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철학학교] 시즌3 3장 1~3절 요약과 질문

아렘
2022-08-23 21:16
579

1~2절 요약입니다. 

 

들뢰즈가 보기에 철학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철학도 동일성, 유사성, 유비, 대립에 기댄 채 재현에 빠져있습니다. 이런 재현적 사유를 들뢰즈는 사유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가 보기에 이는 사유의 이미지, 독단적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코기토 및 칸트 비판을 축으로 사유가 이미지로 떨어지게 된 공준들을 나열하는 것이 1~3절의 내용입니다. 무전제라 여겨진 ‘나는 생각한다’ 를 배경으로 데카르트와 칸트가 비판의 대상이 됩니다. 요약하자면 생각(사유)은 암묵적 공준 위에 선 재현(재인)이며,  사유주체인 나의 자기동일성도 없을 뿐더러, 칸트의 비판들도 자기 동일성과 재인의 모델에 기댄 재현에 불과합니다. 데카르트와 칸트의 사유는 사유가 아니라 사유의 독단적/교조적/도덕적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것이지요. 들뢰즈는 기존의 철학들이 암묵지(사유는 인식능력의 자연스런 실행) 위에 쌓아 놓은 공준들과 그로 인한 철학의 이미지들을 비판하면서 사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진짜 사유에 대한 힌트는 공준에 대한 부정일 것 같습니다. 여덟가지 공준을 따라가면서  공준을 부정하다보면 아마도 사유가 무엇인지 현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 부분에 힌트가 좀 나옵니다. 재현하지 말것, 당대의 문화가 지닌 객관적 전제들 및 자연적 사유의 주관적 전제들에 기대지 말것, 반시대적일 것, 악한 의지와 사유의 무능력을 드러낼 것, 그리고  완고하고 실질적인 반복, 그리고 초월 등입니다. 기기묘묘하게도 들뢰즈는 매우 빈번하게 부정에 기대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 대부분 무엇이 아닌지를 통해 그것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말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철학과 전제들의 문제 철학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전제 없이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시작은 객관적 전제도 주관적 전제도 배제해야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란 정의는 이성적이라는 개념과 동물이라는 개념이 이미 명시적으로, 객관적으로 알려져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는 객관적 전제에 기댄 정의입니다. 이를 넘어섰다는 데카르트, 헤겔, 하이데거 역시 ‘모든 사람은  알고 있다.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라는 형태로 개념 이전에 어떤 선-철학적인 방식의 앎  그러니까 암묵적이고 자연적인 전제에 기대고 있다고 여깁니다. 암묵적이고 자연적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이 주관적 전제입니다. 자연적 사유의 형식에 힘입어 철학자들은 전제들 없이 시작하는 듯 위장을 했지만 그들은 주관적/암묵적 전제들을 위에 재현의 재현들을 쌓았을 뿐입니다.

첫 번째 공준: 보편적 본성의 사유라는 원리, 두 번째 공준: 공통감의 이상 사유를 압살하고 훼손한 공준들 중 첫 번째는 사유주체가 선한 의지를 가졌으며 사유가 본성상 선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첫 번째 공준 및 기존 철학들이 선-철학적인 어떤 공통감(sens commun, common sense)에 의존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철학에서 사유/주체/존재라는 말은 전제를 필요로 하지 않는 그 자체로 자명하고 무전제적인 말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 임을 알고 있다’에 해당하기 때문에 철학의 시작으로 적당하다고 여겨져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무전제적인 주체는 사유하는 능력을 타고 났습니다. 이는 사유가 인식능력의 자연스러운 실행이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사유는 본성상 선하고, 사유주체는 선한 의지를 가지기까지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이는 사실적이라기 보다는 권리적이라고 여겨야 할 것 같습니다. 사유한다는 것이 어떤 인식능력의 자연스러운 실행일 때 이 인식능력의 사유주체는 권리적으로 참에 대한 자질을 갖추고 있고(선한 의지), 사유는 참과 관계가 있을 것(선한 본성)이라는 권리적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런 전제/공준은 선-철학적인 공통감에 기반합니다. (P296) 철학을 주체에서 시작하든, 존재에서 출발하든, 존재자에서 출발하든 모두 이런 공준에 의거한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은 사유가 아니라 사유의 이미지, 들뢰즈는 더 나아가 독단적 /교조적/ 도덕적 이미지(니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사유는 이런 도덕적 이미지가 가진 공준들을 과격하게 비판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297) 도덕적 파괴와 퇴폐를 대가로 치러야 할 것입니다. 들뢰즈가 도덕적이란 말은 비판을 했는데, 선-철학적 전제는 어떻게 비판을 할까요? 선-철학적 사유의 이미지들을 한 번 비판해 보자고 합니다. 철학이 권리상의 타당성을 주장하면서 만들어 놓은 그들의 초월론적 모델을 한 번 들여다 보자고 합니다.  사유와 독사 그리고 칸트 비판은 이런 맥락에 있습니다.

