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기획>- SNS시대 ‘징후’의 해석과 대응은 인문학의 몫

문탁
2012-08-22 15:43
1274

역시 경향신문에 나온 기사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171856395&code=960201

 

[인문학에 던지는 12가지 질문](12) SNS시대, 인문학의 과제는 무엇인가

 

■ 집단지성이라는 알리바이

바야흐로 SNS의 시대, 곧 사회적 네트워크 서비스의 시대다. 나는 물론 이 시대에 대해 지극히 ‘인문학적’으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인문학은 이러한 시대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아서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혹은 반대로 인문학은 이러한 시대에 어떤 효과를 미치면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들 말이다. 말하자면, 마치 원래 ‘인문학’이란 것이 이러한 ‘시대적 현상’들에 대한 진단과 소화와 평가를 어쩌면 필연적이고도 의무적으로,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수행하거나 반영해야 하는 학문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인문학이 SNS의 시대라고 하는 어떤 ‘거대한 흐름’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언급을 하거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면, 그것은 인문학이 인간과 사회의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독립적이며 메타적인 층위에서 무언가를 규정할 수 있는 ‘당연한’ 위치에 있는 학문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시대적 흐름 또는 현상들 자체가 특정한 인문학적 ‘가능조건’들을 규정하고 또한 그러한 인문학적 ‘효과’들을 산출하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인문학 자체는 SNS 시대를 해명하거나 규정할 수 있는 어떤 불변하는 상수가 아니라 현재의 SNS 시대라고 하는 역사적이고도 기술적인 환경에 내속되어 있는 어떤 종속적인 변수인 것이다.

사실 기존의 소위 ‘인문학’이 인터넷 시대의 도래를 포함하여 현재 SNS 시대의 등장 안에서 유의미한 것으로 생각해온 주체는 통상적으로 ‘집단지성’이었으며 그러한 논의의 틀은 현재도 큰 변함이 없다. 집단지성은 익명적이고 불특정하지만 오히려 바로 그러한 성격들 때문에 특정하게 고정되어 있는 일반적이고 단수적인 주체나 대중적, 여론적인 지성보다 훨씬 더 유동적인 자기갱신이 가능하고 정치적으로 더욱 기동적이며 또한 끊임없이 스스로를 수정하고 교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어 왔다. 위키피디아, 구글, 다음의 아고라 등이 형성하고 있는 세계가 사실 그러하며 우리는 거기에 그러한 특성들을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지성은 실재하는가, 또는 집단지성이란 그러한 실체로서 그 이름에 합당한 어떤 효과를 산출하는가, 혹은 이 질문을 더욱 ‘인문학적’으로 적확하게 정식화하자면, 인문학은 이 SNS의 시대에 집단지성이라는 주체의 이름을 소환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어떤 정당한 윤리와 적합한 정치를 지니고 있는가. 이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 인문학의 알리바이, 상이한 형태로 언제나 있어 왔다고 생각되는 ‘시대정신’, 바로 그 이름으로 부여되는 어떤 환상의 알리바이는 아닐까.

■ SNS는 대화가 아닌 독백이다

“인문학은 일견 가장 민주주의적이고 가장 평등주의적으로 여겨지는 SNS의 ‘소통’ 구조가 오히려 민주주의와 평등주의 그 자체가 지닌 가장 적나라한 한계를 가장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저자 최정우씨의 배경은 미디어 아트의 창시자로서 인터랙티브 예술을 선보인 고 백남준의 작품(서울 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이다. | 사진작가 박재찬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시대가 SNS 시대라는 저 하나의 선언은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첫째 사회적인 네트워크, 곧 인간관계의 사회적인 망이 단순히 지역적이거나 물리적인 시공간의 제한을 뛰어넘어 다양한 영역과 분과들로 ‘확장’되었다는 의미, 둘째 그러한 사회적인 관계망이 일종의 ‘서비스’로서 제공되고 향유된다는 의미, 셋째 이러한 SNS가 어쨌든 과거와는 매우 다른 방식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의미는 그 자체의 표면적인 의의보다는 징후적인 효과로서 독해되어야 하며, 또한 일견 가장 중심적으로 보이는 의의로부터가 아니라 가장 주변적이며 부차적인 의미로부터 독해되어야 한다.

