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집’에 살고 있습니다

우현
2022-10-14 16:15
473

 

선집에 살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한창 수다를 떨던 도중 친구가 물었다. “너 근데 춘천 안 살면 자취해?” “응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렇다고 볼 수 있는 건 또 뭐야.” 친구에게 내가 하는 ‘공부’를 이해시키기 어렵 듯이, 내가 사는 ‘선집’이라는 공간에 대해서도 말을 꺼내기 시작하면 너무 길어지니까 그냥 퉁 치는 습관이 생겼다. 현재는 자취에 조금 더 가깝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자취는 확실히 아니고, 그렇다고 기숙사도 아닌 것 같은... 이번 기회에 내가 사는 공간 ‘선집’에 대해서 써볼까 한다.

 

공간의 윤리, 자취도 기숙사도 아닌

 ‘선집’은 인문학 공동체 ‘문탁 네트워크(이하 문탁)’에서 시작된 공동주거 프로젝트다. 때는 2018년 즈음인데, 먼 지역에서부터 문탁에 드나드는 청년들이 생기자 나온 아이디어이다. 기왕 공간을 얻는 김에, 단순히 숙박시설로써 기능하는 게 아니라 함께 산다는 것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장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여러 샘 분들이 힘을 합쳐 문탁 근처의 투룸 방을 얻었고, 간단한 생활용품들과 가구들을 지원해주셨다. 초창기에는 확실히 기숙사 느낌이 강했다. 금남(禁男)/금주(禁酒)라는 엄격한 규칙도 있었고, 담당 선생님도 존재했으며, 불시 점검 같은 이벤트도 있었다고 한다. 금남 금주라는 규칙을 처음 들었을 때는 살짝 어이가 없었지만, 그만큼 많은 청년들이 오갈 수 있는 공동 공간이라는 점과 함께 산다는 것을 고민해보는 장이라는 맥락을 가져갔으면 하는 의도가 아니었나 싶다. 자유롭게 술 먹고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자취방이 아닌, 그렇다고 숙박과 공부이외에 모든 것이 제약된 기숙사도 아닌, 선집이라는 공간의 윤리를 강조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선집의 운영 방식에서도 그런 윤리를 엿볼 수 있다. 초창기 선집은 투룸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한 방에서 생활하도록 했다. 다른 방은 문탁에 오는 다른 청년들이 언제든지 게스트 하우스로 이용할 수 있도록 게스트 룸으로 운영했던 것이다. 한 방에서 생활하면서 직접적으로 생기는 마찰과 입주자 이외의 청년들과의 관계, 주거 공간의 새로운 용법 등 다양한 지점에서 선집의 윤리를 만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선집 2년차에 내가 입주하게 되면서 대부분의 룰이 없어지고, 담당 선생님도 없어지며 기숙사보단 자취에 가까워지긴 했지만, 여전히 공동주거 공간으로서의 윤리가 남아있다. 입주자는 외부인보다는 문탁 주변에 선집의 맥락을 아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문탁에서 회의나 티타임이 열리면 항상 선집에 문제는 없는지, 잘 살고 있는지를 물어온다. 이것이 내가 선집을 간단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이유이다.

 

 

룸메이트, 함께-산다는 것에 대하여

 나에겐 선집이 첫 자취였던지라 처음 입주할 때는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여러 윤리 덕분에 내가 겪은 첫 번째 룸메이트와는 확실히 ‘같이 산다’는 느낌을 받았다. 성격적으로도 잘 맞는 편이었고, 공부와 활동을 함께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생활패턴을 공유하고, 비슷하게 움직였다. 거의 항상 같이 밥을 먹었고, 가끔은 장도 함께 보며 요리도 해먹었으며, 외식도 자주했다. 물론 갈등들도 있었지만, 문탁의 샘들과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같이 이야기해나가곤 했다. 하지만 그런 윤리에 살짝 벗어나 있던 두 번째 룸메이트와의 생활은 확실히 힘들었다. 문탁에 드나들지만 본가가 멀리 있던 케이스가 아니라 단순히 부모님의 영역 밖에서의 생활을 원했던 친구였기 때문이다. 물론 문탁에도 접속하려고 하고 작은 활동들도 이어갔지만, 기본적으로 자신의 독립된 생활과 공간을 원했다. 아무 인사 없이 나가고, 밥도 따로 먹고 싶어 하고, 하루 종일 굳게 닫혀있는 방문을 보며 느꼈다. ‘아, 같이 산다는 건 기본적으로 밥을 같이 먹는 것이고, 먹지 않더라도 서로의 일정을 대략적으로 파악하는 것이고, 매일 인사를 하는 것이구나!’ 결국 그 친구와는 큰 사건 없이 헤어지게 됐지만, 다음 만나게 될 룸메이트와는 같이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세 번째 룸메이트는 나의 노력과는 살짝 별개였다. 윤리적인 면에서도 말이 잘 통했고, 성격적으로 너무 잘 맞아서 아쉬운 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가 선집을 나가게 되자 다시 혼자서 사는 게 불안해질 정도였다. 결국 그 친구는 얼마 전 선집을 떠났고, 다시 나의 홀로-선집 생활이 시작되었다. 혼자 사는 건 편안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외롭기도 하고, 내 생활을 꾸려나가는데 에너지가 많이 든다. 이렇게는 공간 윤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선집 생활을 유지할 수 없으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앞으로의 나와 선집은?

 선집을 유지하는 가장 직관적인 방법은 함께 살 사람을 찾는 것이다. 빈방을 채우고, 월세를 나눠 내고, 매일 인사를 하는 것. 그러나 이 방법은 상상 이상으로 피곤한 일이다. 나는 벌써 네 번째 룸메이트와 합을 맞춰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태까지는 문탁과 선집의 맥락을 이해하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문탁 주변의 청년을 구하려고 했었고, 문탁 주변에서 방이 필요한 사람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문탁 주변에 청년 자체가 많이 줄었다. 문탁과 선집의 맥락을 이해하면서 방을 필요로 하는 청년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외부인을 구해야하는데, 선집의 맥락을 잘 알고, 성격적으로 잘 맞는 사람들과도 쉽지 않았던 일을 뉴페이스와 해야 한다니! 벌써부터 마음이 무겁다. 무엇보다 올해 들어 많이 바빠진 내가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초창기 때처럼 빈방을 게스트 룸으로 운영해볼 수도 있고,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두 방 모두 사용하며 지내는 방법도 있다. 물론 내 경제적 상황으로 보면 후자의 선택지는 현실성이 없지만... 그리고 무엇보다 베스트인 상황은 마음이 잘 맞는 룸메이트를 만나는 것이지만...! 뭔가 방법이 없을까?

 

 

댓글 1
  • 2022-10-14 19:05

    우현에게 딱 맞는 메이트가 나타나야 할 텐데.....생각이 안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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