사유와 독사: 그들의 모델은 재인(recognition)입니다. 재인은 똑같은 것으로 가정된 어떤 대상에 대해 적용되는 모든 인식능력들의 조화로운 일치입니다. 보고 만지고 상상하는 각각의 인식 능력들이 낳는 데이터(소여)들이 하나의 대상을 가리킬 때 재인이라고 합니다. 조화로운 일치가 하나 더 필요합니다. 나의 인식이 다른 사람들의 인식에 의해서도 정당화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재인은 타자의 주관적 인식능력들과의 협동을 요구합니다. 공통감을 요구하는 셈이지요. 아울러 이러한 일치는 사유하는 주체의 통일성을 요구합니다. 코기토의 나는 데카르트에서건 칸트에서건 자기동일성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재인은 동일성의 형식에 근거한다). 지금까지 나온 사유의 이미지들의 내용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본성상 올바를 뿐 아니라 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는 어떤 사유의 이미지가 있고  2. 그 다음 이 사유의 이미지로부터 ‘권리상’ 따라 나오는 공통감의 순수요소 3. 마지막으로 재인의 모델 혹은 이미 이 모델에서 따라 나오게 되는 재현의 형식 등이 있습니다. (302) 재인의 모델 안에서 사유는 인식능력들의 같음(동일성)에 정향되어 있습니다. 철학은 그 스스로 독사를 넘어서기 위해서 애써 왔다 여겼지만 독사를 합리적 수준으로 고양하고 보편화했다는 게 들뢰즈 생각입니다. 철학은 독사의 고상한 버전이자 사유의 이미지에 불과했습니다. 들뢰즈는 가슴이 아프답니다. 사유는 어떠해야 할까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재인의 형식에 머물지 않기. 공통감을 벗어던지기… 저도 가슴이 아픕니다. 뭔 말인지는 짐작만 가능합니다.

세 번째 공준: 재인의 모델 (칸트 비판을 중심으로) 재인의 모델은 특히나 철학에 더 위험합니다. 재인 모델(기존 철학)의 권리적 주장을 따르다 보면 철학이 납작해 집니다. 재현해 내는 일상적인 진부함(현실적인 경험이나 사실들)에 머물고 모험적이고 선험적인 사유로의 모험이 불가능해 집니다.(이게 더 위험할텐데…)  초월론을 열었다는 칸트는 다를까요? 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초월론적 영역은 그저 이 세계의 산이나 땅속입니다. 무슨 말일까요? 그의 초월론은 경험의 영역(심리적 영역)을 초월론적 영역으로 전사한 것에 불과합니다. 초월론적 영역이 그 자체로 탐구된 것이 아니라 경험적 영역에서 유도되었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또 다른 위험이 있습니다. 대상을 재인한다는 것은 대상에 실린 가치를 재인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재인이 이미 확립된 가치들의 재확인에 머문다면 그러한 재인은 아무에게도 아픔을 주지 않는, 일체의 고통이 없는 편안한 사유에 머물게 됩니다.  새로운 가치를 얻기가 어렵게 됩니다. 확립된 가치는 분식을 거쳐도 확립된 가치일 뿐입니다. 몇 번 나왔던 아름다운 영혼, 결혼과 약혼이란 말은 이런 의미입니다. 재인에 머문다면 그들은 철학하는 노동자에 불과합니다. 어떻게 새로운 힘들이나 가치를 사유 안으로 들여올 수 있을까요? 재인이 아니어야 합니다. 재인과 관련된 말들을 부정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악한 본성, 악한 의지, 어떤 강제와 강요, 중심의 와해를 통해 들여올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가슴이 아파집니다.