첫 번째로 ‘확장’이란 단순히 양적인 공간의 팽창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관계 안에 ‘비관계의 관계’까지도 포함되고 포착되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트위터에서 단순히 우리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들만을 따르지/구독하지(follow) 않으며, 또한 페이스북에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들에게만 친구 신청(friend request)을 하는 것도 아니다. 전통적으로 ‘비관계’ 혹은 ‘무관계’였던 어떤 인간관계가 SNS 안에서는 하나의 실체적인 관계로 등장할 수 있으며, 심지어 그러한 비관계/무관계가 이러한 관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어떤 전혀 다른 형식의 인간관계가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이러한 새로운 형식의 인간관계는 기존의 관계망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요구한다.

두 번째로 그것이 ‘서비스’로 제공된다는 사실은 그러한 사회적인 네트워크가 근본적으로는 결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질서 바깥에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그 ‘서비스’에 가시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어떤 가격을 지불하거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이 그 이름 그대로 하나의 ‘서비스’인 한에서 그것을 통해 어떤 식의 ‘이익’을 얻기를 기대하고 희망한다는 뜻이다. 그 이익의 형태는 인간관계의 구성(페이스북의 ‘친구’나 ‘그룹’)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든 의견의 확대재생산(트위터의 ‘인용’이나 ‘리트윗’)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든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인 입장과 위치의 확립과 파괴에 결부된다. SNS를 통해서 인문학이 정치 혹은 정치적인 것에 대해서 다시 사유해야 하는 이유이다.

세 번째로 SNS는 흔히 ‘소통’의 현대적 대명사로 불린다. 그러나 예를 들어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그에 붙어 있는 ‘사회적 네트워크’라는 일반적인 이름과 그러한 이름에 걸맞게 예상되는 소통의 기능과는 어긋나게도, 결코 ‘대화(dialogue)’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 없는 역설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트위터는 대화라기보다는 ‘증언(testimony)’의 형식을 띠며, 페이스북 또한 소통이라기보다는 ‘전시(exhibition)’의 형식을 띤다. 다시 말해 SNS의 이 대표적인 두 형태는 대화라기보다는 차라리 ‘독백(monologue)’ 형식에 가까운 모습을 띠는 것이다.

특정한 수신자를 상정하고 있는 전화 통화나 문자 송신과는 전혀 다르게,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비록 제한된 범위 안에서라 할지라도 결코 특정되지 않은 수신자를, 전혀 정해지지 않은 독자를 대상으로 삼으며 그렇게 발설된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그러한 발설이 적확하게 기대하고 목표로 할 수 있는 수신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전언(message)의 개념을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하며 특징적인 성격이다. 그 전언은 특정한 수신자를 갖지 않고 부유하며, 수신자는 오히려 그 스스로 자발적이고도 임의적으로 그러한 수신자가 되기를 선택한 사람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일견 가장 민주주의적이고 가장 평등주의적으로 여겨지는 이러한 ‘소통’의 구조가 오히려 민주주의와 평등주의 그 자체가 지닌 가장 적나라한 한계의 실체를 가장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인문학이 SNS를 통해 물어야 하고 또 인문학 자체가 SNS 안에서 변화해야 하는 지점은 바로 이러한 징후에 대한 해석과 대응에 달려 있다. 이러한 지평에서 소위 보편성을 지향하고 객관성으로 통합되며 중립성으로 교정되는 집단지성에 대한 어떤 믿음이나 희망이 합의나 종합에 대한 일종의 ‘지독한 환상’에 근거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되물어야 한다. 오히려 SNS는 인문학으로 하여금 보편적이지 않고 편파적이 되는 인식의 방법, 중립적이지 않고 당파적이 되는 존재의 윤리, 통합적이거나 체계적이진 않지만 그러한 것을 대체할 수 있는 또 다른 종류의 총체성이 지닌 감각의 정치를 요청하며 또한 종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SNS는 보편성을 해체하며, 또한 그러한 보편성이 전제하던 통일성과는 다른 형태의 어떤 총체성, 그 불가능한 가능성에 대한 질문들을 인문학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 ‘소통’이라는 공허한 지저귐

