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경 4-3 후기> 시란 이런 것이구나!

자누리
2019-11-04 09:17
297

王風의 다섯 번째는 중곡유퇴中谷有蓷이다.

“골짜기 가운데 익모초가 있으니 바짝 말랐구나. 여자가 이별을 한지라 한숨을 쉬고, 한숨을 쉬니 어려운 때를 만났다.”

여섯 번째는 유토원원有兎爰爰이다.

“토끼는 빠져나가고 꿩이 그물에 걸렸구나. 젊었을 때는 별 탈이 없었는데 인생 후기에 온갖 근심을 만났으니 차라리 잠들어 움직이지 말고 싶구나.”

일곱 번째는 면면갈류綿綿葛藟이다.

“끝없는 칡덩쿨이여 하수가에 있도다. 이미 형제와 떨어져서 남을 아버지라 부르노라. 남을 아버지라 부르지만 나를 생각해주지는 않는구나”

후기를 쓰려고 읽어보다가 문득 나는 왜 후기도 이런 시를 맡게 되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절이 너무 각박하고 먹고 살기 어렵다. 중곡유퇴나 면면갈류는 가족이 이산된 아픔이 생생하게 전해져서 마음이 아픈 그런 시들이다.

이 시들과 함께 어린 시절이 돌아왔다. 내게 고향은 지금껏 아름다운 금수강산이었고 돌과 물과 풀들을 마음껏 가지고 놀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는데 불쑥 다른 것들이 찾아온 것이다.

초등학교 때 내 주변에 도시로 돈 벌러 가는 일이 낯설지 않았다.
이른바 개발경제 시기로 산업역군이 되는 길에 13세의 어린 자녀들을 보내곤 했다.
나랑 동갑내기인 친구 몇몇은 학교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공장으로 식모살이로 갔었다.
그에 못지 않게 어려웠던 우리 집 형편에 나는 그 집들 딸이 아닌 것을 얼마나 다행으로 여겼던지...

명절이라고 선물 바리바리 사들고 찾아온 그들에게 듣던 이야기들이 바로 “남을 아버지라 부르지만 나를 생각해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들이었다.
하룻밤 같이 자면서 듣던 이야기들 끝에는 “차라리 잠들어 깨지 않고 싶다”는 속마음이 나왔다. 그런 밤은 위로가 동정이 되고 동정이 친구를 더 비루하게 한다는 걸 알게 해서 차마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뒤돌아 자면서 눈물로 베개를 적시기만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시란 이런 것이구나!

원래 처음 읽을 때만 해도 서주-동주 이야기나 공자맹자로 읽던 춘추전국시대를 이렇게 다른 장면들로 만난다는 이야기, 후대 지식인들이 어떻게 다르게 해석하는지 등이 후기감으로 스쳐갔는데, 몇 번 읽고 나서는 그렇게 쓸 기운이 서지 않는다.

시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만 들 뿐이다.
이렇게 이천년 전과 몇 십년 전과 어제와 오늘을 만나게 하는구나, 그것도 그 감정까지 오롯이 살려서...

댓글 5
  • 2019-11-04 10:41

    음... 시가 그런 것이었군요.... 한 회 결석하고 만난 후기가 마음을 훅 흔드네요...

  • 2019-11-04 13:58

    전쟁때만 이산이 발생하는게 아니군요
    지금도 먹고 살기위해 여기저기 흩어져 고된 삶을 사는 젊은이들이 있어 이 '면면갈류'시가 다시 보입니다

  • 2019-11-05 10:01

    말라버린 물가를 막막히바라보며 한숨쉬는것말고는 할게 없는 심정 ㅠㅠ

  • 2019-11-05 10:03

    와...마음아픈 공감...
    저도 어제밤 시를 읽으며 그 시절을 상상해보았습니다.
    과거를 불러일으키는 시의 감성이 자누리샘 글에서 더 느껴지네요.
    일단 급하게 댓글 ㅎㅎ

  • 2019-11-11 17:36

    실은 저는...궁금했더랬어요.
    한사람 없는데도 텅빈거같은 공숙단의 모습이 과연 어땠을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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