칸트적 비판의 애매성 칸트의 비판들은 좀 애매하다는 소리입니다. 사유의 이미지를 전복하려는 노력은 가상한데 만족스럽지 않다는 소리입니다. 무슨 소리일까요? 칸트는 시간 안에서 실체적 자아가 분열/균열되는 지점까지는 갔습니다. 가상합니다. 하지만 그의 인식능력들인 지성(순수이성비판), 이성(실천이성비판), 상상력(판단력비판)이 사변적, 실천적, 심미적 인식에서 어떤 공통감을 형성하기 위해 협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비판은 좀 애매합니다.  재인되어야 할 것들에 따라 입법적이고 주된 역할을 맡고 있는 인식능력들이 달라집니다. (지성은 인식에서, 이성은 도덕에서, 상상력은 미적 판단에서) 공통감을 복수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인식 능력들의 조화로운 일치를 보여주는 다른 예에 불과할 뿐입니다. 칸트에 의해 인식능력들은 각자의 권리범위와 효력이 정초됩니다.  조화로운 일치… 그에게 분열되었던 나와 죽었던 신이 다시 살아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해 보입니다.

 

네 번째 공준: 재현의 요소 이제는 잘하면 외울 것 같습니다. 동일성, 유사성, 유비, 대립 이런 것들이 재현을 정의합니다. 재현 아래에서 차이는 수난을 당합니다. 동일성, 유사성, 유비, 대립의 아래에서만 차이를 생각하게 됩니다. 차이도 재현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재현 아래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재현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은 재발견과 재창조뿐입니다. 이런 재현 아래의 차이는 차이 그 자체를 사유할 수 없게 만들고, 반복을 있는 그대로 사유할 수 없게 만듭니다.

한 줄 정리를 하자면, 데카르트와 칸트의 코기토(나는 생각한다 혹은 나는 사유한다)는 나는 재현한다의 뻥이었습니다. 사유가 아니었습니다. 들뢰즈가 보기에…

댓글 11
  • 2022-08-23 21:20

    P304 하단에서 305 상단> 이런 식으로 칸트는 어떤 심리적 의식의 경험적 활동들을 기초로 이른바 초월론적 종합은 어떤 경험적 포착에서 곧바로 유도되는 것이고, 그 밖의 것들도 마찬가지다. 칸트는 2판에서 대목을 삭제하는데, 이는 뻔히 들여다보이는 이런 절차를 감추기 위해서이다.  무슨 말일까요? 삭제한 대목이 무엇이었을까에 대해서 같이 상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 밖의 것들도 마찬가지다? 이거 좀 무책임한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 2022-08-24 19:58

    요약 올립니다. 질문 1. '~밖에 될 수 없는 것'의 의미 2.<국가>에서 감성적인 것과 감각 밖에 될 수 없는 것의 구분에 혼동이 있었다는 것의 조금은 디테일한 설명. 읽으신 분 있으시면 여쭤보고 싶음.

  • 2022-08-25 01:45

    '사유의 이미지'로 명명된 이 짧은 장 안에서 들뢰즈는 플라톤 이래로 서양철학의 주류적 흐름을 전복하려 한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사유'라고 받아들여졌던 것들을 '사유의 이미지'로 격하하고, 진정 '사유'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재정립하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도 문제의 계보의 맨 끝단에는 플라톤이 있다. 그점은 '플라톤은 인식능력들에 대한 우월한 사용이나 초월론적 실행을 발견하면서도 이런 사용이나 실행을 감성적인 것 안의 대립형식, 상기 안의 상사성 형식, 선 안의 유비에 종속시킨다. 그는 이를 통해 재현의 세계를 준비하고 있고'(320쪽) 같은 표현에서 분명해진다. 들뢰즈의 관점에서 보자면,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된 그러한 '인식이론'은 새로운 것을 분만(*)하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다. 이름 그대로 '재인'이란 그저 이미 알던 것의 재확인일 뿐이거나,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에 대한 정보의 증가만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의 결여는 곧장 사물들의 변화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고, 이는 이러한 관점 아래에 낯선 것에 대한 도덕주의적 예단이 깔려 있음을 드러낸다. 이 부분에 있어서 들뢰즈는 니체의 철학사 해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사유'는 '인식 가능한 것'에 있지 않고 오히려 '인식불가능한 것'에 있다. 오로지 '감각 되기만' 하는 것만이 우리를 '사유'하게끔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유'는 '수동적-비자발적'이다.

