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3강 - 지금 왜 다시 안티 오이디푸스일까?

문탁
2019-02-21 17:25
613
이것은 후기를 빙자한 전기(前記). 낼 강학원 오리엔테이션 자료임^^


1. 가타리? 과타리!!
  늘 헐레벌떡 강의실에 들어선다. 자리를 잡고 앉아서야, 아, 오늘은 <안티 오이디푸스>였지, 라는 생각이 든다. 잽싸게 강의안을 가져다 읽어본다. 나름대로의 워밍업인 셈이다. 그러다가 깜놀! 첫 번째는 바로 ‘과타리’!!
  음, 뭐지? ‘가타리’가 아니고 ‘과타리’? 옛날 어느 날, ‘리건’이 갑자기 ‘레이건’이 되었을 때 느꼈던 당혹감 같은, 뭐 그런 잡스러운 당혹감이 잠시 들었다. 가타리? 아니 과타리! 과메기? 아니 과타리!! 음, 이제는 과타리, 구나^^
  두 번째 깜놀은 바로 푸코의 서문이었다. 뭐시기? <안티 오이디푸스>에 있는 푸코의 서문? 그런게 있었어? 왜 난 기억이 안 나지?
   강의가 끝난 후 집에 와서 간만에 <앙띠 오이디푸스>(내가 가지고 있는 책의 제목은 <앙띠 오이디푸스>이다.)를 집어 들었다. 거의 두 페이지에 하나 꼴로 포스트 잇이 붙어 있고, 곳곳에 잘못된 번역어를 바로 잡아 다시 표기한 기록이 보이고, 여백마다 들뢰즈의 개념을 꼼꼼히 정리해놓은 메모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뭘 이렇게까지 열심히 읽었대?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구먼. 쩝! ) 하지만 그 책에 역시나 푸코의 서문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주문했다. <안티 오이디푸스>를^^

2.  그것은 똥싸고 씹한다
  문탁 식구들은 대부분 아는 이야기이지만 난 어느 날 갑자기 들뢰즈&가타리를 만났다. 한 때 가슴을 뛰게 했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은 망했구, 동지들은 흩어졌고, 심지어 어떤 친구는 공개적인 ‘전향선언’까지 했구, 어쩌다 낳게 된 아이는 많이 아팠고, 돈은 없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야겠길래 (그러려면 소련이 왜 망했는지 알아야 했다!)  찾아간 수유연구실에서 들뢰즈&가타리를 만났다. 그것이 사람인지 사물인지, 유명한지 안 유명한지, 한 사람인지 두 사람인지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천의 고원>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것은 한국어로 쓰여 있었지만 한국어가 아니었다. 외국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고대의 상형문자, 혹은 에일리언의 문자처럼 정말 단 한 줄도 독해하기 어려운 글이었다.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 그 때 난 4장 ‘언어학의 공준’의 발제를 맡았었는데, 정말 피....똥.....쌌.....다!!
  <앙띠 오이디푸스>는 <천의 고원> 다음에 읽은 책이었다. 출판 순서로 보자면 거꾸로 읽은 셈이다. 그 책 역시 쉬운 책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의 고원>과는 다르게) 곳곳에 가슴 뛰게 하는 문장들로 가득 찬, 그런 책이었다, 고 기억한다. 새로 배달되어 온 <안티 오이디푸스>를 다시 들춰보았다. 온통 명령어로 써진 푸코의 서문!  “모든 일원적이고 총체화하는 편집증에서 정치적 행동을 해방하라”, “구획과 피라미드식 위계화 말고 증식, 중첩, 분리를 통해 행동, 생각, 욕망 들을 발전시켜라”.. “권력에 홀딱 반하지 말라” 아하!
  첫 페이지. “그것(ça)은 도처에서 기능한다. 때론 멈춤 없이, 때론 단속적으로. 그것은 숨쉬고, 열 내고, 먹는다. 그것은 똥 싸고 씹한다. 이드(la ça)라고 불러 버린 것은 얼마나 큰 오류더냐? 도처에서 그것은 기계들인데, 이 말은 결코 은유가 아니다. 그 나름의 짝짓기들, 그 나름의 연결들을 지닌, 기계들의 기계들. 기관-기계가 원천-기계로 가지를 뻗는다. 한 기계는 흐름을 방출하고, 이를 다른 기계가 절단한다. 젖가슴은 젖을 생산하는 기계이고, 입은 이 기계에 짝지어진 기계이다...” 오호!!
  여전했다. 푸코의 말대로 이 책은 “새로운 이론적 참고 자료”가 아니었다. 이 책에서 “‘철학’을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이 책은 지금도 나를 가슴 뛰게 한다.(그렇게 작동한다^^) 그러자 다시 기억이 났다, 나에게 들뢰즈&가타리가 무엇이었는지. 그들은 터널 속에서 헤매고 있던 나에게, 지리멸렬한 일상 속에서 지지부진 살고 있던 나에게, 다시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하지만 다른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줬다. 비로소 나는 다시 살 수 있을 것 같았었다.

