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지 부루쓰 2탄 : 병소독의 수레바퀴 아래서

히말라야
2019-01-24 09:28
526

2. 병소독의 수레바퀴 아래서

그러나 레몬 썰기 전날에 해야 할 중요한 큰 일이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작년과 달리 올해는 레몬차를 담글 때부터 작은 병에 나누어 담아두자고 결정했기 때문에, 레몬청 담을 병들을 깨끗이 씻고 소독해야만 한다.

작년에 레몬청을 만들어 커다란 김치통에 한꺼번에 담아 보관했더니, 공기와의 접촉면이 넓어서인지, ‘알흠다운’ 곰팡이 꽃이 넓은 표면에 알알이 피어났다. 친구들의 정성과 땀방울이 그리고 함께 만든 시간이 오롯이 녹아들어 있는 레몬청에 피어난 곰팡이를 바라보며 넋이 빠진 내게, ‘대한민국 최고 대학을 나온 수재’는 조언했다.

“떠 내고 먹어!”

어느 정도의 균은 해롭지 않고 오히려 체내 면역력 증강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격려와 함께. 절대로, 단지, 그저, 재료가 아까워서가 아니다. 몸에 좋을(지도 모르는) 것이니 친구들과 사이좋게 ‘노나먹는 게’ 더 좋지 아니한가. 게다가 유자청과 레몬청에는 우리 우정의 흔적이, 깨알 수다와 웃음보따리들이, 알알이 배어있지 않은가. 문탁에서 만들어 내는 모든 생산품들이 그렇겠지만, 파지사유의 담금차에도 영혼이 담겨있지 아니한가!   


곰팡이.jpg
(사진 속에서 조끼를 입은 대한민국 최고 수재의 모습을 살짝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위생의 시대”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뼈속까지 근대인인 나를 비롯한 큐레이터들은 또 다시  곰팡이와 맞닥뜨리는 것이 못내 꺼림칙하다. 그래서 올해는 잘 소독되고, 공기와의 접촉면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작은 유리병들에 나누어 담아 밀봉하기로 결심했다.

이 날은 함께 설탕을 사러가기로 미리 약속해 놨던 뿔옹도 있고, 그날 파지 마감 당번인 초희도 있으니까, 병을 소독하는 일쯤이야 우리 셋이면 충분하리라. 그런데 함께 설탕을 사오자마자 급한 선약이 있다며 뿔옹은 총총히 사라지고, 마감당번인 초희마저 더치커피 사장인 진달래를 따라 쫄래쫄래 어딘가로 가버렸다. 이게 어떻게 된거지?


아뿔싸, 다시 떠올려 보니 나는 그들에게 병을 함께 씻자는 말을 안하고, 나 혼자서 ‘우리 셋’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스피노자 선생이 “혼자 생각하지 말라”고 그렇게나 강조를 했는데도! 나는 자꾸만 혼자 생각하고 결론을 내린 뒤, 다른 사람도 나같이 알고 있으리라는 착각을 수시로 한다. 누군가와 함께 생각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에게 우선 말해야만 한다. 그건 마음 속 생각이 아니라 몸에 달린 ‘입으로’ 해야하는 일이다. 별일 없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입을 떼기가 어려운 나는, 이성적으로 살아가기가 정말 녹록치 않다!


병.jpg


뭐, 300개도 아니고 30개 정도인데, 까짓 거 별거 아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아큐처럼 정신승리법을 써 본다. 그러나 병 닦는 솔도 없는 파지 주방에서 깊은 유리병 속을 수세미를 넣어 긴 주걱을 이용해 빡빡 돌려 닦으려니 열 개도 못 닦고 손목이 아려온다. 아린 손목을 다독이며 겨우겨우 30개 넘는 병을 닦아내니, 이제 끓여 소독할 차례.