    질문) 들뢰즈는 이전까지 서양철학의 주류적 흐름을 '사유의 이미지'로 비판하면서 '사유'의 참모습을 '비자발적'인 생성으로 재규정한다. '사유의 이미지'가 당대의 에피스테메로서 '양식'과 '공통감'을 전제하는 수학-과학적 재인의 모델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면, 다른 의미로 들뢰즈가 주장하는 '사유'는 양식의 파괴와 재창조에 따르는 의식의 확장과 변형이라는 공통감을 전제하는 현대예술의 창작모델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랬을 때 (사유와 구분되는) '철학'의 역할이란 결국 해당 시대가 공유하는 인식 모델, 창작 모델에 대한 형이상학적 해설인 것인가?

    * 『테아이테토스』, 150b 이하

  • 2022-08-25 08:12

    철학은 역설 이외에는 어떠한 동맹자도 없이버텨야 하고 공통감의 요소는 물론이고 재현의 형식마저 포기하는 완고함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사유가 사유하기 시작할 수 있고 또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선-철학적 이미지와 그 공준들에서 벗어나 자유를 구가할 때문이다. 만일 사유로부터 이런 형태-왜곡적 이미지를 투사하는 그 공준을이 먼저 검토되지 않는다면 새로운 진리론을 내놓겠다는 그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로 그치고 만다. p298

    예를 들면 맹자의 성선론도 일종의 전제를 가지고 도덕의 기준을 세운다고 보는데, 전제 없이 가능한가? 혹은 위 문장에서 '새로운 진리론'이라고 했지만 이런 건 없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유'와 '사유의 이미지'의 구분에 대해서 질문하고 싶었는데 정군샘 메모를 보니 지금까지 사유라고 했던 것들을 비하하기 위한 표현으로 사용된 것이다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 2022-08-25 09:05

    제 질문도 사유의 이미지와 사유하기에 대한 것입니다. 사유의 이미지를 왜 이야기하고 있는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지만, 들뢰즈가 말하는 사유에 대해서는 마치 화두를 든 것처럼  깜깜하게 느껴지는군요. 그래서였을까요? 3절을 읽으면서 제게 떠오른 '사유하기'의 모델은 '화두'였습니다. 사유의 이미지에 갇히지 않고 벽을 마주한 듯한 상태에 놓이는 것, 그런 것이 '화두'라고 하니까요. 하지만 들뢰즈가 그런 것, 혹은 어떤 모델을 염두에 두었을 것 같지는 않기 때문에 대체 '사유밖에 할 수 없는 그것'이 무엇인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물론 기존의 사유의 이미지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의 밖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또한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1) 각각의 인식능력을 그것이 고장나는 극단적인 지점으로 이르게 하는 일, 인식능력이 3중의 폭력 앞에 놓인 희생양이 되게 하는 일(321쪽),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군요. 2)감각밖에 할 수 없는 것, 상상밖에 될 수 없는 것, 사유밖에 될 수 없는 것, 그것은 어떤 것일까요? 3) 감성에서 상상력으로, 상상력에서 기억으로, 기억에서 사유로의 폭력적이고 비자발적 이행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4) 상상력과 사유가 이루어내는 부조화에 의한 조화의 사례로서 칸트의 숭고(327쪽)를 이야기하는데, 숭고가 사유하기인가요?

     

    질문은 네 개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사유하기와 사유의 이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습니다.ㅠ

     

    • 2022-08-25 15:20

       

      저도 읽는 내내 그래서 도대체 들뢰즈에게 철학은 뭘까... 라는 질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요. 앞서 302p에 의하면 본성상 착한 것도 아니요 권리상 자연적인 공통감도 아니요 초월론적 모델로서의 재인도 아니라고 합니다.

       

      (328~330p)자크 리비에르와 앙토냉 아르토의 서신교환은 들뢰즈가 말하는 사유하기의 모범이라고 보여지는데요.  리비에르가 아르토를 알아간다고 생각할 수록 더욱 그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사실적 차원뿐 아니라 권리상으로도 어려움에 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유하기는 독단적 이미지에 숨을 수 없고 이를 파괴한다. 들뢰즈는 아르토의 강박과 충동이 사유의 시작이고, 사유가 사유받도록 강요받으면서 결국 사유의 중심이 붕괴되고 균열되고 무능해지면서... 이로써 아르토는 이미지 없는 사유를 추구하고 또 재현을 용납하지 않는 새로운 권리를 장악하게 된다고 합니다. 