3. 지금 왜 다시 들뢰즈일까?
  나야, 아픈 애 키우고 돈 벌면서 지리한 일상을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느라 푸코니 들뢰즈니 같은 ‘신상’을 알지도 못한 채 어느 날 갑자기 그들과 마주쳤지만, 사실 90년대 중반 이후는 가히 들뢰즈 열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노마디즘, 소수자, 탈주 같은 용어는 새로운 유행어가 되어 있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2000년대 중반, 내가 관계하던 한 대안학교의 철학교사는 아이들의 글에서 ‘노마디즘’이라는 단어를 보지 않는 게 소원이라고까지 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사람들은 들뢰즈 대신 지젝을 맹렬히 읽기 시작했다. 소위 ‘지젝 신드롬’ !!
  “들뢰즈 ‘자신’은 정치에 무관심한 고도로 엘리트적인 작가다. 그러므로 유일하게 진지한 철학적 물음은 다음과 같다. 들뢰즈를 가타리에게로 돌아서게 한 본래적인 곤궁은 무엇인가? 들뢰즈의 저서 중 아마 최악일 <안티 오이디푸스>는...단순화된 ‘평면적 해결책’을 통해서 곤궁과의 완전한 직면에서 벗어난 결과 아닌가? 우리의 과제는 이 곤궁과 다시금 직면하는 것이다.”(지젝, <신체없는 기관>, 도서출판b, 50쪽)
  헤겔과 라캉을 지적 자원으로 삼는 헤겔 좌파 지젝. 하여 헤겔과 라캉을 전 방위에서 무찌르고 있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들뢰즈 최악의 책으로 꼽는 지젝. 그런데 들뢰즈 열풍과 지젝 신드롬이 거의 바통 터치 하듯 유행하다니... 이건 뭐....지? 아마 그 때부터가 아니었을까? 내가 서양철학과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던 때가.
  그리고 이번에 난 다시 ‘수동적’으로 들뢰즈를 만난다. ‘장자’만 읽는 것은 영, ‘거시기’하다는 청년들 때문에, 17세기 스피노자보다는 20세기 들뢰즈를 읽고 싶다는 청년들 때문에. 그런데 그들은 왜 들뢰즈를 읽고 싶은 것일까? 그리고 지난 3강 때 난, 그 질문이 더욱 강렬해졌다.
  지금 우리나라는 1960년대 프랑스처럼 라캉의 권위가 하늘을 찔러 모든 학문과 비평, 창작에 정신분석의 도식과 용어가 적용되고, “정기적으로 분석의의 소파에 앉는 것이 유행이자 과시로까지” (우노 구니이치, <들뢰즈, 유동의 철학>) 되어 있지도 않은데, 욕망이 금지되기는커녕 타자의 욕망에 개입하는 순간, 바로 개저씨나 꼰대가 되는 걸 감수해야 하는 이 시대에 <안티 오이디푸스>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4. 신자유주의와 분열분석
  <안티 오이디푸스>의 부제는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다. 우노 구니이치에 따르면 그것은 “새로운 <자본>을 쓰는 것을 하나의 목표로 했던” 책이고 (이 책을 번역한 김재인 역시 맑스의 <자본>이 19세기 자본주의에 대한 지도제작술이었다면, <안티 오이디푸스>는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지도제작술이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정신분석 대신 분열분석을 제창한 책이다. 그리고 그들이 정신분석을 비판한 이유는 그것을 “자본기계의 본질을 이루는 내적 도착”으로 포착했기 때문이다. 한 극에는 분열증적인 욕망, 또 한 극에는 분열증을 배제하는 ‘공리계’를 통해 작동하는 자본주의 거대 기계의 도착. 이것은 욕망을 결여로 단정 짓고, 욕망을 자폐적으로 다루는 정신분석의 도착과 정확히 일치한다. 