인문학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세심하게 경계해야 할 근본적인 지점은 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SNS 시대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행동한다. 그러나 SNS가 그렇게 한 ‘시대’를 대변하는 대표적 현상이라고 말해버릴 때, 우리는 그와 동시에 저 월드와이드웹과 스마트폰이라고 하는, 일견 지극히 보편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매우 특수하고 특정한 물질적 조건의 유물론적이거나 계급적인 의미를 망각하거나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트위터라고 하는 지저귐(twitter)의 형식과 대상은, 잠에서 깨 일어나서 먹고 싸고 일하고 놀고 다시 자는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개인적인 안부의 교환과 소망의 표현, 사회적이고도 정치적인 발언과 의지의 표명을 통과해 정치, 경제, 문화 등의 거대담론에 이르기까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140자라는 지극히 협소한 공간 안에서 실로 다양하고 방대하게 펼쳐지고 있다. 트위터는 묻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What’s happening)?’ (최근 이 질문은 무심하게도 ‘새 트윗을 작성하세요(Compose new tweet)’라고 하는 밋밋한 명령형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그 질문이 남겨둔 공란에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바로 그 제한적인 140자 안에 적어 넣는다. 이 질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대답을,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그러한 대답이 반드시 지녀야 할 어떤 적합한 대답의 형식을 포함한다.

그 대답이란, 대답의 형식이란 ‘무엇(what)’이다. ‘무엇’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무엇’이 단순히 하나의 ‘해프닝(happening)’이 아니라 일종의 ‘사건(event)’이 될 수 있기 위해, 우리가 SNS 안에서 물어야 하고 또 대답해야 하는 것은 어떤 것이 되고 있으며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 누군가는 ‘자폐적인’ 이념의 시대는 가고 바야흐로 ‘소통적인’ 실용의 시대가 왔다고, 추상적인 관념의 시대는 사라지고 현실적인 경제의 시대가 등장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저귐만큼이나 공허한 지저귐은 다시 없을 텐데, 왜냐하면 ‘이념의 시대가 끝났다’라고 하는 시대의식만큼 강력한 이념이야말로 존재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SNS는 여전히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우리 시대의 투쟁이 개념과 이념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적인 투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 말의 가장 결정적이고도 치명적인 수신자는 바로 인문학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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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게 같은 날 경향신문에는 아래와 같은 신간소개가 있었습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171917105&code=900308

 

책과 삶]유동하는 근대의 한 풍경… 트위터로 잃은 ‘숭고한 외로움’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조은평 강지은 옮김 |동녘 | 400쪽 | 1만6000원

책에는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사실은 이 책의 영어판 원제다. 좀 더 정확히 옮기자면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서 띄우는 44통의 편지들’(44 Letters from the Liquid Modern World)이라고 해야겠다. 애초에는 이탈리아 잡지에 연재했던 글이다. 좌파 계열 일간지인 ‘라 레푸블리카’가 여성을 대상으로 발행하는 주간지 ‘여성을 위한 라 레푸블리카’에 2008년부터 2년간 연재했던 글들을 모았다. 약간 난해한 글쓰기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는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87)도 여성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친절한 면모를 보여준다. 기존에 출간된 그의 저서들에 비해 비교적 잘 읽히는 책이다.

일단, ‘유동하는 근대’라는 개념부터 살필 필요가 있겠다. 저자는 ‘지금 이 시기’를 “그대로 가만히 멈춰 있을 수 없고 오랫동안 그 모습을 유지할 수 없는” 액체의 상황으로 바라본다. “이 세계에서 모든 것들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우리들이 좇으려고 안달하는 패션과 주목을 받는 대상들은 끊임없이 바뀐다. 어제 주목을 끌던 물건과 사건이 오늘은 주목받지 못하고, 또 오늘 우리에게 흥미를 끄는 물건과 사건도 내일이면 관심 밖의 것이 된다. 우리가 꿈꾸는 것들과 무서워하는 것들, 심지어는 희망을 품는 이유와 염려하는 이유조차 계속해서 변화한다.”

그래서 저자가 제시하는 현대인의 이미지는 다급하게 흔들리는 물결 위에 떠 있는 부초와 같다. “보다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와 이와는 정반대로 더 비참해질지도 모른다는 위협”이 “너무도 재빠르게 다가오거나 때로는 사라지기도 하면서 자리를 뒤바꾸는” 상황 속에 놓여 있다는 얘기다. 그렇게 끊임없이 유동하는 근대는 “오늘은 확실하고 타당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내일은 전혀 쓸 데 없고 유감스러운 실수”로 만들어버리면서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변화에 재빨리 대처할 것을 강요한다.

