다. 제자들마다 지적해주는 내용도 디테일하다. 디테일한 만큼 까칠해보인다. 표현은 단박하지만, 두세 번 의미가 꼬아져있다. 절대 한 글자에 한 의미를 담지 않는다. 고수의 화법다. 

 

子溫而厲 威而不猛 恭而安

 

<술이편>의 마지막 문장이다. "공자께서는 온화하면서도 엄숙하시고, 위엄이 있으면서도 사납지 않으시며, 공손하면서도 편안하셨다." 해석에서 우응순샘은 공자는 '溫'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고, 수강생들은 무엇이 '溫'한 사람의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질문했다. 공자가 제자들에게 직언하는 모습을 보면, 정확한 지적이나 애둘러 말하지 않는 냉정함이 있다. 자공이 "선생님 저는 그릇인가요?"라는 질문에 공자는 단박에 "너는 그릇이다."라고 무질러버린다. "君子不器" 군자는 그릇이 아니라는 가르침 다음에 바로 이런 문답이 오가니, 자공은 무안하고 선생에 대한 미움이 생길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 대한 유추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에 의한 추론이기 때문에 진위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다.

 

이 부분을 수업하며, 나는 선생이라는 일은 '溫'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강사다. 선생이라는 의식 없이 직업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가끔 내가 선생이 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 학생들이 수업에 빠지거나, 과제를 못 냈을 때, 발표를 하지 못했을 때, 그애들이 내게 보내는 가히 '소설수준'의 경위서를 읽으며, 학생들을 의심할 것인가? 속는 셈치고 넘어갈 것인가? 갈등의 순간이 온다. 강사 초년시절에는 학생들에게 우습게 보여서는 안된다는 위기의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너희들에게 속는 어리숙한 사람이 아니라는 표시를 팍팍 내려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속아주는 사람'이 선생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선생이 학생을 믿어주어야지, 의심하고 증거를 캐려 한다면 수업이고 뭐고 끝이다. 이런 게 논어에서 말하는 '溫'은 아닐 수 있다. "선생님 제가 공황장애가 있어서..." "선생님 제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라..." "선생님 교통사고가...." 이런 사유를 선생에게 내야 하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건, 사실확인과 진위판별이 아니라 더 이상의 소설을 지어내지 않아도 되도록 여유를 주는 일 같다. 

 

 

댓글 4
  • 2020-10-25 18:20

    갑자기 溫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하고 싶어지는 후기네요.
    溫이란 일단 따땃한 열이 필요하므로 뭔가 핑계로 빠지는 제자들을 볼 때 일단 뚜껑이 열린다...이럴 때 열이 난다.
    물론 그 열은 화로 귀결되지 않지만, 일단 열은 난다는...ㅋㅋ
    새털의 논어 후기 재밌게 읽었어요.

  • 2020-10-25 18:48

    '소설수준'의 경위서를 보니 반드시 溫 해야할 것 같아요.
    클라스가 다르네요. 헐~~

  • 2020-10-26 06:48

    논어는 몰라도 후기는 ㅎㅎㅎ

  • 2020-10-26 08:23

    ㅎㅎ 그럴듯하고 기발한 소설을 낸 성의있는? 학생들에겐 통과와 함께 추가점수를 주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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