  분열분석은 그러므로 정신분석의 안티테제이다. 분열분석의 제 1과제는 “그 자체의 리얼리티를 찾아내고, 욕망의 평면과 과정을 발견하는 것이다. 리비도 경제학은 결코 리비도의 생산, 등록, 소비의 시스템을 생각하거나 그 유통을 계량화하거나 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제와 욕망이 포개어지면 일탈하고 서로 자극하면 대항하는 과정을 정밀하게 응시하고, 욕망의 다양한 강도와 그 변질, 그 외부성, 그 주름을 검출하는 것이다.”(우노 구니이치, <들뢰즈, 유동의 철학>)
 그러니 어쩌면 <안티 오이디푸스>의 분열분석은 노골적인 파시즘체제 (교련, 금서, 검열 등 - 그것은 욕망의 탈코드화가 아니라 초코드화를 통해 작동하는 체제일 수도)에서보다 모두가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욕망이 끊임없이 다른 욕망으로 분열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힘이 되는, 지금 같은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더 유효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도 여전히 그 분열분석의 끝에서 체제를 전복시키는 것과는 전혀 다른 혁명을, “분열분석은 그 자체로는 혁명에서 생겨나는 사회체의 본성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분열분석은 혁명 자체의 등가물이라고 결코 주장하지 않”는(<안티 오이디푸스>), 전혀 새로운 혁명을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버뜨!! <안티 오이디푸스> 8년 후, <천의 고원>이 출간된다. 더 이상 욕망이라는 용어도 분열분석이라는 용어도 혁명이라는 용어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기본적인 문제의식이 달라지진 않았다. 하지만 뭔가가 달라지긴 했다. 하여 더 넓어지고 깊어지고.....................그리고 어려워진^^ <천의 고원>!! 
  이제 마지막 한 강의만을 남겨두고 있다.
댓글 1
  • 2019-02-22 13:15

    문탁샘과 주변 몇몇 사람들이 들뢰즈를 추천하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대부분 어떤 순간에 만난 들뢰즈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순간들을 그들에게 무언가 절망과 바닥을 경험하던 시간들이었다.

    왜 일까. 그들이 들뢰즈와 가타리를 만난건 우연히 '아다리'가 맞아서였을까?

    아이들을 데리고 멀리 물놀이를 다녀왔는데, 아이들에게 그곳이 중요하진 않았던 것 같다.

    거기가 수영장이든 워터파크든 제주도든 하와이든 아이들에게 그닥 중요하진 않은 듯 하다.

    그저 그때 잘 놀고 수영하면 장땡이었다.

    어쩌면 나에게도 그런 감각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니체든 스피노자든 들뢰즈든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저 그때 나를 헤엄치게 하는 무엇이 필요하거나, 그 필요를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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