 

이제 하나의 유행어가 세계를 휘감고 있다. “좀 플렉서블(flexible)해 보라구!” 그렇게 ‘좀 더 유연해지기’ 위해 우리는 현재 일어나는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가지려 한다. 저자는 “다행히 우리는 부모 세대들이 상상할 수조차 없던 것들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 어조는 시니컬하다. “인터넷과 월드 와이드 웹, 지구 곳곳의 구석과 틈새를 신속하게 연결할 수 있는 정보 고속도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 사용할 수 있는 작고 편리한 휴대전화나 아이팟”은 마치 좋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그는 많은 이들을 고통과 익사로 내몰고 있는 “왁자지껄한 소음, 거짓말과 환영, 쓰레기, 폐기물 같은 껍질들”이 둥둥 떠다니는 모습으로 ‘유동하는 근대’의 풍경을 묘사한다.

이 책은 ‘우리 시대의 가장 첨예한 풍경’을 독해한다는 측면에서 발터 벤야민을 떠오르게 한다. 벤야민이 파리의 아케이드라는 풍경에 주목해 소비자본주의의 황폐함을 묘파했던 것처럼, 이 책의 저자인 바우만은 오프라인과 온라인으로 분열된 삶, 트위터처럼 지저귀는 대중, 인스턴트 섹스, 10대들의 대책없는 소비, 쇼핑 중독과 유행에 빠져 허우적대는 세태 등을 바라보면서 안갯속의 미래에 대해 우려한다. 아울러 이 책의 서술 방식은 조각조각 나눠진 에세이들을 묶어놓았다는 점에서도, 눈앞의 구체적 현실을 매개로 철학적 상념을 펼쳐나간다는 점에서도 앞세대의 사상가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저서 <미니마 모랄리아>를 연상시킨다. 일사불란한 논리에 기반을 뒀다기보다는 현실의 ‘깨알같은’ 모티브를 노학자의 직관으로 바라보는 즉흥적 서술이 빈번히 등장한다.

저자가 유동하는 근대의 풍경 중에서도 특히 주목하는 것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다. 책에는 한 달에 3000여건의 문자메시지를 보낸 10대 소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말하자면 “하루 평균 100여건, 깨어 있는 동안에 10분마다 한 번꼴로 메시지”를 보낸 셈이다. 물론 한국 청소년들이 보자면 그 정도는 아무런 이야깃거리도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저자는 “밤낮 없이 메시지를 보내는 행위에 빠진 그 소녀는 혼자 지내본 적이 거의 없으며, 혼자서 지낼 수 있는 기술을 배울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했다”며 “불행하게도 외로움을 잊어버렸다”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외로움은 “숭고”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에 집중하게 해서,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는 것, 더 나아가 인간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해 주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인터넷이라는 진통제, ‘접속’이라는 상황으로 도피할 수 있게 되면서 “외로움을 느낄 필요가 없는 상황”에 놓였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당신은 이제 충분하고도 진실하게 혼자 있을 수 없게 됐으며,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식으로 서로에게 충성을 맹세할 필요도 없어졌으며,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들에 대해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트위터(Twitter)는 새들이 지저귈 때 내는 소리를 뜻한다. 저자는 이 지저귐에 대해서도 우려가 깊다. 일단 그 확산 속도에 두려움을 표한다. 책에 따르자면, 2009년 미국의 ‘뉴스 앤드 옵서버’는 트위터 이용자 수가 지난해에 비해 900% 늘어났다고 보도했다. 페이스북 사용자가 228% 늘어난 것에 비해 압도적인 추세다. 알려져 있다시피 트위터는 “140글자 이내의 단순한 물음과 재빠른 답신”을 특징으로 하는 대표적인 단문(短文)의 소통 방식이다. 정리와 삭제도 쉽다. 저자는 전 세계로 확산되고 있는 이 지저귐에서 중요한 것은 “보여져야 한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왜 우리가 그것을 하고 있으며, 무엇을 목표로 삼고 무슨 꿈을 꾸는지, 어떤 것을 즐기며 어떤 것을 슬퍼하는지는 하등 중요한 것이 못되는” 피상적 소통이라는 얘기다.