찾아보고 물어보니 끓는 물 소독은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펄펄 끓는 물에 담가서 휘~휘~ 저어서 꺼내는 방법과 처음부터 찬물에 병을 뒤집어 세워 놓고 서서히 끓이는 방법. 첫번째 방법이 쉬워 보였지만, 갑자기 뜨거운 물에 들어간 유리가 깨질 위험이 있다. 겁이 디게 많은 나는 (이것도 사주 때문인가?) 좀 더 수고롭지만 안전한 두 번째 방법을 택한다. 솥 안에 유리병을 세워 보니 한번에 7개 정도가 들어간다. 솥 바닥이 평평하지 않아서 거꾸로 세워둔 유리병들이 자꾸만 와그르르 쓰러진다. 그 때마다 내 마음도 와그르르 무너져내린다. 게다가 뜨거운 김이 부글부글 뿜어져나오고 있는 솥에서 유리병들을 집어 내려니 자꾸만 손은 오그라든다. (정말, 겁은 디게 많아가지고...ㅠㅜ)

소독.jpg

그렇게 자책, 원망, 고통과 공포의 시간을 통과한 뒤에, 내 앞에서 반짝거리는 삼십 몇 개의 유리병들을 바라보았다. 나 이전과 나 이후에 이 유리병들을 이렇게 반짝거리도록 소독했을 그리고 소독할 다른 누군가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나와 다르지 않은, 누군가들의 존재가 느껴진다. 영원히 돌고 있는 ‘병소독의 수레바퀴’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연대감이랄까… 앗! 혹시! 이런 느낌이 스피노자 선생이 말했던 “영원의 상” 아래서 사물을 본다는 것일까? 그건지 아닌지는 몰라도, 나는 그들 모두에게 깊은 우애심을 갖는다. 그러나 돌연 내 입에서 자동기계처럼 흘러 나오는 소리는, “아~ 힘들다”는 탄식이다. 그걸 들은 누군가 즉각 화답한다.

“여기서 그런 일 안해 본 사람 아무도 없어!”

그렇다! 맞다! 나도 바로 그 생각을 하고, 그것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전적으로 옳은 이야기다. 그렇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이 했다고 해도, 또 앞으로 누군가들 또한 할 일이라고 해도, 지금 내가 힘든 건, 힘든 거다! 힘든 게 안 힘들어지지는 않는다. 혼자서 자책, 원망, 고통과 공포의 시간을 통과한 사람의 입에서는 “아 힘들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는 것. 이것 역시 “영원의 상” 아래에서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좀 더 이성적이 되어, 더 많은 사람과 함께 생각하기 위해 부지런히 입과 몸을 놀릴 수 있다면! 그래서 더 많은 사람과  함께 웃고 떠들며 영원히 돌아가는 병소독의 수레바퀴 아래서 기쁨을 생산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병소독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것이 힘들다는 탄식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영원의 상” 아래에서 변함없는 사실이겠지.


(3편으로 계속)


댓글 6
  • 2019-01-24 10:16

    고로케님은 영원의 상 아래서 병 소독하신다.

    다음엔 샘께 노하우 전수받기를^^

  • 2019-01-24 10:31

    아! 담쟁이베이커리에는 병 소독할 때 쓰는 집게가 있어요.

    다음엔 적절한 도구를 사용할 줄도 아시기를^^*

  • 2019-01-24 11:07

    히말샘의 글에 감정이 푹 빠져 심심하고도 심심한 세상의 모든 위로의 말을 생각하며 어떤 댓글을 달까? 고민하다가 새샘과 도샘의 댓글을 보고 제가 확~~ 깼습니다 두분은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고수이십니다 ㅋㅋㅋ

  • 2019-01-24 11:51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저 서른 개의 병들이 모두 주방이나 파지사유에 챙겨다 주신 병들을 재사용한 것이라는 것을^^

    주방 병 수납장이 비지 않도록 재활용 가능 병이 눈에 띄면 

    가능하면 챙겨다 주시길^^

    주방에서 알뜰히 소독해 잘~ 쓰겠습니다~~~

  • 2019-01-24 17:16

    은방울의 깨알 선전 짱!!

  • 2019-01-25 00:15

    히말 이번엔 캠프땜에 같이 못했지만 

    다음엔 병소독의 수레바퀴 속에 같이 들어가서 

    그대의 입과 몸이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같이 돌도록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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