       

      사유하기가 본유적으로 타고난 것이라기보다 사유 속에서 분만되어야 하는 것임을 안다... 사유한다는 것은 창조한다는 것이고, 그 밖의 다른 창조는 없다. 하지만 창조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사유 속에 '사유하기'를 낳는 것이다. 

       

      '사유하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사유'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이때 사유란 뭘까요? 사유가 사유하도록 강요받는 순간은 오히려 리비에르의 아르토르를 향해 끊임 없이 헛발질을 하며, 아르토의 신경증으로 드러나는 것 같은데, 사유 그 자체는 더욱 모르겠군요.

  • 2022-08-25 11:07

    3장에서 '권리적'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들뢰즈는 '권리적'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가? "데카르트가 철학자라면" 그가 "권리적 차원에서 어떤 사유의 이미지를 일으켜세우기 때문이다"(299)라는 문장은 들뢰즈가 권리적 차원의 파악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듯하다. 하지만 "권리적 차원에서는 쉬운 것"이 "사실적 차원에서는 가장 어려운 것"이라면서 데카르트주의의 전제를 반박하기 위해 반대 사실을 들이대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토론을 권리적 차원 자체에 위치시켜야 하고, 또 이 이미지가 순수사유로서의 사유의 본질 자체를 배반하는지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3절 끝부분으로 가면 들뢰즈는 아르토가 "본연의 어려움과 이것에 뒤따르는 문제와 물음들이 사실적 차원의 사태가 아니라 사유의 권리적 구조임을 안다"고 쓴다.

     

    '권리적'은 어떤 본질 내지 원칙이 있고 그리로부터 나오는 당연한 논리적 귀결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 외에 다른 의미가 사용되고 있는가? 내게 권리적이라는 말은 "공통감"을 배제할 수 없는 말로 보인다. 그래서 그가 공통감에 대비해 "역설감"(327)이라는 말을 쓸 때, 이 말마저도 '역설감이라는 공통감'으로 보인다.

  • 2022-08-25 11:18

    칸트가 말하는 이성과 지성은 어떤 것인가요?

    들뢰즈는 칸트가 사유의 이미지를 전복하기 위해 상상력, 이성, 지성 개념을 끌여 들인다. 여기서 어떤 ‘논리적 공통감’을 형성하는데, 지성이 두 능력을 끌여 들이는 사변적 모델을 제공하고, 재인의 실천적 모델의 경우 도덕적 공통감 안에서는 이성이 그 역할(입법적 지위)을 한다고 한다. 주석에는 칸트적 의미의 지성은 개념적 사유능력이고, 이성은 이념적 사유능력이라고 하는데......이 정도의 의미(아렘쌤의 요약문으로도)로 윗 문장은 어렴풋이 알겠지만, 칸트의 지성과 이성, 상상력은 무엇인가요?  

  • 2022-08-25 12:06

     3절 차이론적 인식능력 이론 

     

    사유를 가만히 내버려두는 사태와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사태에 대해 설명하는데, 전자는 대상을 재인할 때 사유는 자신의 이미지로 채워지는 것이다. 이땐 사유주체의 선한 의지와 본성을 전제하고 참에 대해 주장하는 친근성을 전재한다. 그리고 사유하도록 강제하지 않는다. 반면 사유하도록 강제하는 사태가 있는데, 이건 재인의 대상이 아니라 마주침ㅁ의 대상으로 '감각 밖에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구판 311쪽)에서 보면 "재인 안에서 감성적인 것은 오로지 감각 밖에 될 수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그 뒤로 쭉 감성, 감각을 다르게 설명한다. 감성적인 것은 감각되는 것과 다른 사태이고 대상 지시 뿐 아니라 그 다체가 다른 인식능력에 의해 겨냥되는 것이다. 반면 마주침의 대상(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감성을 '분만' 하는데, 감각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감각되어야할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걸 다른 말로 감성적 존재자가 아니라 감성적인 것의 존재라고 한다. ...그리고 쭉 이어...감각 밖에 될 수 없는 것!!이 현전할 때 감성은 기호에 부딪혀 엔승의 역량이 된다. 

     

    하여간에 '감각'이 뭔가 마주침이고 들뢰즈가 말하고자 하는 바인 거 같긴 한데, 이 감성과 감각....의 관계. 좀 정리해보고 싶어요. 

     

     

  • 2022-08-25 13:45

    위에 올렸던 3장 사유의 이미지 워드파일 pdf로 변환한 버전 올려드립니다.

  • 2022-08-25 14:56

    질문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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