물론 거기에는 반론의 여지가 있다. 어떤 이들은 트위팅의 효용성을 강조한다. 예컨대 “뭄바이 테러 당시 목격자들이 그 비참한 상황을 5초마다 80개의 트윗을 보내 알렸다”든지, 아랍 민주화에서도 트위터가 톡톡히 역할을 했다는 주장 같은 것들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바우만은 그런 ‘일부 사실들’은 본질과 전혀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거액의 로또에 당첨된 사람이 기뻐하는 모습은 보여주면서도, 정작 실망한 수백만의 낙첨자들은 언급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마저 장악한” 트위터가 “사람들의 교제와 그들을 묶어주던 유대감, 친밀함과 심원함, 영속성에 상처를 줬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나는 보여진다. 따라서 존재한다”는 새로운 버전으로 업데이트됐다고 말한다. 게다가 금융이 주도해온 작금의 위기처럼, “트위터로 인한 사람들의 상처는 세상 곳곳으로 확대되는 데 반해 그 이득은 사유화된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온라인에서 인간의 행위와 사고가 진행되고 있는 현실은 ‘유동하는 근대’의 가장 중요한 현상이다. 저자는 “가상적 관계들이 현실적 관계의 가장 실질적인 부분들을 마구 휘저어버리고 있다”며 “특히 10대들은 눈을 마주치는 방식으로 타인과 교감하는 일이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지경에까지 처했다고 말한다. 그들이 가상세계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오프라인 생활에서는 으레 출몰하기 마련인 모순과 충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들의 유대관계를 “지웠다 다시 쓰거나 덮어쓰는 일”로 여기고 있으며,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가변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다시 말해 “이전 세대의 사람들이 단 하나의 정체성을 고민했다면, 이제는 끊임없이 계속해서 정체성을 재부팅하는 상황”이 벌어진다는 얘기다.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 바로 하세요!”라는 슬로건은 유동하는 근대가 인간에게 내려준 ‘신의 선물’처럼 보인다. 저자가 이탈리아 여성들에게 보낸 44개의 편지 중에서 ‘상품화된 욕망’의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글은 ‘인스턴트 섹스’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순간적 즐거움의 옹호자들은 “인내심이나 자기 희생, 오랜 시간에 걸쳐 힘들게 얻어야 하는 즐거움”에 대해 냉소를 보내지만, 여든살이 넘은 바우만은 “오랜 시간에 걸쳐 이뤄지는 연애, 더디게 진행되는 성적 유혹의 작업”이야말로 “섹스에서 정말 중요한 구성요소”임을 상기시킨다. 물론 이런 경고도 잊지 않는다. “전자매체를 통해 장난삼아 바람을 피울 수 있게 된 사람들은 머잖아 다음과 같은 것을 깨달을 것이다. 다른 모든 중독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얻는 만족감도 매번 새롭게 투여하는 마약의 분량이 늘어나는 만큼이나 점차 줄어들게 된다. 결국 우리는 보다 많은 양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 즐거움의 질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책에는 세대 차이의 문제, 개인의 내밀한 프라이버시, 부모와 자식의 관계, 신용카드의 덫, 미래에 대한 공포 등 다양한 단상들이 잇따라 펼쳐진다. 저자가 바라보는 유동하는 근대의 풍경은 비관적이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 편지에서 카뮈를 인용해가며 생에 대한 의지를 피력하려는 입장을 보여준다. 이 유동하는 근대의 부조리를 개인이 아닌 공동의 문제로 바라보고 대처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마지막 코멘트는 앞서 보여준 비관에 비해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냥 비관으로 막을 내렸으면 어땠을까. 21세기의 풍경을 ‘유동하는’이라는 수식어로 규정한 노학자의 불안과 우려를 엿볼 수 있는 책. 거듭 읽어도 해독하기 어려운 번역문들이 간혹 등장하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댓글 1
  • 2012-08-23 08:36

    지난 총선이 끝나고 한겨레에 실렸던 글 중에 SNS 덕에 선거 결과가 지금과는 다를 거라고 예상했는데,

    아니였다.  그래서 SNS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최근에 붐을 이뤘던, SNS 와 나꼼수 이런 것 덕분에 잠깐 동안 총선의 결과가 설마 지금과는 다를 거라 기대했는데,

    역시나 그것도 지저귐이었다는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말을 하는 사람만의 공허한 메아리인양 그런 말이 되어버리고 받는 사람들은 그대로 그러한 얘기엔 벽을 치고 있는 꼴이고,

    또한 자기들끼리만 주고 받는 sns는 아닌지를 얘기하고 있었습니다.

    해프닝이 아닌 사건이기 위해 소통을 해야하는데, 결코 도구의 덕이 아님을 알 수 있었던 건 아닌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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